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끄신 하느님, 나의 신앙 여정(1)이 너무 길어 소분하여 다시 올립니다.)
나를 이끄신 하느님, 나의 신앙 여정(1-1)
<출생>
1943년 2월 5일, 43세의 엄마가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조산(早産)을 했다. 딸이었다. 입덧이 심하여 임신 기간 중에 제대로 음식 섭취를 못한 산모는 아기를 낳자마자 혼절을 했고, 한 손에 쥐어질 만큼 밖에 안 되는 작은 아기는 역시 죽은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지금 같은 세상이었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을 것이고, 몸무게도 달아봤을 것이고, 전문 의료진의 손에 맡겨졌을 아기였다.
아기는 감기에 걸리더니 폐렴이 되었다. 이 아기가 온전히 살아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의사가 왕진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아기의 가느다란 팔뚝에 주사를 놨다.
얼마나 많이 주사를 맞았는지 아기의 팔뚝이 썩어들었다. 아버지는 움푹 들어간 아기 팔뚝을 소독하고 수시로 새로운 거즈를 집어넣었다. 지금까지도 팔뚝에는 그 때의 상처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아기를 낳았다고는 하나 엄마에게서는 젖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우유나 분유도 귀하기 어려운 때였다.
젖 한 모금 줄 수 없는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지극 정성으로 이유식을 만드셨다. 미음, 암죽을 받아먹으며 아기는 생명을 이어 갔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태어난 날의 성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음력 정월에 태어났다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정자(正子) 보다, 26세 때 내 손으로 고친 현진(玹鎭) 보다 37세 때 얻은 ‘아가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살게 된다.
<부모님>
막내인 나는 우리 어머니가 언제부터 절에 다니셨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초등학생 때 불경을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고 매일 외우셨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반야심경, 신경, 천수경을 내가 먼저 외워서 어머니께 가르쳐드렸다. ‘보월화’라는 법명도 있으셨다.
어머니는 음력 24일 관음재일이면 먹물들인 한복으로 차려입고 종로에 있는 조계사로 가셨다. 둘째 딸을 사고로, 넷째 딸을 병으로 잃으신 극한의 슬픔과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또한 폐결핵을 앓고 있는 작은 아들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으로 부처님께 의지하고 정성을 다하셨다.
아버지는 절에 규칙적으로 다니지는 않으셨지만 불교를 믿으셨다. 불교서적을 읽으셨고, 가끔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가시어 청담스님과 월주스님을 만나 대화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개신교 대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 문학도 수강했고, 일주일에 세 번씩 대강에서 열리는 예배시간에 참석했음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작은 오빠>
내가 태어났을 때 작은 오빠는 18살이었다. 본래 병약하셨던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애비가 이 아이 클 때까지 살지 모르겠구나. 네가 이 아이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열여덟 어린 아들에게 갓 태어난 막내딸을 부탁하셨던 아버지는 병약하신 몸으로 여든다섯 살까지 사시면서 당신이 마흔 세 살에 얻은 막내딸이 세 아이의 어미가 될 때까지 지극한 사랑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셨지만, 오빠는 1978년, 53세로 아버지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막내 동생인 나를 유난히도 사랑해 주었던 작은 오빠가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오빠 나이 23세 때부터였다. 서울 농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안양에 있는 가축 위생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천성이 외곬이었던 오빠는 밤을 낮으로 삼아 연구에 골몰하였다. 과로가 신체의 저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은 결핵균의 침범을 받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약을 복용하던 중 6.25 동란을 맞았다. 전쟁 통에 치료와 안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러는 동안 병은 계속 진행되었다.
직장을 쉬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부모님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기침 미열 각혈에 시달리며 홀로 외롭게 투병하던 중 오빠는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오빠 나이 33세 때였다.
그 당시 폐에는 크고 작은 동공이 여러 개 생겨 있었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폐 절제 수술도 신체 쇠약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빠는 결국 고집을 꺾고, 웃으면서 그러나 깊은 절망을 안고 35세 때에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
<오빠의 긴 투병생활, 거룩한 여행>
모질게도 긴 병상의 삶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한 번 자리에 눕자 두 평짜리 작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 보지 못하고 지냈다. 안정을 해야 된다 하여 식사도 누워서 했고, 대소변도 받아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결핵환자는 꼭 그런 식으로 누워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방법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섭생을 잘 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도 환자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당장에 필요한 것은 절대 안정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번 자리에 누운 오빠는 일어나서 앉아보지도 걸어보지도 못한 채로 18년을 살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정신은 명료했다. 전염의 우려가 있다며 가족과도 격리되어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집으로 오빠는 옮겨졌다. 늙으신 어머니가 그 모든 시중을 홀로 드셨다.
상경 후 얼마동안은 안양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오빠는 그곳에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박봉의 주머니를 털어 남에게 베풀며 살았다고 한다. 가난한 학생의 학비를 대주는 등 불우한 동료와 주민을 도왔다. 자신을 위해서는 쓸 돈이 없었는지 오빠가 늘 낡은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시간이 감에 따라 자연 오빠를 찾는 주위의 발길도 뜸 해졌다. 적막하고 단조로운 나날 속에 항상 누워만 있었지만 나름대로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살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그렇게 오래 목숨이 이어지는 것이 기적이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오빠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평화였다. 그 오랜 세월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환자 특유의 짜증도 없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 네 오라비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성불한 사람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봉성체를 위해 신부님과 신자들의 방문이 있었다. 신부님을 모시고 온 구역식구들도 오빠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곤 했다. 워낙에는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사람이었는데 병상의 오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예수님 성모님께서는 오빠에게 무슨 일을 하셨던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이런 일이 한번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빠의 신비체험이었는지 약물 부작용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오빠가 서울로 와서 아직 우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였다. 올케언니가 나를 부르더니 “작은 아씨, 삼촌이 이상하세요. 좀 올라가 보세요.”했다. 내가 얼른 오빠 방으로 가보니 항상 누워만 있던 오빠가 무슨 기운이 났는지 일어서서 성모상을 쓰다듬으며 엉엉 울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평소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진 오빠를 보고 놀란 나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살고 있던 큰 언니에게로 달려갔다. 언니를 보자 흑흑 느껴 울며 “오빠가! 오빠가!”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래? 왜 그래? 영진이가 죽었니?” 물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아니, 오빠가 미쳤어!” 하였다. 허둥지둥 집으로 온 언니는 이상해진 오빠를 보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박사인 당신 조카를 오라고 하여 오빠의 이런 행동에 대해 상담을 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사촌 오빠는 최근에 새로 들기 시작한 약물에 의한 환각 증세 같다고 말하였다. ‘싸이클로쎄린’이라는 신약이 원인이었을 거라는 결론이 나자 앞으로 이 약은 복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가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몰라도 오빠의 흥분상태는 갈아 앉았고 그 이후로 오빠는 더 이상 어떤 정신과적인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평온해 진 것 같았다.
오빠는 그날의 일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단지 성화가 그려져 있는 작은 접시를 내게 주며 잘 간직 하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날 성모상에서 빛이 나와 그리로 들어갔다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 접시는 한 동안 내가 갖고 있다가 잘못해서 그만 깨뜨리게 되었고 미련 없이 나는 그것을 버렸다. 오빠가 한 말을 내가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해서 충신동에서 살고 있던 작은 언니는 오빠의 약 심부름을 주로 하였고, 나는 오빠 부탁으로 명동성당에 가서 경향잡지 등 교회서적들을 사다 주었다. 그 중 더러는 읽어보라고 오빠가 책을 내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추어만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곤 했다. 오빠는 내게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오빠의 신앙을 내 것으로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