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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이동민
문학작품은 인간의 욕망을 두드린다.
(수필문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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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말은 정신분석학 용어이다. 정신분석학은 심층심리 즉 무의식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욕망은 무의식과 관계되는 용어이다.
예일대학에서 1982년에 발간한 학술지에 ‘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글이 실렸다. 발제문으로 ‘문학은 정신분석의 무의식이다.’라고 하였다. 임진수 교수는 ‘정신분석은 문학의 무의식이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덧 붙였다.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 속에서 무의식적인 요소를 찾는 방법에 의거한다.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작품과 무의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상정하였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바로 무의식이다. 일반적으로 무의식을 ‘의식 속에 있는 의식할 수 없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절대로 의식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의식 바깥에 존재함으로 나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한다. 문학작품과 욕망의 관계는 바로 무의식으로 맺어져 있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말하기 이다. 그러나 반쯤 말함으로 작가의 욕망과도 결부된다. 문학작품을 정신분석학에서 볼 때는 무의식이 의식을 가로지른다고 한다. 작품은 작가의 의식 세계이다. 작품에서 말해지는 내용물의 뒤에는 작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그림자가 숨어 있다. 즉 무의식이 연루되어 있다.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욕망은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힘에 의하여 바깥으로 끊임없이 뛰쳐나오려 요동치는 것이 욕망이다. 문학에서는 ‘반쯤 말하기’라는 방식으로 욕망을 밖으로 배출한다. 또한 행동에서, 표정에서, 실제로 말하기에서도 우리는 반쯤만 말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인간의 욕망을 두드린다.’라고 한 말은 독자의 욕망을 일깨워 낸다. 는 뜻이다. 이때는 욕망의 주체는 독자가 된다.
문학작품과 글쓰기, 특히 수필쓰기의 과정을 살펴 봄으로 무의식적 욕망을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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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쓰기를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이 어떻게 문학작품에 스며드는가를 알아 보자. 수필쓰기는 90% 이상이 과거형 문법으로 쓴다. 과거의 체험을 회상으로 불러내서 문자화 한다. 체험은 우리 몸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체험을 기억으로 보관하기 위해서는 지각기관을 통해서 내면으로 들어와 신경조직인 뇌세포에 기록한다. 기억으로 보관할 때는 체험 그대로가 아니고 체험 이미지로 바꾼다. 기록은 사진을 찍듯이 한 사실이 아니고 의미를 가지는 문자로, 즉 이미지로 기록하여 보관한다는 뜻이다. 문자는 사진처럼 사물의 형상이 아니고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기호이다.
어떤 대상을 지각하고, 인지하고, 보관하는 과정이 기계처럼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몸의 주인인 내가, 주체로서의 자아가 관여하기 때문이다. 체험이라는 경험적 실체가 문자라는 이미지로 바뀔 때는 변형이 일어난다. 변형된 기억을 기억 흔적이라고 한다.
기억으로 보관되면 의식에서 사라진다. 2차적 자극이 가해지면 보관된 기억 흔적은 깨어나서 의식에 돌아온다. 회상이란 보관해 둔 기억 흔적을 의식으로 꺼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 뚜껑 보고 놀란다’가 있다. 자라보고 놀랐던 과거 체험은 일차 경험이고, 일차 경험을 불러오는 솥 뚜껑은 이차 경험 또는 사후 작용이라고 말한다. 나이 든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가 생각났다면 할머니는 솥 뚜껑의 역할을 한 것이다. 기억으로 되살아 나는 어머니는 회상의 결과물이다. 수필을 쓸 때는 회상의 결과물인 어머니의 경험을 언어로 바꾸어서 표현한다.
이 과정을 요약해보면 대상물(어머니) – 체험(어머니와 가졌던 경험) – 지각 – 신경조직 – 보관(뇌세포) – 2차 경험 – (심리적 에너지의 투여) – 기억을 불러 냄(회상) – 언어로 바꾸다. 라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갈 때마다 변형이 일어난다. 변형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왜냐면 주체의 자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필에서는 어머니, 유년시절, 고향 등이 가장 흔하게 소재가 된다. 수필에서 표현한 어머니는 과거에 실재로 경험하였던 어머니가 아니고 작가가 가공하고 변형시킨 이미지로서 어머니이다. 독자는 작품에서 실재의 어머니가 아닌 이미지를 만날 뿐이다. 실재의 어머니가 어머니의 이미지로 변형되는 데는 욕망이 관여한다.
욕망은 최초의 충족 체험을 재현하려는 심리적 움직임이라고 정의하였다. 예술작품을 정신분석적 방법으로 비평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탐구하는 것이 필수이다. 최초의 경험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맛본다.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에 마주치는 과제는 생존이다. 배고픔도 맨 먼저 만나는 시련 중에 하나이다. 배고픔은 생존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이고, 육체적 결핍으로 오는 고통이다. 신생아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젖을 요구한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결핍을 욕구라고 하고, 보채고 울므로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보내는 신호를 요구라고 한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므로 배고픔의 고통은 해소되고 충족감을 느낀다. 이것을 총족 체험이라고 한다. 충족 체험을 할 때는 육체적인 충족감과 더불어 또 다른 지각이 발생한다. 지각에 의한 것은 육체를 떠나서 심리적으로 만족감이 생긴다. 지각된 만족감은 기억이 되어서 보관됨으로 기억 흔적을 만든다. (막연한 만족감이 아니고 엄마의 젖 두덩에 실려서 기억이 된다. 이때의 젖 두덩은 배고픔과는 다른 하나의 사물이 되므로 기억 흔적이라고 말한다.) 다시 배고픔이 오면 어머니에게 젖을 달라고 요구를 하는 동시에 보관되었던 기억 흔적도 깨어나서 심리적 만족감도 기대한다. 이제부터는 배고픔이 해소되는 육체적 충족감에 더하여 심리적인 만족감도 기대하게 된다.
만족감을 기대할 때는 최초에 지각하였던 만족감과 동일하게 재현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욕망이라고 한다.
체험은 어디까지나 일회적 경험이므로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버리므로 최초의 충족 체험은 영원히 과거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 과거와 동일하게 재현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더군다나 기억은 체험 자체가 아니고 이미지로 보관됨으로 기억은 이미지를 통해서만이 의식에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충족 체험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욕망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욕망은 현재의 고통 때문에 과거의 충족을 그리워하는 것이므로 항상 과거를 지향한다. 또한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욕망이 성취되지 않는 상태로 내버려 두면 욕망의 덩어리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현실에서는 충족 대상을 찾을 수 없으므로 기억에다 새로운 대상을 포함시켜서 (배고픔에 어머니의 젖가슴을 포함시키듯이) 만족을 느끼려 한다. 포함되는 대상을 표상이라고 한다. 수필에서는 유년시절, 고향, 어머니가 가장 흔히 나타나는 표상이다. 심리적으로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이 욕망이다. 기억에 다른 대상을 포함시키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자아가 형성되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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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손 쉬운 답은 ‘나 자신’이다. 다시 ‘나 자신’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 한 마디로 답할 수 없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란 프로이트가 말하는 세 개의 심리 영역 중의 한 영역이다. 프로이트는 심리 영역을 이드 – 자아 – 초자아 라는 세 영역으로 나누었다. (제 2 지형학에서) 인간의 심리가 세 영역으로 나누어지는 기전을 살펴 봄으로 자아를 알아보자.
태초에 인간이 태어날 때는 자기보존 본능만이 있었다. 보존 본능(개체보존(식욕)과 종족보존(성욕)) 을 흔히 동물적인 삶의 행태에서 나타나는 속성이라고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물적인 삶과는 차이가 있지만 거의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동물은 본능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만약에 배고 고프면 본능은 먹으라 명령한다. 소는 소중히 가꾸고 있는 농작물이든, 산자락의 풀이든 가리지 않는다. 인간이 배고픔을 경험하였다면 빵집의 유리창에 진열되어 있는 빵은 먹으려 하지 않는다. 먹고 싶어도 참는다. 왜 참을까? 짠발잔에서 보았듯이 그 빵을 먹으면 절도라는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세세하게 관찰해 보면 배고픔이라는 육체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엄격히 말하자면 생존 본능이지만) 음식물을 먹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흔히 본능이라고 하지만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이드(Id)라고 이름을 붙였다. 돈이 없어 훔쳐 먹으면 경찰에 붙잡혀 가서 벌을 받으니 참으라고 명령하는 또 하나의 심리 영역이 있다. 금지를 담당하는 영역이다. 초자아라고 한다. 양심도 초자아에 해당한다. 마음 한 켠에는 벌을 감내하고 먹을까, 아니면 참을까, 를 두고 내게 유리한 쪽을 찾기 위해 저울질하는 심리 영역이 있다. 이것을 ‘자아’라고 한다.
위의 설명대로 하면 자아는 선험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삶의 경험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사람마다 자아가 다르고, 가치판단에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하여 위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캉은 자아 형성에는 두 가지의 다른 길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이드에서 자아가 생겼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서 주체의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심리 내면으로 받아들이므로 형성한다.
생명을 가진 개체는 숙명적으로 생존 본능을 안고 있다. 인간의 심리 내면에도 본능적 욕동이 꿈틀거린다. 살고자 하는 욕동을 도외시한 자아란 있을 수 없으므로 자아의 한 면은 이드에서 분화되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바깥에 있는 대상을 나와 동일시 함으로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대상이 아버지이면(아버지를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가 심리 내면으로 들어와서 자아의 한 면에 자리 잡는다. 아버지의 동일시란 아버지의 권위, 즉 금지하고, 벌을 주는 아버지의 요구를 수용함으로 질서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초자아가 형성되는 기전이다. 초자아를 받아들이므로 자아는 본능과 초자아라는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을 모두 가진다. 초자아는 심리발달 과정에서 오디푸스 콤플렉스기에 나타나는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초자아의 기능은 자기 관찰(감시), 양심, 이상 등의 추상적 성격을 띈다.
아버지는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지만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대상(자아 이상)이다. 내가 동일시 함으로 나도 그와 같이 되었다고 생각한다.(이상 자아) 말하자면 이상적인 자아는 나의 바깥에 있는 이상적인 대상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상적 자아를 가진 실체라고 생각함으로 자기애(나르시시즘)에 빠져들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무조건 자기가 옳다는 사고)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설명을 하자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규칙(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법이라고 한다.)을 받아들이므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이로서 스스로를 사회규칙을 받아들인 지극히 모범적인 사람(이상자아)으로 생각한다.
나를 나타내는 주어는 ‘자아’만이 아니다. ‘주체’라는 말도 사용한다. 내 안에는 자아와 주체라는 두 사람의 나가 있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체는 일반적으로 욕망의 주체이고, 무의식의 주체이다. 욕망의 주체니, 무의식의 주체니 하는 어려운 말은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문학작품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 가설인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야기 해보자. 어린이의 심리발달 과정에서 3-5세는 오디푸스 콤플렉스기이다. 아버지 – 아이 – 어머니 사이에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아이는 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좋아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힘이 센 아버지의 여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협을 한다.(동물세계와 같다) 어머니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너의 남근을 거세해 버리겠다. 이에 아이는 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여기다가 아버지의 위협에 굴복하여 아버지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아이는 아버지의 말에 따르므로 자신의 남근을 지키기로 결정한다. 어머니에 대한 욕구는 억압해버려야 한다.(인간질서에 따른다) 이때 억압해버리는 욕구는 심리 속으로 들어가서 욕망이 되고, 무의식이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이 시기는 어린이의 발달 과정에서 친구를 사귀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시기이다. 즉 사회의 규범과 법칙을 수용하는 사회화 시기이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심리적으로 아버지의 위협을 받아들여서 어머니를 좋아하는 욕구를 억압함으로 무의식이 강화되는 시기로 설명하였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무의식은 결코 의식되지 않는 의식이라고 하였다.억압함으로 무의식이 되어 버린 욕망은 의식 세계에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결코 나타내지 않는다. (나타나면 정신병자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움직인다. 이때 숨어서 나를 움직이는 힘을 주체라고 한다. 욕망의 주체, 또는 무의식의 주체라고 한다.
쉬운 말로 설명을 하자면 신생아기에는 본능이 시키는 데로 행동하였지만 성장하여 사회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금지를 요구하는 사회 규범들을 받아들여 본능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제 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벌(사회적인 제재)을 받아야 한다. 억제를 심리적 용어로는 억압이다. 하고 싶은 일을 억압해 버리면 미련이 남는다.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욕망이다. 아버지의 금지에 의하여 하고 싶은 일을 억제하는 일을 거세라고 한다.
거세된 자리는 ‘있다가 없어진 자리’이므로 빈 자리가 되거나, 구멍으로 남는다. 빈 자리는 없어진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으킨다. 이것이 욕망이다. 이로서 나는 사회적 규범(아버지의 법)을 요령껏 받아들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아와 욕망의 결핍을 채우고 싶어 하는 무의식의 나(주체)가 나타난다.
거세를 좀 더 설명해보자. 혼자서 생존할 수 없는 어린이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욕구를 해소해 달라고 요구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요구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바로 쾌락의 원천이다. 그러나 오디푸스 콤플렉스기에 접어들면 금지하는 아버지의 법 때문에 어머니가 쾌락의 대상임을 포기해야 한다. 포기는 바로 거세하였다는 뜻이다. 이로서 어머니의 상실이 일어난다. 어머니의 상실이란 쾌락의 포기를 뜻한다. 거세된 대상(어머니)을 다른 상징물로 대치하면서 욕망이 만들어 진다. 형성된 욕망은 끊임없이 의식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 몸부림 친다.(억압물의 회귀) 의식은 자아가 주인이다, 자아는 초자아인 아버지의 법을 인정한 나이므로 본능이나 욕망의 덩어리를 받아주지 않는다.(저항이라고 한다.) 이로서 욕망과 자아 사이에 타협을 한다. 위장하거나 환각의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타협의 방식이다. 타협 형성물로는 꿈, 실수, 농담, 환상 등등이 있다. 환상(꿈)의 동기는 욕망이고, 환상의 내용은 욕망의 성취이다.
억압이 된(거세가 된) 빈 자리를 채워주지 않으면 정신병적인 또는 신경증적인 고통을 겪는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빈 자리를 타헙 형성물로 매워야 한다. 환상도 메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욕망은 환상 뒤에 숨어서 나타난다. 이것을 두고 욕망은 환상에 스며나오므로 자신의 모습을 반 쯤만 드러낸다고 말한다. 정상인은 욕망을 직접 대면할 수 없다. 환상을 통해서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그러나 욕망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으므로 인간은 영원히 그리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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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에 의하여 욕망이 생겨나는 기전을 보았다. 형성된 욕망은 의식 세계로 반드시 되돌아 온다.회귀 할 때는 생경한 욕망 그대로가 아니고 엄청나게 변형되어서 나타난다는 것도 알았다. 꿈은 욕망의 대표적인 변형된 형태이다. 프로이트는 낮에 꾸는 꿈(백일몽, 환상)이 문학작품의 형태라고 하였다. 즉 문학작품은 환상에 다름 아니다, 라고 하였다.
환상에 대해서 알아보자. 환상을 요약하여 정의를 내리면 ‘주체가 등장하는 상상적인 각본’이다. 환상의 정의에 나타나는 중요한 말은 주체, 각본, 상상이다.
각본(scenario)은 이야기의 구성 단위인 시퀀스(sequence=인과에 의하여 연속되는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환상도 여러 시퀀스로 구성된 상상적 이야기이다.
주체의 의미는 환상이 어떤 대상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이 반영된 것이다(투사). 즉 환상은 자신을 대상으로 풀어가는 상상적 이야기이다.(영화 속의 주인공이 해피 엔딩하는 것에 즐거워 하였다면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되어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환상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풀어가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자신을 대상으로 쓰는 수필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에서 불러내어 문자로 표현하는 형식을 취한다. 프로이트는 기억에는 환상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고 하였다. 유년기의 기억은 실재의 사건을 기록하여 보관한 것이 아니고 상상의 산물인 환상을 보관하였다고 말한다. 수필은 사실이 아닌 환상으로 쓰여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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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답울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보자. 수필은 사실을 씁니까? 수필은 작가의 회상이 바탕이 된다. 수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대부분이 과거형이다. 경험 – 지각 – 기억 – 회상 – 문자화라는 과정을 거쳐서 수필이 된다. 과거형 동사에는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적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회상을 할 때는 시간이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 환상이 스며든다. 더욱이 수필은 환상이라고 하였으므로 사실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회상을 통해서 불러낸 유년의 기억을 쓴 수필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는 사소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숨길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기억이기 때문에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 한다. 어느 누가 자신의 기억을 거짓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신의 기억은 진실이고 사실이라고 믿는다. 욕망은 억압물 이므로 금지 된 것, 이루어지지 못한 소원으로 구성된다. 현실에서 실천하여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실재의 욕망과는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나타난다.
사례를 보자. 아주 어렸을 때 뒷 산에 올라서 진달래를 꺾었던 일을 마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듯이 생생하게 말하였다. 기억이 너무 또렷하였다. 가족의 말로는 바로 그때 손자를 끔찍이도 귀여워해주던 할머니가 죽었다. 이 사람은 할머니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 하였다. 여기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사소한 일을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였다. 두 번째는 막상 자신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을 사건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명한 기억과 망각 사이에 설명이 가능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보면 선명한 기억은 다른 기억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다. 그래서 덮개-기억, 또는 은폐 기억이라고 한다. 덮개-기억이 마음의 고통을 감추려는 위장이라면 동시에 숨겨진 욕망을 찾아가는 실마리도 된다. 수필에서 쓰여진 많은 내용들이 사실은 덮개-기억일 수가 많다. 수필에서 표현한 선명한 기억은 의식적 주체(자아)가 욕망을 오인하도록 위장한 표현일 수가 많다. 자기 성찰을 심도 있게 하지 못하면 작가 자신도 환상에 속아서 사실이라고 오인한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식이 표현된 것이다. 수필을 쓰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 작가의 무의식도 문장 속을 예리한 화살이 되어 관통한다. 작가는 드러내기 부끄러운 것은 표현하지 않는다. 글로 쓰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대수롭지 않는 일들이다. 비난 받지 않을 것들, 심지어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채운다. 작가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다. 덮개-기억만 나열하였을 뿐이다. 자아의 검열에서 통과한 것만 나열한다.
작가는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오인하도록 술수를 부린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작가 자신이 자신의 욕망을 오인한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고, 타인의 탓이라고 말한다. 수필은 이처럼 자신이 심리적으로 불안 요인을 떠 안고 있으면서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의의 사도나 된 듯이 타인을 맹렬히 비난하는 경우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오인 된 욕망을 표현한 수가 많기 때문이다.
수필을 읽다 보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극명하게 구분하여 기술하는 것을 흔히 본다. 이런 경우는 작가 스스로가 그 이유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극도의 적개심을 나타낼 때는 그 사람이 이유이기보다는 자신의 무의식이 이유인 수가 많다.
프로이트의 환자를 예로 들어보자. 이 환자는 프로이트를 찾아 올 때까지는 자신도, 주변 사람도 마음의 병을 앓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음을 움직이는 심리기전은 정상인이나 환자나 같다. 다만 그 강도가 정상의 수준을 넘어서면 환자로 분류한다. 망상은 ‘병적이다’는 뜻이 강하지만 정상인도 갖고 있는 심리기전이다. 프로이트의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얼마 전에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도 내 눈에 자꾸 거슬렸다. 그의 행동, 말투 하나까지도 나를 기분 나쁘게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쁘고, 괜찮다고 생각한 여자가 그 남자와 무척 친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였다. 질투심은 멀쩡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런 경우의 심리기전은 질투망상이다. 질투망상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으므로 이것만으로는 환자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정상인의 수준을 벗어날 만큼 지나칠 때만이 병이다. 이런 경우에 정상인과 비정상인 사이에 분명하게 선을 긋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은 정신병리에서 여러 양식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욕망들이 의식 세계로 회귀할 때는 위장을 함으로 형태가 바뀐다. 이상자아에 의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항상 정의롭고 옳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어 가난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사람은 부자라는 망상에 빠져서 자기 과시를 한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게 위해서 지나치리만큼 남의 약점을 파고 들고, 날을 세워 비난한다. 이와 같은 심리를 융은 인격의 그림자라고 하였다. 자신이 옳다는 자기중심주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실제는 그림자일 수가 많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찾아가는 방법 밖에 없다. 수필쓰기는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좋은 길이다.
수필에는 무의식의 욕망이 숨어 있다. 서두에서 말하였듯이 수필의 글에는 욕망이 숨어 있더라도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반쯤만 드러낸다. 반쯤 말하기라고 한다.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이 욕망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아는 환상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 환상은 욕망의 자리를 메워주므로 환상을 통해서 향락을 즐기기 때문이다. 수필작가가 자기 작품에 나르시시즘적인 애착을 가지는 이유이다. 환상을 버리고 뒤에 숨어 있는 욕망을 찾아내지 않으면 자기성찰을 할 수 없다.
환상(수필)을 통해서 자기 성찰을 하는 과정을 보자. 첫째는 환상이라고 굳게 믿는다. 처음에는 환상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자기가 쓴 수필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이와 같은 심리기전에 의한 것이다. 성찰을 통해서 진실을 추구하게 된다. 수필이라는 환상을 관통하고 있는 진실을 추구한다. 다음에는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상상으로 만든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 그대로 ‘깨닫는 것’이다. 다음에는 진실을 추구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반쯤 말하기의 방식을 통해서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 자기 치유는 반쯤 말하기로 숨겨놓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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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수필을 읽고 이해하기 보다는 감동을 받으므로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문학작품은 인간의 욕망을 건드릴 때를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 독자는 충족체험을 현실에서 찾을 수가 없으므로 욕망을 통하여 맛보려 한다. 욕망은 현존하는 실체가 아니다. 이미지이고, 기억이다. 현실에서는 재현이 불가능함으로 충족체험을 경험할 수 없다. 현실에서 충족을 주는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선다.
기억에는 환상이 스며든다고 하였다. 환상은 현실이 아니므로 현실의 어떤 대상을 기억에 결합시킨 것이 환상이다. 기억 이미지이다. 기억 흔적이라고도 한다. 기억 이미지, 즉 기억 흔적으로 보관한 것이 기억이다. 기억 흔적은 어디까지나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움의 대상이다. 문학작품은 우리의 기억 흔적을 깨워서 독자를 그리움(환상)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성적 판단을 유도하여 이해하게 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수필에서 흔히 만나는 형식이 작가의 생경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글이다. 좋은 작품은 독자의 이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표상으로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에드가 알란 포오의 ‘도둑맞은 편지’라는 탐정소설을 읽고 이야기의 이면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학작품은 인간에 관한 이해(이해란 나를 읽고 알고 있다는 뜻이다.)를 문자와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암호화한 것이다. 그 인간에는 독자인 나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내가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고 작품이 나를 읽고 있는다. 라고 하였다.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수필을 읽는 것이 아니다. 수필의 의미가 인간(나까지 포함한)의 속성을 포함함으로, 수필 속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인 나를 읽고 있는 것이다.
작품을 사례로 검토해보고 글을 끝 맺겠다.
두 할머니 이야기
나와 함께 수필 공부를 하는 회원이 쓴 글을 읽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저자는 성당에서 만난 두 할머니의 이야기를 수필로 썼다.
한 할머니는 성당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서 하고, 시신을 염습하는 궂은 일까지 마다 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사례를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펄쩍 뛰었다.사례를 바라고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니다,라는 것이 할머니의 지론이었다.새벽 미사를 보러 가서 만나게 되면 신심이 깊은 사람은 천주님이 꼭 기억해 주신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곧 잘 까르르 웃는다. 웃음소리가 맑고, 밝기가 그지 없다. 담배를 치우는 할머니에게 고맙다고 담배를 한 갑 드리면 한사코 받지 않는다. 그러나 갑을 뜯어서 한 개피를 피우고 난 담배는 받는다. 아마도 뜯겨진 담배 갑은 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성당의 행사장에서 할머니의 이웃에 산다는 자매를 만났다고 하였다. 저 켠에서 교우와 어울려서 한담을 나누는 할머니의 웃음소리는 여기까지 들려왔다. 자매는 ‘참, 안됐다.’라며서 할머니의 신상에 관하여 들려주었다. 큰 아들은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낸 후에 종적을 감추고는 소식도 없었다. 작은 아들이 퀵 써비스로 생활을 꾸려가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할머니는 폐지를 주워서 조금이나마 생활비에 보탠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할머니는 약간 뚱뚱한 몸매이고, 복스런 얼굴을 하고 있어서 부잣집 마나님의 인상을 풍겼다. 할머니와 함께 걸을 때는 동생과 아들의 자랑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하였다. 수필에서 표현한대로라면 자랑을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내 동생은 oo동에 있는 60평 아파트에 살고 있제. 내 아들은 공부를 잘 해서 약대를 보냈는데, 지금 75평 아파트에 살고 있지.”
처음으로 들을 때는 ‘할머니는 복도 많으시다’라고 부러워해주었지만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이제는 듣기 싫은 소리가 되어버렸다.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친목 행사를 가졌다. 폐지를 줍는다는 할머니는 여전히 여러 사람과 어울려서 떠들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부잣집 마나님을 닮았다는 할머니는 크다란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수필을 쓴 작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선과 악을 대비하듯이 두 할머니를 대비함으로 어떤 삶이 바람직한가를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의 읽기는 달랐다. 부자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꼭 같은 두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할머니는 꼭 같이 자신이 돈에 궁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 애쓰고 있다. 한 할머니는 행동으로 보여주려 하였고, 한 할머니는 말로서 보여주려 하였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처지가 되어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해 보았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그래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쭐대면서 살았으리라. 아들이 사업을 할 때도 이웃으로부터 여유롭게 산다면서 부러움을 받았으리라. 아들이 부도를 내고 종적을 감추면서 가난뱅이가 되었지만 가난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호주머니가 텅텅 비었으면서도 돈 있는 사람의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허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부잣집 마나님을 닮았다는 할머니는 어떠하였을까? 유년의 세월이 너무 가난하여 힘겹게 보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까지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어린 시절이 힘들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할머니의 말마따나 가난을 벗고 여유롭게 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속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어릴 때에 가난뱅이라면서 싸늘하게 바라보던 이웃의 눈초리가 잊어지지 않는다. ‘난 지금 부자가 되었어’라고 뻐기지만 주변에서 부러워해주지 않는다. 자신이 부자임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억울하였다. 가난하였을 때 그렇게 차가운 눈길을 주던 사람이었는데,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현실의 가난을 부정하면서 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부를 과시함으로
과거의 가난을 부정하면서 살고 있다. 둘 다 부자이고 싶은 속내는 같으면서도 표현이 달랐을 뿐이다.
누가 더 가난할까? 누가 더 부자일까. 이런 질문은 어리석다.
나는 생업에서 은퇴를 한 후에 내 자신을 관조해 본다면서 ‘백수 일기’를 쓰고 있다. 30여 편이 모여있다. 백수일기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두 할머니의 모습을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고 내가 마치 유명인이라도 되는 듯이 본심을 감추고 가식의 짓거리를 한 일도 수두룩 하였다.
두 할머니가 바로 나였구나.
이 수필은 ‘두 할머니의 겉으로 보이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부자이다. 또는 부자였다.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은 덮개-기억일 뿐이다. 덮개-기억을 관통하는 것은 반쯤 말하기로 보여주는 무의식의 관통이다. 두 할머니의 기억에 쓰며 든 환상은 부자이다. 자기가 부자라는 것을 스스로 오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타인(독자)에게도 오인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심리적 진실은 가난이다.‘누구나’에는 나도 포함되므로 수필작품은 나의 내면을 읽고 있다. 라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
문학작품에는 인간의 속성을 꿰뚫는 진실을 담아야 한다. 수필에서는 ‘나, 진실을 말한다’라는 개념정의에 충실해야 한다. 진실은 무의식의 나이다. 주체로서 나이다.
( 대구문학 2012. 4-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