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차 경남 합천/부산/울주 일원(2005. 10. 15~16)
1. 합천 해인사 2. 부산 금정산 범어사
3. 울주 천전리 암각화 4.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2. (1) 부산 금정산 범어사 영상자료
2. (1) 부산 금정산 범어사 사진자료
[범어사 입구 조계문]
사적기(事蹟記)에서는 당시의 규모를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 아래에 이중전을 창건하였고 그곳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와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모셨으니 그것이 곧 미륵전이다. 또 미륵전 서쪽에 3간의 비로전을 세우고 그 곳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간의 대장전을 세우고 팔만대장경과 3본(三本)의 화엄경과 3장(三丈)의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도량의 상층과 중간층에 별처럼 늘어섰으니 그 밖의 전각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관(地官)은 의상스님이고, 공사를 총감독한 이는 당시의 대왕이며, 기와일을 감독한 사람은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였고, 터를 닦고 재목을 운반한 사람은 담순귀(曇順鬼)등이었다.
[범어사 입구 조계문 후경]
[범어사 성보박물관]
[범어사 천왕문]
ㅇ 범어사 불이문
‘불이(不二)’란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의 다른 말이다. 즉 부처와 중생, 나와 남,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나아가 생과 사도 둘이 아니라는 연기법(緣起法)의 진리를 말한다. 불이문을 다른 이름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누구나 이 문을 왕래하는 이들이 진리를 깨닫고 잊었던 본성을 되찾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전각이다.
범어사의 불이문은 1699년(숙종 25)에 자수 스님이 천왕문과 함께 창건한 이래 중수의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작은 규모로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원통형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내 외 2출목의 주심포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 기둥에는 동산 스님이 쓴 주련을 걸었다. “신광(神光)의 밝고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세상의 알음알이를 논하지 말라.”는 경구(警句)가 분별을 좋아하는 요즘 세상에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범어사 불이문 우측 죽림]
[범어사 보제루 전면]
ㅇ 범어사 보제루
불이문에서 30여 단의 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웅장한 전각이 보인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름을 지닌 보제루(普濟樓)이다. 불이문 앞에서 볼 때는 2층의 누각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의 건물이다. 즉 바깥쪽에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안쪽과 6~7m의 높낮이를 두었다.
우리 나라의 사찰이 산지가람을 이루면서 산 경사면을 조화롭게 이용하여 이러한 누각 건물을 많이 세웠는데, 범어사의 보제루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아래 기둥을 통해 대웅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좌우로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보제루는 1699년(숙종 15) 자수(自修) 스님을 비롯하여 조헌(祖軒)회영(懷英) 스님 등이 건립하였다. 기록으로 전하는 최초의 모습이지만 지세로 보아 그 이전에도 이러한 형식의 전각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후 1813년(순조 13) 신정(信定) 스님이 주관하고 만잠(萬岑)관식(寬式) 스님 등이 중수하였고, 다시 1827년(순조 27)에도 일부를 중수하였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기둥 간격이 넓어 사찰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익공(二翼工)식의 공포를 가구하여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렸다. 최근에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주초석위에 1.5m의 석주를 받치고, 벽을 석판으로 막아서 앞마당 쪽에만 네 짝의 창을 달았다. 새로 입힌 단청과 장식으로 예전과 비교하여 고졸한 분위기가 줄어들었지만, 조선 후기 누각의 전형적 모습은 간직하고 있다.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불이문쪽에 범어사, 앞마당쪽에 보제루,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절에서 대규모 법회를 거행할 때 예불과 법요식이 이 곳에서 이루어진다.
[범어사 보제루 앞 풍경]
[범어사 종루]
ㅇ 범어사 미륵전
미륵전(彌勒殿)은 종루 앞,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절의 창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범어사창건사적에는 미륵전을 중심 불전으로 삼았다고 한다. 즉 당시는 2층 건물이었는데, 이로 보아 아마도 김제 금산사와 같은 큰 규모의 미륵입상이 주불(主佛)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범어사창건사적이 실제 절이 창건된 시대와 크게 달라 이러한 내용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범어사는 일찍이 화엄사상을 꽃피우던 화엄도량인데 어떻게 미륵전이 가람의 대표적 전각이라고 하였는지 의문이 남는다.
아무튼 임짐왜란 때 절이 크게 소실되면서 미륵전도 사라진 듯, 1613년(광해군 5)에 묘전 스님이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미륵전을 중창하였다. 이보다 앞선 1602년(선조 35) 터만 남은 곳에서 홀연히 미륵불의 얼굴 반쪽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신령한 일이라 초막을 짓고 봉안하였다가 이때 비로소 미륵전을 중건하여 여법하게 봉안한 것이다.
다시 1637년(인조 15년)에 인흡 스님이 중건하였고, 1714년(숙종 40)에는 명학 스님이 사재를 내어 전각과 불상을 중수하였다. 그 뒤 1889년(고종 26)에 의룡(義龍) 스님이 중창한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범어사 미륵전 미륵불]
안에는 목조 미륵불좌상을 독존으로 봉안하였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미륵전에 4위의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즉 서남북쪽의 3위는 석조였고, 동쪽의 1위만 목조였다. 석조 미륵은 모두 없어졌으나 목조 미륵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수인은 아미타인을 취하였고, 상호는 전반적으로 경직된 모습이다. 즉 가늘게 뜬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긴장감이 엿보인다. 목조불의 장점인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도금으로 인해 다소 반감되었다.
머리의 육계는 둥글고, 계주(珠)를 강조하였다. 계주 위에는 나발(螺髮)을 나타냈는데, 이는 양쪽 귓불과 엄지손가락에도 있어 이채롭다. 목은 짧고 풍만한 가슴에는 어깨에서 내려오는 통견(通肩)의 법의가 감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앞으로 약간 숙인 상반신, 자연스런 손가락의 굴곡 등에서 조선 후기 중에서도 대략 18세기 이후의 양식을 지녔다고 하겠다.
[범어사 미륵전 불화]
미륵불은 특이하게 정면 즉, 입구 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벽을 등지고 대웅전을 향해 앉아 있다. 이는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미륵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고, 이 때문에 일본을 등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범어사 대웅전]
ㅇ 범어사 대웅전 - 보물 제434호
대웅전(大雄殿)은 범어사 가람의 중심으로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절의 창건과 함께 대웅전이 들어섰을 것이나,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기록에 처음 보이는 대웅전은 1614년 묘전 스님이 가람을 중창하면서부터다. 아마도 이 때의 대웅전 불사는 임진왜란 때 절이 전소되었다고 하므로 중수 정도의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건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후 1713년에 흥보(興寶) 스님이 주관하여 중건, 단청하였고, 1720년(숙종 46)에 대준(大俊)우화(祐和) 스님 등이 편수로서 석계(石階)를 수리하고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그 뒤 1814년에 개와, 1871년에 단청이 이루어졌다
이후에는 큰 중수 없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따라서 대웅전은 1614년의 창건과 1713년의 대대적 중건을 거치면서 조선 중기 이전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즉 조선 중기 이래의 간결하고 힘찬 다포식 건축의 양식적 특성과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어서 보물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양식이다. 대규모의 건물에는 보통 팔작지붕을 올려 시각적으로 건물의 중량감을 감소시키지만, 예외적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대웅전의 맞배지붕 양식은 다른 전각에도 영향을 미처 범어사에는 유난히 맞배지붕 건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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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의 외벽은 단청을 하지 않은 목재 재질 그대로이다. 대부분의 전각이 불국토의 세계를 장엄한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또 목재를 보호한다는 기능적 측면에서 단청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범어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해지고 또 고졸한 품격이 느껴져 더욱 소중하게 보인다.
내부의 불단에는 여러 가지 화문과 비천상(飛天像)들을 화려하게 조각, 장식하였다. 그 위의 닫집은 아자(亞字)형 평면에 다포식 지붕을 올렸는데, 운룡(雲龍)과 극락조, 비천상 등을 조각하였다. 그 섬세한 조각기법이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한편 동서의 내벽 위쪽에는 동방의 약사삼존과 서방의 아미타삼존을 벽화로 그려 본존인 석가여래와 함께 삼계여래(三界如來)의 불국토를 장엄하였다.
ㅇ 범어사 삼층석탑 - 보물 제250호
미륵전 앞에 있는데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 높이는 약 4m이고, 상하의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하층기단은 각 면에 세 개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탱주(柱)는 없다. 상층기단은 중석(中石)을 높게 하고 각 면석에 역시 안상을 크게 조각하였다.
1층 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급격한 경사를 지녔고, 끝에서 살짝 위로 솟았다. 옥개받침은 4단인데 평평하고 얇아 신라 하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상륜부는 사라졌으나 후대에 노반과 보주를 얹어 놓았다.
한편, 기단 아래에는 조성 당시에는 없었던 석단을 추가하여 석탑을 높였으나, 그로 인해 안정감이 부족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신라 후기 9세기의 석탑 양식을 잘 지니고 있어 보물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앞 금고]
대웅전에 오르는 돌계단과 기단에는 각각 동백꽃과 동백나무 가지를 조각하여 불국토의 아름다움을 장엄하였다. 계단의 소맷돌에는 해학이 묻어나는 해태상을 세워 화재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정면의 왼쪽 문 앞에는 1862년에 조성한 금고가 있다. 바깔 지름 90㎝, 안지름 71㎝, 두께 15㎝, 크기의 대형 금고로서 좌우 측면에 점각(點刻)으로 간지와 시주자의 이름을 새겼다.
[대웅전 앞 소맷돌]
[범어사 대웅전 좌측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