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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條今佛國 오늘날 불국사 쓸쓸하다만
![]() 사진=장명확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은 한말(韓末)과 식민지 시대 때 우리 불교를 일본 불교와 결합시켜 법맥을 끊으려는 야욕을 용맹정진의 일념으로 막아낸 분이다. 스님은 한말과 일제 식민지 체제 내에 가장 주체적으로 행동했고 불교 원리에 입각해서 많은 불교지도자들을 양성하면서 스스로 강백(講伯)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그 수난의 시기를 굽힘없이 절의와 정도를 지키면서, 수많은 논설을 쓰고 솔선수범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했다. 수행과 함께 불교계 정화에도 힘썼고, 후학 양성을 무엇보다 절실한 한국 불교의 과제로 여겨 이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저서에 시집인 <석전시초(石顚詩鈔)>와 <석림수필(石林隨筆)>, <석림초(石林草)> 등이 있다.
시집 <석전시초>에 실린 스님의 시만으로 본다면, 개인적인 감흥과 교유의 자취, 기행의 여적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스님의 행적과. 한말(韓末)과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전제로 한다면 이런 시들이 스님의 시세계 전체를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달리 본다면 이런 시들에서도 스님의 시안(詩眼)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불국토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느낀 심경이 시행 속에 녹아 있을 것이고,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조선 사람들의 답답한 심회가 은연중에 서려 있음은 분명하다.
시대 상황이 쓸쓸한 분위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시가 단순한 감상(感傷)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간난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미래에 대한 혜안이 갖춰져 있지 못하다면, 이를 극복할 대안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스님은 참담한 현실을 눈 감고 잊기 보다는 이를 솔직하고 여과 없이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만큼 스님은 자기 시대의 현실에 대해 민감했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스님의 시는 어두운 시대를 함께 걸었던 선승의 눈에 잡힌 그 시대의 풍속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가람을 탐방한 뒤 스님이 느낀 감회를 담은 두 편의 시를 골라 읽기로 한다.
첫 작품은 팔만대장경을 품에 안은 해인사인데, 스님은 인적도 뜸한 산사로 묘사한다.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도 그다지 밝지 않다.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리는 해인사의 풍정이 이러하다면 그 시대 다른 사찰의 모습은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그저 산사에 숨어있는 샘물을 마시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볼 뿐이다. 퇴락한 대찰(大刹)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젖어 무턱대고 발길을 서성거리는 스님의 우울한 심사가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런 탐방의 길목에서 스님은 불교를 중흥하고 국운을 일신해야 한다는 다짐을 더욱 견고하게 다졌을 것이다. 스님이 당시 남긴 수많은 논설들과 <석전수필> 등에 실려 있는 해박한 불교지식, 모순을 바로잡고 진리를 선양하려는 힘찬 목소리는 그런 국토 탐방의 여정(旅程) 속에서 싹터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시에서 우리는 스님이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쓸쓸한 국면을 떨어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불국사에는 1300년을 이어온 대찰로서의 당당한 위세가 살아 있다. 하늘을 덮을 듯 펄럭이던 깃발을 거두었던 당간(幢竿)은 아득히 속세의 길까지 그림자가 뻗어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미소 같은 햇살이 사방을 따뜻하게 감싼다. 독경 소리에 이어 법어 소리도 힘차고, 범종 소리는 하늘을 넉넉하게 뒤덮고 있다.
이런 불국사를 둘러보면서 스님은 뭔가 희망의 징조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서리가 내려 모든 꽃들이 다 지고난 뒤에도 홀로 노란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국화의 기상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말세(末世)라 참담한 기운이 만연해 있지만, 국화의 절개와 기상을 잊지 않은 도반(道伴)과 신중(信衆)이 있기에 이 나라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고 스님은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