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대 맘보 댄서들은 팔라디움이 문을 닫은 1966년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하였습니다. 이때의 춤이 아직 “맘보 온투(On2)”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2세대 댄서들은 이미 지금의 온투(On2) 댄서들이 사용하는 이론 및 스텝을 공식화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뉴욕에서의 맘보의 쇠락과 새로운 스타일의 라티노 음악 및 춤이 개발된 것이 특징입니다. 첫번째로는 맘보와 소울 음악의 조합인 부갈루입니다. 부갈루는 전국적으로 엄첨나게 성공을 거뒀습니다. 맘보와 라틴 재즈처럼 부갈루는 아프리카-아메리칸과 푸에르토리칸 음악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습니다. 부갈루의 인기는 짧게 지속됐으나, 영향력은 매우 커서 푸에르토리코 문화 내에서 아프리카적인 요소가 전반적으로 일깨워지게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부갈루는 힙합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살아남았습니다.
에디 토레스(Eddie Torres)와 에리카 피크놀(Ericka Fignole)의 “Boogaloo” 공연
(음악은 1967년에 대히트친 “bangbang”이란 Boogaloo 입니다 ㅎ)
1970년대에 떠올라 지금은 사라져가지만 일시적으로 크게 붐을 일으켰던 또 다른 춤으로는 라틴 허슬(Latin Hustle)이 있습니다. 디스코 특징이 강한 이 춤은 사실 맘보보다는 스윙과 더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허슬은 이 당시 뉴욕 라티노 댄서들에게 엄청나게 강한 영향을 끼쳤고, 맘보가 거의 죽어가는걸 내버려둘 정도로 그 영향력이 너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통해 맘보, 부갈루 음악가들과 댄서들이 성취를 이루며 더 지속력이 강한 음악이 탄생했고, 이 음악이 결국 맘보 댄스가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는 것을 도왔습니다. 이 음악이 추후 "살사"로 알려집니다.
“소스”를 의미하는 "살사"는 맘보의 갑작스런 쇠퇴 이후 십년 동안 뉴욕에 등장하였습니다. 이 명칭은 프로모터에 의해 만들어진 명칭이였습니다. 이 단어가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부 음악가들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The King of Mambo”에서 “The King of Salsa”로 호칭이 변경된 티토 푸엔테(Tito Puente) 조차도 자주 다음과 같은 불만을 얘기했습니다. “난 살사를 연주하지 않는다. 난 쿠반 음악을 연주한다.”
뉴욕 푸에르토리칸 음악가들은 손(son) 과라차(guaracha) 와 같은 쿠반 리듬과 플룻 기반의 차랑가(charanga)의 합주로부터 살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맘보 시절의 음악가들과 동일하게 그들도 실험 및 혁신을 통해 빠르게 그들 스스로의 스타일을 만들어 갔습니다. 예전의 팔라디움 시절과 마찬가지로 초기 살사 뮤지션들도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뉴요커 래리 할로우(Larry Harlow), 파나마인 루벤 블레이드(Ruben Blade) 그리고 파니아 레코드(Fania Record)의 창립자들인 도미니칸 조니 파체코(Johnny Pacheco), 이탈리안-아메리칸인 제리 마수치(Jerry Masucci)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윌리 콜론(Willie Colon), 레이 바레토(Ray Barretto), 에디&찰리 팔미에리(Eddie & Charlie Palmieri), 리치 레이(Richie Ray)와 바비 크루즈(Bobby Cruz) 등 뉴욕에서 태어난 푸에르토리칸인들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고,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의 음악은 쿠반 선배들의 음악과는 많이 달랐고, 현재의 쿠반 스타일인 송고(songo)나 팀바(timba)와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뉴욕 프에르토리칸의 정체성 및 문화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음악가들 음악을 대상으로 한 소셜 및 공연 영상들도 많은데요, 한번 살펴볼까요?
윌리 콜론(Willie Colon) - te conozco (샤니 탈머(Shani Talmor)와 알렉스(Alex)의 소설 영상)
에디 팔미에리(Eddie Palmieri) - Oye lo Que Te Conviene (자오코 공연)
리치 레이&바비 크루즈(Richie Ray & Bobby Cruz) - Sonido Bestial (그라시아스 공연)
새로운 음악은 당연히 새로운 형태의 춤을 가져왔습니다. 초기 살세로와 살세라들은 간단의 턴 위주의 짧은 루틴를 가지고 온원(On1) 베이직으로 춤을 추었습니다.하지만 1970년대의 재능있는 젊은 댄서들이 더 인기 있는 다른 댄스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라틴 허슬은 스윙으로부터 만들어졌지만, 디스코 시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허슬은 빠른턴, 아크로바틱, 살사보다 더 길고 폭발적인 턴 패턴 등 퍼포먼스에 집중된 화려한 댄스였습니다.
댄서들 사이에서 허슬의 인기는 빠르게 팔라디움 맘보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라틴 심볼릭스(Latin Symbolics)와 같은 몇몇 댄스 컴패니는 살사와 허슬을 혼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허슬의 복잡한 턴이 살사에 통합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뉴욕 살사/맘보의 특징으로 정의되는 복잡한 턴의 시작입니다.
그럼 허슬을 한번 살펴볼까요?
Hustle 댄스 영상 (익숙한 아크로 동작들이 많이 보이죠? ㅎ)
197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더 이상 맘보를 추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팔라디움 댄서들은 은퇴를 하거나 가르치는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젊은 댄서들은 맘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980년대에는 살사 음악까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파니아 레코드(Fania Record)는 매각되었고, 메렝게, 하우스, 힙합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프로듀서들이 필사적으로 살사 음악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동안(결국 1980년대 후반에 살사 로만티카(salsa romantica)를 통해 성공해냅니다.), 소수의 댄서들만이 맘보가 활발하던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루이크 마키나(Luis Maqunia)에게 맘보를 배운 허슬의 선구자 조지 바스코네스(George Vascones)는 온원(on1), 온투(on2) 둘 다 포함한 맘보를 많은 댄서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팔라디움 맘보의 전성기 시절, 단순한 어린아이였던 에디 또레스(Eddie Torres)가 없었다면, 맘보는 절대 지금처럼 전세계적으로 대중화가 된 모습으로 화려한 복귀를 이루어낼 수 없었을겁니다.
첫댓글 드디어 에디 또레스 할부지가 등장하는군요 ㅎ
쵝오 원조보쌈유^^
정말좋은글 감사합니다 무엇인가의 과거를 안다는거 좋은거지요 ㅎㅎ
에디 할배가 등장했으니 또 다른 얘기들이 많을듯..ㅎㅎㅎ고생하고 있어요^^좋은 글 무한감사^^ㅎㅎㅎ
아직은 어린.에디.ㅎ
잼나게.잘 봤어요~~~
살사 로만띠까... 사실 참 좋아용 ㅋㄷㅋㄷ 뭐 정통살사는 아니지만서도
매번 재밌게 잘보고 있습니다 ^^ ㅎㅎ 좋은글 감사해요
고생이 많아요..!
덕분에 아는게 많아지네요~
감사감사^^
다음편도 기대~
하나하나 아는 재미가 있어용^^에디 또레스 할부지 ㅎ
허슬영상이 하나 있어도 좋을것 같네용 ㅎ
좋은 의견 ㅎ 추가 완료! ㅎ
영상자료들까지 함께 넘감사합니다>-<
허슬...아 배우고 싶지만 국내에서 가르치고 또 활동하는 동호회가 없어서 못 배운 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