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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산 정기 받아 발복한 지수면 엘지그룹 생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사림파의 필두이며 포은, 목은과 함께 고려말 3은으로 불리는 야은 길재는 고려왕조의 옛 도읍지인 개성땅을 돌아보며 이런 시조를 읊었다. 인걸은 산천에 의거하여 살아가고 수없이 많은 세월 속에 인걸들이 만들어낸 자취가 모여 역사를 이룬다. 그러나 산천의 변화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며 인걸의 생멸은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불만백년인 인간의 업적이 유구한 역사를 지니는 산천을 어이 따를 손가. 세켠을 접어 넘긴 고개 넘어 세월이 산천은 그대로 두었으나 인걸은 이미 그 때 사람들이 아니니 지금에사 보건대 믿을 건 오히려 사람보다 산천이 더 정겹구나.
엘지그룹 생가 풍수타령에 나선 자리에 서두부터 웬 산천 넋두리냐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으나 지수를 찾은 나에게는 남다른 감회가 있기에 그렇다. 바로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산천이기에 어릴 적에 보아왔던 산천의 모양이 3개성상을 뛰어넘은 지금에도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정감어린 모습으로 그 옛날의 추억을 전해준다. 굳이 변한 게 있다면 영화 속 괴물 같은 자동차가 질주하는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났고, 마을 안의 자갈밭길이 말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 밖에 특별히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옛날 사람들이 아니다. 그 때 같이 놀던 동무들과 냇가에 헤엄치던 버들치와 개구리들 또한 그 때의 것이 아니다. 굳이 찾으려면야 이리저리 얽힌 인연들을 못 찾을리야 없겠지만 세월 따라 변해버린 낯설고 서먹한 사람들의 얼굴보다 산천의 모습이 더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을 전해준다.
오늘은 고향의 향수를 찾아 온 것이 아니라 풍수답사를 왔으니 고향산천 넋두리 타령은 그만 접어두고 엘지그룹의 생가를 둘러 풍수적으로 감결을 한 번 해 보자.
고속도로를 빠져 톨게이트로 나오는 길목 오른편에 지수면 승산리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새의 둥지처럼 생긴 마을은 품에 안긴 듯 평화롭게 놓여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나와 아는 체를 한다. 고향이라 하지만 모두가 낯선 모습이 되어버린 지금에 누가 있어 나를 알아주랴만은 그래도 강아지가 나를 반겨주니 이 녀석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생가가 있는 마을의 행정구역은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이다. 승산리(勝山里)에는 크게 상동마을과 하동마을이 있고 그 밖에 고속도로 넘어 임내마을, 허곡마을과 숲안마을, 허실마을 등이 모여 몇 안 되는 집이지만 옹기종기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승산리는 예전에 승내리(勝內里)라 하던 것을 1995년 11월 1일부터 승산리라 개칭하여 오늘날의 행정구역 명칭이 되었다. 승산리에는 현재 500명이 채 못 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가구수는 198호이다(지수면 홈페이지 자료 인용)
생가는 그 중 하동마을 구실봉 산자락 아래에 있다. 구슬처럼 둥글게 생겨 옥산, 옥봉, 구실등 또는 구실봉이라 부르는 이 산은 구슬의 방언표현이며 구릉처럼 낮은 높이지만 생가에 생기를 넣어주는 주산이 된다.
구실등 바로 옆에 솟아오른 또 하나 작은 봉우리는 지신산이라고 하는데 승산마을의 북쪽을 막고 있어 수구막이 역할과 함께 겨울의 차가운 계절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풍수가 좋아서 큰 인물이 났다느니, 재벌이 되었다느니 하는 따위의 주술적 표현은 하지도 말고 또한 믿지도 말아야 된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무지몽매한 민초들을 꼬드겨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반풍수들이 혹세무민하였는가? 그런 반풍수쟁이들의 폐해 속에 우리 고유 학문이 미신으로 치부되고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차마 말 하는 것조차 창피하게 여겨져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아직도 풍수공부 시작하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 대통령이나 재벌, 유명인들의 생가나 선영이다. 도대체 거기서 무얼 배우고 느끼는지, 그래서 운 좋게 그런 명당하나 찾아서 하늘이 내리는 벼락복이라도 받아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애시당초 그런 꿈은 깨는 게 좋다. 단언코 말하는데 그런 발복 터는 천지간에 없다.
엘지 생가와 선영도 수많은 풍수가들이 다녀가는 곳 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평가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돌아본 생가는 여느 명당집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살기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것은 사실이나 특별히 재벌을 탄생시킬 만한 풍수적 형국은 별로 없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승산리의 마을 형국부터 살펴보자. 방어산 정상 바로 아래 가마봉에서 내려다보는 승산리는 사방이 산으로 둥글게 감싸고 있다. 이런 곳을 풍수형국으로는 새의 둥지로 본다. 괘방산에서 흘러내린 심방산은 승산리 마을의 남쪽을 감싸고 돌아 지수 톨게이트를 지나 구슬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구슬산이 둥글게 이어져 북쪽의 지신산까지 병풍처럼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동쪽은 진산(鎭山) 방어산(防禦山,530.4m)이 높이 솟아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듯이 지켜주는 가운데 새의 둥지처럼 아늑한 보금자리에 모여있는 집들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지속의 알처럼 보보인다.
다음으로 방어산의 정기가 흘러온 행룡 과정을 살펴보자. 백두대간의 끝 지리산에서 취령을 거쳐 동남쪽으로 흐르는 낙남정맥의 산줄기가 경남 곤양의 소곡산, 사천의 팔음산, 고성의 무량산에 이르고, 다시 동북쪽으로 몸을 틀어 함안땅에서 여항산을 세우기 직전에 오봉산을 일으켜 그 맥을 분기한다. 오봉산에서 출맥한 용은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군북면, 사봉면, 지수면을 경계 짓는 괘방산(掛傍山, 451m)을 솟구치고 남은 정기를 몰아 북으로 지수와 함안의 진산이 되는 방어산에 그 기를 모두 모으고 남강을 만나 행룡을 멈춘다. 계수즉지(界水則止)라 산은 물을 만나면 정기를 모으고 멈추게 되는데 대개 이런 곳이 명혈(名穴)자리가 된다.
남강휴게소가 바로 여기에 있다. 먼 길을 오고가는 길손들을 대접하는 남강휴게소는 주말에는 주차장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다. 방어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내려받은 기막힌 명당발복이다,
여기서 잠깐 남강휴게소의 풍수 한 자락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전통적인 지리사상에서 말하는 터잡이 이론 중에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이 있다. 즉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어야 좋은 땅이라 했다. 만일 반대로 물을 등지고 산을 향해 있다면 배수임산(背水臨山)형이 되어 나쁘게 된다. 남해고속도로에는 남강휴게소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부산에서 순천방향으로 가는 상행선상에 놓여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반대방향인 하행선에 있다.
먼저 상행선의 휴게소를 보면 남강을 등지고 방어산을 마주하고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배수임산형으로 터의 위치는 좋으나 건물의 방향을 거꾸로 배치한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하행선 남강휴게소의 경우에는 방어산을 등지고 앞쪽으로 남강을 바라보고 건물이 배치되었다. 전통풍수이론을 그대로 따른 배산임수형이다. 두 휴게소의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 수를 보면 영업의 정도가 확실하게 비교 된다. 어느 곳이 장사가 더 잘될까? 실제로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러서 확인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승산리 마을이 새의 둥지처럼 생겼다면 이런 곳에는 새가 있어야 완벽한 명당이 된다. 그런데 아주 큰 새 한 마리가 승산리를 향하여 날아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방어산이다. 방어산의 봉우리를 마을 입구에서 보면 큰 새 한 마리가 힘찬 날개짓을 하며 마을로 날아드는 모양이다. 아래 사진에서 새를 찾아보기 바란다.
방어산의 두 봉우리를 새의 날개 중 어깨부분으로 보면 양 옆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날개가 된다. 그 가운데로 산맥하나가 마을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아래 부분에 다시 솟구친 봉우리는 새의 머리가 된다. 그 밑자락으로 흘러내린 용맥은 새의 부리가 되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승내리 마을이다. 풍수에서 형국을 나타내는 새의 종류는 많다. 닭, 까마귀, 기러기, 참새, 봉황새 등이다. 그런데 방어산의 새는 거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큰 새는 봉황뿐이다. 봉황이 둥지로 향해 날아드는 형국인 것이다. 이런 것을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라 한다. 즉 하늘을 나는 봉황새가 먹이를 물고 둥지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앞서 지수면 지형도 참조)
풍수적으로 풀어보면 기막히게 좋은 명당 중의 대명당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좋은 명당형국에 발복이 터진다면 재벌뿐이겠는가? 봉황그림을 배경으로 앉는 사람인 대통령도 날 수가 있다.
승내리를 감싸고 도는 물줄기는 승산도랑이다. 괘방산에서 발원한 도랑은 마을 앞에 이르러 둥글게 금성수가 되어 환포하여 흐른다. 금성수는 재물복이 많은 수형이다. 이것은 생가의 외당수가 된다.
생가 앞에 이르면 대문 바로 앞으로 내당수가 또 하나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일부만 볼 수 있지만 생가 앞의 맨홀 뚜껑을 보면 물줄기의 흐름이 역시 금성수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집 뒤로 돌아가서 내룡을 살피니 주산(主山)의 맥(脈)이 집터와 이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주산인 구실봉과 생가 터 사이에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다. 계수즉지의 원리로 본다면 주산의 기운은 끊겨서 생가로 더 이상 생기(生氣)를 불어넣어주지 못하고 있다. 주산이 허한 탓에 집 뒤에는 대나무를 심어 비보(裨補)를 하였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대문 넘어 안대를 살피니 괘방산에서 서북으로 흘러내린 산맥하나가 마을 앞을 지나 수구(水口)까지 길게 이어졌는데 이것이 안산(案山)이다. 안산의 모양은 둥글게 금체(金體)형이다. 역시 재물발복 형상이다.
조산(朝山)은 방어산으로 봐야한다. 방어산은 화형산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모양으로 화재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생가 앞으로 흐르는 내당(內堂水)가 있어 화기는 제압되었다고 여겨진다.
종합적으로 정리를 해 보면 비봉귀소형 형국에서는 귀인(貴人)이 날 자리이지 재벌탄생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형국이다. 더구나 가장 큰 결함은 내룡의 맥이 끊어져 주산(主山)의 생기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수적으로만 본다면 매우 흉한 형상이다. 그러나 발복의 요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안산이 금체형이라는 점과 마을앞의 내 외당수 모두가 금성환포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외당(外堂水)는 생가에서 볼 때에 보이지 않는 물줄기인 암공수(暗供水)가 되어 더욱 재물발복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정도의 형국은 재벌이 탄생한 터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터에 결함이 너무 많다.
흔히들 세간에서 말하는 생가발복이라는 주장에 대해 필자는 이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첫째, 비봉귀소형의 명당형국의 정기는 승산리 마을 전체에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굳이 왜 생가만 발복하였는지 이유를 묻는다면 답할 자료가 없다. 혹자는 생가터에서 보이는 봉황의 형국이 가장 뚜렷하게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써 놓은 책을 본 적이 있다. 누군지는 밝히지 않겠다. 그러나 이건 좀 억지적인 데가 있다. 필자가 살펴 본 바로는 오히려 승산교에서 바라보는 형국이 더 뚜렷해 보였다.
둘째 결정적으로 생가터에는 내룡(來龍)의 용맥이 끊어져 주산의 생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점 가장 큰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조산이 뚜렷하지 않다. 방어산을 굳이 조산으로 본다 하더라도 옆으로 비켜 앉아 있고 형상 또한 재앙을 가져오는 화산형이라 명당발복을 오히려 방해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결함이 많은 터에서 어찌 재벌이 탄생했다고 주장하는지 비봉귀소형 하나만 가지고 주장하기에는 발복(發福)의 정도가 너무 크다.
승내리 마을은 예로부터 부자가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을 안에 들어서면 큼직한 고대광실 기와집들이 수십 채가 구실봉 산자락을 따라 도열해 있다. 평범한 마을임에도 마치 어느 민속마을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대문 바깥에선 이런 부촌(富村)이 없었다고 하며 ‘주백리(周百里, 백리주위라는 뜻)가 승산토지’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근의 함안과 사천, 그리고 의령군에까지 승산마을 사람들의 토지가 있었다고 한다.
만석꾼이 셋, 천석꾼이 일곱, 그래서 승산 부자 열 명이 도합 3만 7천석을 하였으며 이토록 큰 부자마을임에도 ‘청어장사 울리고 보내는 승산마을’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셈에는 밝고 생활은 검소하였다 한다.
무엇이 승산리 마을을 이토록 풍요롭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서부경남을 적시며 동으로 흐르는 남강의 젖줄과 봉황의 웅대한 기상을 품은 방어산의 발복이라 여겨진다.
압현과 송정 그리고 인근 청담리의 넓은 벌판은 생리를 풍족하게 해주는 생산의 터전이 되고 거기에 유유히 흐르는 남강의 물줄기는 농토에 넉넉한 물을 공급하여 수많은 농작물을 길러주는 젖줄이 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방어산의 웅대한 정기는 산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호연지기를 은연중에 불어넣어주고 있었으니 이로써 승산리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근면함이 넓은 농토에 더하여져 마침내 큰 부를 이루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승내리 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은 조선 세종임금 때 들어온 김해허씨(金海 許氏)였다. 지금 허씨 종손의 17대조가 된다. 그 후 한참 뒤에 구인회 회장의 8대조인 능성구씨(綾城 具氏) 구반(具槃)이 들어와 살게 됨으로써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이후로 승내리는 김해허씨와 능성구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구씨 집안과 허씨 집안이 마침내 통혼(通婚)을 시작하게 되니 이로써 두 가문이 핏줄로써 인연을 맺게 되는 동기가 된다.
현재 승산 마을의 성씨 분포를 보면 허씨가 1백12호, 구씨가 36호, 타성이 1백48호다. 옛날엔 타성들이 거의 없었고 허, 구씨의 비율은 지금과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승산에서 서울 및 부산으로 옮겨가 살고 있는 허, 구씨들은 약 3백40호정도가 되는데 대부분은 럭키 그룹과 연고를 갖고 있다고 한다.
승산리의 진산은 방어산이다. 지수면과 함안군의 경계를 이루고 동시에 두 개 면의 진산이 되는 방어산은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왜적을 맞아 싸워 승리한 곳으로 호국의 산이다. 고려 우왕 5년(1379년) 왜구가 반성을 거쳐 방어산을 침입해 점령하고 있던 것을 관군이 포위공격하여 적 34명의 수급을 베며 산을 탈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설에는 또 다른 신화를 말해주고 있으니 바로 묵신우(墨神祐) 장군의 이야기다. 방어산 정상에 세워둔 안내문에 의하면 “방어산 정상에는 옛성의 자취가 있으며 서쪽에는 장군당, 그 아래 마제현(馬帝峴-말발굽고개) 북쪽에는 장군철상(將軍鐵像), 동쪽에는 옛 절터가 있었다. 절의 이름은 망일암(望日庵)이라 했으며 장군의 이름은 묵신우로서 사람으로서는 그 용맹을 따를 수 없었다.
장군은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절학(絶壑, 깎아지른 골짜기)을 날아 건너다니면서 300근짜리 활을 잡아당기는 힘을 지녔었다. 때마침 변성(邊城)에 큰 병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중 혜성(慧聖)의 도움을 얻어 산봉우리에 성을 쌓고 적을 방어했다. 적은 방어산 맞은편 봉우리에 진을 치고 도전해 왔으나 장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한 달을 버티다가 비로소 영을 내려 화전(火箭)을 빗발처럼 퍼부으니 화전에 꿰인 채 타죽은 적은 부지기수였다. 적은 장군의 지략을 보고 이것은 신병(神兵)의 병술(兵術)이라 하여 도주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과 스님 혜성의 철상과 철마를 세웠다고 전하며 장군의 군마가 전쟁 때 흘린 말굽의 핏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선연하다고 한다. 산이름을 방어, 봉우리를 산성, 마을이름을 승어(勝禦) 지금의 승내(勝內)라 일컬음은 모두 방어산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진주시에서 시립공원으로 추진 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묵신우 장군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이 없고, 방어산에 있었다는 장군당이나 철상 또한 지금은 없지만 왜구를 막아낸 이 신화와 같은 전설이 승산리 마을 주민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방어산을 호국의 산으로 매김질 함으로써 대단한 긍지를 지녀왔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방어산 정상에 올라 지수면 지역을 굽어보면 남강의 물줄기가 넓은 들판을 적시며 둥글게 휘감아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풍수적으로 보면 물줄기가 둥글게 흐르면 그 안 쪽이 명당길지가 된다. 이것은 홍수가 나더라도 물의 흐름이 바깥쪽으로 몰리기에 안쪽은 수해를 입지 않는 안전한 지역이 된다. 따라서 금성환포형의 물줄기 안쪽은 내도록 농작물의 풍년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의 입지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꼽았다. 아름답고 장엄한 방어산이 진산으로 굽어보고, 남강의 풍부한 물줄기가 농토를 비옥하게 적셔주는 지수면 승내리 마을은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명당 고을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지금은 필자가 살던 고향땅 용봉리 마을에 마, 우엉 등을 집단 재배하여 지수의 특산물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지수는 생리가 풍족하여 자연히 부자가 많이 날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축복의 땅이라 할 것이다.
지수의 또 하나 명물은 승산리에 있는 지수초등학교이다. 우리나라 제일이며 세계적인 대기업의 총수를 그것도 3명씩이나 배출하였기에 한국 기업사의 산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에 알려진 유명한 명문초등학교이다. 연암 구인회 회장과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 그리고 효성그룹 창업주인 만우 조홍제 회장이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시골학교에 지나지 않지만 1921년 김해 허씨 가문의 만석꾼이었던 허준 선생이 땅을 기증하여 설립한 이 학교는 80년을 넘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구인회, 구태회, 구자경, 이병철, 조홍제, 허정구, 허신구 등등 삼성, 럭키, 효성그룹의 총수와 수뇌진을 배출한 재벌들의 산실이다. 학교 교사 앞에는 지금도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원래는 세 그룹의 회장이 한 그루씩 심어 모두 3그루였던 것이 한 그루는 죽고 두 그루만 남아 있다. 재벌 총수들을 배출한 증거이다.
이 학교는 한때 폐교될 뻔한 위기를 맞았다. 2000년 농촌학교 통폐합 정책으로 학생 수가 부족하여 폐교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학교 13회 졸업생이면서 해방 후 3년간 지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학교 사랑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였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모교에 긴급히 거금을 투입하여 체육관을 설립하고 인근지역의 학생들에게 특별 장학금을 주며 학생모집 활동을 폄으로서 간신히 학교를 살려 낸 것이다. 학교에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체육관의 이름을 구자경 명예회장의 호를 따서 상남관이라고 붙였다.
엘지그룹의 창업주인 고 연암 구인회 회장과 또한 세계적인 기업 엘지그룹에 대해선 너무도 잘 알려져 있기에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능성구씨 집안에 전해지는 근면과 검소에 얽힌 이야기 몇 토막과 명문가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주는 있는 구씨가문의 가훈 10훈을 소개하고 오늘의 풍수 답사기를 맺고자 한다.
명문가의 집안에는 반드시 그 가문만이 지니는 독특한 명가훈이 있다. 가훈이야말로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대대로 이어주는 토대가 되며 가풍이 되는 것이다. 능성구씨 가문이 명문가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는 구인회 회장의 증조부인 만회공(晩悔公)때이다. 만회공은 조선 철종 때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시독관(侍讀官)과 사서를 기록 관리하는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그 자리는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는 자리로서, 왕자의 교육은 물론 백성의 도덕을 교육시키거나 어전 회의록을 작성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이를 잘 아는 당대의 선비들과 유림들 사이에서는 만회공의 학문과 인품이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893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민심은 피폐해지고 조정에서는 그것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이를 계기삼아 다시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날로 커져만 가는 외세의 모습에 탄식하던 만회공은 동지들과 함께 임금께 상소를 올리는 등 국운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국운의 회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만회공은 관직을 물리고 고향인 승산마을로 낙향해 버린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의 귀거래사를 남긴다.
見國事 日非決歸/ 견국사 일비결귀/
(나라 일을 보니 날로 그릇되어 감에 되돌아갈 것을 결심하다)
북문에 눈비 흩날리듯 날마다 가슴 찢어짐이여 저녁노을 쳐다 본다/
벼슬하여 무슨 일 하였는가/
나랏님 잘못 조정에 앉아 고칠 점 하도 많지만/
도연명 같이 밭이라도 갈거나 가고픈 고향/
떠나는 발길 왜 이리 망서려짐인가/
아 내 조국 어찌 잊으랴/
흐르는 눈물 옷깃 적신다/
낙향한 만회공은 그 후 은둔생활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딱 한 번의 외출을 제외하고는 일체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번의 외출은 1931년 손자 연암 구인회가 진주에서 포목상을 차려 번창하자 격려차 들른 것이었다.
이토록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만회공은 후손들에게 10가지 교훈을 가훈으로 남겼는데 이로서 능성구씨 가문의 가풍이 확립되게 되고 이는 훗날 엘지그룹의 인화경영의 근간이 된다.
-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껏 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 선조에게 제사하는 날에는 반드시 엄숙하고 조심하여라.
- 나의 정성과 공경 다하면 혼령이 앙양하게 계신 듯 하라.
-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 자손이 착하지 못하면 조상을 욕되게 하기 쉽다.
- 선대 훈계를 삼가 이어서 바르게 할 뿐 변하지 말라.
- 두려워해서 스스로 조심함이 깊은 못을 만난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이런 가문의 전통 속에서 화목과 검소함이 몸에 배인 구씨 집안에서는 남들이 보는 데선 짚신을 신고 다니다가도 남이 안 보는 데선 짚신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또 담배를 피울 때에도 담뱃대에 담배를 재고 빨기는 하지만 후욱 뱉는 건 입김일 뿐, 담배엔 불이 붙어있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부채를 부치때에도 펴고는 있지만 사실은 얼굴을 흔들고 있을 뿐, 부채를 닳게 하지 않으려고 들고만 있었다고 하며, 머슴들이 한창 일을 하는 데 와선 담뱃대에 담배를 재 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이에 머슴들은 주인이 언제 담배를 피우러 올지 몰라 긴장상태에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한다.
선조들의 이러한 구두쇠의 전설을 들으며 자란 엘지그룹 창업주 연암 구인회(1907 - 1969) 회장은 1931년 진주 중앙시장에서 ‘구인회 상점’이란 간판을 걸고 포목점을 열게 되니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그 때만 하여도 선비집안에서 천직인 상업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포목점으로 번 돈과 당시 승내리의 만석꾼 허만정씨의 투자금을 합하여 부산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차린 때는 1947년 1월 5일이며 이로써 구씨가문과 허씨 가문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되었고 여기서 만들었던 화장품 ‘락희크림’으로 엘지그룹의 모체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부산 서대신동 락희화학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연암을 ‘파카 코트(미군 장교들의 상의) 사장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매가 닳고 기름때가 잔뜩 낀 이 옷만 입어서 직원들에게 파카코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연암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셈이다. 게다가 연암은 평소에 담배도 비싼 담배와 싼 담배를 같이 지니고 다니면서 비싼담배는 손님에게 권하고 자신은 싼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대대로 자손들에게도 근검절약 정신과 독립심을 갖도록 가르쳤으며 어떤 물건을 하나 사게 되면 사용기한을 정하여 반드시 그 때까지 아껴서 사용하도록 하였다니 평소 그의 검소함이 얼마나 대단하였나를 알 수 있다.
생전에 연암이 자손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 중 하나는 "한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말라" 는 것이었다.
명문가의 가정교육과 대를 잇는 가르침 속에서 몸에 익은 연암의 인화사상은 고스란히 기업이념으로 녹아 들어가 여기서 인화경영이 발원하고 LG의 'Good to Great' 존경받는 도덕경영이 비롯됐으며 이어 88년 명예회장의 21세기 경영구상 발표와 경영노선의 대전환, 95년 제3대 구본무 회장 취임과 LG, CI및 정도경영, 글로벌 초일류경영으로 '사랑해요 LG'로 상징되는 디지털 자본으로의 질적 도약을 이뤄냈다.
(머니투데이 뉴스 자료 인용)
한편 엘지의 영원한 파트너인 김해 허씨 가문의 가풍 역시도 구씨가문 못지않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 당시 지수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만석꾼이었던 허준 선생의 땅은 서부경남 일대를 뒤덮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이토록 거부임에도 선생의 평소 지론은 “세상에 어려운 것이 재물을 모으는 일이요,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이 모은 재물을 잘 쓰는 일이라”하며 필요한 재산 외에는 인근의 친척들과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넉넉한 인심을 발하였고 토지를 희사하여 교육사업에도 힘을 쓴 것이다.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이 자랑할 만한 세계적인 기업 엘지그룹의 생가를 둘러보고 돌아나오며 다시한번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되새겨 본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종과득과(種瓜得瓜),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은 만고에 빛나는 평범한 진리이다. 무릇 큰 인물의 탄생이나 역사적으로 발생하는 큰 일의 성사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환경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므로 세계가 알아주는 대 재벌의 탄생이 어찌 풍수 한가지로 이루어졌다고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