나들이 때마다
유럽에서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도시마다 거의 광장을 가지고 있다. 안내 겸 해설자는 유럽 특징을 “광장 문화”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내가 읽은 로마사에서는 그것은 주로 로마시대 군단기지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앞서 발전한 도시의 모습을 모델로 도시들이 커가다 보니 시청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어김없이 광장이 있고 중세를 거치면서 성당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제국 로마에는 국력 확장기에 28개 군단을 유지하고 있다가 후에 30개 군단으로 늘리기도 했다. 군단병이 사는 곳을 주둔군만을 위한 특수한 지역으로 차단한 것이 아니라 주민과 소통하는 유기체적 도시로 만들려는 로마인의 통치 의식이 바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광장은 군단병들 전체가 만나고 훈련하는 장소에서 유래 되어온 곳이다. 라인강은 북해로 빠지고, 도나우강은 발원지에서 빈으로 내려가다 부다페스트를 적시며 흘러간다. 하류에서 루마니아의 베오그라드를 지나 흑해에 이르는 곳까지 염주알처럼 늘어서 있는 도시는 거의 다 군단기지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역사는 설명해주었다. 그 도시들이 중세를 거치면서 독립국의 수도가 된 곳이 대부분이다.
로마군은 하룻밤을 묵어가는 곳도 안전하고 든든한 숙영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곡괭이로 이긴다.” 혹은 “병참으로 이긴다”고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 15권은 약 6500쪽이 넘는데 필요한 곳의 지도를 충분히 끼워 넣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말로 설명해준 지도(이티네라리아 아드노타타)다.
가보지 아니한 전선을 싸우는 장수와 함께 가기도 하고, 기술자들을 이끌고 제국의 방위선으로 민원 써비스를 나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따라 가는 길은 “로마답다!!!” 를 연발하게 한다. 부다페스트(그때의 지명은 아킨쿰)에 갔을 때 도나우(헝가리에서는 두노)강에 놓인 다리 위를 자동차로 건너면서, 유람선으로 다리 아래를 지나면서 이 보다 더 흘러흘러 가면 루마니아 투르누세베린(로마시대에는 드로베타)에 닿아 트라야누스가 건설했다는 다리가 있었던 곳에 갈 수 있겠구나 했다.
그뿐인가 카이사르가 정복해서 로마에 바친 갈리아, 거기에 수많은 율리우스라는 성을 가진 후손들이 살고 있을 땅도 보았다. 카이사르마저 싸우기를 그만 두었다는 게르만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숲 슈발트 발트, 그리고 건장한 체구에 벌거벗다 시피하고 싸우는 용감한 사람들. 거리에서 게르만 아저씨를 만나면서 그리고 우리를 계속 태우고 다닌 폴란드 국적의 기사님을 보면서도 나는 내내 고대인 로마속주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로마가 정복자로서 그 넓은 땅과 사람들에게 제시한 규제는 늘 시행에서는 유연했고 피지배자 중심이었고 자치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것은 유럽 사람들이 ‘친절’과 몸에 밴 ‘양식’으로 내려내려 이어 받았음을 알았다.
유럽 여행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식사하는 곳 아닌 곳에서 화장실 찾기는 쉽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한번은 오후 다섯 시 좀 못 돼서 체스키크롬로프 성에 당도했다. 다섯 시 안에 성안에 도착했으면 유료화장실 이용이 가능했을 것인데 걸어 올라가다 보니 관리자가 퇴근한 뒤라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가 일행과 잠시 분리되어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도 친절한 카페 주인이 시간도 없고 갈 길이 바빠 음료도 못 사주는 우리에게 화장실을 쓰게 배려해준 일이 생각나고 고맙다.
화장실 때문에 생각나는 것이 또 있다. 로마는 국력확장에서 유지기로 넘어가면서 확장기부터 세제는 세율을 거의 고정시킨 간접세로 300년 넘게 얇고 넓게 징수하고 있었다.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원 확보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했다. 연구 끝에 ‘백티칼 우리나이’ 라는 세금을 신설했는데 이걸 오줌세라고 번역했다. 공중변소에서 모인 소변을 수거하여 양털에 포함된 기름기를 빼는데 쓰는데 이렇게 사용하는 섬유업자에게 부과했다는 것이다. 이걸 두고 다음 황제가 될 장남 티투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황제는 아들의 코앞에 은화 한 줌을 들이대면서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아들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이건 오줌세로 거둔 돈인데.....”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베스파시아노’라고 말하면 공중변소를 가리킨다는 말이라 고 한다.
말이 난 김에 유럽의 거리마다 유료 화장실을 더 늘렸으면 좋겠다. 거기서 받은 돈으로 유지비가 안돼서 그러나? 아무튼 먹을 때 돈을 내고 먹었으니 쌀 때도 돈이 드는 것을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급하니까 돈이 들어도 걱정거리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해우소 인심이 넉넉한 우리나라가 짱이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유럽은 어디를 가도 관광지에는 대성당이나 성이 있다. 우리 관광지가 주로 고찰이나 궁궐에 한정 돼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쉔부른 궁전에 갔을 때도 페키지 상품 여행이라서 주마간산 격이다. 각 나라에서 온 관광객 한 무리를 인솔한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것 마냥 들고 난다.
아헨조약에서 프라그마티세 장크치온(국본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받아두었지만 왕위 상속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드니 어쩔 것인가.
아버지 카롤6세 한테서 여자로 키워지고 교육받아 온 마리아 테레지니아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황제 자리에 앉혀 가면서 국정을 담당한 여제의 모습을 더 찬찬히 알고 싶고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기대는 접어야 했다.
오히려 빈이나 짤츠부르크가 더 한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늦가을 유럽은 검은빛에 가까운 숲과 넓고 푸른 초원과 수피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늘씬한 노란 잎을 달고 있는 자작나무를 젤 많이 봤다. 굳이 내장사나 설악산의 가을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우리들의 가을 풍광은 얼마나 아름다운 만산홍엽인가. 늘 밖에 가면 내안의 것들이 더 잘 보이고 그립다. 201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