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창 밖으로 낡은 가옥이 스쳐 지나간다. 30년 간 묵은 때가 공장 건물과 기와 지붕 위로 흐른다. 굴다리 밑으로 지나는 청량리 2호선 전철 위로 왕십리 유행가 가락이 흐른다. 점집과 철학관 너머로 재개발 주택단지란 현수막도 보인다.
근 30년 간 가장 변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그건 왕십리일 것이다. 미아리 길음시장과 삼양동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지 이미 십 년도 훨씬 넘어버렸다. 이제 왕십리가 그 마지막 배턴을 넘겨받아 재개발에 들어간 것이다.
거리는 기계 공구를 만드는 공장과 철물점, 선반 밀링 등 간판들로 빼곡이 들어 차 있다. 지붕 낮은 가옥들은 30년 전 기억을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28년 전 일이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나는 그 거리를 지나며 신나게 7080 노래를 불렀었다. 나 어떡해 나 어떡해애애애…….
세상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데모대의 물결로 아수라장인데 나는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왕십리를 떠난 버스가 행당동 입구에 들어서고 있다. 육중한 대학 건물이 사선(斜線)으로 들어온다. 도로 왼쪽으로 보이던 건물들이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도로가 넓혀지면서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신 그 옆으로 고급스런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다. 외양부터가 화려해 보이는 고급 음식점과 수입 의류상가와 컴퓨터 전문점이 보인다. 사근동으로 빠지는 골목 옆으로 대학 병원 후문이 보인다. 비탈진 오르막길이다.
옆으로 눈을 돌리는데 영안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 이상하다. 옛날에는 없었는데. 하긴 벌써 30년 세월이다. 그때는 캠퍼스 전체가 숲으로 우거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학 정문에서 인문관으로 오를 때면 왼쪽은 아예 숲 자체였었다. 인문관 뒤로도 숲이 우거져 호랑이가 새끼치게 되었다고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너스레를 떨었었다.
학생관 위로는 105개 계단이 공대 건물과 맞물려 있었다. 그 앞으로 대학원 건물이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 대학원 건물 위로 난 사범대학을 다녔다. 벌써 28년 전 일이다.
사범대학 건물에서 한참을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음대 건물이 보이고 그 앞으로 대운동장이 있었다. ROTC 학군단이 그곳에서 사열을 벌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그곳에 화려하고도 웅장한 건물이 들어서 버렸다. 언 듯 보아 무슨 과학 센터 같다. 거기서 한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대학 병원이다. 학생 때 나는 그 건물을 두어 차례 갔었다. 30프로 할인해 준다는 말에 솔깃해 간 것이다. 지금 나는 그곳을 비통한 심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28년 전 그러니까 내가 이 대학에 막 들어왔을 때 만났던 남학생이 입원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살기 힘들다는 암병동이다. 5-6년 전인가. 신촌에 있는 병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암 정밀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위에 직경 6밀리의 혹이 발견됐는데 캔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실체가 그때처럼 확실하게 와 닿은 적이 없었다.
다행히 혹으로 판명돼 초음파로 완치가 됐었다. 검사 결과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가슴이 쩌릿쩌릿해 암이 아닌가 지레 겁먹었었다. 그런데 막상 암이 아니라고 하자 마음이 싹 바뀌었다. 길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죽음이 시시해진 것이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사할 수가 없었다.
암병동은 새로 생긴 건물에 있다. 바로 지하에 영안실이 있다. 나는 암병동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발걸음을 디민다. 8층을 누르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6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침대에 누운 환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다. 코에 투명한 관이 연결된 걸 보니 중환자인 모양이다. 목발을 짚은 젊은이가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8층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아마도 문병 온 사람들 같다.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진다.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휘일체어에 앉은 환자가 복도 양쪽을 오가고 있다. 삶이란 짧은 단어가 저들 머리 위를 맴도는 것 같다. 나는 긴 복도 끝에 있는 병실로 다가간다. 손끝이 덜덜 떨린다. 815호실. 문 앞에 환자 이름이 보인다. 윤대식.
손잡이를 돌리는데 손끝에 경련이 인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스무 살 캠퍼스를 오가던 나이 어린 여자가 그때 만난 첫사랑의 남자를 죽음 직전에 해후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서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동 운명체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만나는 죽음을…… 서로 모른 체하다 만날 뿐이다. 그는 남보다 조금 앞서 만날 뿐이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흔한 말이 떠오른다.
삶의 순서와 죽음의 순서는 그렇게 다른 모양이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작가다운 상상 앞에 나는 가슴이 패이는 것처럼 아프다. 병실은 고요하다. 침대에 누인 육신이 삶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듯 정적감마저 흐른다. 눈물이 나요, 난 원래 두려움이 많거든요.
언젠가 봄날 목련꽃이 만개한 캠퍼스를 걷다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의 군 입대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때 그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래봐야 삼 년인 걸 뭐. 그 삼 년이 삼십 년 세월이 될 줄이야. 삼십 년의 세월이 내 가슴을 치받고 있다. 침대 아래에 붙여 놓은 환자 이름을 읽으며 나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 창가 쪽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왔니?"
그 소리에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앙상한 손이 내 스커트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다.
"어쩌다 어쩌다……."
검게 타들어 간 얼굴색이 나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있다.
"고맙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도대체 어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혜미야, 나 그동안 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꼭 꿈만 같다."
"저도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을게, 그냥 고맙다, 이렇게 찾아와 준 것에 대해서."
그는 숨이 차는지 잠시 말을 멎었다.
"고맙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구나."
저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그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새어 나오지 않는다.
"병원에서 간암 말기라고 하는데 제일 먼저 니 생각이 떠오르더라. 보고 싶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어떡하면 니 얼굴을 볼까.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죽음이라는 핑계를 대고 만나게 되는구나. 혜미야 나 그동안 살면서 니 생각 많이 했다. 나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내 가슴은 또다시 스무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유아발상적인 유치찬란한 내 사고(思考) 수준을 그는 잘 이해해 주었었다.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2학년 정혜미. 그녀는 아이큐 숫자가 두 자리도 안 됐던 모양이다. 공부야 어영부영 따라 잡을 수 있었지만 정서(情緖)는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도서관에 처박혀 동화책이나 줄창 읽어대던, 그런 내 모습을 동급생들은 유치원생이라 불렀다.
우유에 빨대를 꽃고서 초콜렛과 함께 먹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장면을 좋아해 점심은 늘 학교 뒷문에 난 중국음식점에 가 해결했다. 그때 내 등뒤에서 음식값 계산을 하던 사람이 그였다. 그나마 그가 군대로 숨어버린 뒤에는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했지만.
"왜 이제야 나타났어요. 난 난."
"넌 여전하구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안 변하긴요, 이제 중년인 걸요."
"몸은 건강하지?"
"네."
"인생은 누구나 한번 왔다 가는 것, 누가 먼저 가고 늦게 가는가, 그 차이 뿐이라고 하더라, 글은 여전히 잘 되고."
"그저 그래요."
"그나저나 걱정이겠구나, 요즘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하느라 책을 안 사본다고 하 던데."
"괜찮아요, 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아요. 동생이 사업이 잘 돼서."
"그래 다행이구나. 혜미야 그동안 삼십 년이란 세월이 우리 앞을 흘러갔구나, 강산이 세 번은 변했어."
"요즘은 오 년마다 강산이 변한대요."
"그렇지, 그동안 나 원망 많이 했지."
"아뇨, 언젠가 지금처럼 만날 거라 생각하고 살았어요. 전 아직도 정신 연령이 그때 수준인 걸요."
"그때? 그때 너는 유치원생 아니었던가."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잡는다.
"많이 웃으세요, 엔돌핀이 돌면 암세포는 금새 죽는데요."
"그래 그래선지 지금 내 몸속에서 엔돌핀이 펑펑 솟는 것 같구나."
그는 숨이 가쁜지 숨을 몰아 쉬다 내 손을 놓는다. 나는 겁이 더럭 난다. 죽음의 사신이 그를 만나러 온 것인가. 오! 주여, 하나님.
언제 들어왔는지 간호사가 그에게 다가가 혈압을 체크한다. 그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혜미야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럼요, 우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걸요."
"그래, 우린 잠시 떨어져 있는 것 뿐이야, 천국에서 만나면 다시 헤어지지 말자."
그와 나는 손가락을 걸고 맹세한다.
"환자에게 말을 많이 시키지 마세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간호사가 내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내일 다시 올게요."
"혜미야……."
나는 솟구치는 울음을 참으며 병실을 빠져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동 밖으로 나왔다. 병동 밖은 온통 삶의 전장터다. 밀집된 주택가가 상가 건물과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도심 군락을 이루고 있다. 생존의 기운이 봄기운과 함께 사람들 발걸음마다 묻어나고 있다. 비탈길을 내려 대학 정문을 향하는데 오른쪽으로 영안실이 보인다. 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저 영안실로 가겠지.
삶의 마지막 관문을 저기서 치르고 영원히 못 돌아올 길을 향해 떠나겠지. 봄기운에 지친 나는 그만 길거리에 눕고 싶어진다. 허공에 온통 삼십 년이란 단어가 떠 다니는 것 같다. 그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이젠 노처녀란 단어 대신 독신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동안 삶이란 단어 대신 죽음이란 단어에 더 집착하며 살아온 것 같다. 아니 죽음을 목표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강이 요단강이라고 한다. 꿈에서 요단강을 건너면 죽는다고 내 어머니가 말했었다. 그래 나는 그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것이다. 20년 전 일이다. 집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뇌와 뼈 장기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나를 치인 운전자는 완전 초보였다. 이제 막 시내 연수를 끝낸 애송이 여대생이었다. 남자 친구의 차를 끌고 나왔다가 나를 치는 바람에 유치장 신세까지 진 운 나쁜 여자애였다. 그녀는 갑자기 차도로 뛰어든 나를 보자 당황한 나머지 엑셀을 밟아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그때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나는 거의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다. 문제는 살아난 뒤에 있었다. 뇌의 기능에 이상이 온 것이다.
기질적 뇌 증후군이라 했다. 기억력의 혼동에 이상이 오면서 나는 심각한 자폐 현상을 일으켰다. 과거와 현재가 기억 속에서 수렁을 헤매면서 정신체계에 이상이 발생한 것이다. 다만 아직 인지(認知) 능력은 살아 있어 생활하는데 불편은 없었다. 꾸준한 정신과 치료 끝에 증상은 호전되는 듯했으나 그야말로 풍전등화처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떨 땐 말짱했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는 충격적으로 재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도 다니다 말다를 번복했다. 다행이 내 집안은 인맥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그 어렵다는 교직원 채용 시험을 한번도 거치지도 않고 취직이 되었고 그마저 힘들면 학원 강사로 취직했다.
백수 신세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신의 가호였다. 외부적으로 나는 직장인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내 증상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이 숨바꼭질하듯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가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내 정신 속에서 나를 늘 부추기고 있었다. 정혜미 유치원생.
대학 2학년의 나이에 동화책과 우유와 초콜렛을 먹는 덜 떨어진 여대생. 정혜미. 그녀 곁에 선 잘생긴 공대생 남학생 윤대식.
나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마다 요단강을 건너고 싶었다.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조차 내 증상을 정확히 눈치 채지 못했다. 겉보기에 멀쩡하니까 괜찮지 싶은 모양이었다. 갈등이 심할수록 나는 글에 매달렸다. 글밖에 나의 증상을 호소할 데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등단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에게도 내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몇 년 전엔가 바람결에 그의 소식을 들었었다. 그 역시 세월의 뒤편에 밀려나 고난의 여정 중에 있음을. 그리고 그가 나의 독자라는 사실을.
그 30년이란 세월이 그와 나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내 책은 출간되자마자 운 좋게 잘 팔려 나갔다. 정말이지 그건 행운이었다. 그 흔한 광고 한번 안 하는데도 독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사 가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 지긋지긋한 직장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안심하고 창작에만 몰입하게 된 것이다. 또 남동생의 사업이 번창하는 바람에 아예 돈 걱정은 않고 살았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엄청 흘러가 버렸다. 나이 오십이 바로 코앞에 닥친 것이다. 그러나 창작열 앞에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창작이라는 울타리는 세월도 나이도 다 입막음해 주었다.
그럴지라도 죽음에의 유혹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창작의 그늘 아래 가려진 우울증. 그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창작의 고통에 따르는 우울의 빈도를. 과학적 증거로도 창작과 우울은 비례로 나타나고 있다. 때에 따라 우울은 자살충동으로 이어진다. 유명한 문학가나 예술인들이 짧은 삶을 마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창작의 세월 동안에도 나는 요단강을 서너 차례 갔다 온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럴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여전히 어린 아이다. 남편을 섬겨 보지 않고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여자는 엄격히 말해 여자가 아니라고 한 우스개 소리가 있다. 왜냐하면 여자로서의 신체적 기능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책임감에서 벗어난다. 오직 자신만 책임지면 된다. 모든 결정을 혼자서 하고 매사에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오로지 자기 안위만 걱정한다.
눈 한번 질끈 감고 났더니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아! 정말 눈 한번 감고 났더니 세월이 30년이나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경쟁구도는 더욱 치열해졌는데 태도는 친절해졌다. 살기가 여유로워짐에 따라 서비스 정신이 향상된 것이다. 일례로 요즘은 버스를 타면 운전기사들이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30년 전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버스 차장이 있어서 일일이 차비를 주고받았다. 그것도 시내버스와 좌석버스가 있어 거기에서부터 빈부차이가 났다.
나중에는 토큰제로 바뀌면서 차장들은 실직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다 토큰제에 문제가 발생했다. 토큰이 아닌 동그란 쇠붙이를 넣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개씩 발견되는 바람에 지금의 교통버스카드가 등장하게 되었다. 급격히 몰아닥친 서양문물로 도덕적 가치는 땅에 떨어져 무도덕 시대가 되었고 자연은 더욱 심각하게 훼손돼 지구 종말론이 공공연히 회자되었다.
북극곰이 사라지고 빙하가 녹아 없어지는 세기말적 종말론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신의 고유 영역인 생명복제와 함께 인터넷의 무한 경쟁시대가 대두되었고 취직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만치 힘들게 되었다. 과학만능주의는 한계치에 도달하는 듯했으나 그건 순전히 오산이고 착각이었다. 언젠가부터 내 주변 인물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병고로 사고(事故)로 요단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그에 따라 내 의식(意識)도 점점 공동(空洞)화되는 것 같았다. 이제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는 나와 남동생뿐이다.
대학 친구들 중에도 나와 정경이만 남고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암병동에서 최후를 맞았다. 죽음의 단말마 고통을 난 똑똑히 목도하였다. 체중이 25kg까지 빠지고 온몸에 진액이 다 빠진 연후에 비로소 죽음이 찾아오는…… 그건 가히 형벌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의 절친한 교우들이었다. 유치원생으로 불리는 나의 부족한 정서수준을 그들은 탓하지 않고 받아준 고마운 은인들이었다. 나의 부족한 점을 감싸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천사들이었다.
그런 천사들을 세상은 등 떠미는 모양이었다. 생전 남에게 해코지는커녕 싫은 소리 할 줄도 모르는 그녀들을 그것도 그 끔찍한 병고로 세상을 등지게 한 것이다. 그것도 아직 어린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채로. 민혜는 나이 서른 둘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예경이는 나이 마흔에 열 살 된 아들을 두고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나와 가장 친했던 희영이는 위암으로 빼빼 말라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역시 작년에 폐암으로 아내의 뒤를 따라 천국행 열차를 탔다. 나는 요즘도 암의 징크스에 시달린다. 암 정밀검사와 조직검사를 두 번 받았기 때문이다.
3개월마다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지난달에는 정경이마저 암으로 세상 뜨는 줄 알았었다. 콩팥에 돌이 보이는데 그게 암인지 돌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결석으로 밝혀져 초음파로 깨는데 성공했지만. 정경이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건강 챙기느라 난리다. 그런데 불행은 다른 곳에서 터지고 있었으니 바로 그였다. 그가 간암 말기라는…… 아! 그건 정말이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내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시한폭탄의 뇌관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세상 종말이 따로 없었다. 우울과 죽음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그리움이 분노가 되어 치솟았다. 나는 꿈속에서조차 그와 연인이 되어 보지 못했다. 언제나 철저하게 혼자였다. 체질화된 외로움은 나의 적수이자 친구였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맺은 우군이자 강적이었다. 또한 무감각해진 마음의 공동묘지이자 정신의 분화구였다. 그 분화구 속에 나는 나의 글을 몽땅 쏟아붓고 있었다. 세상은 종말론으로 시끄러워도 경제위기니 가정파탄이니 하는 단어가 뉴스란을 장식해도 나는 허구 속에 내 정신을 들이밀고 있었다.
철저한 현실도피가 내 글에서는 삶의 현장으로 되살아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외로움은 형벌이자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마다 창작은 힘을 받았고 완성물을 내놓았으니까. 그리고 운 좋게도 내 책은 서점에서 잘 팔려 나갔다. 그건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그 기적의 한켠에 내가 알지 못하는 아주 강력한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운명과 삶을 거머쥔 절대주권자였다. 어느날 거리를 걸어가는데 술 취한 남자들이 말했다.
"세상사 내 맘대로 안 되더라."
"팔자라는 게 있긴 있는 모양이더라."
그때였다. 어디선가 복음 성가가 들려왔다.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픔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 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론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난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복병이 숨어 있어 일 분 일 초 이후의 일도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길이라지 않는가. 삶의 무게에 눌려 정신마저 혼미해질 무렵 나는 드디어 피난처를 찾았다. 안식처이자 편안한 잠자리와 같은 곳, 현세는 물론 미래와 내세까지 안전이 보장되는 그곳. 실종된 나의 미래가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눈물의 골짜기와 같은 인생, 누구와 함께 갈 것인가. 가사 내용이 쩌릿쩌릿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는 마장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성동 경찰서 앞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공장지대였던 그곳을 지나며 나는 얼마나 나의 미래를 꿈꾸었던가. 나는 이 다음에 반드시 소외 계층과 약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리라. 버림받은 장애인들을 돕고 더 나아가 여력이 하락한다면 아프리카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영혼들을 섬기리라.
어린 나는 그런 꿈같은 생각을 품고 나의 미래를 설계했었다. 그러다 교통사고롤 인해 순식간에 나의 미래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때는 마장동에 우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 운동장(동대문 운동장의 전신) 뒤로 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마장이 있었다. 지금은 과천 경마장으로 이사 가버렸지만. 그때 나는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경마를 보면서 얼마나 신나 했던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여전히 정신연령이 유치원생이었다. 다소 부족하고 어리숙한 사범대학 학생. 정혜미.
그 정혜미가 지금 소설가가 되어 28년 전의 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버스가 마장동을 지나 경동시장에 닿았다. 한약재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전에는 낮은 집 지붕으로 덮였던 그곳이 지금은 우뚝 솟은 빌딩으로 가득 차있다. 소규모 한약재상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빌딩 속으로 흡수된 모양이다. 옛날에는 그 한켠에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어 한동안 붐볐었는데…… 이젠 다 흘러간 옛 추억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란 단어 앞에 난 무수히 실종된 나의 과거를 바라본다.
그리고 현재라는 단어 앞에 정신을 모아 본다. 현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과거의 결정체이다. 거역할 수 없는 과거의 현장이 성과라는 단어를 가지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나에게 그 성과를 묻고 있다. 내가 소설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생각한다. 팔자가 좋아서 소설이나 쓴다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도 소설 써 봐.
살기가 편해짐에 따라 인심도 세태도 많이 변한 것 같다. 그악스럽던 상인들도 친절문화가 배고 편안함은 이제 문화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했다. 다만 길거리에 늘어선 노점상과 포장마차는 아직도 여전한 것 같다. 경동시장 끝자락의 청량리 시장이 먹구름과 함께 가슴속으로 다가온다. 갑자기 봄기운이 비구름과 합세했는지 비가 뿌려대기 시작한다. 금새 안개 같은 뿌우연 액체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아스팔트 위로 수많은 차량이 물을 뿜어내며 지나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모았다가 흩어진다. 나는 어느새 굴다리 밑을 지나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천사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무료진료 병원이다. 머릿속에서 아슴한 기억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과거의 소망이 기억 한켠에 숨어 내 의식을 반추하고 있다. 천사 건물 벽돌 사이에 내 이름이 보인다. 702번 정혜미. 무의식 속에 잠수되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 언젠가 나도 천사회원이었지.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이 현재의 나를 집중조명하고 있다. 아! 그곳에 환히 떠오르는 웃음이 있다. 그다.
군대 가기 전, 그는 최류탄 가스를 맞고 쓰러진 선배를 병원으로 후송해 준 일이 있었다. 10.26이 발생하기 이틀 전이었다. 선배는 데모를 주동하다 현상수배 된 전 총학생회장이었다. 그의 고교 선배이자 친구의 형이었다고 한다. 선배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혼수상태였다. 최류탄이 뇌를 관통했는지 머리에서 심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급하게 수술에 들어갔으나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함구되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그의 이름이 불랙 리스트에 오른 모양이었다.
아직 군대 갈 때도 되지 않았는데 소집 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그때는 군에서 자주 의문사가 발생하던 시기였다. 어느날 그에게 소식이 끊기더니 30년이란 세월이 그대로 실종되고 말았다. 나는 한때 그의 실종을 두고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골머리를 앓았었다. 아마 그날도 그런 날이었을 게다. 화창한 봄날 집 앞을 나서는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물이 떠올랐다. 강물 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엇엔가 홀린 듯 나는 정신없이 차도로 뛰어들었다.
30년이란 세월 동안 그 역시 험난한 나날을 보냈다. 자신의 망가진 육신을 혼자 끌어안고 괴로워하면서 칩거의 세월을 보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꿈에도 알지 못했었다. 나는 그냥 그가 세월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줄 알았다.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 속에 나 역시 세월에 떠밀려 살아갔으니까. 버스 안에서 트롯트 유행가 가락이 흘러나온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간다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하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랑했지만 갈 길이 달랐다 이별의 시간표대로 떠나야했다 달리는 차창에 비가 내리네 그리움이 가슴을 적시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추억이 나를 울리네.
송대관의 노래에 나는 실성한 듯이 웃는다. 노래 가사 중간 부분이 마음이 가 닿는다. 사랑했지만 갈 길이 달랐다……. 그는 이제 이별의 시간표대로 떠나야 한다? 갑자기 차체가 흔들리면서 차창 밖의 풍경이 색다르게 지나간다. 초록 수풀이 지나더니 강물이 지나간다. 차 바퀴가 레일 위를 지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기차를 탄 걸까. 아니 분명 버스를 탔는데 제기동을 지난 버스가 청량리를 지난 것 같은데……그렇다면 나는 어느새 추억의 열차로 바꿔 탄 걸까.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소망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레일을 지나는 기차는 추억의 그림들을 하나씩 담아내고 있다. 동화책을 읽으면서 우유에 빨대를 꽃아 먹는 여대생. 초콜렛을 들고 먹으면서 누군가를 향해 손짓한다. 학교 교사로 학원강사로 다시 소설가로 거듭난 인생, 정혜미.
그 위에다 윤대식이라는 말기 암 환자의 모습도 지나간다. 30년이란 세월 속에 7080 노래도 들려온다. 나 어떡해 나 어떡해애애애…….
온 캠퍼스를 들썩이며 대학가요제를 개최했던 나의 모교. 그때 임백천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았던가. 나는 그때도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었다. 열차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세월을 회전시키고 있다. 봄꽃의 화려한 색상이 차창 밖으로 지나는가 하면 장맛비에 불어터진 밭고랑이 온통 폐허처럼 보인다. 타오르는 단풍과 눈밭으로 변해버린 세상이 수십 번 차창 밖을 스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소망 종착역이 보인다.
종착역에 이르기 전 지난날 나의 꿈을 뒤적여 본다. 작가가 되기 이전 내가 꾸었던 화려한 꿈의 문양들을. 어린 날 꾸었던 봉사자로서의 미래의 꿈을. 소외 계층과 약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리라. 버림받은 장애인들을 돕고 더 나아가 여력이 허락한다면 아프리카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영혼들을 섬기리라.
답십리 굴다리 옆 천사건물도 생각났다. 열차는 추억의 다리를 건너고 세월의 수레바퀴를 지나 현실로 되돌아 왔다. 죽음이라는 소망의 종착역을 뒤로 한 채. 동네 골목길을 지나고 대문간을 들어선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TV의 화면의 글자가 내 눈을 압박한다.
탈레반에 억류되었던 봉사단원 중 머리에 히잡을 쓴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카메라 앵글이 그들을 비추고 있다. 이어 기자와 인터뷰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인다. 채널을 돌린다. 탈북민들의 실상을 알리는 화면이다. 꽃제비로 불리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고 있다. 미이라처럼 바짝 마른 어린아이는 땅에서 옥수수 알을 주워 입에 올리며 눈물을 커다란 눈동자에 매달고 있다. 누가 저 아이를 돌봐 줄 것인가.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한 영혼이니라. 말씀이 떠오르면서 속에서 연민의 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과거의 한 단상이 떠올랐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무던히 시도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꽃제비라고 불리는 저 불쌍한 어린 영혼 앞에 갑자기 왜 그 일이 떠올랐을까. 꺼질 듯 꺼질 듯 위태한 생명의 움직임 앞에 나의 본성은 울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뭔가 무거운 중압감에 밀려 머리를 들 수 없었다. 다음날도 일어났는데 여전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니 지친 봄기운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원고 재촉 전화일 것이다. 지난달부터 신문에 칼럼 연재하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한 작품도 완성된 게 없었다. 기삿거리는 차고 넘치는데 막상 쓰려니까 일거리가 손에 잡히지가 않는 것이다. 핸드폰이 계속 을려댄다. 모른 척 외면하고 자리에 눕는다. 그러다 나는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불길한 예감이 순간 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설마…… 그가…….
핸드폰 뚜껑을 열자마자 예감은 곧바로 현실이 되어 내 가슴을 조인다. 나는 정신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몸은 땅바닥을 기는 것 같은데 마음은 벌써 병실에 가 있다. 그것도 영안실 입구에. 발걸음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몸이 공중에 붕 솟았다가 바닥에 처박히는 느낌이 든다. 귀에서 수많은 잡음이 들린다.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로 뛰어드는데 순간 아득한 현기증이 인다. 환상이 보인다.
수많은 연인들의 환상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잔뜩 성장(盛粧)을 한 연인들이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샹들리에 불빛이 비추는 곳으로 들어서고 있다. 젊고 아름다운 쌍쌍들의 파티다. 가운데 무대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있었다. 천사 복장을 한 여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서비스하고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나와 천상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무지개빛 화려한 꽃상여를 타고서.
꽃상여? 왜 하필이면 꽃상여일까. 가까이 다가서는데 갑자기 우르르 쾅! 하는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빈 택시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버스를 타는데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된 인질 중 하나가 탈레반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식이었다. 아! 나는 내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탄식소리를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버스가 왕십리로 가는 도중 나는 몇 번이나 까무러칠 뻔했다.
긴장된 가슴이 몇 번이나 심장발작을 일흐켰기 때문이다. 버스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으로 정신이 부서져 흩어지는 것 같다. 왕십리 하늘이 다 없어지는 줄 알았다. 이윽고 버스가 행당동에 닿았다. 발길이 땅에 닿았는지 모르겠다. 걸어가는데 몸이 휘청였다. 공중에 한번 빙 곤두박질 쳤다가 땅에 처박히는 환각을 일으키며 병동 앞에 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몸이 안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내 발길은 815호실 앞에 서있다. 무엇엔가 떠밀린 듯 몸이 안으로 들어선다.
본능적으로 그가 누웠던 자리를 바라본다. 없다. 빈 침대다. 그의 부재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가.
"여기 침대에 누웠던 환자 어디 갔죠?"
내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바로 그의 옆 침대에 있던 환자 보호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어젯밤에 영안실로 내려갔어요, 교인들이 와 마지막 임종 예배드리던데."
그랬구나 그랬구나.
"영안실로 내려가 보세요, 아까도 어떤 여자분이 와서 울면서 내려가던데."
나는 또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다. 순간 분노와 슬픔이 내 머리를 관통하는 것 같다. 느닷없이 신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초월적이고도 신비한 그분의 처사가 이 순간 너무도 원망스럽다. 인생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그분의 주권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영안실로 들어서는 나는 온몸이 오싹하다. 공포스런 분위기가 검정색 톤으로 내 정신을 압박한다. 향불 태우는 냄새에 몸이 놀라 진저리친다. 검은 상복 입은 여인과 상주들의 모습이 보인다. 불경소리와 찬송가 소리도 들린다. 죽음의 형식은 복잡하다. 올 때는 간단히 왔는데 이승을 떠나는 형식은 왜 그리 복잡한가. 죽음이라는 거추장스런 형식 앞에 나는 아연 긴장한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찬송소리가 들려온다.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 믿든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아! 그건 내가 그토록 그리던 나의 최후를 위한 장송곡이었다. 나의 발걸음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저절로 움직였다. 커다란 국화 화환이 입구에 보였다. 교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의 빈소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목사로 보이는 중년남자와 검정색 한복을 입은 여인이 나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누구? 하며 질문을 퍼붓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의 영정이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다.
유치원생 혜미 왔구나.
순간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 철거덕 하고 와 닿았다. 마지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나는 입구에 있는 국화 한송이를 들고서 그에게 다가갔다. 잠시 고개를 숙이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여인이 다가왔다.
"실례지만 고인과 어떤 관계인지."
나는 이상한 예감에 여인을 바라보다 그만 절망감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혹시 정혜미씨?"
"네? 그런데요?"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어린이마냥 가슴이 떨린다.
"우리 대식이가 그토록 찾았는데……."
여인은 뭔가 아쉬운 눈빛으로 내 몸을 훑어 내린다.
"이럴 줄 알았더면 그때 내가 반대를 않았어야 했는데."
그 말끝의 뉘앙스가 몹시 마음에 걸린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지만……."
여인은 결심한 듯 말을 잇는다.
"우리 대식이가 혜미씨와 결혼하겠다고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요."
난생 처음 듣는 소리다. 순간 반가움과 기쁨이 요동친다.
"내가 말렸어요, 혜미씨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마음 고생하는 거 알고서."
그녀의 얼굴은 민망함으로 가득하다.
"이럴 줄 알았더면 그때 말리지나 말 것을."
그렇다면 그가 독신으로 산 이유가 군대에서의 후유증이 아닌, 바로 나 때문?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나는 갑자기 정신이 혼동스럽다.
"내가 그만 지레 겁을 집어먹고서, 무슨 큰 정신병에 걸린 줄 알고 얼마나 반대를 했는지."
여인은 후회인지 자책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아까부터 나를 유심히 살폈던 이유가 바로 그 이유였단 말인가. 예배를 마친 교인들이 빈소를 빠져나가 신발을 신고 있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들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신의 존재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 걸까.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은 그 능력이 어디까지일까. 나는 쓸데없는 질문에 시달리면서 비약적인 상상에 휘말렸다. 천국이란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 사후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걸까.
나는 천국의 의미를 상상하며 영안실을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버스가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면서 왕십리 하늘이 떠나가고 있었다. 나의 20대와 30대를 가슴에 파묻고 이제 마지막 40대의 말미를 남겨두고서, 왕십리 하늘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그와 고별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률이 내 마음속에 들려오고 있었다. 언젠가 들었던 복음성가였다.
'우리 살아 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론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나의 마음은 어느새 어린 날 내 옛꿈을 찾아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자, 그들을 향해 내 발걸음을 바삐 옮기고 있었다. 그 꿈이 나를 미래로, 다시는 후회 않을 미래로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그 미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첫댓글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더라면 어르신들이 이런 아픔을 안 겪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봅니다......사람과 사람사이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누가 일찍 깨닫느냐가 행불행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연인 사이는 그저 멀리서 후원 해주고 지켜 봐주어야 행복이 옵니다...맞나요?
첫댓글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더라면 어르신들이 이런 아픔을 안 겪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봅니다......사람과 사람사이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누가 일찍 깨닫느냐가 행불행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연인 사이는 그저 멀리서 후원 해주고 지켜 봐주어야 행복이 옵니다...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