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교리로 풀어보는 불교심리치료 강의] 제1강
서광 스님|한국불교심리치료연구원 원장
<월간 불교와 문화>연재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으로 치자면 선수 과목과도 같은 것이고, 법회에서는 입정(入定)과 유사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법회에서는 대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법사 스님의 설법을 마음에 새기고 담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가끔은 마음을 비우는 것에 더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특별한 마음 자세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 콜로라도주에 위치한 나로빠 대학을 설립하고 불교심리학과 불교심리치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쵸감 트룽빠 린포체는 자신의 저서1)에서 불교 수행에 앞서 우리가 필수적으로 자각하고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다음의 4가지 항목을 주장했다.
첫째, 인간 삶의 고귀함 : 우리가 불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복된 환경 조건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둘째, 죽음의 실재 : 죽음은 갑자기, 아무런 경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셋째, 업의 덫 : 선한 것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인과의 덫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넷째, 고통 :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일체 중생이 겪는 고통의 강도와 필연성에 대한 자각이다.
사실 요즘처럼 마음이 힘들고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특히 온갖 불평등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삶의 존귀함을 명상하고 불법(佛法)과 인연한 사실을 감사하는 일이 그다지 쉽게 와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즉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아차리고 자각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롭고 눈물나게 감사한 일인가를 체험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설사 사는 것이 힘겹고, 눈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이 현실에서의 삶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그 모든 현실적 문제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들 삶의 유한성,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은 갖가지 집착으로부터 우리들을 보다 자유롭게 해주고, 나아가서 인과의 덫을 볼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준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그러면 이제 실제적으로 그러한 명상을 실습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눈을 감고 허리를 편다. 편안하게 숨을 천천히 9번 들이쉬고 내쉰다.
우선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나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고,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 우주 안에 수많은 존재들이 있는데 지금 내가 그 가운데 인간의 몸을 받아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앉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그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귀하고 감사한 일이지만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들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즉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조만간 이 몸을 떠나야 하고 이 마음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죽음이라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이 존귀하고 소중하지만, 그러나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상당히 운명적으로 갈등하고 괴롭고 두렵게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감, 자만심, 우월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무의식의 심층에는 필연적으로 실존적인 고통과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엄청나게 분노하고, 화나고, 자존심 상하고,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며, 더러는 잘난 척하고, 더러는 못난 자신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그 엄연한 현실 앞에서는 이 모든 감정들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또 우리가 만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도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그들을 모두 용서하고 더 큰 마음으로 포용하고자 하는 연민심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사유와 명상은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찰나, 바로 지금-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순간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머물기를 바라는 부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명상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 한 나머지 서로 경쟁하고 질투함으로써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순간,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주변의 여러 인연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인연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도 사랑, 화해, 용서하는 마음을 보낸다. 힘겹게 삶의 짐을 지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질투, 괴로움, 미움, 사랑, 분노 등으로 짓눌린 우리 자신의 어깨를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감싸면서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의 행복, 성장, 사랑을 위해서 시방에 상주하신 불보살님들의 가피를 구하면서 기도한다.
내가 누구라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아집을, 그 자만이나 에고(ego)를 내려놓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것, 내가 배운 것과 생각하는 것 전부를 내려놓고 아주 편안하게 머문다.
모른다는 불안감과 많이 안다는 자만심, 해야 할 일, 떠오르는 인연들에 대한 생각도 잠시 내려놓는다.
불법(佛法)을 공부하는 이 순간의 공덕으로 우리들의 삶이 보다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기원한다.
그 인연으로 앞으로 우리와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도 더불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다시 마음을 호흡에 가져가서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 번 깊이 들이쉬고 내쉰 후 조용히 눈을 뜬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 연기, 인연, 삼법인, 37조도법, 6바라밀, 10바라밀, 윤회, 중도, 유식, 업 등 셀 수 없이 많은 팔만사천 방편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그런 가르침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깨닫고, 우리 안에 내재화하고 체득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사수(聞思修)다.
문은 들을 문(聞) 자를 의미한다. 물론 듣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읽고, 쓰고, 보고, 냄새 맡고, 접촉하는 것 전부를 말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내용을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는 일반적인 명상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화두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무튼 계속 마음속에 담고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항상 들으면서 산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꽃을 봤다고 하자. 꽃이 어느 한순간에 우리의 감성을 터치했다. 즉 안의비설신의 가운데 우리의 감각을 건드렸든, 아니면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을 건드렸든 간에 우리의 주의가 발생했다. 그러면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다 불법과 인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주의, 자각하지 않았다면 그 인연은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지는 못한다. 보통 승가에서는 출가한 시기에 따라서 법랍을 정하고 그에 따라 위아래의 순위가 정해진다.
그런데 언젠가 법정 스님께서는 진정한 법랍은 출가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자각하고 알아차렸느냐를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실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자각하는 시간을 따지는 게 올바른 법랍이지 그냥 식물처럼 숨만 쉬고,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멍한 상태로 보낸 세월에 집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가 않다. 문사수도 마찬가지다. 내가 들었다는 이야기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내가 자각하고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것이 문(聞)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알아차린 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명상을 하거나 화두를 드는 단계다. 순간적으로 주의를 주고 알아차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지속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차린 내용이 잊히지 않도록 사유 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기억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사유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알아차린 내용이 점점 명료해지고 예리하게 다듬어진다. 그런데 만일 듣고 보고 냄새 맡고 하는 과정 없이 그냥 무턱대고 사유만 하게 되면, 이는 휘발유도 공급하지 않은 채 계속 자동차를 몰고 가는 겪이 된다. 만일 열심히 수행한 결과로 망가진 육체와 고착된 사고, 관념을 얻었다면 그것은 필시 사유할 그 무엇도 없이 사유에 매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차린 것도 없이, 구체적인 사유의 대상도 없이 사유하게 되면 자칫 망상으로 흘러버릴지도 모른다.
세 번째 단계에서 사유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즉 우리의 몸과 말과 생각으로 실천하고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드디어 우리 안에 체득되고 내재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부른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부처님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삼밀수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부처님을 쳐다보면서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려고 애쓴다면 그건 망상이다.
삼업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체계적인 교리적 이해가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 또 부처님의 뜻이 뭔지를 알아야 엉뚱한 것을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문사수의 세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신구의 삼업을 개선하고 수정해가야 한다.
신구의 삼업을 개선하고 수정하는 작업으로서의 수행은 반드시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개입되는 아집의 내적인 작용과 관련지어야 한다.
또 삶의 가치와 의미, 존재 방식, 삶의 태도라고 하는 큰 틀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노력이 올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흔히 무엇을 하든 중도에 그만두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하지만 수행만큼은 다르다. 비록 우리가 실감나게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수행은 언제 어디서 그만두든 조금이라도 시작하고 노력했다면 그만큼 효과가 있고 그 공덕이 수승하다.
쵸감 트룽빠 린포체가 제안하는 4가지 선수 과목을 바탕으로 문사수를 통한 올바른 수행은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인생이 더 충만해지고, 더 기쁘고 감사하게 머물 수 있도록 돕는다.
나아가서 우리의 존재, 삶 자체가 보물이고, 선물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과 인간관계가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채워지게 만든다. 그러한 열망은 다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함께 소통하도록 하고, 단절이 아닌 연결과 수용, 포용하면서 인간과 세상을 향한 경계가 무한히 확장되고 확산되는 연기적 세계, 연기적 존재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 http://cafe.daum.net/IKBP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부처님을 닮아가는 삼밀수행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