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지금 간절한가.’ 펴낸 동은 스님
“처절한 고독 속, 사면 벽 뚫은 원동력은 생사 해결 향한 간절함”
청천벽력같은 백혈병, 3년 시한부 선고 받고
억울·분노 삭히며 걷다. 벽 걸린 법구 보고 ‘출가’
생사고리 못 끊은 자신, 특단 조치로 무문관 선택
간절·절박·투철·일심으로, 혈관종의 사선 넘어 정진
나를 살아있게 하는
모든 것들에 ‘감사’
매 순간 충실히 살며
삶, 완전히 연소시켜야
동은 스님은 “영혼을 바쳐 열심히 살아야 할 때가 있고,
한 점의 미련도 없이 확실하게 죽어야 할 때도 있다”며
“살아 있는 동안 매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 잠그겠습니다.”
혜일 스님(강진 백련사 주지)의 무심스런 한 마디가 떨어지자
금속성 외마디가 땅거미 내려앉은 만덕산(萬德山)의 허공을 갈랐다.
철커덕!
별을 안은 공간과 두 평 남짓의 공간 사이에 빗장이 걸렸다.
이제부터 석 달 동안 마주할 수 있는 건 침묵과 사면의 벽뿐이다.
붉은 함성이 온 거리에 차고 넘쳤던 그 해(2002) 5월의 보름달은
백련사 무문관(無門關) 맞배지붕에 유난히도 시린 빛을 내려놓았다.
군사 훈련 강도가 센 것으로 정평 난 보병 8사단(오뚜기 부대)에서
완전군장 30km 산악구보 선수로도 뽑혔던 청년은 1985년 봄날의 햇살 아래 쓰러졌다.
백혈병(白血病)이었다. 의사는 “길어야 2∼3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 선고했다.
길을 걸었다. 걷다 지치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찬 이슬만 피할 수 있으면 헛간 바닥에라도 몸을 뉘었다.
부산서 뗀 걸음은 하동과 청학동 중간 그 어디쯤의 지리산 자락에 닿았다.
작은 토굴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바람 한 점이 청년의 옷섶을 스치고는
흙벽에 기댄 채 간신히 붙어있는 종이 한 장을 흔든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고 싶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직후 오른쪽에 바다를 둔 7번 국도를 따라 오르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갈까? 설악산과 오대산을 고민하다 강릉 터미널에 여장(旅裝)을 풀었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나뒹구는 신문지를 주워와 덮고는 새우잠을 청한 뒤
이른 아침 월정사로 걸음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선상에서 방황하던 청년을 맞이한 건 6월의 새벽 종소리였다.
스님은 당시의 신산한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통곡할 힘조차 빠져나가버린 빈 몸에 그득그득 차오르는 고요한 슬픔,
마침내 쓰러진 새벽 월정사에서 내 지나온 모든 업장을 녹여 내리던,
내 갈기갈기 찢어진 영혼을 따듯이 감싸 안던,
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그 울림을 스며들게 하던 새벽 종소리! 아,
그때 내가 깊게 토해냈던 울음들, 통한의 설움들, 회한의 아픔들…
그날 그 새벽의 종소리는 내 생애 결코 잊지 못할 순간으로 각인되었다.’
(‘무문관 일기, 그대 지금 간절한가’ 중에서)
지리산 토굴의 바람 한 점과 오대산 월정사 새벽 종소리가 혈액암마저 녹여버린 것일까?
3년의 생명선을 가볍게 넘어서고는 ‘이뭣고’ 들고 은산철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해인사 선방 정진 중에 조계종 종정이자 해인총림 방장인 혜암(慧菴) 스님 앞에 섰다.
“아무리 정진해도 성취되는 바 없어 괴롭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요?”
“정진해도 성취되는 바가 없는 듯하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금생에 이 몸 받아 간절하게 정진하다가
좌복 위에서 죽는 것만큼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공부하다 죽을 각오’로 문 없는 문에 들어 선 동은(東隱) 스님이었다.
혜일 스님은 무문관 자물쇠를 채우기 직전 공책 한 권을 건넸다.
건강에 이상 징후가 보이거나 급히 요청할 게 있으면
공책에 적어서 공양 투입구로 내 놓으라는 당부였다.
수좌에게 공양물과 좌복만 있으면 됐지 더 이상 곁에 두어야 할 게 뭐 있겠나! 하여,
수행 중 목도하는 심상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첫 공양을 하고는 새벽 2시부터 밤 10시까지의 하루 정진표를 공책에 새겨 넣었다.
나태·방일을 경계한 흔적인데 무서울 정도로 투철했다.
머리에 난 작은 상처에 누군가 두고 간 연고를 발랐는데 부작용이 일어났다.
윗입술이 허옇게 다 벗겨져 너덜너덜하다.
손바닥, 발바닥, 겨드랑이에도 발진 현상이 나타난다.
‘병원으로 가자’는 혜일 스님의 권유에도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며 차일피일 미뤘다.
몸에 종기 좀 생겼다고 이리 쉽게 무문관을 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앉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엎드려 보니 열이 차오르고 머리가 불덩이 같다.
먹을 수도 없는데 탈진이 덮친다.
6월의 마지막 날 혜일 스님이 “큰 일 나기 전에 병원에 가야 한다”며 자물쇠를 열었다.
굳게 닫혔던 문을 살짝 밀어보니 활짝 열린다. 백련사 나한전으로 들어섰다.
동은 스님은 현재 두타산 천은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다.
“부처님, 못난 이 중생 몸이 아파 수행 중간에 내려왔습니다.
버틸 만큼 버텼는데 도저히 안 되겠기에 병원에 가려고 내려왔습니다.”
뺨 위로 내린 눈물은 이내 울음으로, 울음은 통곡으로 이어졌다.
“부처님, 이제 그만하실 거죠. 더 이상은 저도 견딜 힘이 없습니다.
오늘이 제 인생에 있어서 아픔의 정점이고 싶습니다.”
삼배의 마지막 절을 올리고는 통나무 넘어지듯 쓰러졌다.
그대로 꿇어앉은 채 말없이 웃는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됐습니다. 부처님, 저는 더 이상 바랄게 없습니다.
앞으로 수행 정진하는데 더 이상 몸만 아프지 않아도 정말 열심히 잘 살 겁니다.
약속합니다!”
검사 결과 혈관종(血管腫)으로 판명 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죽음은 현실이 되었을 터다.
정진 도중에 문을 열었으니 ‘반쪽 결제’가 되어버렸다. 하여,
몸을 추스르고 다시 무문관에 앉았을 때는 정진의 고삐를 더욱더 바짝 죄었다.
동은 스님의 생애 무문관 첫 정진은 그렇게 익어갔더랬다.
‘무문관 일기, 그대 지금 간절한가’를 읽고 난 직후 저자 동은 스님을 꼭 뵙고 싶었다.
뼈를 깎는 고독과의 사투를 이겨 낸 원동력만이 궁금해서는 아니다.
책에서 본 미소불! 붓 펜으로 쓱쓱 그린 미소불은
혈관종으로 인해 육체의 고통이 극한으로 치닫던 때 그린 부처님이다.
고통과 미소! 양 극단을 관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동은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는
두타산 천은사에도 찬 기운 머금은 바람이 들어차고 있었다.
자사호에서 우려 나온 보이차가 세 번째 찻잔을 붉게 물들일 즈음
무문관에 들어 간 연유를 여쭈었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았을 때 억울했습니다.
도대체 왜 내가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받아 들일수가 없었던 겁니다.
생사의 고리가 궁금했고, 그 의문을 풀려고 출가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앞서 어설픈 용맹심으로 시작한 토굴생활은 오래가질 못했습니다.
온갖 고생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승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사미계를 받은 직후 만행을 떠난(1986. 8) 동은 스님은
지리산 하동 토굴로 들어가서는 일대사 인연을 결판내겠다고 작심했었다.
행자시절 틈틈이 모아 둔 조사어록도 몇 권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니, 금방이라도 한 소식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타성일편으로 다가와야 할 화두는 점점 멀어져 갔다.
자신을 점검해 줄 선지식이 없기에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
동은 스님은 해인사 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엔 해인사·불국사 선원 등의 제방 선원에서 정진해 갔다.
“해인사 선방에서 첫 철 안거를 난 이후 몇 년간 선방을 다녔지만
타고난 둔근기라 아무리 애를 써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공부하다 죽어라!’는 혜암 스님의 가르침을 머리로만 이해했지 실천하지는 못했던 겁니다.
그러는 와중에 세월만 흘렀습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로 무문관을 선택했던 것이다. 동은 스님에게 무문관이란 어떤 의미일까?
“무문관은 생사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결단의 공간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기도 합니다.
좇는 것이 아니라 좇기고 있던 운명이란 화두에게 뒤돌아서 노려보며
‘야, 한번 덤벼 봐!’ 하는 곳입니다.”
몸에 난 종기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삼백육십 혼신의 뼈마디와 팔만사천 혼신의 털구멍을 의문의 덩어리로 뭉쳐
무(無) 이 한 마디에 매달려라’는 무문 혜개(無門 慧開) 스님의 일언을 떠 올리며
자신을 경책한 이유를 알겠다. 절박했고 간절했던 것이다.
“연고 부작용과 싸우는 틈에 정진 패턴을 놓쳐 어느새 타성에 젖어버렸습니다.
머리에는 껍데기 화두만 가득했습니다.
찰나, 찰나마다 간절하게 정진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저는 안일함과 타협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식이면 무문관은 망상의 소굴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여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대 이 순간, 이 좌복 위에서 생을 마쳐도
한 점 후회함이 없을 정도로 온몸을 던져 정진하고 있는가?
그대 지금 간절한가!’ 가식을 벗어 던진 민낯의 자신을 진실로 마주했음이다.
무문관 첫 정진이라 해도 나름의 갈무리 있을 터다.
“모든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머리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느끼는 그런 감사함입니다.
스승과 도반에 대한 감사함은 물론입니다. 정진 분상에서 선지식 아닌 것은 없습니다.
앞만 보고 내달렸던 지난날들도 하나씩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를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열심히 수행하고 잘 산다고 이 사바세계가 평안하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내 곁에 왔던 부처들을 몰라보고 내쳤었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기적, 내 곁에 왔던 부처, 살아 있게 한 모든 것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연기(緣起). ‘참된 자기에게 있어서는 일체의 타자가 자기화 된다’는
백장 선사의 가르침이 무문관에서 실현된 듯하다.
그러자 동은 스님은 손사래 치며
“기회 닿는 대로 무문관에 다시 들어 갈 것”이라고 했다.
수행 중 떠올린 선구 하나를 부탁하자 원오극근 선사의 일언을 전했다.
금산사에서 무비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을 공부할 때 처음 접했다고 한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生也全機現)/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死也全機現)’
철저히 살고(全機生), 철저히 죽으라(全機死)는 뜻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영혼을 바쳐 열심히 살아야 할 때가 있고,
한 점의 미련도 없이 확실하게 죽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살아 있는 동안 매 순간에 충실해야 합니다.
전기생, 전기사에 입각해 자신의 삶을 완전히 연소시켜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흐름이 삶입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인 겁니다.”
그 무슨 일을 하던 그것에 몸과 마음을 다 쏟아 부으라는 말이다.
마음을 찾고, 쓰는 일이 선(禪)이라고 한다면, 밥 먹고 지하철 타고
직장으로 향하는 일상도 선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이 순간의 흐름이 삶’이라면 ‘모든 순간은 결정적 순간’이요 ‘선적 일상’일 터다.
이제 알겠다.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사면의 벽을 뚫어 낸 원동력은
‘생사를 해결하겠다’는 간절함이었으며, 육신의 고통 한 가운데서
미소불을 그린 담대함의 원천은 양 극단을 조율한 중도(中道)였다.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선기를 품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다.
선(禪)의 강렬함과 뜨거움이 새삼 느껴진다.
산사에 인 바람이 박규리의 시 ‘무문관’ 한 토막을 내려놓는다.
‘저마다 갈 수 있는 길은 / 오직 맹렬한 이 한 길뿐,/
피안에 이르는 길이 / 천갈래 만갈래라니요 / 원,천만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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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기억을 오롯이 품고 있는 친필 노트.
“무문관 정진 때 일어나는 단상들을 틈틈이 적어 놓았었는데,
가끔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부처님께 무슨 처방이라도 받는 듯이 공책을 꺼내 보곤 했었다. ……
어느 때는 며칠을 빈둥거리며 망상만 피워댄 적도 있었고,
어느 때는 며칠 밤낮을 용맹정진할 때도 있었다.
다만, 무엇을 하든지 순간의 마음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은 분명하다.” -
동은 스님 저 ‘무문관일기, 그대 지금 간절한가’ 중에서
동은 스님은
- 오대산 월정사 출가.
- 해인사 승가대학·송광사 율원 졸업.
- 해인사·불국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정진.
-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수료.
- 월간 해인 편집장.
-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교장.
- 현재 두타산 천은사 주지.
2018년 12월 12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