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기도의 성지인 문수전
전경. 지난 밤 내린 비로 인해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을의 문턱에선 나무들의 가을 준비가
부산하다. 여름동안 짙푸른 신록을 뽐내던 문수사 단풍나무들도 가을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마쳤다.
문수사가 자리한 청량산은 문수산이라고도 불린다. 이웃한 전남 장성에서는 축령산 혹은 취령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축령산이나 취령산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영축산에서 따온 이름이고 청량산이나 문수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청량산은 해발 620m 남짓한 작은 산이지만 노령산맥의 중심부에 있어 남으로는 전남 영광, 동으로는 장성, 북으로는 정읍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때문에 산 정상에 서면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빼어난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곳에 자리한 문수사는 오대산 상원사, 울산 문수암과 더불어 자장율사가 창건한 우리나라 3대 문수도량으로 꼽힌다.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사적기는 전한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 중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귀국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와
수세가 중국의 청량산과 닮아 있어 문수산 기슭의 암굴(暗窟)에서 7일 기도를 올리던 중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꿈을 꾸고 그곳을 파보니
화강석의 장대한 문수보살상이 나왔다. 여기에 그 화강암을 둘러쌓아 문수전을 만들고 절을 지어 문수사라 일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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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자락의 문수사는 가을에 더
아름답다. | 조선 초기 대찰 면모 곳곳서 드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시기에 신라스님이 백제 땅에 절을 창건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삼국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문수보살의 지혜가 절실하였을 것이고 문수보살의 지혜를 염원한 이들에 의해 문수신앙이 활발하게 일어났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문수사는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축령산문수사 중건사적’ ‘문수사 한산전 중창상량문’ ‘축령산 문수사
내원초창상량문’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역사는 알 수 있다.
이 사적기들을 종합해보면 1607(선조40)년 에 중건했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고 1653(효종4)년 성오대사와 상유스님이 대웅전을 중판함고
동시에 대웅전의 삼존불을 조성하고 명부전, 시왕전 단청불사를 했다.
그 후 1764(영조40)년에는 신화, 쾌영 두 스님이 선운사로부터 이주하여 중수하고 양진암도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1835(현종1)년 당시 문수사 주지였던 우홍 스님이 2차 중수하였고 1876년 고창현감 김성로의 시주로 묵암스님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수사에서 발간한 1411(태종11년)에 간행된 ‘대전화상주심경’과 1424(세종6)년에 간행된 ‘영가진각선사증도가’와
1534(중종29)년 에 간행된 ‘법화영험전’ 의 목판본이 발간된 기록으로 보아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지방 산골
사찰에서 불교관련 서적이 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초기 문수사의 규모가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 문수사 건너편 계곡너머에는 2곳의 부도밭이 존재하고 있어 당시 많은 스님이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지혜를 얻고 깨달음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영험에 힘입어 과거에는 일반인들도 각종 고시 공부를 위해 고창은 물론 영광, 장성, 정읍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문수사를 찾았다고 한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의 정·관·재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유명 인사들도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이 많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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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움을 간직한 문수사 숲길과 불이문.
문수사는 조선시대 불교서적이 발간될 정도의 대찰이었다. 지혜를 얻는다는 문수신앙의 상징으로 근현대 정관계 인사들도 많이 찾은
곳이다. | 원숙한 아름다움의 단청과 단풍 ‘일품’
좁다란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명부전, 만세루, 금륜전이 ㅁ자 모양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서 보이는 대웅전은
예전엔 화려한 빛을 보였을 빛바랜 단청이 원숙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대웅전 뒤편의 문수전은 친근하고 후덕한 얼굴의 문수보살상이 남쪽의
문수산 정상을 바라보고 서있다.
둥글고 소박한 모습의 문수보살은 스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여느 문수보살이 어린 동자의 모습이나 보살상을 하고 있는 모습과 달리 스님의
모습과 영락없이 닮아 있다.
문수전 뒤편 단풍나무 숲속에는 자장율사가 기도했다는 자장굴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안전사고를 우려해 지금은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 문수전 가는 길에는 지혜의 물을 상징하는 맑은 샘물이 흐른다. 문수보살의 지혜를 상징하는 용지천이다. 이 샘물은 사시사철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고 한 겨울에도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사실 문수사는 문수보살보다 단풍으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웃의 선운사, 내장사, 백양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100~400년생 단풍나무 수백 그루가 자생하는 군락지이며 2005년도에 천연기념물 제463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곳이다.
일주문에서 문수사 경내까지는 걸어야 제격이다. 걷다보면 만나는 아름드리 아기단풍나무들과 800m에 이르는 숲길은 진초록 단풍이 비 냄새와
나무냄새가 섞여 어느 향수보다도 더 향기로운 냄새로 유혹한다.
종교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열린 마음으로 걷다보면 거기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광과 문수보살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마음을 열고 나무들과 서로 교감하고 사색하며 걷다보면 세속의 번뇌는 사라지고 새털같이 가벼워진 머릿속은 문수보살의 지혜로 가득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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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의 지혜가 전해진다는
용지천 | 주변 둘러볼만한 곳 ▲ 선운사
선운산도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이 창건한 선운사는 보물 290호인 대웅전과 보물 279호인 금동보살좌상 등 19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축령산 휴양림 전북 고창과 경계를 이룬 축령산(621.6m) 일대에는 4~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늘 푸른 상록수림대
1,148ha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독립운동가였던 춘원 임종국 선생은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무입목지에 1956년부터 21여 년간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고 있다. 편백나무는 스트레스를 확 풀리게 하는
피톤치드라는 특유한 향내 음이 있어 삼림욕의 최적의 장소로 널리 홍보되어 특히 국·내외 단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축령산 입구 괴정 마을에는 민박촌과 관광농원이 조성되었고, 산 중턱에 40여명의 동자승들이 수도하는 해인사의 진풍경, 산 아래
모암마을에는 통나무집 4동이 있어 체험하고 체류할 수 있는 관광을 즐길 수 있고, 휴양림을 관통하는 임도를 지나가면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을
촬영하던 금곡영화촌이 연결되어 있다.
“기복 아닌 참 문수신앙 정립에 나설터”
인터뷰 - 문수사 주지 태효 스님
태효 스님은 단풍나무 숲 지킴이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다. 문수사 단풍나무 숲이 2005년 9월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 463호로
지정되기까지 태효 스님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과 나뭇가지를 꺾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단풍나무를 지키기 위해 멱살을 잡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8년간의 노력 끝에
2005년 단풍나무 숲을 문화재청으로 부터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았다. 지금도 고창사람들은 문수산의 등산로를 개방하라고 아우성이지만 스님은 등산로를
개방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문수산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스님은 “숲에 불이라도 나게 되면 100∼400년 된 노거수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며 숲을
찾는 시민들의 의식변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도 고창군에서 사륜오토바이 체험장과 펜션을 건축하려다 스님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스님은 아울러 “지역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 잡고 있는 숲의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발전을 위해 행정과 교감을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관음, 지장신앙에 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문수신앙을 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계획이다.
단지 입시 기도나 시험 합격 기도에 국한된 문수신앙이 아닌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고 진정한 깨달음을 향해 가는 구도자로서의 문수신앙
재정립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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