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한(1800~?)
황경한은 1800년 한양에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한이 부모는 1790년 결혼했지만 늦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십 년 만에 아들 경한을 얻는 큰 기쁨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황사영 알렉시오가 1801년 신유사옥 때 핵심 주모자도 지목되어 도피하였고, 1801년 12월 10일(음 11월 5일) 대역부도 죄를 저지른 중죄인으로 판결되어 능지처참 형 순교를 했다. 대역죄인의 가족이기에 할머니는 거제도로 어머니는 제주도의 관노비로 유배되었고, 황경한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라는 법 판결문(일성록; 사학징의)에 의해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이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떠난 유배는 매서운 혹한의 추위가 이어지는 1801년 11월 중순(음력)이었다. 한양을 떠나 전라도 남단까지 그리고 다시 뱃길로 이어지는 유배 길은 춥고 배고픈 고통의 길이었다. 게다가 대역죄인 아들이라는 신분이 추자도 섬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평생을 손가락질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어머니 정난주의 지극한 모성과 명철한 이성은, 반듯한 양반 가문 황사영의 아들 경한을 평생 노비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할 수 없어 지혜를 도모하게 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가 호송선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두 살 젖먹이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추자도에 아들을 내려놓기 전, 정난주와 황경한(추자동 성당 유리화)
하추자도 예초리 해안가 바위틈에 사공들에 의해 내려졌다.(이때 젖먹이 아들을 내려놓고 천만갈래로 찢어졌을 모정과, 어미 품에서 떠나 생존의 무서운 두려움을 느꼈을 아기를 생각해보라) 어린 아기 황경한은 겨울 바닷가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울고 있다가, 천만다행으로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오씨 부부는 경한을 거두어 키우면서,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황경한임을 알려 주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오씨부부의 주워다 키운 아들이나 머슴의 처지로 살아갈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하고 고마운 일로, 불행과 고통 중에도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임을 느끼게 한다.
추자도 예초리 어부 오씨에게 발견된 황경한(추자도 성당 유리화)
오씨의 집에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建燮)과 태섭(泰燮)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아들 경한은 자신의 내력을 알고 난 후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제주에서 고깃배가 들어오면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고 전해진다.
제주도를 향해(황경한의 눈물의 사모곡,추자도 성당 유리화)
추자도의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경한의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에서 관노로 37년간 인욕의 세월을 살면서 늘 아들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걱정하다, 1838년 2월 1일(음) 66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선종하여 하느님 품에 안겼다.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관노비의 신분으로 몸 붙여 살던,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의 배려로 김 씨 선산에 묻힐 수 있었다. 김상집은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에게도 모친의 부고를 알리고 ‘한굴 밭’에 있는 후손들에게 정 마리아의 묘를 돌봐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그 후손들이 묘를 정성껏 돌보았다고 한다.
제주 용수 성지(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표착지) 기념관에는 김상집이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보내는 정난주 마리아의 부고가 전시되어 있다. 이를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추자도 예초리에 귀양살이하는 황 서방 본대에 삼가 드림
“종전에 뵈온 바 없사오나 소식 종종 들어 아옵더니, 근래에 소식 듣지 못하오니 매우 딱하옵니다. 추위가 심한 요즘 기체후(건강) 어떠하온지 알고자 하옵니다.
어른(당신)의 이곳 대부인(大夫人: 모친) 정씨가 불행하여 지난해 2월 초하루 묘시(5-7시 사이)에 별세 하신고로 장례를 잘 지냈사옵고, 부고 편지를 진작에 보냈사옵니다. 그러나 지금껏 회답이 없어서 의아해하던 차에, 추자 사람 이 서방 편에 듣자와 안부를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부고가 전해지지 않은 듯하오니, 세상사 가이없사옵니다.
이곳 주인 도리에 차마 박절하옵기로 제사와 명절 차례를 다 지내오니 그리 아옵소서. 마침 인편이 있기에 다시 자상한 편지를 하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라오며, 회답을 인편에 즉시 전하옵소서. 말씀은 한이 없사오나, 총총히 줄여서 올립니다.”
기해년(1839년) 정월 23일 대정 서정리 주인 김상집.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제주도 추자도 예초리(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산 20-1)에 천주교 순례지인 황경한의 묘가 있다. 묘비에는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와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아들”의 묘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0년에 제주 선교를 위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1909년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 사실을 프랑스 전교 잡지에 소개했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주었다.
1908년 5월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한 기록이 남아있는 추자도에는 1956년부터 제주중앙 성당 관할의 공소가 시작되었다. 1988년 추자 공소는 서문 성당 관할로 이관되었고, 상추자도 항구 인근에 위치한 추자 공소 신자들은 황경한 묘소를 돌보아 왔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 600여 평을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