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권역은 예로부터 물길과 고갯길을 따라 물산과 학문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민간신앙과 불교문화가 영∙호남을 아우르며 융합∙발전하는 등 동일한 문화권 아래 있어 왔다. 지리산권역 5개시∙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는 이렇듯 영호남을 넘어 하나의 문화권임을 재확인하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지리산권 관광개발계획을 접하고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지리산의 생태∙역사∙문화∙농업 환경을 보전하고, 기존의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리산권시민사회단체협의회’(이하 협의회)발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전 국토가 개발 바람에 몸살을 앓고 있다. 전국 어디 할 것 없이 지역발전을 내세우며, 관광개발에 지역의 명운을 걸고 있다. 지리산도 예외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리산마저 통째로 개발하고 싶어한다. 어느 누구도 개발의 내용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개발의 이익을 누가 가져가는지 따지지 않는다. 지역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단 한번의 민주적인 논의도 없이, 개발 계획은 은밀히 진행되고 있다.
지리산에도 문화관광부가 주관하는 광역권관광개발사업 중의 하나인 지리산권관광개발계획이 수립 중에 있다. 지리산권 7개 시∙군을 그 공간적 대상으로 하는데, 현재는 해당 시∙군이 제안한 171개 사업에 대한 심의가 진행 중에 있다.
이에, 지리산권시민사회단체협의회는 지리산권 관광개발 계획과 관련하여 우리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첫째, 지역발전의 동력은 ‘농업’이지 ‘관광개발’이 아니다.
지금 정부는 농업을 포기하고, 그 빈자리를 ‘관광개발’로 채우려 하고 있다. 지방 정부와 지역의 토호세력은 개발 세력을 등에 업고, 개발이 곧 지역발전이라는 개발환상을 유포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사회에서 농업 없는 지역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농민이 없는 농촌관광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설 중심의 개발 사업을 지양하고, 지역의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사업들로 그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
둘째, 지리산국립공원은 절대 보전되어야 하며, 국립공원 인근 지역의 대규모 개발 또한 반대한다.
지리산국립공원을 훼손하는 그 어떠한 사업에도 반대하며, 국립공원 인근 지역 또한 국립공원 보전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 자연친화적 소규모 개발이어야 한다. 지리산권역의 관광개발은 자연 그대로의 지리산 그 자체를 기반으로 한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자연 그대로의 지리산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지역을 찾는다. 대규모 시설이 생기면, 근처 소규모의 민박집이나 식당 등의 피해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우리는 그동안 대규모 외부 자본의 투입으로 지역 경제가 오히려 침체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이것이 지리산 국립공원 인근 지역에 테마 파크식의 대규모 개발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셋째, 개발 이익이 일부 세력이나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며, 원주민에게 돌아와야 한다.
개발이 지역 주민들의 소득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특정 세력이 개발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겨우 토지보상금이나 일용직 고용 등의 부수적 이익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지방정부는 서둘러 개발 이익의 환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환수된 개발 이익을 지역의 교육∙의료∙노인 복지 등에 써, 그 이익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개발 이익의 환수 없는 대규모 민자유치식 사업 선정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넷째, 사업 계획부터 실행까지 주민들의 실질적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라.
지자체가 제안한 사업 중, 주민 참여가 필수적 사업조차 주민들을 배제한 체, 담당자의 책상 위에서 계획이 수립된 것이 태반이다. 이는 곧 사업의 실패로 이어진다. 계획 단위에서부터 집행에 이르기까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서, 민∙관이 함께 가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주민들의 실질적 참여 방안이 없는, 관 주도의 일방적 사업의 경우,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다섯째, 관광기반시설 확충을 빙자한 대규모 SOC 사업은 제외되어야 한다.
지방정부는 관광기반시설 확충을 이유로, 실제로는 관광과 전혀 관계없는 지역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불필요한 도로 건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소중한 예산 낭비도 문제지만, 관광기반시설이 오히려 중요한 관광자원인 경관 자원을 훼손하기까지 한다. 반드시 필요한 기반 시설 외의 SOC 사업은 마땅히 제외되어야 한다.
지리산권역의 단체장들은 지금이라도 개발 일변도의 정책을 철회하고, 주민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여성∙노인∙소농∙소상인∙청소년들을 위한 지역 내 의료나 교육 문제 등의 복지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해, 지리산 권역을 자연과 더불어 주민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길 촉구한다.
그동안 지리산은 3개도 5개시∙군으로 나눠져 있어, 통합적인 접근은 고사하고 지자체들의 개발 쟁탈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지리산권역 전체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지역 간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역사적인 지리산권시민사회단체협의회에 참여를 결의한 지리산권역의 농민∙노동∙시민∙환경 단체들은 그 시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사람들’이라는 연대 의식으로, 지리산 지역의 농업과 환경, 마을 공동체를 살려내고, 지리산권역을 생명과 평화로 넘쳐나는 삶의 터전으로 가꿔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