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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두 사자 비유 애가(1-9절)
오늘 본문은 두 사자의 비유와 한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통해 유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모습은 비극 중에서도 비극입니다. 1-9절은 두 사자의 비유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들(16-20대)
16대, 요시야
17대, 여호아하스(살룸) : 요시야의 셋째 아들, 등극 3개월 만에 애굽왕 느고에 의해 폐위
18대, 여호야김(엘리야김) : 요시야의 둘째 아들, 11년 통치. 1차 포로가 일어남(다니엘 끌려감)
19대, 여호야긴(여고냐, 고니야) : 여호야김의 아들, 3개월 통치, 바빌론으로 끌려가 37년간 감금 생활.
20대, 시드기야 : 요시야의 넷째(막내) 아들 11년 통치, 두 눈이 뽑힌 때 사슬에 결박되어 바빌론 포로됨.
(1) 너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고관들’은 ‘장관이나 장군과 같은 귀족들’을 의미하지 않고, ‘왕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다에는 모두 20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마지막 5왕(16-20대)은 16대 왕인 ‘요시야’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시야왕에게는 모두 4명의 아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아하스(살룸), 시드기야가 있었습니다. 첫째아들 요하난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네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16대 왕인 요시야를 이어서 그의 셋째 아들인 여호아하스(살룸)가 17대 왕 위에 올랐고, 다음은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이 18대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19대 왕으로는 여호야김의 아들이자 요시야의 손자인 여호야긴이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요시야의 막내아들인 시드기야가 20대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⑰요시야의 셋째 아들이자 유다의 17대 왕인 여호아하스(살룸)는 첫째와 둘째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기대를 한몸에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조상들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다가 등극한 지 3개월 만에 애굽왕 느고에 의해 폐위되었고, 애굽으로 끌려가서 거기에서 죽었습니다.
⑱요시야의 둘째 아들이자 유다의 18대 왕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은 11년간 다스렸지만 지만, 그의 통치 때에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서 수많은 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끌려갔는데, 그것이 1차 포로입니다.
⑲여호야김의 아들(요시야의 손자)이자, 유다의 19대 왕인 여호야긴(여고냐, 고니야)도 불과 3개월간 통치하면서도, 조상들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다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무려 37년 동안이나 감금 생활을 했습니다.
⑳요시야의 넷째(막내) 아들이자, 유다의 20대 왕인 시드기야는 11년간 통치했지만, 그는 자식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도 두 눈이 뽑히고, 놋사슬에 결박당하여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라는 비극적인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중에서, 1-4절은 유다의 17대 왕인 여호아하스에 대한 애가이고, 5-9절은 19대 왕인 여호야긴에 대한 애가입니다.
(2-3) 부르라 네 어머니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에 엎드려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17대 왕인 여호아하스의 어머니는 암사자라고 자문자답합니다. 어머니가 사자이면, 아들도 당연하게 사자입니다. 흔히 사자를 ‘백수의 제왕’이라고 하듯이, 여호아하스왕을 사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자에 비유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자에 비유하면 예수님을 피조물, 그것도 동물에 비유했다고 불경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예수님을 사자에 비유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사자’인 ‘아슬란’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인 유다가 사자 새끼들 중에 하나를 젊은 사자_건장한 사자로 키웠다고 합니다. 사자가 다 자라면 다른 동물들 위에 군림할 수 있지만 어릴 때는 다른 동물들처럼 연약합니다. 어미 사자가 사냥하러 갈 때 걱정거리 중에 하나는 아주 어린 사자들입니다. 좀 크면 데리고 다니지만, 그전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기고 갑니다. 그러다가 하이에나나 들개 떼를 만나면, 아주 어린 사자들은 물려 죽습니다. 하이에나나 들개들이 미래에 자신들이 당할 공격을 미리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자, 17대 왕 여호아하스는 사자가 자기 먹이를 잡아서 물어뜯듯이, 사람을 잔혹하게 물어뜯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사람들에게 할 수 없는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4)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젊은 사자인 여호아하스를 이방(애굽)이 듣고, 함정에 빠뜨려 잡고는 갈고리로 꿰어 애굽으로 끌고 갔다고 말씀합니다. ‘갈고리로 궤다’는 말은 물고기를 잡아서 아가미에 고리를 꿰어놓거나, 소나 돼지를 잡아서 그 커다란 고깃덩이를 보관소 천장에 걸어놓은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호아하스는 그렇게 비참하게 애굽으로 끌려간다고 하십니다.
여호아하스는 23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왕은 31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태어나기 8년 전부터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아버지가 어떻게 통치하는지를 다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도 보았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선정을 베푸는지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백성들을 자기 먹잇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여호아하스를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통해서 징계하셨습니다.
(5-7)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웠더니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에 왕래하며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그의 궁궐들을 헐고 성읍들을 부수니 그 우는 소리로 말미암아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황폐한지라
이것은 유다의 19대 왕인 여호야긴에 대한 비유입니다. 여호아하스가 끌려가고, 여호야김이 통치했습니다. 혹시라도 해서 여호아하스를 기다렸지만, ‘혹시나?’는 언제나 ‘역시나!’였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여호아하스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자 새끼를 키웠다고 합니다. 여호야긴입니다. 그가 크고 나니, 여호아하스의 복사판이었습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긴은 똑같이 3개월을 통치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지 아니하고, 먹잇감으로 여겨 잔혹하게 물어뜯는 것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8-9) 이방이 포위하고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우리에 넣고 갈고리를 꿰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 그 소리가 다시 이스라엘산에 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호야긴도 여호아하스처럼 똑같이 함정에 빠지고, 갈고리에 꿰인 상태로 끌려갔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갔고, 여호야긴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서 무려 37년 동안이나 감금 생활을 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포도나무 가지 비유 애가(10-14절)
1-9절이 두 사자에 관한 비유였다면, 10-14절은 한 포도나무 가지에 대한 비유인데,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몰락을 예언하는 애가입니다.
(10) 네 피의 어머니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유다를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 가에 심겨졌기 때문에 당연하게 물이 풍부하니까 열매가 많고, 가지도 풍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물 가에서 저절로 자생한 것이 아니라, ‘물가에 심겨졌다’라고 합니다. 유다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밀가루 반죽이 발효하여 부풀릴 수 있는 것은 밀가루 자체에 그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누룩을 통해서입니다. 누룩이 없다면 밀가루 반죽은 시간이 지나도 부풀어 오르지도 않고, 그 성질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유다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를 목이 터져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11-13) 그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에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에서 뛰어나 보이다가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 바 되고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는 한 때, 가지들이 뻗어 나갈 만큼 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지 하나가 굵고 다른 큰 가지들보다 더 높이 솟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드기야왕의 교만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고 강건하게 보이는 포도나무가 뿌리가 뽑혀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나니까 상황이 급변하고 말았습니다. ‘동풍’은 북아프리카에 불어오는 아주 건조한 사막 열풍_시로코(sirocco)입니다. 이 동풍은 요나 선지자에게 그늘을 제공했던 박넝쿨을 하룻밤에 말라버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 동풍이 불어오니 열매가 말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6·25전쟁 때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썼듯이, 동쪽에서 엄청나게 몰려오는 바빌론의 군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가지들이 꺾이고 말라 불에 탔다고 하는 것은 유다 왕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전의 유다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와 같았지만, 이제는 가물(가뭄)이 들어 바짝 말라버린 땅에 심겨진 것과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빌론 포로가 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 가지(시드기야)가 교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14)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큰 가지에서 불이 나와서 그 가지와 열매를 불에 태운다고 하는 것은 시드기야가 왕으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규(통치권을 상징)가 될만한 강한 가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왕이 될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입니다. 그래서 ‘애가’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관(왕)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으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시작도 애가이고, 끝도 애가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참 슬픕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애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다가 비극적인 애가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가나안에 땅을 사 두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을 얻게 하시고, 그들이 채우지 않았을지라도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한 집에서 살게 해 주시고, 그들이 파지도 않은 우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심지도 않은 포도밭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되어서 배불리 먹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때 단 한 가지,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것을 어기고, 우상들을 섬기며, 이방의 가치관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지면에서 멸절하게 하실 것이라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반복하여, 불순종하고,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만들었던 사울왕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사울처럼 여호아하스, 여호야긴, 시드기야도 자신이 작은 존재인 것을 거부하고 큰 존재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들 자신에게는 자기 자신과 유다를 제대로 꾸려갈 능력이 없음에도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변질되고 나니까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고, 변화된 삶, 더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는 있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이 ‘애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아가(雅歌)_아름다운 노래, 노래 중의 노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의 마지막 4명의 왕의 이야기는 참 슬픈 노래와도 같습니다. 그들은 불과 각각 3개월과 11년씩 통치했을지라도 영원의 시각에서는 한 점에 불과한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이웃 나라의 힘을 더 의존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생각하여 무자비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삶이 자신의 인생을 ‘애가’로 만들어 애굽에서 또 바빌론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애가로 만들고, 미래도 애가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강한 가지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과 교만한 마음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물 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을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가며, 우리의 삶과 믿음을 변화시켜가는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넣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누룩에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애가’가 아니라 ‘아가’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남은 인생도 그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