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정은 보금자리의 신화를 내어줄 것인가, 가족은 삶의 튼실한 울타리가 아니라 고통의 짐으로 출세를 저지하는 혹인가? <형제의 강>을 보면서 첫 번째 제기한 질문이다.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고개숙인 아버지'와 해체되어 가는 가족 관계의 위기감을 적절히 반영함으로써 <형제의 강>은 우리 시대 문화적 연속선상의 일부로 파악된다. 전통적인 가족 관계와 인습적관례에 충실하면서도 현재의 문화에 예민하게 반응한 작가의 시선이 주목된다. 남녀노소 구별없이 모든 TV 시청자를 어우를 수있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교육,생활 수준 직업, 성별, 연령, 취미가 제각기인 시청자들을 결속한 것이 이 드라마의 첫번째 성공 비결이다
경제 불황이라는 보도, 과소비 억제 캠페인이 주류를 형성할 때 한 편에서는 시청자들간의 위화감을 조성하는 으리으리한 거실과 내로라 하는 디자이너들의 경쟁인 양 펼쳐지는 연기자의 패션 등 '있는 자' 들의 행태가 볼거리로 치장되는 드라마는 그대로 시청자들 눈엣 가시였다 물질적, 육체적 소비가 최선이라는 자기 도취, 욕구의 즉각적 충족, 화사한 분위기로 일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브라운관의 세계는 탐욕이 오늘의 낭만을 만드는 것인 양 현실을 왜곡하고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형제의 강>은 기억 속의 경험을 확대 조명하고 잊혀져가는 기억의 저편을 일깨우면서 삶을 드러내주었다.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얼마든지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바탕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드라마는 연출자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확인시켜주고 있다. 또한 6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 드라마라는 성격이 나름대로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게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형제의 강>은 당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기억의 흔적'을, 신세대에게는 지금은 사라진 것에 대한 낯설음' 이 상호작용하여 결과적으로는 세대를 엮는 동아줄 역할을 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로서, 초시간적인 인간성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가정이고 그것은 이 드라마의 전제가 된다
'고개숙인 남자'의 전형인 '아버지'의 화두가 '아버지 신드롬 '이라는 사회문화 현상을 만들어 대중적 삶의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는 용어가 되었는데 단지 그것은 유행에 그치는 것일까? 고도의 산업 사회가 요구하는 치열한 경쟁을 온몸으로 감당하다 갑자기 소외와 상실의 주인공으로 전락해버린 우리 세대 아버지의 모습은, 그 강요된 초라함의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뒤로 한 <형제의강>의 아버지 모습은 시대의 역행인가,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사회학적인 문제 제기가 이 드라마를 여느 드라마와 차별하는 요소이다
가부장제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한 가족사의 단면을 통해 우리에게 현대적인 가족 윤리의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형제의 강> 그 재미의 근원
드라마는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 문제는 "의미는 필요없다. 재미만 필요하다"는 편향성이다. 유익과 감동, 완성도가 결여된 드라마는 결코 좋은 드라마로서 자리하지 못한다. TV 드라마가 작가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때 기초 공사의 극본 작업이 중요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훌릉한 극본은 좋은 드라마의 토대이다. 작가는 적확한 문제 의식으로 시대의 고민을 담아내야 하며, 그것이 곧 드라마의 주제로 부각될 수 있다.
작가의 특수한 체험이면서도 일반의 보편적 삶과 합일되는 것이면 더욱 좋다. 가치 있는 체험의 표현은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고 그것이 재미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일간지 TV 비평의 논조는 대강 이렇다. 드라마에는 사건은 있지만 인생이 없고, 소재는 있지만 주제가 없고, 극적인 사건은 있어도 문학적 구성력이 없이 오직 일회성 흥미에만 의존하는 저속성 , 통속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제의 강>을 시청하면서 경험한 즐거움의 실체를 밝혀내는 작업은 이점에서 흥미롭다. 우리 시대 아버지 모습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1위로 꼽힌 박근형씨의 캐스팅은 이 드라마의 무게 중심이 되었다. 서복만은 가부장제의 권위적인 아버지의 전형으로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약간의 허풍기가 있고, 외도를 하면서도 당당함이 하늘을 솟을듯한, 주변에 염치도 체면도 없는 경상도 사투리가 억센 사내다. 반면에 그의 아내 이순례<김영애>는 현모양처형으로 가족의 모든 질곡을 감수하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전형이 된다 이들은 엄부양처의 원형이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이기적으로 커가는 장남 준수와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형에게 양보하는 것이 최선임을 배우고 자란 준식, 자의식이 강한 딸 정자, 장애자로 태어난 막내 준호로 구성되는 한 가족의 모습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 이다.
실로 오랜만에 시청자들은 공감할 수 있는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가까운 우리 시대의 인물이라고 하는 '친근감'은 시청자들이 맛보게 되는 일차적 재미의 근원이다. 따라서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공감의 확장은 저마다의 추억의 앨범을 넘기는 향수에 젖게 했고 쉽게 동일시하게 했다.
'재미' 는 곧 대중성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재미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작가<이희우>는 공부 잘 하는 큰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다른 가족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아버지, 서을 법대에 들어가 모든 고시에 패스 출세하지만 결국 고향에서 외면 당하는 준수<김주승> , 집안이 망하자 여직공이 되어 노조 간부가 되는 정자 등의 가족사를 근간으로 60∼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정치적 상황을 배경삼아 사회적인 현안에 주목한다
<형제의 강>은 재미와 메시지라는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얽힌 드라마의 단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딸부잣집> <달빛가족> <까치 며느리> <며느리 삼국지> 등을 집필하면서 숱한 화제와 만만치 않은 시청률을 보유하고 있는 작가는 TV가 가족매체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인 듯 싶다. 그의 작품은 대개가 가족을 근간으로 하는 풍자와 해학을 가미한 코믹터치의 성향이었다.
<형제의 강><76.70.2∼97.4.3 수목 밤9:50∼10:50>이 50회라는 짧지 않은 기획 횟수에 더해 깊회를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짜임새 있는 구성 때문이다. 드라마 왕국이라고 자부하던 모 방송사의 작년 드라마가 도중 하차한 것이 4편에 이른다는 사실은 방송사 내외적인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점에 있어 부실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허술한 극적 전개나 무리한 갈등 양상은 본질적으로 드라마 실패의 주요인이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성력에 기초하지 않은 스타의 기용이나 분위기 연출 등은 사상누각이다. <형제의 강>이 얽고 있는 구성의 긴밀함은 인물의 성격 창출과 더불어 튼튼한 기등이다.
아버지와 형에 대한 준식의 반항-육친을 위한 자기희생-사랑하는 자의 희생-강한 자와 약한 자의 싸움-근사랑하는 자의 불명예의 발견-사랑의 장애-준수의 야망-서복만의 잘못된 판단-도주둔똔그사랑하는 자를 잃음-회한으로 짜여지는 서사적 구조와 갈등의 양상은 드라마의 사건을 진전시키고 등장 인물만이 아닌 시청자들을 흡인하며 옥죄는 사슬이다. 주역 뿐만 아니라 빛나는 조연들<남포동, 김애경, 김보연 등>의 눈부신 연기들은 또 어떠한가. 가족 구성원으로 남자와 여지치 전형으로 사회상을 드러내는 극적 장치로 다양하게 해석 가능한 등장 인물들은 이 드라마를 풍부하게 만든 양념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보여지는 숙명적인 파국 속주인공의 행보는 시청자의 정서적 체험을 다양하게 한다. 아버지를 보면서 분노, 미움, 거부를 어머니에게는 인내,절제 질투,정성 등을 소희<염정아>의 반전을 통해 소희보다 더 아픈 상처와 가슴 저려하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 비현실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의 순애보 소희의 열정은 그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 차지하는 여인상이다
준식이 돼지를 키우고 옥수수를 심르며 치열하게 살아가려 했던 건강한 삶의 생존 방식이 어느새 주먹의 세계로 돌변한 것은 지극히 현실 드라마의 타협점이고 배우<박상민>의 캐릭터를 극복하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현실의 한계 <극중 현실-애써 개간한 땅이 정부에 의해 싱7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를 새삼 발견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의 첫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줄기차게 빗줄기가 뿌려지면서 장애자인 어린 준호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매몰차게 동생을 내려놓으라는 준수의 호통, 그로 인해 호되게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는 준식. 그가 앞으로 살아갈 삶의 버거움을 한바탕 퍼붓는 비로, 어깨의 무게로 암시한다. '날좀 보소 날 좀 보소" 밀양아리랑을 부르며 훌훌 벗어던지는 옷가지들이 빗줄기와 더불어 흐뜨려지고 어느새 준식은 벌거벗은 자연이 된다. 인물과 배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시정 가득한 영상은 그대로 감동으로 다가왔다.
준식의 순수가 그대로 묻어나는 장면이다. 초반 20여회 아역 연기자들의 열연을 보며 "어쩜 저렇게.."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찾아보기 힘들어진 준식 <정수범>의 외형은 그대로 시대를 대변했고 친근한 이미지로 머물었다 21회 <76.72.12> 성인이 되어 "히야가 노래하는 거 한 번들어 볼래" 팔을 들어 춤추며 다시 부르는 밀양아리랑은 준호<김정현>의 우수어린 눈속에 투영되면서 전체의 구조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것은 적절하게 조합된 갈등의 양상과 연기의 호흡이 느껴지는 탤런트의 열연이 힘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풍부한스토리와 더불어 인간을 드러내는, 정말 살갑게 느껴지는 '사람 냄새'가 나는 드라마였다. 뭉뚱그려 <형제의 강>의 연기자들은 '체' 하는 것이 없어 좋았다. 거기에는 단순히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표정이 있고 행동이 있고 감정이 있었다. 극의 표현은 연기다. 최근 우리 드라마에 있어 연기력의 미숙을 지적하지 않는 풍토가 불만이다. 거품 인기로 얼굴을 들이미는 무례한 연기자가 적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방송사의 수익 있는 상품임을 전제할 때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매끈한 얼굴을 선호하는 것이 이제 자연스레 '공모<왔작>' 의 형태를 낳아 평단에서조차 문제삼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점에서 캐스팅의 절차는 연출자의 몫 나아가 제작자의 안목을 재는 열쇠가 된다. 이제 드라마의 평가는 내용 중심의 미시적 접근에서 벗어나 제작 관행의 인습을 극복하고 창조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제작 인력의 얼개를 주연급 연기자에게만 포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창출, 개성있는 신인의 발굴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아역들이 중심이 된 초반의 드라마가 오히려 성인 연기자보다 우수했다는 평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부산방송 주최로 아역 탤런트를 공개 모집,4차에 걸친 선발 과정을 통해 뽑힌 연기자들을 충원한 사례는 하나의 대안이다. 연기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김주승의 부자연스러움, 천편일률적인 박상민의 상투성, 연기의 과욕을 부린 임상아 등은 오히려 초반에 다져진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이 드라마에 주목하면서 연출자인 장형일PD 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나름의 수확이다. <전우> <개국> <맥> <국화와 칼> <안중근> 등 주로 굵직한 특집 드라마로 메가폰을 잡은 터라 주제 의식이 분명한 것은 익히 아는 바이나 새로운 인물의 창출, 연기자를 선발하는 능력, 인간에 대한 탐구와 애정이 남다르게 돋보였던 <형제의 강>을 대하면서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못내 아쉬운 것은
드라마는 방송 문화의 꽃이며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우위를 차지한다. 재미, 오락성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지상의 비판을 뒤로 하고 이 글은 순전히 시청자의 입장에서 솔직한 감상에 주력했다. '통속적이다. 오락적이다' 하면 이미 비판이 끝나버린 평단의 비평 태도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드라마 망국론을 문제삼는 언론의 태도는 오히려 나쁜 관행을 반복하는 듯하다.
문제는 재미,오락, 쾌락의 진정성이며 그 절제의 미덕이다.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의 기준은 불변의 기준에 의해 질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형제의 강> 역시 이 점에서 고질적인 우리 드라마의 구습을 벗어던지지 못한 점을 비껴갈 수는 없다. 시청률 3위<37.4%>를 억지에 가까운 구성과 패륜적인 내용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인기가 오른다고 분석<97.2.25조선일보>한 기사에 과연 정당하게 항변할 수 있는가?
<형제의 강>이 지향하는 과거는 과거의 사실들에 의해 이미지화 된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은 '한정된 공동체 의식'으로 한국인을 가족 중심적으로 만드는 강한 소속감과 일체감의 연대이다.
드라마의 가족상은 좁게는 작가의 경험이고 넓게는 일반 시청자들의 기억이다. 왜냐하면 드라마는 그것이 과거의 이야기일지라도 현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회고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단지 재확인 한다. 지금은 사라져 낯설게 보이는 사실들을 선택적으로 제시하여 '현재성' 을 갖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추억하는 회고담 중 낯설고 부재한 것들은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가 비교되어야 한다면 그 동일함은 무엇인가? 특정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특정한 메시지를 말하는 작가의 울림은 '과거'이지만 동시에 '현재'에 대한 몽롱한 이미지 즉 아버지의 위상,가족 해체의 위기를 낮게 그러면서 깊게 그려내고 있다. '고개 숙인 아버지' 에 반하는 가부장적 질서로 회귀하려는 심리가 점증하고 있음을 은연 중 의심하는 대목도 이런 점에서다. 아버지의 상실을 운운하는 세태에 역으로 아버지의 존재로 힘겨워했던 폐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의 진정성을 검토해야 한다.
또 하나는 폭력의 메시지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절대권력, 형의 모습으로 등장한 이기적 출세주의 그러한 비정에 저항하는 순수의 몸부림은 결국 폭력일 수밖에 없는가.부도덕하고 비겁한 세상에서 '순수함'이란 가치는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준식의 소박한 꿈은 야비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인간의 도리와 가족을 저버린 준수의 파괴된 현실은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꿈이다. 갈등의 증폭이나 해결 수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드라마 구조의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T?드라마가 갈수록 폭력의 묘사가 지나치거나 자극적이 되어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검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폭력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양상들은 무엇이고 그 관계는 어떠한 가치들과 연계되는가. 준식의 폭력적 관계가 실현되고 있는 현실은 특정 상황, 특정 인구층을 이미지화한 것에 불과하러라도 이에 야기되는 현실의 문제를 짙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폭력은 드라마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사회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폭력적 사회에서 최선의 대안은 무엇일까? 결국 힘의 관계가 폭력적 현실을 야기하지만 모두 폭력화하지는 않는다. 힘의 관계를 폭력화가 아닌 이를 위반하는 새로운 위계 질서의 창출은 불가능한 것인가.
훌륭한 이야기 전달의 핵심은 오락적 요소이다. 그럼에도 소재의 통속성 진부함은 이 드라마를 비판하는 첫번째 칼날이다. 권선징악적인 이분법적 형제의 갈등 구조, 준수와 소희의 신파성 사랑, 연희와의 정략 결혼 등 그렇지만 질책보다 애정으로 이 드라마를 자세히 읽은 것은 이전보다 이 드라마가 보편적으로 인간의 진실된 측면에 주목하면서 진지한 사회적 탐구가 돋보이는 작가의 확장된 드라마 세계에 기대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경험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사회적 현상으로서 담화 가능한 것이다. 시청자가 품고있던 숨겨진 감정들을 낚아채어 세련된 연금술로 마음을 열게 한 작가의 진보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