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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55호.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2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주 소수서원 [榮州紹修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소수서원 소나무숲
▲ 소수서원 당간지주
한때 사찰이기도 했던 소수서원에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 소수서원 선비촌앞 장승들
▲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소백산 1 자락길 중 죽계구곡
소백산 초암사(草庵寺)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삼괴정 근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에 걸쳐 흐르는 계곡을 죽계구곡(竹溪九曲)이라 한다. 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영주시 순흥면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죽계천(竹溪川)의 상류 지역이다.
아홉 구비를 돌아 절경을 이루는 죽계구곡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은‘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고,
퇴계 이황도 그 비경에 취해 찬사를 보냈다 한다.
제1곡은 금당반석, 제2곡은 청운대, 제4곡은 용추비폭, 제9곡은 이화동이라 불린다. 그중 제4곡은 한가운데에 둥근 바위가 놓여 있는 소(沼)로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추비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 맑은 계곡과 소나무와 참나무 고목,
바위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이루는 죽계구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이름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계구곡 [竹溪九曲]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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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암사[ 草庵寺 ]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의상대사가 세운 조계종 사찰로, 의상이 부석사 터전을 보러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백산의 절경 속에 자리잡은 청량도량으로 6. 25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은 법당이 남아 있으며, 초암사 삼층석탑 (경북유형문화재 126)과 초암사 동부도(경북유형문화재 128),
초암사 서부도(경북유형문화재 129) 등을 소장하고 있다.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사각형 지대석 위에 세워진 이중기단의 각 면석에 우주가 있고, 일주씩 탱주를 모각하였다. 각 층 옥신에도 우주가 있고, 옥개석 아래 4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없지만, 주변에 그 파편이 흩어져 있다.
주변에 금성단, 소수서원, 죽계구곡, 순흥읍내리 벽화고분, 쌍계사
[네이버 지식백과] 초암사 [草庵寺] (두산백과)
▲ 달밭골
경상북도 영주시의 순흥면 배점리에 있는 골짜기이다. 한자로 표기해서 (月田谷)이라고도 한다.
달밭이 있는 골짜기 마을을 말한다 . 소백산 비로봉에서 원적봉으로 이어지는 남동방향의 능선이 있는데, 그 중간쯤의 달밭재 동쪽의 완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 달밭골은 산중에 밭을 일구어 사는 마을인데, 완만한 경사지에 달뙈기 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명은 이 밭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달밭'이라는 '다락밭'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뒤에 와전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관련 지명으로 달밭재, 달밭고개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달밭골
▲ 비로사[毘盧寺]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진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라고도 불렀다.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로 추정된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 한 승려가 중창하고 진공을 청해 이곳에서 살게 했는데, 그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1126년(인종 4) 인종이 김부식 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 환암이 중창하였다.
1468년(예종 1)에는 김수온이 사재를 들여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석불상 2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 경희가 중건하였다. 이어 1684년(숙종 10) 월하가 법당과 산신각 등을 중창하였고 1907년 범선이 요사를 증축하였는데,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희방사 주지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 요사를,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법당과 요사채뿐이지만, 진공대사보법탑비(경북유형문화재 4)와 석조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7),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6) 등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로사[毘盧寺] (두산백과)
▲ 금계저수지 /소백산 자락길 2코스
▲ 금선정(錦仙亭)
금선정(錦仙亭)은 풍기군수 이한일(李漢一)[1723~?]이 건립한 정자이다.
금선정 일대는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자주 소요하던 곳으로,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 마늘이 유명한 단양 마늘 정식
▲ 저녁식사후 단양강(남한강) 잔도 걷기
▲ 소백산 희방폭포
소백산 중턱 해발고도 700m 지점에 있는 폭포로, 소백산 절경 중 한 곳이며 영남지방 제1의 폭포로 꼽힌다. 높이는 28m이다. 소백산의 영봉 중 하나인 연화봉(1383m)에서 발원하여 희방계곡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요란한 굉음과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직 암벽을 타고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천혜몽유처(天惠夢遊處)’
즉 하늘이 내려준 ‘꿈에서 노니는 듯한 풍경’ 이라 평했다 한다.
연화봉에 이르는 최단 등산코스를 따라 가면 만나는 희방폭포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의 희방매표소로부터 걸어서 약 15~20분 거리에 있다. 폭포 옆의 암벽에 설치되어 있는 철계단을 올라가면서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과 폭포 위의 소(沼)를 볼 수 있다.
폭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인 희방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희방폭포 [喜方瀑布] (두산백과)
▲ 희방사[喜方寺]
희방사의 창건 시기는 자료마다 상이하다. 『희방사유지(喜方寺遺誌)』에는 643년(선덕여왕 12)에 두운(杜雲)이 희방사를 창건했다고 하나, 두운이 활동한 시기는 8세기이며, 현존하는 유물이나 유적에서 7세기경 창건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에는 861년 두운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대체로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희방사에는 두운과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한다. 두운이 이곳 동굴에서 기도하던 중 호랑이 목에 박힌 비녀를 뽑아 살려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 호랑이가 의식을 잃은 처녀를 업고 오자, 두운이 정성껏 간호하고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계림호장(鷄林戶長) 유석(兪碩)의 무남독녀로서, 그날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고,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이에 계림호장이 딸을 살려준 은공에 보답하고자 절을 지어 희방사라 했다는 내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희방사 [喜方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죽령 옛길 (竹嶺 옛길) / 명승 제30호
『죽령 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지이다.
♣ 함께 한 분에 여행기는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san330/222035380752
▲ 단양 방곡도깨비마을
중선암과 상선암을 지나 선암계곡의 경치에 홀려 오다보면 방곡리에 도착한다.
첩첩 산중에 둘려싸여 평화로운 방곡리는 600여년전 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했다.
방곡 도깨비마을에서는 여전히 소나무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전통적으로 도자기를 굽는 장작 가마 방식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으며, 다수의 도예인이 공방과 가마를 운영하고 있으며, 도예촌에서는 도예전시관, 도자판매장, 도예교육원을 상설 운영하고 있다. 방곡 도깨비 마을의 으뜸 체험은 단연 도자기 만들기 체험이다. 체험 프르그램에 따라 도예 장인과 함께 물레를 돌려볼 수 있고, 잘 구워진 도자기 그릇에 나만의 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만의 도자기는 불가마에서 잘 구워져 한달 후에 집으로 배달된다. 마을을 둘러싼 오미자 밭도 마을의 자랑거리다. 오미자를 수확하여 오미자 파이, 오미자 팝콘 같은 이색 먹거리를 만들어 보고, 오미자 떡을 빚어 나누어 먹을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계절 재료를 활용하는 요리체험, 전래놀이체험, 천연염색체험 등을 즐길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양 방곡 도깨비마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선암골 생태유람길
▲ 오미자
오미자나무의 열매로 지름 약 1cm의 짙은 붉은 빛깔이다.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을 느낄 수 있어 오미자라고 불린다.
▲ 선암골 생태유람길 중 " 물소리길 " 걷기 / 상선암 부근
▲ 선암골 생태유람길 중 " 물소리길 " 걷기 / 중선암 부근
▲ 꼬리 진달래
▲ 선암골 생태유람길 중 " 물소리길 " 걷기 / 하선암 가는 길
▲ 초복이라 능이백숙과 마늘 흑염소로 맛나게 ...
▲ 저녁식사후 단양강변 걷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