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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방원 3 - 제1차 왕자의 난 1
조선건국 직후 왕실 최대 비극인 '제1차 왕자의 난'은 이성계의 첫 번째 아들 이방우에 의해 이미 잉태 되고 있었다.
이방우는 우리나라 역사상 참으로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이방우는 이방원에게는 13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 같은 장형이었다.
실지로도 이방원은 큰형 이방우를 아주 어려워했다.
'육룡이 나르샤'라는 TV 드라마에서도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자 이방우가 이방원에게 달려가 이방원 뺨을 때리고 멱살을 잡으면서 이방원을 크게 질책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이방원과 이방우의 성격과 차이점을 극대로 부각시키는 모습이었다.
이성계가 뛰어난 장군으로 고려에 공을 많이 세우고 고려정계로 진출한 이후 이방우도 과거에 급제해서 고려신하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방우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성격의 아주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이방우는 할아버지인 이자춘과 그 이전의 선조들이 고려인으로서 원의 신하였던 것을 많이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이방우는 고려의 더 충직한 신하가 되고자 했다.
이방우의 이런 점 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해서 새 나라를 건국했는데 큰아들인 이방우는 아주 딴죽을 건다.
이방우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이 벌어지기 시작 한다.
이성계가 장자인 이방우를 세자로 세우려 하자 이방우는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만약 자기를 세자로 세우면 왕이 되자 마자 왕위를 다시 고려 왕씨에게 반환하겠다고 까지 극언을 한다.
이방우는 고려신하로서 고려왕조에 불충된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쓰는 나로서도 이방우 당시 처신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건국이 우리 역사진행에서 발전하고 더 나은 일이었는가?
이에 대한 의문은 우선 제쳐 두고 이야기 해보자!
모든 나라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오백년 된 고려 또한 마찬가지로 흥망성쇠를 보였다.
당시 오백년 된 고려는 한 나라가 패망의 길로 가는 모든 모습을 보여 주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개혁적인 신진사대부와 무인세력 이성계에 의해 토지개혁, 노비해방, 권문세가 타도 등 대부분 일반 백성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개혁적인 정책으로 새로운 나라 건국을 진행하고 있었다.
조선건국 직전과 건국초기는 분명하게 백성들이 바라는 개혁적인 정책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아버지인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이방우 자신 또한 세자가 되어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였다.
이방우가 진정 백성들을 생각했다면 자신이 왕이 되어 백성들을 위해 더 개혁적인 정책으로 풀어가면 된다.
그런데 이방우는 백성에 대한 도리 보다 다 쓰러져가는 고려에 대한 충정만을 우겼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방우는 당시 시세를 전혀 읽지 못했다.
한 왕조에 대한 충정보다 더 큰 의리나 충정을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이방우는 시야가 좁고 고지식하기만 했다.
이런 점에서는 정몽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정몽주는 그래도 고려에서 받았던 것이 많았고 자신이 지킬 것도 많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유학자로서 불사이군을 외치는 충신의 모습으로 길이 남겨질 수도 있고 지금도 좋은 모습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이방우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것에도 못 마땅해 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건국 된 조선 또한 정몽주와 정도전을 둘 다 죽인 이방원이 왕이 되고나서 부터는 조선 500년 내내 조선건국의 최고 공신인 정도전은 만고의 역적이 되어 이름조차 거론 못하고 조선건국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것은 그 어떤 새로운 권력자들도 어느정도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자기들이 만들어 논 권력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충직한 신하 이미지 띄우기 전시효과에 불과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개혁가나 혁명가 보다는 불사이군을 외치며 최고권력자를 위해 목숨마저 팽개치는 충직한 신하들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이방우, 정몽주가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올바름이 백성들의 생활을 좀 더 관심있게 보고 백성들 편에 서서 어떠한 것이 더 백성들에게 유리한 일인지를 판단 할 수 있는 올바름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어쩌든 조선이 건국되자 격렬하게 반대하던 이방우는 느닷없이 황해도 해주라는 지방으로 내려 가버린다.
이에 이성계는 한숨을 쉬며 이방우를 세자로 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이방우에게 자기 고향인 함흥에 정착하도록 해준다.
이방우는 함흥에서 자기 선조들이 고려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당시 몽고에서 전해져 온 술, 소주를 날마다 마시고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다 함흥에 온지 1년만에 죽고 만다.
이방우가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성계에게는 이방우 말고도 7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제 큰아들 이방우 죽음으로 7명 아들 모두에게 세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특히 조선건국에 가장 공이 큰 다섯째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방원에게 큰아들 이방우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지만 이제 그 산이 제거되었으니 당연히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방우 죽음이후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정안군 이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때 이방원 친모 왕비 한씨는 이미 죽고 없었고 계비 강씨가 이성계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계비 강씨 신덕왕후의 의향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내정까지 했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이 방번은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친동생 방석에게 빼앗겼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들은 왕실 중심의 정부가 아니라 관료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고 삼십대 성인이 훨씬 넘어버린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해 나이가 가장 어린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하려 했다.
신덕왕후 강씨도 자기 두 아들 중 누가 왕이 되어도 별 상관없는 일이라 순순히 정도전 일파 말에 따랐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는 후계자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장자 순 혹은 능력 순이라거나 하는 분명한 원칙을 따르면 되었을텐데 이방원의 배다른 동생이자 나이 어린 막내에게 왜 세자 자리를 맡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했는지는 의문이다.
태조이성계가 계비 강씨에게만 빠져 그런 결정을 내렸다기에는 석연찮다.
개국공신들인 정도전 일파에 힘이 밀렸고 정몽주를 살해한 이방원의 과격함에 진저리 쳤는지도 모른다.
아마 장자 이방우가 세자 자리를 지켰거나 아님 둘째가 세자 자리를 이었다면 이방원이 그렇게 쉽게 왕자의 난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든 그리하여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었다.
불과 11세밖에 안 된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 의 지원에 힘입어 6년 동안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세자의 배후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방원에게 기회가 오고 있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태종 이방원 4 - 제1차왕자의 난 2 가 이어집니다!
그냥 연결해서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계속 올립니다 ^^
태종 이방원 4 - 제 1,2차 왕자의 난
우리나라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는 꽤 된다.
그 성공한 쿠데타를 살펴보면 대부분 쿠데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쪽이 불시의 기습으로 인해 성공하고 그리고 쿠데타 성공이후 전개과정이 엇비슷하다.
그 중 우리나라 역사상 전개과정이 가장 닮은 두 쿠데타가 있다.
바로 조선건국 직후 '제1차 왕자의 난'과 600년이 지난 후 대한민국 '전두환일당 신군부에 의한 쿠데타'이다.
이 두 쿠데타를 비교해보면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이 두 쿠데타의 주인공인 이방원, 전두환 둘 다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위화도회군 이후 역성혁명을 계획할 때 부터 직접 참여했기에 어렴풋이 왕을 꿈꾸었을지는 모르지만 방원 위로 4명의 형이 있었기에 엄두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생각지도 않게 장형인 이방우가 세자는 싫다며 낙향하고 그 뒤 1년만에 죽는다.
이에 이방원은 왕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방원 위로는 3명의 형, 아래로는 두 동생의 친모인 계비 강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넘기 힘든 당시 거의 모든 군권과 실권을 가진 정도전이 버티고 있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총애를 받아 보안사령관에 올랐지만 그 당시까지도 최고권력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당시는 박정희대통령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여권에는 차지철, 김재규, 김종필 등 쟁쟁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고 야권에는 김대중 김영삼이 있었다.
그런데 경천동지할 10.26이 터져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차지철이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10.26사태는 당시 대통령시해범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수사권을 가진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느닷없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방원은 방석이 세자가 되고도 6년 동안은 숨 죽이고 살아야 했다.
방원도 어느 정도 사병을 가지고 있었고 현존 왕의 친아들이자 개국공신이라는 명분은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도전 일파가 마음만 먹으면 이방원을 역모로 몰아 쉽게 죽일 수도 있었다.
정도전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방원을 너무 경시했다.
이방원의 야망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방원을 살려두어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자신만만했다.
그래도 한 때 제자였고, 자기를 친삼촌처럼 따랐던 현존 왕 친아들인 이방원 목숨까지 빼앗는 일은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10.26이후 군권은 명목적으로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과 계엄사령관 정승화에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최규하와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럴만한 힘도 있었다.
군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명나라의 심한 간섭과 자신을 압송하라는 명의 요구에 화가 나 요동정벌을 주장한다.
태조 이성계로부터 요동정벌을 허락받은 정도전은 그 명목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장악해 나가려 한다.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여러 의미가 있었지만 왕자들의 사병, 특히 이방원의 사병을 혁파하여 그들의 손발을 잘라 놓으려는 의미가 컸다.
이에 이방원은 배수진을 치고 죽기살기로 정도전일파를 불시에 기습하여 반격을 가한다.
이방원을 경시하여 별 대비를 하지 않았던 정도전은 이방원 기습 한방에 살해되고 정도전의 꿈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전두환도 당시 병력으로 보면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게임이 안되었다.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과 정병주 공수특전단사령관이 정승화와 같은 편이었다.
전두환 월권이 심해지자 정승화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동해안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 내릴 준비를 끝마치고 발표만 남겨 놓았다.
이 정보를 입수한 전두환과 신군부측이 발표 전날 기습적으로 선수를 쳤다.
바로 12.12 쿠데타이다.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도전과 방석, 방번 이복동생들까지 살해한 이방원은 실권을 장악했으나 당장 왕이 되지는 않는다.
허수아비 둘째 형 이방과를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정종이다.
이방원은 세제가 되어 실권을 잡고 뒤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전두환도 12.12쿠데타에 성공했지만 당장 최고권력자 자리에 앉지는 않는다.
최규하를 임시대통령으로 만들어 놓고 그 또한 실권을 잡고 최규하를 뒤에서 조정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대부분 성공한 쿠데타는 이처럼 상대적으로 더 힘을 많이 가진 정적과 비교도 안되는 작은 병력으로 단숨에 기습하여 일거에 성공시킨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박정희의 5.16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쿠데타의 성공한 이방원과 전두환에게도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이방원은 자기와 성정이 비슷하며 왕에 대한 야망이 있고 사병도 엇 비슷하게 보유하고 있는 넷째 형 이방간과 백성들의 여론이었다.
전두환에게는 당시 대통령 후보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과 국민의 여론이었다.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방원은 어쩔 수 없이 친형 이방간과 전투를 치룬다.
그리고 승리한다. 제 2차 왕자의 난이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드디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태종이다.
전두환일당은 5.17 쿠데타로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제거하고 5.18광주항쟁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르니 제 5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전두환은 무소불위의 대통령이 된다.
이 두 쿠데타 전개과정이 너무 비슷하지 않는가?
전두환 일당이 600년 전 이방원의 쿠데타를 면밀히 연구하고 검토하여 벤치마킹 한 것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방원의 쿠데타와 왕위 쟁탈은 600년이 지난 후에도 벤치마킹 할만큼 철두철미한 계획아래 진행된 것이다.
제 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조 이성계는 병석에 있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쿠데타의 분노했지만 이미 병권을 빼앗겨 어쩔 수 없었다.
이성계는 방석과 방번을 살려준다는 이방원의 약속을 믿고 쿠데타를 용인한다.
그러나 이방원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방원은 방석과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이 때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방석의 후사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태조이성계는 방원의 약속과 달리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분노하고 충격을 받아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지내다 왕자의 난 한달 뒤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이다.
이제 태조이성계는 상왕으로 칭하게 된다.
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이미 자신이 가진거나 마찬가지인 세자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야망이 없는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넘겨주었다.
이방원의 이러한 행위에는 자신은 야심이 없다는 것을 신료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위한 쇼였다.
고려시대 17살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기도 한 이방원답게 머리를 잘 썼고 기다릴 줄도 알았다.
이방원은 왕에 대한 별 야망없이 착하기만 형 이방과에게 차기 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에 대한 야망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방원은 얼마든지 훗 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방원은 정종이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세제가 된다.
그리고 2년 후 정종이 바늘방석에서 스스로 내려와 세제 이방원에게 왕위를 전위하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세종의 친아버지 조선 3대왕 태종이다.
이어서 태종시대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