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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평동 성당 5구역 미리내 성지순례
복중(伏中)을 방불케 하는 때 이른 폭염이 며칠 째 계속되던 5월 26일, 우리 구역에서 미리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전날까지는 미세먼지·초미세먼지까지 하늘을 뒤덮어 외출하기가 두려웠었는데,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확 티어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물빛이 반짝이고, 아차산의 능선도 선명하게 보이며, 북쪽의 불암산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하였다. 오늘도 기온이 만만치 않게 오를 듯싶지만 탁한 공기가 더 공포의 대상이니 뜨거운 햇볕쯤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8시까지 집 앞 장자대로로 나가면 데도 마음이 설렜는지 5시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늘 하던 대로 과일과, 계란 반숙, 떡으로 요기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좀 이르지 않나 싶었는데 벌써들 많은 분들이 나와 있었다.
8시까지 모두 탑승, 8시 3분에 출발하였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모범생들, 우리 5구역 식구들이다. 애당초 가기로 했던 분들 중에서 불가피한 사정으로 못 나온 이들이 많아 최종 인원 24명이 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안성면, 천주교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 떡과 물, 과자를 배분 받고, 시작 기도로 주모경을 바치고, 오늘 하루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다 줄 기사 분께 박수를 쳐드린 후, 구역 총무로부터 미리내 성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미리내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와 경당이 있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이다. 미리내는 천주교 박해 때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살았던 교우촌으로, 병오(1846년)박해 때 순교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순교자들도 함께 모셔져 있다.
※ 미리내 지명의 유래
신유(1801년), 기해(1839년)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여기저기 흩어져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살았는데, 밤이면 달빛 아래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리내 성지 팸플릿 참조)
미리내 성지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은 1시간 20분, 일요일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차는 막히는 구간이 없이 잘 달렸다. 단지 용인으로 들어가서는 길이 좁아서 천천히 움직였다. 묵주기도 20단을 바쳐야 한다는 주문을 사도 회장으로부터 들었다. 갈 때 못하면 올 때 나머지를 마저 해야 한다는 숙제까지 내 주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 짧은 시간 안에 묵주 기도를 20단이나 꼭 바쳐야 한다고? 잠시 의아했었지만 그 의문은 성지에 가서 길을 걸으며 해소 되었다. 우선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를 5단을 바치는 동안 목적지에 닿았다.
예정 했던 시간보다 10분 정도 지나 미리내 성지에 도착하였다.
(성체조배실이 있었다.)
우리의 1차 목적지는 10시 10분 이전에 경당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차장에서부터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내려쪼였지만 다행히도 키 큰 나무들이 길 양 옆에 있어서 그늘 아래로만 들어가면 괜찮아 걸을 만 하였다.
조금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카트 하나가 와서 뒤에 쳐져서 걷고 있던 우리 세 사람(70대) 앞에 서며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경당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세 자매가 있어서 걱정하던 차에 얼른 태워서 먼저 가게 하였다. 나는 좀 걷고 싶어서 타지 않았다.
길 양옆에 성화와 성상이 있어 무엇인가 했더니 묵주기도 매 단의 신비를 바치는 곳이었다. 바로 20단 묵주기도의 길을 우리가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 관계상 묵주기도를 바치며 갈 수 없기 때문에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라도 바치자고 했던 숨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
(포즈를 취하는 이와)
(사진을 찍어 주는 이)
(사도회 형제들)
‘20단 묵주기도의 길’을 지나 처음 만난 곳이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 성당이었다.
경당은 여기서 언덕길로 조금 더 올라가 있었다. 가는 도중에 좌측으로 성모당이 보였다.
드디어 경당에 도착하였는데 카트를 타고 먼저 간 자매들이 그늘에서 쉬며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높은 곳에 위치한 경당은 1925년7월5일 교황 비오11세에 의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명중 79명이 복자로 시복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후에, 1968년10월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병인 순교자 중 24명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이 된 것이다.)
※ 경당(經堂) : 특정 신자나 공동체를 위한 경배, 기도, 예배처, 소성당
경당 앞 좌측에는 순교자의 모후 성모상이 있고, 가운데에는 네 개의 무덤이 있었다.
좌로부터 ‘강도영 마르코 신부’ 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 ‘페레올 주교 묘’, ‘최문식 베드로 신부’ 묘이다. 강도영 신부는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신부이시며 방인사제(한국에서 서품받은 사제)이시고, 미리내 성지 1대 신부이시다.
이 무덤 외에 경당 뒤편에 김대건 신부의 어머님이신 ‘고 우르슬라’의 묘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안고 와서 이곳에 안장시켜드린 ‘이민식 빈첸시오’ 묘가 있는데 가보지 못하였다.
네 분의 무덤 앞에서 문화해설자이며 성지해설자인 남자분의 해설을 들었다. 본인의 소개로는 시인이며 일본어 번역가로 활동하신 다는 형제분은 경상도 억양으로 열정적인 해설을 해 주었다. 김대건 신부의 성해 ‘발 뼈 조각’이 관 조각 일부와 함께 보관 되어 있다는 경당 내부를 잠깐 들여다보고 난 뒤 계단 아래 나무 그늘로 가서 또 다른 해설가인 파올리나 자매님의 해설을 다시 들었다.
이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11시가 미사 시간이라 서둘러 내려가 103위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신 103위 성인의 시성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1991년 5월 27일에 대성전이 봉헌되었다.
이 성당의 내부는 명동성당을 본 따서 지었다고 한다. 대성당의 제대 앞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비골(종아리뼈)이 모셔져 있다.
미리내 성지 주임신부님은 머리가 희끗희끗 하신 분으로 성지 신부님 특유의 열정과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말씀 한마디 한마디마다 힘이 있으시고 유머어가 넘치셨다.
“우리가 매일 의무적으로 바쳐야 할 기도로는 아침·저녁 기도. 묵주기도, 삼종기도가 있는데 그 외에 중요한 기도는 화살기도이다. 다급한 사정이 있을 때, 우리의 감정이 욱하고 치밀어 올 때 화살처럼 쏘아 올리는 기도는 우리에게 평정심을 되찾게 만들어 준다. 화살기도를 많이 바치자. 그리고 ‘천주님!’하고 부를 때 ‘오, 천주님!’하고 기도 하자. 그리고 ‘5천원’을 떠올리고 미리내 성지 후원에 가입하여 매달 5천 원씩 기부하자. 기부 기간은 100년으로 하자”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비신자 순례객들에게는 우리 성인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셨다.
대 성당 앞에서도 단체 사진을 찍었다.
미사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는데 식당은 저 아래 성지 입구 쪽에 있다.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데 두 자매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사무실에 카트를 보내 줄 수가 없느냐고 전화로 물어보고 있던 중에 기적과 같이 카트가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큰 소리로 카트를 세워 놓고 보니 주임신부님과 또 다른 신부님이 타고 계셨다. 염치불구하고 사정을 말씀 드리고 두 자매를 태워서 보냈다.
점심식사는 성지 내 식당에서 하였다. 집행부가 근처에 맛 집을 알아 본 모양인데 골프장이 많이 있고, 성지 순례 객도 많아 어느 식당도 단체손님을 예약해서 받을 수 없는 사정이라 해서 이곳에서 먹게 되었다. 여기 음식을 먹는 것이 성지를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괜찮은 일이고 음식 맛도 좋았다. 더구나 우리는 24명인데 30명의 밥값을 지불했다는데 아깝다고 하기보다는 성지에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식사 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요셉성당으로 갔다.
요셉성당은 자그마했으며 외벽이 돌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얼핏 보아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113년 된 성당이었다.
요셉 성당 앞에는 아카시아나무의 그늘이 시원한 쉼터가 있어 그곳에서 잠시 쉬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 경당 쪽에서 만났던 파올리나 자매의 해설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성요셉성당은 미리내 성지 초대주임신부인 강도용 마르코 신부(1896~1929년)가 신자들과 함께 1907년 걸립한 돌 성당으로 성 김대건 아드레아 신부의 성해 하악골(아래턱뼈)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강도용 신부님이 계셨을 당시에 그 일대에 공소가 33개(?)가 있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러 오는 신자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들은 헌금 대신 돌로 헌물을 하여 돌로 된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돌로 지은 성당은 미리내와 제주도 두 곳에 있었는데 제주도에 있던 성당은 개발로 인해 없어졌고 현재에는 이 곳 하나만이 남아있다.
“요셉성당의 제대는, 일제시대 때 원산 <덕원수도원>에서 제작되어 우마차에 실어 미리내까지 운반해 왔으며,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에도 제대와 감실만을 분리하여 현재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사제가 뒤로 돌아서서 미사를 드렸다.
종각에 올려진 <미리내 종>은, 1917년 강도영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로부터 들여왔으며,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 포탄제작을 위한 징발을 당해 하마터면 훼손될 뻔하였다. 이 종은 현재도 미리내 본당에서 사용되고 있다.“-미리내 성지 홈피
강도영 신부는 성당을 건립했을 뿐 아니라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교우들의 신앙과 글을 가르치고, 농업기술을 전파하고 해성제사(海星製絲) 공장을 운영하며 신자들에게도 양잠 기술을 가르쳐서, 지역민들이 자활의 길을 개척하고 소득을 증대하게 하였으며, 천주교와 신학문을 지역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상록수의 주인공 같은 존재였다.
해설자는 강도영 신부님에 관한 것 외에 김대건 신부님의 출생과 유학, 조선으로의 돌아오는 과정과 체포, 새남터에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고,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잘려진 머리는 보자기에 싸서 가슴에 안고, 몸은 등에다 짊어지고,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여, 7일 동안 걸어 자신의 선산인 미리내에 안장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25세의 청년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17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일을 해낸 이민식 빈첸시오, 그 외에 수많은 신자들이 택한 순교의 길, 그 일들을 가능하게 한 힘의 원천인 33세의 청년 예수님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벌써 몇 번째나 반복해서 해설을 하고 있음에도 해설가인 파올리나 자매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목소리는 낭랑하였다. 보고 듣고 있는 내가 오히려 더 힘이 들었을 뿐, 정작 본인은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끝가지 수행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교 정신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요셉성당을 나와서 나는 그 자매에게 정말 수고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가벼운 포옹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해설을 들은 후 밖으로 나와 쉬고들 있는데 십자가의 길을 성당 안에서도 할 수 있다고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조금 전 해설을 듣는데 집중하느라 기력이 소진되어서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두 자매(세레나와 안나)와 함께 그늘에서 쉬며 기다리기로 했다.
십자가의 길을 끝낸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 주차장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탔다.
올라가는 길에 빛의 신비 5단과 고통의 신비 2단을 바쳤다. 나머지는 각자 집에 가서 하라는 과제를 받고 잠시 여흥시간을 가졌다. 우리나라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냐고들 하는데 우리 구역 식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들 빼어난 명창들이었다. 구역 합창단을 하나 만들어도 될 듯싶었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좀 늦은 시각인 5시쯤 도착하였다. 공원 옆 콩나물 국밥 집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젊은 자매들은 먼저 갔다. 이 더운 날 뜨거운 콩나물 국밥이 괜찮을까 했는데 의외로 더위가 가시고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집에 가서 밥 차려 먹는 수고를 덜게 해 준 집행부의 섬세한 배려에 감사드린다.
79년도에 영세를 하였으니 올해로 40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지 순례를 많이 해본 축에 들지 않는다. 늘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집안 행사가 많았기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 의무를 다 하고 협력하기 위한 차원에서만 참석하였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 이처럼 중요한 성지인 미리내를 한번 밖에, 그것도 근 30년 전에 왔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성지 순례는 많이 다니지 않았지만 내가 영세한 후로 몇 년간은 우리 교회가 한국순교자들을 늘 기리던 시기였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시성시복을 위한 기도를 바쳤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전국신앙대회가 1981년 10월 18일에 있었고,(교황청이 150년 전 조선 포교지를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로 설정한 것을 기념하고 우리 신앙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행사였다. 조선교회는 그 전까지만 해도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103위 성인 시성식이 있었던 1984년 5월 6일에는 ME 부부로서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교황님이 들어오시는 길 양옆에 도열하고 있었다.
제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있었던 1989년 10월 8일 에는 미색 치마저고리에 푸른색 우산을 바쳐 들고 성체 분배를 하시는 신부님을 인도하였었다.
이 모든 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 되었다. 조순 서울시장이 여의도 광장의 상당 부분을 공원으로 조성하기 전에는 모든 신앙대회가 이곳에서 열렸었다.
김대건 신부님 유해봉송 시에는 하얀 모시로 한복을 맞춰 입고 행렬을 뒤따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2대 교구장이셨던 ‘성 앵배르 라우렌시오 범 주교님’과 ‘성 모방 베드로 나 신부님’, ‘성 샤스탕 야고보 정 신부님’의 시신이 묻혀 계신 삼성산 성지가 우리 본당 관할이었다. 매 달 21일 성지 미사가 있었고, 9월 ‘김대건 안드레아와 범 라우렌시오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지금은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로 바뀌었음.) 미사에는 전 신자가 성지에 가서 마사를 드렸었다.
순교자들의 삶과 믿음은 영세한 지 얼마 안 되는 새신자인 나의 신앙 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었다. 파올리나 해설자가 우리 교회 초대 교구장이 누구냐는 질문을 했을 때 '브뤼기에르 주교'라고 내가 대답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기를 보냈었기 때문이다.
이번 성지 순례가 준 의미와 감동이 더 컸던 것은 이 성지가 지니고 있는 스토리가 특별했고, 순교 선열들과 교감을 해 보면서 희미해져 가고 있던 순교정신을 되새겨 보는 귀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미리내를 가게 된다면(그럴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해설을 듣지 않고, 이번에 들르지 못했던 고 우르슬라 묘소와 이민식 빈체시오 묘, 그리고 무명 순교자의 묘소를 찾아보고 싶다.
**미리내 성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아래로 http://www.mirinai.or.kr/m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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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일이 시조부님 제사이고, 6월 2일은 어머님 1주기, 6일은 시제,
할 일은 많고 몸도 힘든데 내가 또 이 일을 하고 있다.
언젠가 부터 여행을 하고 난 뒤에 기록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그 여정이 미완성으로 남는 기분이 든다.
기억력도 쇠퇴하고 느낌도 희미해져서 기록을 남겨두고 싶기도 하지만
잊고 있다가 나중에 보면 지나간 일기장을 들쳐 보는 것 같은 재미도 있다.
미진한대로 일을 마쳤으니 잊어버리고 집안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와, 대단한 기록이다.
내가 마치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듯 하구나.
아가다는 우리나라 곳곳, 더 많이 다녀야겠다.
유홍준의 우리문화답사기 같이 구석구석을 알리는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