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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김제 51코스 제1부
동진강석천휴게소-불당마을-원평천-해창마을-진흥경로당
20230524
1.김제평야에 울려퍼지는 아리랑 아라리요
서해랑길 50코스를 마치고 곧바로 51코스 탐방에 나선다. 동진강 동쪽 언덕길을 따라 내려간다. 건너편에는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동전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동진강 동쪽 유역에는 드넓은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들녘이 펼쳐진다. 죽산면 서포리 들녘으로부터 동진강 하구에 이르는 동쪽 평야를 김제평야라 이르며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이룬다. 동진강 서쪽 부안군은 산봉들이 솟아 있는데 동진강 동쪽 김제는 산은 보이지 않고 평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이 평야에 물을 대는 강이 동진강이요, 그 지류가 원평천이며 신평천이다. 인간은 수렵채취를 벗어나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을 발달시켰다.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근원지가 어디일까? 그를 증명하는 것이 김제의 벽골제라 할 수 있다. 벽골제는 원평천 위쪽에 있기에 서해랑길 51코스에서 한참 밖에 있다. 51코스 출발지인 동진강석천휴게소 공원에 벽골제 수문 모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김제가 농경을 통한 풍요로운 지역이며, 우리나라 도작(稻作)문화의 발상지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가 공업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김제를 비롯한 호남평야 지역은 경제발전과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낙후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동진강석천휴게소는 폐점되어 폐허처럼 서 있으며, 그 앞 공원도 내버려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에 세워진 통일을 염원하는 비석 또한 동학혁명의 깃발처럼 찬란하게 휘날리다가 패배한 채 나뒹구는 것 같아 길손의 마음은 아득했다.
"김제는 삼한시대에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렸다. 이는 '벼의 고을'이란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벽골제’라는 저수지가 만들어져 벼농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곳이다. 통일신라 때 ‘벽골’은 ‘김제’로 바뀌었다. 이는 ‘금의 언덕’ 또는 ‘황금의 벌판(들)을 뜻한다. 옛 기록물에 김제시 일대의 평야를 “대평, 속칭 김제만경평야라고 한다(大坪俗稱金堤萬頃坪)”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큰들’을 표현한 것이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참조) 김제는 예로부터 평야 지대였다. 이 평야에 물을 대는 중심 강물이 동진강과 만경강이다.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 땅과 물이다. 국가권력과 권력자 및 부력자(富力者)는 이 땅과 물을 장악하여 농민을 수탈한다.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민란이 있었지만, 그 정점은 전라도 고부군수(현재 정읍) 조병갑이 만석보를 축조하여 터무니없는 사용료를 부과하자 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하여 농민들이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해랑길 51코스의 들녘은 동학농민혁명의 농민들이 물결치는 것 같다. 동진강 위쪽 정읍 만석보를 가늠한다.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이 만석보를 파괴하는 모습이 보이고, 고창 무장에서 동학지도자들이 포고문을 알리는 소리가 드높다. 농민군은 부안관아를 점령하여 무기를 확보하였다.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을 만나 두려움에 떠는 농민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데 그들이 관군을 물리쳤다. 승리의 함성이 죽산면 서포리 들녘에 울려퍼지는 것 같다. 그 승리의 함성은 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아, 우리가 해냈구나. 가렴주구에 허덕이던 농민들의 탄식이 이제, 희망의 얼굴로 이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서포리 들녘 보리밭에 보리가 물결치고 있다. 소만 절기를 지나 보리이삭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6월이면 보리타작이 있을 것이다. 들녘의 보리밭을 보면 언제나 이 가곡이 떠오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박화목/작사, 윤용하/작곡, 1952) 그리운누구를 기다리는 걸가? 그리움을 사무치게 하는 저녁놀이 가슴을 울린다. 이 가곡이 대한민국 '보리밭'을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가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리밭과 관련된 또 다른 작품이 떠오른다. 잘 알려진 미당의 '문둥이' 작품, 이 시에 나오는 보리밭은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형의 문둥이는 대낮에 사람의 눈에 띌까 숨어 지내야 한다. 애기를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소리에 애기를 먹고 싶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달 뜨는 밤의 보리밭에서 애기를 먹고 천형에서 해방되는 꿈을 꾼다. 보리밭에서 문둥이의 꽃처럼 붉은 울음과 거기에서 환기되는 애기의 울음은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보리피리를 불며 우리 국토산하 눈물의 언덕을 방랑한다는 생각이 든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서정주의 '문둥이'(1936.11) 전문>
모든 예술은 그리움이다. 예술 작품을 표현하고 감상하는 일은, 그래서 양자 모두 그리움에 젖는 시간이다. 포악하고 절망적인 삶의 현실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예술 작품이고 그들을 소리와 색채와 형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과 그 결과물 모두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은 대상과 주체와 표현물의 삼중 예술이며 그것은 모두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이다. 서포리 들녘에서 보리밭을 감상하는 길손은 보리밭 그리움에 벅차다. 동학농민의 물결 같은 보리의 물결, 신동엽의 시 '보리밭'은 지난 시절 뜨겁게 타올랐던 동학농민을 그리워하는 작품 같다. 보리밭에서 江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을 꾸던 사람들은 깃발을 꽂고 어디로 달아났는가? 칡순 같은 사랑의 그들은 서해바다로 들어갔다. 보리밭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그들의 맑은 영혼들이 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득한 그리움이 보리밭 물결을 일으킨다.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旗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버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江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北扶餘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쩍 사냥 다니던/ 太白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있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 몸 채, 뙤약볕 아래/ 西海바다로 들어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신동엽의 '보리밭'(1968년) 전문>
서포리 들녘 보리밭 반대편 넓은 밭에 이랑이 단정하다. 밭에서 일하는 농군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문의하니 콩을 심는다고 한다. 무슨 콩이요? 메주콩이오. 이 넓은 밭에 혼자서 메주콩을 심으세요? 아니, 기계가 심었는데, 빠뜨린 곳을 채워주는 것인디. 아, 그러시군요. 그런디 다른 사람들은 일찍 갔는데 당신네들은 너무 늦었소. 네, 걸음이 늦어서 그렇습니다. 농군 아주머니는 농경사회의 밭일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같았다. 그리운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메주콩, 밀, 보리를 심어 농작물을 재배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자연의 재해와 농경에 대한 사회의 냉대 속에서도 대지에 밀착하여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보리의 생명력처럼 느껴졌다.
죽산면 서포리에서 원평천의 공도교를 건너 죽산면 대창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원평천 위쪽에 있다는 부량면 신용리의 벽골제,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인 죽산면 홍산리의 내촌마을과 외리마을, 그리고 '아리랑 문학 마을'을 어림한다. 공도교 앞에 나즈막한 산이 누워 있다. 무슨 산일까? 알아보니 명량산이었다. 명량산은 죽산면 대창리와 죽산리에 걸쳐 있다. 남쪽은 죽산면 죽산리, 그 북쪽은 죽산면 대창리 지역이다.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대하고 있는 땅의 형세를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하여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런 곳을 길지라고 하였다. 김제 땅 죽산면에 들어와서 배산임수를 찾을 수 없다. 산은 없고 평야가 지평선 멀리까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즈막한 명량산을 만났다. 그 앞에는 원평천이 동진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죽산면의 명량산과 원평천은 배산임수의 길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량산을 북쪽으로 등지고 원평천을 남쪽으로 마주한 죽산리 명량마을이 길손에게 더 끌린다. 그런데 서해랑길은 죽산리 명량마을 방향이 아니라 북쪽 대창리 해창마을로 이어진다. 해창마을 앞을 통과하여 대창리 들녘으로 나갔다.
대창리 들녘에서 명량산(鳴良山)이 제 모습을 온전히 보여준다. 산은 큰 바위가 길게 누워 있고 그 위에 수풀이 우거져 있는 모양새다. 그 아래로 개천이 흐르는 것 같다. "명량산은 죽산면 평야지대에 유일하게 솟아 있는 높이 51.1m 산으로 마치 누에가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이라서 누에산, 우렁이를 닮아서 우렁이산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홍수 때 두 형제 산이 떠내려가다가 형 산은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동생 산은 죽산까지 떠 내려왔다. 동생 산이 형을 잃고 슬피 울었다 하여 명량산(鳴良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조) 명량산의 전설이 흥미롭다. 설악산 울산바위와 같은 산과 바위 이동 전설이다. 명량산은 예전에 이곳이 바다였는데 수심이 낮아지면서 융기하여 형성된 지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연유로 이러한 위치 이동 전설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대창리 들녘의 긴 농로를 따라간다. 들길에 핀 지칭개 연분홍 꽃이 하늘하늘, 건너편 동쪽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마주보며 5월의 들녘을 지키고 있다. 줄기를 곧추세우고 그 끝에 연분홍 꽃을 애기 솔방울처럼 달고선 지칭개는 봄날의 한없는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 모습은 길손에게, 약속하고 떠난 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고려가요 '동동' 4월령의 여인처럼 그려진다. "4월을 잊지 않고 오셨구나, 꾀꼬리 새여. 무엇 때문에 녹사님은 옛적의 나를 잊고 계신가." 봄날에 꾀꼬리가 지저귄다. 꾀꼬리 지저귈 때 님은 떠나가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꾀꼬리는 봄날 약속을 어기지 않고 돌아왔는데 떠나간 님은 어이하여 나를 잊고 오지 않는가? 여인의 탄식이 지칭개 연분홍 꽃처럼 눈물진다. 지칭개 여인이 마주보는 지방도711호선 해학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님이 오시는 길인가. 농로에서 바라보는 그 길은 아름답다. 그 길에 님이 나타나면 지칭개 여인은 버선발로 뛰어나갈 것이다. 서해랑길에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걷기 위해서는 공도교를 건너서 서해랑길과 헤어져 죽산리 명량마을 방향으로 길을 잡아 해학로를 따라가면 된다. 해학로는 새만금농산 앞에서 헤어졌던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대창리 농로를 따르다 보니 왼쪽에 수로가 길게 이어진다. 수로에서 낚시질을 즐기는 분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전주에서 오신 분인데 이 수로에서 장어가 잡힌다고 하며 이 수로는 임실 섬진강의 옥정호 물을 터널을 통해 정읍 칠보산으로 넘겨서 수력발전을 한 뒤 동진강으로 흘려 보내고 수로를 연결하여 김제시 광활리 들녘까지 김제평야에 농업 용수를 공급한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1923년에 시작한 동진강 하류의 간척사업에 의해 광활한 간척농지를 얻게 되지만 농업용수가 부족하였다. 1928년 전북 임실 섬진강 상류에 운암댐이 건설되어 운암저수지(옥정호)가 생겨났고, 1931년 남한 최초의 운암수력발전소가 정읍 칠보산에 준공되었다. 1925년에 조직된 조선 최대의 동진수리조합은 김제평야의 미곡 수탈에 앞장서서 간척농지의 개발을 위해서 농업용수를 끌어들일 방법을 세웠다. 그래서 임실 운암저수지에서부터 정읍 칠보산의 운암수력발전소까지 터널을 뚫고 도수로(導水路)를 통해 운암저수지의 물을 운암수력발전소로 보내 전기를 생산한 뒤 동진강으로 물을 흘려보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섬진강 물이 동진강 유역의 김제평야에 농업용수로 쓰이게 되는데, 이 수로는 미곡 수탈에 앞장선 동진수리조합의 작품인 것이다. 그 수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길손은 수로를 따라 간척농지와 수로 역사의 흐름을 따라갔다. 1965년 섬진강댐이 준공되면서 1928년 건설된 운암댐은 수몰되었고, 1931년 건설된 운암수력발전소는 1985년 폐쇄된다. 그리고 1940년에 시작되어 1965년에 준공된 칠보수력발전소가 역사의 승리자처럼 자리를 지키며 섬진강 물길을 동진강 하류 간척농지에 대주고 있다.
대창리 들녘의 대창로에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길게 조성되어 있는 지방도 711호선 '해학로'로 나왔다. 도로명 '해학로'의 해학이 무슨 뜻일까?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럽다는 해학(諧謔)일까? 알아보니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이 도로명을 바다두루미길 '해학로(海鶴路)'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성덕면 대석리에서 태어난 이기 선생은 황현(黃玹)·이정직(李定稷)과 함께 호남 3절로 불렸으며, 유형원(柳馨遠, 1622~1673)·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 말 실학자이자 항일 독립투사이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찾아가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1905년(고종 42)에는 동경(東京)에 가서 천황과 요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침략을 항의하였으며, 을사조약 후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재직하는 한편 장지연(張志淵, 1864~1921)·문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결성하여 민중 계몽과 항일운동에 전력하였다. 1907년(순종 1)에는 나철(羅喆) 등 10여 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권중현(權重顯, 1854~1934)에게 부상만 입혔을 뿐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갔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상경하여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간하여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조) 해학로를 통하여 이기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의 생가는 수표 다리 건너 성덕면 대석리에 있다고 한다.
신평천의 수교 다리를 건너 김제시 죽산면에서 성덕면으로 넘어갔다. 수교 다리 북쪽은 성덕면 대석리에 속하지만 그 서쪽은 남포리에 속하는 것 같다. 김제평야는 김제시 죽산면과 성덕면, 광활면 일대의 들녘을 포함하며 그 중심에 성덕면이 자리하는 것 같다. 성덕면 남포리 들녘에 농부들이 일손으로 바쁘다. 소만(小滿) 절기를 3일 지난 이즈음은 농촌에서는 가장 바쁜 시기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두째 아드님이신 정학유(1786~1855)는 조선 순조16년(1816년)에 쓴 <농가월령가> '4월령'에서 이즈음의 농촌을 이렇게 노래앴다. "사월이라 초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날씨도 좋구나.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한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중략) 찔레꽃 만발하니 적은 가뭄 없을소냐. 이때를 이용하여 나 할 일 생각하소. 도랑 쳐 물길 내고 새는 지붕 손질하여 장마를 방비하면 훗날 근심 더 없나니. (중략) 석탄일에 등 달기는 산촌에 바쁜 일 아니나 느티떡 콩찌니는 제 때에 별미로다."(정학유의 <농가월령가> '4월령'에서) 남포 들녘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농기구를 손질하고 아주머니 혼자서 분주히 들녘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인다. 농군아주머니에게 보리와 밀을 구별하는 법을 문의하니 직접 보리밭과 밀밭으로 안내하여 길손에게 보리와 밀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해 주셨다. 보리 이삭과 까끄라기를 살피니, 밀 모가지와 이삭이 보리에 비해 더 길고, 보리 까끄라기가 밀에 비해 옆쪽으로 더 퍼지는 것 같았다.
일손은 바쁘지만 남포들녁은 한가한 듯 평화롭다. 수로에서는 노랑어리연꽃이 앙증스런 노란 꽃을 피우고 넓은 들녘은 누런 보리 물결과 푸른 밀 물결이 여름으로 가는 길의 고요를 출렁거린다. 남포들 북쪽으로 나즈막한 남포산 자락에 남포마을이 자리한다. 서해랑길은 평화로운 남포들을 가로질러 2000년에 폐교된 남곡중학교 앞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로 나간다. 옛 남곡중학교는 태양광발전시설로 개조되었다. '지평선로' 양쪽에 남포산 자락의 남포1구마을, 지평선로 븍쪽에 남포2구마을이 자리한다. '지평선로'는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지역을 홍보하는 도로명인 것 같다. 그 '지평선로'에 남포마을이 낮게 엎드려 있다. 지평선로 양쪽의 성덕치안센터, 성덕우체국, 남포어린이집, 성덕면보건지소, 남포교회, 성덕농약사, 남포떡방앗간을 지나면 오른쪽에 남포들녘정보화센터가 자리하고, 왼쪽에 남포작은도서관과 남포3구마을과 4구마을 방향 표시가 있다. 그 맞은편에 기와집이 있어 가보니 남포들녘관이다. 남포들녘을 소개하는 전시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숙박시설이었다. 남포(南浦)는 남쪽 바닷가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남포 1·2·3·4·5구 마을로 나뉘어 있는데, 이 지역을 1984년 5월부터 남포들녘마을이라 이른다고 한다.
남포3구마을과 4구마을 입구 보리밭에 붉은 양귀비꽃 한 송이가 보리 이삭들 속에 피어 있다. 홍일점으로 피어난 양귀비꽃은 붉은 나비가 보리 이삭을 찾아와 살포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보리 이삭과 양귀비꽃 풍경이 바쁘게 걸어가는 길손의 마음에 여유를 주어 잠시 멈추었다. 남포들은 남포5구마을 입구의 신광정미소를 거쳐 5구마을로 이어진다. 드넓은 김제평야 지평선마을이다. 동쪽으로 지평선이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서쪽으로 동진강 하구의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진다.
성덕면 남포리에서 광활면(廣活面) 은파리(銀波里)로 넘어왔다. 광활면 은파리는 광활면 일대 동진강으로 밀려드는 조수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동진농업주식회사가 1924년에 건립한 광활방조제에 의하여 광활한 간척농지가 개척되었다. 광활방조제는 은파리 학당마을에서 동진강 하구를 따라 진봉면 심포리 거전(巨田)마을까지 이어지며 갑문은 5개소 18련(連)으로 거전갑문 8련, 군평갑문 2련, 학당갑문 4련, 선학갑문 2련, 선광갑문 2련 등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가실양배수장 앞을 거쳐 동진강 하구의 드넓은 간척농지를 돌아 진봉면 봉화산으로 이어진다. 간척농지 농로를 따라 허겁지겁 빠르게 걸었다. 군평노인정을 지나 군평저수지 입구를 거쳐, 생각의 겨를 없이 은파리 진흥마을로 들어섰다. 이곳 광활면 은파리 들녘도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배경지라고 한다. 소설 '아리랑'은 "급변하는 사회 변화 속에 농민들의 삶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땅에 얽힌 농민들의 숱한 애환과 굴곡으로 점철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 시대 우리 민족의 고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터무니없는 괴변일까?
지금까지 걸어온 서해랑길 51코스 길을 뒤돌아본다.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신창마을, 불당마을, 불당마을 앞 들녘, 원평천, 공도교, 죽산면 대창리 해창마을, 대창리 들녘, 지방도제711호선 해학로, 종신리 수교마을, 신평천 수교, 성덕면 대석리 수교마을, 남포리 한포마을, 남포들녘마을(남포1, 2구마을, 3, 4구마을, 5구마을), 광활면 은파리 학당마을, 군평마을, 진흥마을, 행정구역으로는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죽산면 대창리, 죽산면 종신리,/ 성덕면 대석리, 성덕면 남포리,/ 광활면 은파리 지역을 통과하였다. 호남평야의 중심지 김제평야, 김제평야의 중심지를 거쳐왔다. 광활면 은파리 진흥경로당 옆 쉼터정자에서, 부안군청 시작지점부터 예까지 길동무가 배낭에 짊어지고 온 시원하게 보온된 맥주를 마시니 술기운이 오르는 듯 긴 여정의 풍경들이 풀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노래가 광활한 간척농지에 울려퍼진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3.87km 중 14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20분 중 3시간 40분
동진강석천휴게소 공원에 통일염원비가 세워져 있다. 동진강석천휴게소는 폐점된 것 같다.
동진강석천휴게소 공원에 벽골제 수문 모형물과 설명비가 세워져 있다. 뒤쪽의 영빈회관은 폐점된 것 같다.
碧骨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지수지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비류왕(比流王) 27년(330년)에 축조되었고 통일신라 때와 고려조에 수축되었으며 조선초기 태종15년(1415년)에 수리되었다. 김제읍에서 서남쪽으로 6km 지점인 부량면(扶梁面) 포교(浦橋)에 소재하고 있고 제방길이는 남북으로 약 33km에 달했으 현재도 동진농조 김제간선 수로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도 장생거와 경장거에 각각 수문의 자취로 돌기둥이 한쌍씩 서있어 조상들의 슬기로움과 근면함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 수문은 벽골제에 있는 원형을 모방 축소한 것으로 제15차 전북지구 청년회의소 기념사업으로 축조하여 도작(稻作)문화의 발상지인 김제평야의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후세의 산 교육도장이 되기 위해 1500 회원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왼쪽에 통일염원비, 오른쪽에 벽골제 수문 모형물과 설명비가 세워져 있다. 국도23호선 월죽로 건너편에 지평선쉼터가 있다.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동진강석천휴게소 공원 옆에 서해랑길 김제 51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동진강 동안(東岸) 서포5길을 따라간다.
거리 23.4km, 소요시간 7~8시간, 난도 보통이라고 적혀 있다.
동진강석천휴게소에서 출발하여, 알콩쌀콩체험관, 메타세콰이어길, 남포들녘정보화마을, 거전리버스종점과 봉화산을 거쳐 김제시 진봉면 심포항에 이른다. 실제 탐방한 결과는23.87km, 6시간 20분이 걸렸다. 쉴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걸었다.
서해랑길 51코스를 출발하며 서해랑길 김제 51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동진강석천휴게소 공원 옆 서해랑길 51코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동진강 동안(東岸)을 따라 내려온다.
동진대교 건너편 아래가 옛 동진나루였을 것이며 그 맨 뒤에 망월산, 그 뒤 부안읍 시가지가 가늠된다. 그리고 다리 뒤의 낮은 구릉이 동진원이 있었던 곳으로 장등리 청운마을이 있으며 그 뒤의 낮은 산이 망기산인 것 같다. 50코스에서 망기산을 찾지 못하여 망월산과 망기산을 동일한 산의 다른 이름으로 보았는데 망기산은 청운마을 뒤에 보이는 산을 이르는 것 같다.
동진강 건너 동진대교 오른쪽은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드넓은 간척지 동전평야이다. 다리 건너 왼쪽 뒤에 망월산, 중앙 뒤에 석불산, 맨 오른쪽 뒤에 계화도의 계화산이 흐릿하지만 분명히 확인된다.
동진강은 오른쪽 끝이 동진강 포구 문포항일 것이다. 동진강 서쪽에 동진면 동전리 동전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중앙에 보이는 마을은 동전리 신척마을이라 가늠한다. 왼쪽 뒤에 계화도의 계화산, 동진강 북쪽 오른쪽 뒤는 김제시 광활면 일대이다.
동진강 東岸 서포5길을 따라간다. 오른쪽 대왕참나무가 울타리친 건물은 김제분뇨처리시설물이라 한다.
동진강의 하류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평야와 계화도 간척지의 드넓은 농경지가 있다. 동진강 유역은 대부분 평지여서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강 동쪽 서포리 일대. 국도 제23호선 월죽로, 그 뒤쪽에 서해안고속도로, 정면 중앙 맨 뒤에 김제시가지가 있을 것이다.
김제는 삼한시대에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렸다. 이는 '벼의 고을'이란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벽골제’라는 저수지가 만들어져 벼농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곳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지방 조직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꿔 주·군·현 체제를 강화하면서 이름 역시 모두 한자명(漢字名)으로 고쳤는데, 이에 따라 ‘벽골’은 ‘김제金堤’로 바뀌었다. 이는 ‘금의 언덕’ 또는 ‘황금의 벌판[들]’이란 뜻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김제시 일대의 평야를 “대평, 속칭 김제만경평야라고 한다(大坪俗稱金堤萬頃坪)”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큰들’을 표현한 것이다. [출처] 디지털부안문화대전
김제분뇨처리시설물 울타리를 따라 대왕참나무를 울타리나무로 조성하였다.
대왕참나무는 줄기와 가지에 핀처럼 생긴 가느다란 가지가 튀어나와 있는 참나무(oak)라고 하여 '핀오크(pin oak)'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산지는 북아메리카이고, 주로 미국의 중북부 지역과 캐나다에 분포하며 고지대 습지에 서식한다. 가로수로 심기 위해 수입하여 전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추위에 잘 견디기 때문에 겨울이 길고 기온이 낮은 나라에서도 잘 자란다.(다음백과)
동진강 양안(兩岸)에는 드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축사들이 많다.
축산업은 토지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각종 가축을 사육하고 그 생산물을 가공하여 인간의 실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생산·공급하는 산업을 말한다. 전라북도 김제시는 질 좋은 육류 소비 증가에 맞추어 총체보리한우산업특구 추진에 따른 한우 사육 시범단지를 조성하고 광활한 김제평야를 기반으로 친환경 자연 순환농업을 통한 양질의 조사료를 생산할 수 있는 지평선한우 전용 섬유질 사료 공장을 준공하는 등 축산 농가의 경쟁력 강화에 진력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강 하류 동쪽 김제시 죽산면 일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맨 왼쪽의 산은 명량산, 그 앞으로 원평천이 흐르며 그 남쪽은 서포리, 그 북쪽이 죽산면 소재지 죽산리이다. 원평천 상류에 벽골제가 있으며, 맨 오른쪽 동진강 남쪽은 정읍 지역이다.
동진강 유역은 동학 농민 혁명의 발단이 된 주 무대이다. 동학 농민 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만석보(萬石洑)를 쌓고 수세를 너무 많이 거두어들인 데서 촉발된 농민 혁명이다.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고부 방향으로 가다가 동진교를 건너 하류 쪽으로 바라보면 바로 아래에 농민들이 만석보를 부수고 관가로 쳐들어간 흔적을 볼 수 있다. 동진강은 정읍·김제·부안 지역의 주민들과 삶을 같이하며, 호남평야의 젖줄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동진강은 그 유역의 드넓은 평야지대를 적시기에 유량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예전부터 원평천에 벽골제, 고부천에 눌제, 정읍천에 만석보 등이 있었지만 호남평야의 일부분에만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리 수설에 불과했다. 이러한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호남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섬진강 수계에 옥정호를 축조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강 서쪽에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동전평야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 뒤에 석불산, 중앙 왼쪽에 망월산, 그 왼쪽에 낮은 산이 망기산, 그리고 맨 뒤에 부안군 변산반도의 내변산 산줄기가 보인다.
앞에 알콩쌀콩등대마을과 신창마을, 그 오른쪽 뒤에 불당마을이 있다. 맨 오른쪽에 명량산이 보인다.
‘서해 바닷가 마을’이라 하여 서포리(西浦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서포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안군 이도면 방목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포리라 하고 김제군 죽산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가 되었다. 원래 동진강(東津江)과 원평천(院坪川)이 서해와 만나는 지역 사이의 갯벌이었는데 1900년경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길이 약 1㎞, 높이 약 2m의 서포방조제를 쌓고 갯벌을 개간하여 논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마을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마을이 논 가운데에 집을 지어 지하수가 부족한 실정인데 부처댕이[일명 불당]만은 샘물이 솟아나와 일찍부터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자연마을로 신용·부처댕이·신창[일명 교본촌]·노랭이터[일명 하원]·방복·영구·쇠절리[일명 소제]·원터[일명 원기]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죽산면 서포리 들녘에 푸른 밀밭이 펼쳐져 있다. 동진강 하류 유역 김제평야의 일부분이다.
동진강 하류해안 퇴적 평야는 진봉반도와 동진강 하구 사이에 있는 죽산면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밀물 때는 물에 잠기나, 썰물 때는 노출되는 간석지였는데, 간척 사업으로 안전한 농경지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알콩쌀콩등대마을'은 창조적마을 만들기 공모사업으로 조성되었는데, 쌀과 콩의 전국 최대 주산지인 동진강 권역에서 알찬 콩과 쌀이 나온다는 의미를 뜻한다고 한다. 등대마을의 주요 조성 시설은 각종 워크숍과 교육, 체험학습의 장소로 활용될 교육장과 회의실을 갖춘 알콩쌀콩교류센터, 새만금전망카페, 휴게공간을 갖춘 들녘체험관, 논콩선별 및 저장창고, 체험객의 숙박과 체육활동, 야외 문화행사의 장으로 활용될 어울림 마당 등이다. '알콩쌀콩등대마을'은 2018년 7월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왼쪽 뒤에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 중앙 뒤에 계화면 계화산. 동진강은 굽이돌아 계화산 오른쪽 새만금으로 흘러든다.
동진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굽이돌아 가는 곳에 문포항이 있을 것이며, 맨 오른쪽에 교각이 세워져 있는 곳은 원평천이 동진강에 합수하는 곳이다. 중앙 뒤쪽은 새만금이라고 가늠한다.
동진대교 동단 동진강석천휴게소 공원에서 동진강 동안 서포5길을 따라 내려왔다. 동진강 위쪽에 동진대교가 있으며 오른쪽 뒤 망월산 왼쪽 뒤에 부안읍 시가지 건물들이 살짝 보인다. 강 건너 동전평야, 그 위 국도 제23호선 부안로 뒤쪽의 마을은 장등리 장등마을, 그 왼쪽 뒤에 청운마을, 그 오른쪽의 궁월마을, 그리고 그 뒤의 고마저수지도 분명히 어림할 수 있다.
동진강은 왼쪽으로 돌아 흘러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솔숲의 쉼터정자 앞으로 이어진다.
동진강이 왼쪽으로 굽이돌아 부안군 계화면 방향으로 흘러가고 중앙에 교각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원평천이 동진강에 합수한다. 서해랑길은 맨 오른쪽 소나무 아래 쉼터정자에서 오른쪽 불당마을로 이어진다. 쉼터정자에서 왼쪽 동진강북로 제방길을 따라 내려가면 계화산을 마주하는김제시 진봉반도 끝에 이른다.
동진강의 주요 하천은 본류인 정읍천과 지류인 두월천, 원평천, 고부천 등이다. 정읍천은 내장산 까치봉[717m]에서 발원하여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과 이평면의 경계에서 산외면 팽나무정과 칠보발전소에서 방류된 섬진강 유역의 물과 태인천을 합류시킨다. 두월천은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 서당골 매봉산[249m]에서 발원하여 대율저수지로 모인다. 그리고 금구면과 황산면을 거쳐 김제시 동부 중앙을 관류하며 신월동까지 23.0㎞를 흘러 원평천에 합류된다. 원평천은 김제시 금구면 화율리 국사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진강 하구 서포까지 29㎞를 흐른다. 고부천은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에서 발원하여 19.48㎞를 흘러서 성내면에서 동진강에 합류된 뒤, 새만금 지역의 서해로 흐른다. 고부천은 눌제천이라고도 하며 상류는 옛 이름이 오천(烏川), 즉 가무내인데 현재의 이름은 흥덕천이라고 해야 옳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동진강의 본류와 지류 동진강에는 본류를 포함한 4개의 직할 하천과 1개의 지방 하천, 82개의 준용 하천 등 87개 하천이 속해 있으며, 유역 면적은 1,124.14㎢, 총연장은 446.2㎞에 이른다. 동진강의 하류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평야와 계화도 간척지의 드넓은 농경지가 있다. 동진강 유역은 대부분 평지여서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왼쪽 쉼터정자를 거쳐 중앙의 불당마을로 이어진다. 중앙의 명량산은 죽산면 대창리와 죽산리에 걸쳐 있다.
쉼터정자에서 왼쪽 동진강북로 제방길을 따라가면 김제시 진봉반도 끝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서해랑길 51코스 시점 1.4km, 종점 22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직진하여 불당마을로 이어간다. 쉼터정자에서 약 30분 동안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왼쪽에 알콩쌀콩등대마을, 중앙에 서포 제2배수문을 거쳐와서 쉼터정자에서 동진강북로와 헤어졌다.
서포리 들녘에 보리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오른쪽에 신창마을과 알콩쌀콩등대마을이 있다. 멀리 정읍시 지역을 어림한다.
동진강 유역은 동학 농민 혁명의 발단이 된 주 무대이다. 동학 농민 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만석보(萬石洑)를 쌓고 수세를 너무 많이 거두어들인 데서 촉발된 농민 혁명이다.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고부 방향으로 가다가 동진교를 건너 하류 쪽으로 바라보면 바로 아래에 농민들이 만석보를 부수고 관가로 쳐들어간 흔적을 볼 수 있다. 동진강은 정읍·김제·부안 지역의 주민들과 삶을 같이하며, 호남평야의 젖줄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동진강은 그 유역의 드넓은 평야지대를 적시기에 유량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예전부터 원평천에 벽골제, 고부천에 눌제, 정읍천에 만석보 등이 있었지만 호남평야의 일부분에만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리 수설에 불과했다. 이러한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호남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섬진강 수계에 옥정호를 축조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불당마을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불당마을 버스정류소 앞을 통과하여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에 서포리 불당마을이 있으며, 오른쪽 뒤에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불당마을 입구 버스정류소 앞을 거쳐 농로를 따라 들녘으로 나왔다.
원래 동진강(東津江)과 원평천(院坪川)이 서해와 만나는 지역 사이의 갯벌이었는데 1900년경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길이 약 1㎞, 높이 약 2m의 서포방조제를 쌓고 갯벌을 개간하여 논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마을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마을이 논 가운데에 집을 지어 지하수가 부족한 실정인데 부처댕이[일명 불당]만은 샘물이 솟아나와 일찍부터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죽산면 서포리 불당마을 앞 드넓은 들녘에 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뒤에 서포리 원기마을이 있다.
농군 아주머니가 넓은 밭에서 혼자서, 농기계가 메주콩을 심다가 빠뜨린 곳을 찾아 메주콩을 심고 있다. 중앙 뒤쪽에 부안군 부안읍 명월산과 상소산 그리고 그 왼쪽에 부안읍 시가지 건물들이 흐릿하게 확인된다.
불당마을 앞 들녘 농로를 따라오다가 원평천 남쪽 방죽길로 들어서서 걸어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원평천은 아래에서 동진강에 합수한다. 맨 왼쪽 뒤에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이 확인된다.
동진강의 지류 원평천 남쪽 방죽길을 따라 공도교 방향으로 올라간다. 왼쪽 건너편의 산은 명량산 자락이다.
죽산면 서포리에서 원평천의 공도교를 건너 죽산면 죽산리로 넘어간다. 원평천 건너 오른쪽은 죽산면 죽산리이다.
100여 년 전 동학군이 무기인 죽창(竹槍)를 만들었다는 대숲이 우거져 대뫼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죽산리로 바뀌었다. 조선 말기 김제군 반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칠리·석산리·명량리·죽동리·자고리·제내리·화교리·대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죽산리라 하고 김제군 죽산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가 되었다. 원평천(院坪川)이 서해안과 만나는 하구에서 약 3㎞ 떨어진 평야 지대이다. 일제강점기에 죽산리 일대가 간척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옥성리(죽산면)에서 명량산(鳴良山)[300m]까지 약하게 이어지는 구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평야 지대이다. 서해안고속국도가 마을을 지나고, 국도 23호선이 부안군으로, 지방도 711호선이 정읍시 신태인읍으로 이어진다. 부안과 김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죽산면의 행정 중심지이다. 죽산리가 지금처럼 교통의 중심지가 된 것은 원평천의 유로가 인공 제방으로 고정된 다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죽산리 동쪽에 있는 옥성리 내재마을[내재역이 있었다]이 교통의 중심지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도교를 건너 왼쪽 죽산면 대창리 해창마을로 이어간다. 오른쪽은 죽산리 명량마을이다.
죽산면 죽산리는 자연마을로 명량(鳴良)·자고(自古)·석산(石山)·죽동(竹洞)·계두(鷄頭)·가칠(加七)·대죽(大竹)·죽산 등이 있다. 명량은 뒷산인 명량산의 이름을 따 울엉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자고는 이웃 마을의 형세보다 작아서 ‘작은 것’이라 부르던 것이 발음이 변하여 된 이름이다. 석산은 마을 안에 큰 돌이 있어 돌뫼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죽동은 약 400년 전부터 있던 마을로,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골안이라고도 한다. 계두는 마을 지형이 마치 닭의 머리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닭머리라고도 한다. 이웃 마을인 죽동과 같은 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여겨진다. 가칠은 마을이 생겨날 때 늘어선 집들이 일곱 ‘칠(七)’자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를 매어 둘 때 쓰는 닻에 줄이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닻줄리라고도 한다. 대죽은 가칠과 같은 마을이었다가 규모가 커지자 행정 편의상 두 마을로 나누면서 ‘죽산의 큰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산은 죽산리의 행정 중심지로 대숲이 우거져 대뫼라 하였다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고친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에서 발원하는 원평천 위 남동쪽 부량면 신용리에 벽골제가 있을 것이다. 그 북서쪽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과 외리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이 탄생하였으며, 그곳에 '아리랑 문학 마을'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에서 발원하여 봉남면을 거쳐 동진강으로 흘러드는 원평천(院坪川)은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에서 지방2급 하천으로 시작된 뒤 금구천이 합류하는 봉남면에서 국가 하천으로 바뀌고 죽산면에서 동진강에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든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도작문화의 발상지였던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사적 제111호]의 수원(水源)으로 이용되었다. 원평천과 동진강 사이에 형성된 충적평야가 벽골제 좌우에 걸쳐 있다. 원평천은 남쪽의 상두산과 동쪽의 모악산으로 연결되는 산등성이를 분수계로 유역이 형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끝에 원평천이 동진강에 합수하는 두물머리가 보인다. 원평천 하구를 동진강북로가 가로지르는 것 같다.
원평천 중류부와 하류부에서는 경사가 다소 완만하여 농경지 하천의 형태를 보이나, 상류부에서는 산지와 접하는 급경사의 전형적인 산지 하천을 형성하고 있다. 원평천의 유로 연장은 4.54㎞이고, 하폭은 9~40m이다. 유역 내 토지 이용 현황은 유역면적 16.23㎢ 가운데 경지 3.1㎢, 임야 12.7㎢, 대지 0.29㎢, 기타 0.14㎢이다. 유역 내 공장이나 대규모 농장이 없어 수질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상류 일부 구간의 하상은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하상물질의 입경은 모래와 자갈 등이 혼재되어 있으며, 좁은 하폭으로 인하여 유수 소통이 불량한 상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바로 앞 죽산면 대창리 해창마을을 돌아 들녘으로 나가 농로를 따라간다. 해창(海倉)마을은 명량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조선 후기에 나라에서 운영하던 사창(舍倉)이 있던 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장리의 ‘대’자와 창리의 ‘창’자를 따서 대창리(大倉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서포면(西浦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동리·대장리·창리 일부, 반산면 화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창리라 하고 김제군 죽산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가 되었다. 대창리는 동진강(東津江)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다. 남쪽으로 명량산(鳴良山)[51.7m]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 김제시 성덕면과 이웃하고 있다. 지형 특성상 일제강점기부터 방조제를 쌓아 간척 사업을 하였던 곳으로 대창방조제와 서포방조제가 해일의 침해를 막아 주고 있다. 1927년 완공된 대창방조제는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종신리·죽산리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접안 하천은 동진강·원평천(院坪川)·신평천(新坪川) 등이며, 200여 호가 넘는 농가가 있다. 1929년 완공된 서포방조제는 서포지구·연포지구·서포특별지구 등으로 나누어 관리해 왔으며,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와 연포리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장·장돌(長乭)·우마(雨麻)·화동·해창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죽산면 대창리 들녘으로 나와 농로를 따라간다. 명량산은 죽산면 대창리와 죽산리에 걸쳐 있다. 명량산 너머는 죽산면 죽산리이다. 명량산은 마치 누에가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이라서 누에산, 우렁이를 닮아서 우렁이산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들녘을 가로질러 수로가 흐르고 동쪽으로 지방도 711호선 '해학로'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길게 조성되어 있다.
대창리 들녘길에 지칭개 꽃들이 피어서 맞은편 지방도 711호선 '해학로'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를 바라보고 있다.
대창리 들녘 시멘트 농로를 따라간다. 맨 왼쪽에 대창리 대장마을이 있다. 대장마을은 약 25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인근에 있는 강물이 항상 번들거렸기 때문에 번들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오른쪽 위에 지방도 711호선 '해학로'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중앙 뒤 주홍색 건물은 '새만금농산'으로 서해랑길은 그 앞으로 이어간다.
죽산면 대창리 들녘은 누렇게 익은 보리들이 물결치고 있다. 맨 왼쪽은 화동마을, 중앙 뒤쪽은 우마마을, 맨 오른쪽은 장돌마을이라고 가늠한다. 맨 왼쪽 뒤에 부안군 화서면 석불산, 중앙 뒤에 부안군 계화면 계화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장돌(長乭)마을은 마을 서쪽 약 3㎞ 지점에 2,644.63~2,975.21㎡ 정도의 돌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마(雨麻)마을은 해일이 일어났을 때 장마철인데도 비를 맞지 않았다 하여 비 ‘우(雨)’자를 따고, 처음 터를 잡았다는 마씨(麻氏) 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해창마을, 오른쪽은 화동마을이며 그 뒤에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 중앙 맨 뒤에 변산반도 내변산 산줄기, 왼쪽에 상소산과 명월산, 그 왼쪽 뒤에 부안읍 시가지 건물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명량산이 바라보이는 대창리 해창(海倉)마을에는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둔 쌀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배수갑문이 설치되어 바닷물과 어선이 드나드는 포구로 해산물을 파는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1927년에는 대창방조제, 1929년에는 서포방조제가 준공되었다. 화동마을은 이영최라는 사람이 마을 북동쪽에서 숙화봉무(菽花蜂舞) 형국의 명당을 찾아 선대의 묘소를 만들었는데, 주위에 꽃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자손들이 사는 터전에 꽃나무를 많이 심고 이화동(李花洞)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동으로 고쳤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죽산면 대창리 대장양수장 뒤쪽에 대장마을이 보인다.
원평천의 공도교를 건너 죽산면 대창리 해창마을 앞을 거쳐 수로 옆 농로를 따라왔다. 명량산 오른쪽에 해창마을, 맨 오른쪽에 대창리 화동마을이 보인다. 오른쪽 뒤 부안읍 월명산 왼쪽 뒤에 부안읍 시가지 건물들이 보인다.
왼쪽에 대창리 화동마을, 중앙 뒤에 장돌마을, 맨 오른쪽 앞에 대장마을, 동진강 너머로 부안군 석불산과 계화산이 어림된다.
전주에서 온 아저씨가 수로에서 장어 낚시를 즐긴다. 이 분께서 수로에 대하여 설명하여 잠깐 동안에 많은 것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땅 광활면에서 가장 큰 숙제는 바로 농업용수 확보였다. 소금기 있는 땅에서 제대로 벼를 수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본 당국은 미곡 생산에 중요한 부분인 동진강 유역의 관개용수 확보에 비중을 두고 운암댐 건설에 착수한다. 운암댐은 높이 26m에 이르는 콘크리트 댐으로 섬진강 수계에 건설된 관개용 댐이었다. 섬진강 발원지는 진안 팔공산으로 여수만에 이르는 장장 228㎞의 강으로 임실군 운암면의 섬진강 줄기를 막아 그 물을 동진강 유역과 하구에 위치한 광활간척지까지 연결하고자 한 것이다. 운암댐은 1928년 완공된다. 시기적으로 보면 간척 사업과 운암댐 건설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시 죽산면 대장리에서 종신리로 넘어왔다. '새만금농산'은 양곡(쌀,보리,콩,팥,수수,깨 등) 계약재배, 가공, 유통, 유기농쌀, 무농약쌀, 찹쌀, 현미, 찹쌀현미, 흑미생산, 판매 등을 하고 있다.
죽산면 종신리 새만금농산 입구, 51코스 시점 6.7km, 종점 16.7km 지점. 대창로에서 지방도 711호선 '해학로'로 나간다.
대창로에서 지방도 711호선 '해학로'로 나와서, 중앙 맨 끝 명량산 아래 해창마을로부터 걸어온 대창로를 돌아본다. 수교 버스정류소 옆 대창로 입구에 대창마을과 장돌마을 안내판이 있으며, 왼쪽 '해학로'에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길게 조성되어 있다. 도로명 '해학로'는 황현(黃玹)·이정직(李定稷)과 함께 호남 3절로 불리는 해학(海鶴) 이기(李沂)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길이라고 한다.
죽산면 종신리에서 '해학로'의 수교를 건너 성덕면 대석리로 넘어간다. 신평천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 수교(水橋), 그렇다면 다리 이름을 수교(水橋橋)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서해랑길은 수교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한포길을 따라 이어간다.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종신리에 있는 자연마을 수교(水橋)는 약 130년 전까지만 해도 신평천(新坪川)이 서해로 유입되는 하구의 나루터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서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고자 소나무로 일종의 보(洑)를 만들어 물을 가두었는데, 이 보가 장마 때에는 무너미[봇물을 대기 위해 도랑을 걸쳐 막은 부분]가 되고, 평소에는 다리가 되었으므로 수교라고 하였다. 1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던 나루터로 육로가 없이 뱃길로만 통행이 가능하던 길목이었다. 포구에 고깃배와 젓갈배가 드나들면서 강씨, 국씨, 전씨 등 10여 가구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마을 사람들은 신평천[백산저수지에서 발원]을 가로막는 보를 만들어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계절에 따른 가뭄과 홍수 등으로 제 구실을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에 현대식 공법으로 수문 겸 다리를 놓아 농경지가 정리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40여 가구의 마을로 성장하였다. 수교마을은 사방이 평지로 벼농사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과거에 나루터 기능을 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게다가 새만금 간척 사업이 완공되면 수교에서 선유도까지 직선거리로 약 36㎞가 되므로 해안선이 그만큼 멀어져 바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륙의 일부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마을 앞을 지나는 유일한 교통로인 지방도 711호선이 성덕면과 죽산면을 이어 주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평천을 경계하여 남쪽 죽산면(오른쪽)과 북쪽 성덕면으로 나뉜다. 오른쪽에 죽산면 종신리 수교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신평천이 발원하는 백산면 부거리는 마을이 물에 떠 있는 형국이라 부거(浮去)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김제군 연산면에서 백산면에 편입되면서 뜻이 전혀 다른 부거리(富巨里)로 바뀌었다. 부건마을은 수리시설이 없었던 옛적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마를 ‘건(乾)’자를 썼는데, 해방 이후 세울 ‘건(建)’자로 고쳤다. 1967년 호남야산개발사업으로 농업용수가 풍부해지면서 부자마을이 되었다. 김제시의 서북쪽을 흐르는 신평천은 김제시 흥사동 두악산(斗岳山)[58m]에서 발원하여 백산면과 성덕면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성덕면 남포리와 죽산면 대창리 경계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진강의 지류이자 지방 2급 하천인 신평천은 유역면적 65.66㎢, 유로연장 13.84㎞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평천이 흘러 성덕면 남포리 남포들에서 동진강에 합수한다.
신평천이 동진강에 합류되는 죽산면 대창리는 본래 김제군 서포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화동리·대장리·창리의 일부와 반산면 화교리 일부를 합하여 대창리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1927년에는 대창방조제, 1929년에는 서포방조제가 준공되었다. 김제시의 서북쪽을 흐르는 신평천은 김제시 흥사동 두악산(斗岳山)[58m]에서 발원하여 백산면과 성덕면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성덕면 남포리와 죽산면 대창리 경계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진강의 지류이자 지방 2급 하천인 신평천은 유역면적 65.66㎢, 유로연장 13.84㎞이다. 신평천이 자연하천이었을 때는 백산면 석교리 대촌[돔베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리고 백산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1930년대의 지형도에는 백산면 하서리 궁못과 가부리 부신이 신평천의 발원지였다. 2001년 전라북도에서 수립한 신평천하천정비계획은 김제시 백산면 부거리에서 죽산면 대창리 동진강 국가 하천 합류점까지 12.20㎞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평천 남쪽 해학로 왼쪽에 죽산면 종신리(宗新里) 수교(水橋)마을, 오른쪽에 새만금농산이 자리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종남리의 ‘종’자와 신평리의 ‘신’자를 따서 종신리(宗新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반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종남리·신평리·화교리·죽동리·자고리·대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종신리라 하고 김제군 죽산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죽산면 종신리가 되었다. 신평천(新坪川)을 사이에 두고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와 이웃하고 있는 평야 지대이다. 죽산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간척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이다. 새만금방조제에 의해 바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륙이 되었다.선유도까지 직선거리로 약 36㎞나 되어 해안선이 그만큼 멀어졌기 때문이다. 자연마을로 수교·종남(宗南)·신동 등이 있다. 종신리의 유일한 교통로인 지방도 711호선이 수교 앞을 지나면서 성덕면과 죽산면을 이어 주고, 남동쪽으로 서해안고속국도가 지난다. 종남은 종신리의 중심 마을로 진머리라고도 한다. 300여 년 전부터 전주에서 온 박씨와 최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마을에 검은 철솥을 만들었다는 솥붙이 가마터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신동은 일본인들이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니까촌·샛터·동산촌 등으로 부르다가 광복 후에 고친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해학로를 건너 성덕면 대석리로 넘어가 수교정미소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한포길을 따라간다. 앞쪽의 마을은 성덕면 대석리 수교마을이다.
돌샘[石井] 부근에 있는 큰 마을이라는 뜻에서 대석리(大石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남일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소리·소석리·신평리·신등리·병라리·석동리·도하리·양지리·소목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석리라 하고 김제군 성덕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가 되었다. 남쪽으로 신평천(新坪川)이 흐르는 평야 지역이다. 자연마을로 소석(小石)·대석(大石)·용소(龍沼)·신기·신등(新等)·신평·신교(新橋)·수교(水橋) 등이 있다. 소석과 대석은 돌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두 마을에서 먹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작은 마을을 소석, 큰 마을을 대석이라 하였다. 우국지사 황현(黃玹), 실학의 대가 이정직(李定稷)과 함께 호남의 삼걸로 불리던 이기(李沂)가 태어난 마을로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용소는 신기 동쪽에 있는 마을로, 300여 년 전 용소에서 살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마을 이름을 용소라 하였다. 용소멀이라고도 한다. 신등은 신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3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 나무가 울창해서 등나무 ‘등(藤)’자를 쓰다가 1914년 ‘등(等)’자로 고쳤다. 신교는 신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2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 서해로 흘러드는 신평천의 수문과 그곳에 놓은 다리를 상징하여 신교라 하였다. 수교는 신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2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 복죽들과 신평들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신평천을 따라 물길[도수로]이 나고 도로가 새로 뚫리면서 다리가 놓였는데, 수교는 이 다리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교정미소 옆 성덕면 남포리 한포길을 따라 한포마을로 이어간다.
오른쪽 신평천 남쪽 죽산면 종신리 새만금농산 뒤 대창로에서 해학로로 들어서 수교를 건너 성덕면 대석리로 넘어와 성덕면 남포리 한포길을 따라왔다. 왼쪽 마을은 성덕면 대석리 수교마을이며 죽산면 종신리 수교마을은 신평천 남쪽에 있다.
성덕면 남포리 한포길을 따라 앞의 남포리 한포마을을 거쳐간다. 옆의 수로는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로부터 시작하여 김제시 광활면 화양마을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호남평야의 일부 남포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보리와 밀을 재배한다. 앞쪽에 남포산과 남포마을이 보인다.
남쪽의 바닷가에 있는 포구라는 뜻에서 남포리(南浦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남이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현리·나시리 각 일부, 암일면 양지리·도하리를 병합하여 남포리라 하고 김제군 성덕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가 되었다. 남쪽으로 신평천(新坪川)이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하구이다. 자연마을로 이범산(二凡山)·한포(漢浦)·남포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보리밭에 누런 보리들이 물결친다. 한포마을 왼쪽 뒤는 신평천이 동진천에 합수하는 하구인 것 같다.
한포는 남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에 이완용(李完用)이 둑을 막은 후 일본인 다목(多木)이 농장을 만들고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고자 사람들을 이주시킨 데서 이민촌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포로 고쳤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남포산과 남포마을, 남포들에 밀밭이 펼쳐져 있다. 보리와 밀을 구분하는 법을 농군에게 배웠다. 밀 이삭이 보리 이삭보다 홀쭉하며 길고, 까끄라기가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밀, 방사형으로 더 퍼지는 것이 보리인 것 같다.
앞쪽에서 수로를 건너 오른쪽 농로를 따라 남포산과 남포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수로 물에 수초들이 자라고 있다.
수로 물에 노랑어리연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왼쪽에 남포산, 그 아래 남포마을, 그리고 중앙 뒤쪽은 이범산마을인 것 같다. 남포산은 소(牛)산이라 이른다고도 한다.
국공립 남포어린이집이 중앙에 보인다. 남포산 아래의 마을은 남포1구마을이며 길 건너편 마을은 남포2구마을이다.
농로에서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로 나간다. 앞에는 2000년에 폐교된 남곡중학교를 태양광발전 시설로 개조한 것 같다. 그 뒤쪽에 들녘용양원이 있다.
국도702호선 '지평선로' 남포마을 방향이다. 도로 건너편 위쪽에 성덕치안센터와 성덕우체국이 있다. 오른쪽 좁은 길은 '이범산마을' 가는 남포3길이다. "이범산은 남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두 범씨가 언덕 아래에 터를 잡고 살아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포는 남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에 이완용(李完用)이 둑을 막은 후 일본인 다목(多木)이 농장을 만들고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고자 사람들을 이주시킨 데서 이민촌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포로 고쳤다."(디지털무안문화대전)
성덕산(聖德山)에서 이름을 따서 성덕면(聖德面)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남일면 지역으로 도상·석동·도하·양지·신평·대석·용소·소석·신등·인흥·다복·대목·탄상·탄하·옥동·신점·부흥 등 2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이면 모산·나시·고현·남포 4개 리, 상서면 부동리·정동리 일부, 군내면 남산리 일부, 김제군 대촌면 연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성덕면이라 하고 김제군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성덕면이 되었다. 북부에 성덕산 등 해발 고도 20m 안팎의 구릉이 있을 뿐, 면 전체가 충적평야로서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룬다. 서남쪽으로 서해와 닿아 있어 바닷물을 이용한 염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답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농경지는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다.김제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8㎞ 정도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김제시 백산면, 남쪽으로 신평천(新坪川)을 사이에 두고 죽산면, 서쪽으로 광활면, 북쪽으로 만경강(萬頃江)을 사이에 두고 만경읍 및 진봉면과 이웃하고 있다. 대목리·대석리·묘라리·석동리·남포리·성덕리 등 6개 리 31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특산물로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 염전을 개간한 농경지에서 보리와 감자, 성덕면 묘라리와 대석리에서 방울토마토·딸기·카네이션이 생산된다. 문화재로는 성덕면 묘라리에 남산서원(南山書院)이 있다. 남산서원은 1574년(선조 7) 창건하였고, 1870년(고종 7)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에 복원되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로 활약한 유지화(柳志和)와 순조 때의 남궁제(南宮濟)를 배향하였다. 남궁제는 함열인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만경읍 몽산리 옥산에 은거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평선로 왼쪽 남포산 아래의 마을은 남포1구마을이며, 지평선로 오른쪽 마을은 남포2구마을이다.
남포떡방앗간을 지나 지평선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남포5길을 따라간다.
지평선로 오른쪽에 남포 들녘정보화센터, 그 맞은편에 남포들녘관이 있다. 서해랑길은 지평선로에서 왼쪽 남포5길을 따라 남포3구마을과 4구마을로 이어간다.
남포들녘관은 숙박시설로서 6인용 방이 3개 있으며, 요리나 세탁을 할 수 있는 공용다용도실이 있다고 한다.
호남평야의 중앙에 위치한 지평선의 본고장 성덕면 남포리 남포들녘마을 전체를 보여주는 안내도 게시판이 쓰러져 있다.
남포(南浦)는 남쪽 바닷가에 있는 포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포는 본래 만경군 남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현리, 나시리 일부와 남일면 양지리, 도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남포리라 하고 김제군 성덕면에 포함되었다. 1995년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합되면서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가 되었다. 이후 마을이 커지면서 남포 1·2·3·4·5구로 나누어졌다. 1984년 5월부터 남포들녘마을이라 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농촌체험학습을 하는 최적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제시에서 서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백산면, 북쪽으로는 만경읍, 남쪽으로는 죽산면, 서쪽으로는 광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고도 30m 미만의 야산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덕산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말 대학자 해학 이기 선생 등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자 뿌리가 있고 전통이 살아 숨쉬는 마음속의 고향 그대로를 간직한 따뜻함이 베인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붉은 양귀비꽃 한 송이가 보리 이삭들 속에서 피어 있다.
왼쪽 남포산 아래 남포1구, 그 맞은편에 남포2구마을이 있으며 오른쪽에 남포3구, 남포 4구마을이 자리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남포교삼거리 남포5구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소를 거쳐 왼쪽 남포5구마을로 이어간다.
남포5구마을 입구에 버스정류소가 있으며 남포5구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광활로8길을 따라 신광정미소 앞을 거쳐 남포5구마을을 지나 성덕면 남포리에서 광활면 은파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성덕면 남포리에서 광활면(廣活面) 은파리(銀波里)로 넘어왔다. 오른쪽에 은파교(銀波橋)가 있으며, 앞에는 가실양배수장 건물이 있다. 서해랑길은 광활1길을 따라 동진강 하구의 드넓은 간척지를 돌아 오른쪽 뒤에 보이는 진봉면 봉화산으로 이어진다.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은 본래 김제시 진봉면 지역으로 동진강 하류의 개펄이었다. 1923년 10월 일본인 재벌 아베 후사치로[阿部房次郞]가 자기 자본 100만 엔과 일본 정부보조금 100만 엔 등 200만 엔으로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방조제를 쌓기 시작하여 만 3년 만에 10㎞의 제방을 준공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드나들던 이곳을 농사지을 수 있는 논으로 만들기까지는 다시 9년이 걸렸다. 조수가 드나들던 개펄에 방조제를 쌓고 각지에서 이주민을 모아 집단농장 체제의 인위적인 마을을 만들었다. 1924년 당시 김제군 진봉면 은파리학당에서 동진강 하구를 따라 거전(巨田)에 이르는 10㎞의 방조제가 축조되어 몽리(蒙利) 면적 1.01㎢에 달하는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 당시 사상 최대 규모였던 광활면 간척사업에는 전국 각지에서 생계가 막연한 사람들이 자발적 혹은 반강제로 동원되었다. 광활면의 넓은 들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의 가실양배수장 앞을 거쳐 은파리 간척지 들녘을 왼쪽으로 길게 빙 돌아간다. 왼쪽의 팽나무가 우아하다.
김제시 광활면 은파리 지역은 조선 말기 만경군 하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원래는 넓은 갯벌이었다. 이후에 간척되어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에 편입되었고, 1949년 진봉면에서 광활면을 분할함에 따라 김제군 광활면 은파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에 속하게 되었다. 해발 고도 2~3m 안팎의 낮은 평야 지대로,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간척되기 전에는 갯벌 지대였다. 과거의 흔적을 군평마을 바로 위에 있는 군평저수지(郡平貯水池)에서 찾을 수 있다. 군평저수지는 소하천이 자유 곡류하면서 만든 ‘S’자 모양인데, 이것은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만들어진 갯고랑이 너무 깊이 파여 경지 정리를 할 수 없어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군평저수지 일대를 갯고랑이 깊어서 마치 동진강(東津江)이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절강(切江)이라고 불렀다. 현재 군평저수지 대부분이 논으로 개간되어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자연마을로 선광(先光)·선진(先振)·학당(學堂)·용지(龍池)·군평(郡平)·진흥(振興) 등이 있다. 선광은 일제강점기에 일답구(一沓區) 지역으로, 1929년 91가구가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광활면 동쪽에 있어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진은 1981년 7월 1일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선광에서 나누어진 마을로, 선광보다 더 흥하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지는 1981년 7월 1일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진흥에서 나누어진 마을로, 주위에 크고 작은 연못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당(學堂)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이답구(二沓區) 지역으로, 1929년 85가구가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야학당(夜學堂)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가실양배수장 앞에서 광활1길을 따라 들녘을 빙 돌아 군평노인정 앞으로 왔다.
군평(郡平)마을은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학당 서쪽에서 나누어진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는 소금을 구우면서 나온 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소금을 굽던 들이라는 뜻에서 구은들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군평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광활5길을 따라가면 군평저수지가 나온다. 서해랑길은 왼쪽 위 시농길이 아니고 중앙의 광활5길을 따라간다.
광활5길 젠틀농부 앞 감자밭에서 감자꽃이 피어나고 있다. 서해랑길은 광활5길 끝 갈림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은파농로17길을 길게 따라가다가 광활7길 갈림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광활7길로 이어간다.
은파농로17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광활7길 진흥마을로 들어섰다.
진흥(振興)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사답구(四沓區) 지역으로, 1932년 82가구가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지대가 낮고 유독 소금기가 많아 마을을 육성하기 위한 지원이 계속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은파농로17길에서 광활7길로 들어서며 길게 이어지는 은파농로17길을 바라보았다. 이곳 광활면 은파리 들녘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배경지이며, 앞쪽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가 달리는 뒤쪽에 광활면 옥포리 회령마을이 있을 것이라 가늠한다.
광활면 옥포리 지역은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이도면에 속했던 갯벌 지역으로, 간척하여 진봉면 고사리에 편입하였다. 1949년 진봉면에서 광활면을 분할하고 옥포리라 명명하여 김제군 광활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가 되었다. 옥포리가 속한 광활면은 1924년 동진농조주식회사가 광활방조제를 만들어 조성한 간척지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옥포리는 광활면의 중심지로 광활면사무소, 광활초등학교, 우체국, 농산물간이집하장 등이 들어서 있다. 시농마을에는 일제강점기에 있던 농업시험장 자리에 광활면 단위농업협동조합 사무실과 동진농조주식회사 광활출장소 등이 들어서 있다. 자연마을로 회진(會進)·화양(華陽)1구·화양2구·회령(會寧)·광활(廣闊)·화신(華信)·시농(試農)·시흥(試興)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흥마을 광활7길을 따라가다가 진흥경로당 옆 쉼터정자로 들어간다. 오른쪽 뒤는 광활면 면소재지 옥포리 화양마을이다.
광활면사무소가 있는 옥포리 화양마을에는 약 330.58㎡의 큰 창고 5동 있어 양곡을 보관하였는데, 3동은 헐리어 광활초등학교가 들어섰고, 다른 1동은 헐리어 교회가 들어섰으며, 나머지 1동은 농업협동조합 비료 보관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옥포리 시농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간척지의 소금기에 강한 품종을 만들고자 대지 19,834.71㎡에 3,966.94㎡나 되는 농업시험장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 농업시험장을 줄인 시농이 되었다. 당시 농업시험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광활면 단위농업협동조합 사무실과 동진농지개량조합 광활출장소가 있다. 광활간척지는 1923년 10월 일본인 아베 후사치로[阿部房次郞]이 자기 자본 100만 엔과 일본 정부 보조금 100만 엔 등 총 200만 엔을 들여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광활방조제를 쌓기 시작하여 만 3년 만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를 농지로 만드는 데는 약 9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1,928정의 간척지를 관리하기 위해 1답구에서 9답구까지 나누고 소작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고자 격자 모양의 경지마다 일렬로 6가구씩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육마을 또는 여섯가구뜸과 같은 마을 이름이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이 사는 면소재지에는 술집과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가옥은 터를 돋우고 유리창을 이용하여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지었으나 한국인들은 물이 올라오는 평지에 초가집을 짓고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볏짚을 엮어 처마 밑에 둘렀기 때문에 한낮에도 집안이 컴컴하였다. 광활방조제는 옥포리 시농마을 남쪽에서 창제리 신광마을 서쪽으로 뻗어 있는 제방으로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1924년 완공하였다. 광활방조제가 완공됨에 따라 은파리·옥포리·창제리 일대에 16.51㎢의 농지가 만들어졌다. 광활저수지는 둘레 약 4㎞, 넓이 1.2㎢의 규모였는데, 1980년대 중반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메워 논으로 변모하여 지금은 협업농장이 들어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 뒤쪽은 광활면(廣活面) 면소재지 옥포리(玉浦里) 지역이다.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광활간척지를 가리켜 ‘구구지간 광활만인지지(九區之間廣闊萬人之地)’라고 했듯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넓다는 뜻에서 광활(廣活)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진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49년 8월 15일 진봉면의 광활한 간척지를 갈라서 광활면을 신설하고 옥포리(玉浦里)·은파리(銀波里)·창제리(蒼提里) 등 3개 리 9개 마을을 편입하였다. 1952년 9월 5일, 해일로 말미암아 광활방조제 일부가 유실되어 1.87㎢의 논이 유실되고, 3,352명의 수재민이 발생하는 불행을 겪었으나 정부의 수재민 구호와 연차적인 국고 보조금 및 지방비 지원으로 광활방조제를 복구하여 1964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이 되었다. 거북 형상을 한 지역으로 남서쪽은 동진강(東津江)이 합류하는 서해와 인접한 평야 지대이다. 광활면의 유일한 산인 대민가산이 솟아 있다. 동쪽으로 성덕면, 남쪽으로 바다 건너 부안군 동진면,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진봉면과 이웃하고 있다. 옥포리·은파리·창제리 등 3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주요 기관으로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에 있는 광활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우체국, 파출소, 금융 기관,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초등학교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활면 은파리 진흥경로당 옆 쉼터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며 길동무가 모셔온 맥주 한 캔을 고맙게 비웠다.
첫댓글 대모산님,
서해랑길도 반이나 해내셨군요.
카스에서 글을 읽으며 바람에 일렁이는 누런 보리밭길을 걷고, 분홍꽃을 단 지칭개를 보고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다행히 대모산님 덕분에 구간 구간 무임승차를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꿈마니님,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랑길은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탐방하려고 합니다.
무임승차라니요.
공개한 기록을 읽어주셔서 제게 영광이지요.
여름으로 가는 망종 절기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사업 번창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