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역설,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쓰자
2. 한용운의 방법
휠라이트가 말하는 심층적 역설은 종교적 진리와 같이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데 주로 채용되는 역설입니다. 이를테면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진술 자체는 역설입니다. 불교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진리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역설을 채용합니다. 한용운은 시창작에서 역설을 가장 많이 사용한 시인입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님의 침묵」 부분)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 부분)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나는 잊고자」 부분)
만족을 잊고 보면 어떤 것은 불만족이오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만족」 부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알 수 없어요」 부분)
그러므로 대 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선사의 설법」 부분)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반비례」 부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사랑의 끝판」 부분)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천추에 죽지 않을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부분)
감정과 이지가 마주치는 찰나에 인면의 악마와 수심의 천사가 보이려다 사라집니다(「?」 부분)
가려다 오고 오려다 가는 것은 나에게 목숨을 빼앗고 죽음도 주지 않은 것입니다(「차라리」 부분)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떠날 때 님의 얼굴」 부분)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쾌락」 부분)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생의 예술입니다. (「생의 예술」부분)
그러므로 그 삶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행복」 부분)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복종」 부분)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더 짓지 않는 것입니다 (「수의 비밀」 부분)
일정초가 장육금신이 되고 장육금신이 일경초가 됩니다/ 천지는 한보금자리요 만유는 같은 소조입니다(「낙원은 가시덤불 속에서」 부분)
이처럼 한용운은 시에 역설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불교의 경전을 공부하면서 배운 모순어법과 논리적 초월의 상상력을 시에 응용한 것이지요.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참어 펼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품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탕을 끼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화풍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마지막 부분에서 역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화자는 님과 이별한 슬픔을 노래합니다. 밑줄 친 부분이 역설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님의 말소리는 잘 듣고 님의 얼굴은 잘 보아야 하는데도 화자는 자신이 님의 말에 귀먹고 님의 모습에 눈이 멀어서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뒷부분 밑줄은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역설을 통해 화자의 놀라운 태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 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여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인가요
내가 눈을 감을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여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여요
₋한용운, 「반비례」 전문
'그려'라는 조사를 통해 감탄이나 강조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이 시는 전문이 역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연에서 소리와 침묵은 모순이 됩니다.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데 당신의 노랫소리가 역력히 들린다고 하는 것도 모순이며 시적 역설인 것입니다. 2연에서는 얼굴과 흑암이 역설로 대조되고 있고, 눈을 감는데 보인다고 하여 초월적 역설을 보입니다. 3연에서는 그림자와 광명이 서로 역설관계를 갖습니다. 주체와 객체가 역설에 의해 근원적으로 동일성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역설을 통해 시적 초월과 비약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전문
이별과 미의 창조는 역설입니다. 이별이라는 부정적 심상과 미의 창조라는 긍정적 심상이 모순됩니다.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비단” 역시 모순되는 역설입니다. 이별의 슬픔으로 미를 창조한다는 진리를 표면적으로는 모순어법을 통해 정리하고 있습니다.
김상봉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서양의 근대적 주체의 출발점이라면, 우리의 근대적 주체의 출발점은 만해라고 합니다. 특히 만해의 시는 철학자 눈으로 볼 때 가장 심오한 시라고 합니다. 니체는 단지 ‘신은 죽었다'고만 했지만, 만해는 신과의 '이별'을 말하면서도 '이별이 이별이 아닌 걸 안다’고 했기 때문이라나요.
2024. 3. 24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