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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읽는지혜 스크랩 미국의 경제 지배자들
WELL 추천 0 조회 56 12.10.15 02: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국의 경제 지배자들

 

 

밴더빌트 가의 사람들은 모두 성과 같은 저택을 소유하며 미국 최대의 부자 가문으로 군림해 왔다. 일가가 대부호가 된 초석을 마련한 인물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제독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794년에 태어나 미 육군의 수송과 관련한 이권을 바탕으로, 전설에 따르면 뇌물 등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증기선과 철도와 관련된 일대 제국을 세웠다.

 

 

1877년에 사망했을 때 그가 남긴 유산은 1억 달러에 이르렀다. 1880년 통계에서 미국 전체 국립은행의 총 예금액이 8억 3,400만 달러였으므로 10% 이상을 밴더빌트가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금액을 20세기 말 시가로 환산하면 거의 1,000억 달러나 된다! 이는 12조 엔을 웃도는 경이적인 액수이다. 그러나 국민 전체의 생활 수준이 훨씬 낮았던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10배 이상, 즉 100조 엔은 족히 넘는 경제적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밴더빌트 가의 자산 분배는 그 성을 지닌 일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윌리엄 밴더빌트의 첫 부인 앨버는 영국의 말버러 공작인 찰스 스펜서 처칠(Charles Spencer Churchill)에게 딸 콘스엘로(Consuelo)를 시집 보내려고 했으나 딸은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앨버는 격분하여 “그 남자를 죽이고 나도 목을 매어 죽겠다”고 협박하였다. 콘스엘로는 어쩔 수 없이 공작과 결혼하였다.

 

 

처칠 총리의 아들 랜돌프 처칠(Randolf Churchill)의 부인이 바로 남성 편력으로 유명한 파멜라 딕비(Pamela Digby)였다. 파멜라는 그와 이혼하고 또 하나의 철도왕 가문에 속하는 W.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로 인해 나중에 해리먼 미망인이 된 그녀는 1992년 민주당 전국의장이 되어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Bill Clinton)을 대통령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클린턴 정권에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에 취임하였고 1998년에 사망하였다.

 

 

이 가문을 세운 원조 어거스트 벨몬트의 부인 캐롤라인 페리(Caroline Perry)의 부친이 바로 검은 함선으로 우라가(浦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요쿠수카시의 옛 지명)에 내항한 제독 매튜 페리(Matthew Perry)였다. 페리 제독의 동생 너새니얼 페리(Nathaniel Perry)의 손녀 조세핀(Josephine)의 남편은 미국 제일의 금융왕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의 조카이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Jr.)이다.

미국 제일의 부호 밴더빌트 가와 페리 제독이 어떻게 이런 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함선이 찾아온 우라가의 주민이었다. “태평한 잠을 깨우는 증기선, 불과 4척에 잠이 오지 않는구나”하는 노래로 불리어진 증기선 사스케하나호를 타고 일본에 건너온 사람은 페리 제독이었지만, 대양을 항해할 대형 증기선 66척을 소유하여 미국을 지배한 사람은 원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성한 보스턴의 재벌 페리 가문의 자손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가 1994년 1월부터 클린턴 정권의 국방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즉시 북한 핵 의혹 위기를 부추기며 미?일 신 가이드라인 성립을 위한 군사적 긴장을 조장했고, 1997년 1월 장관 퇴임뒤에도 1999년까지 북한 핵 의혹 문제를 둘러싼 정책조정관으로서 한국?북한?일본?중국을 정력적으로 오갔다. 그는 가이드라인 성립 뒤에 “북한은 혐의가 없었다”며 무책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페리는 군수 기업인 GTE 실베니아(GTE Sylvania) 임원을 맡은 뒤 스스로 ESL이라는 군수 기업을 창업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7년부터 국방부 기술 자문을 10년간 수행하여 1977년부터 카터 정권에서 국방 차관이 되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북한 문제와 관련된 외교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재벌이 배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페리 자신은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보이지 않는 전투기 스텔스‘의 기술 개발로 스텔스를 만든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는 스탠퍼드대학교 국제안전보장군비관리센터의 소장을 맡아, 표면상의 직함은 고리타분한 수학자였다. 하지만 이면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투자은행 함브레히트 & 퀴스트(Hambrecht & Quist)의 경영자로서, 또 군수기업인 ’기술전략연합사(Technical Strategies & Alliances)' 회장으로서 거대한 사재를 축적하였다. 이라크 군사 분쟁과 아시아의 긴장, 그리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공격이 부의 축적을 가능케했다.

 

 

일찍이 금융왕 JP 모건은 이렇게 말하였다.

“100만 달러를 버는 것은 바보라도 할 수 있지만, 머리를 쓰지 않고서는 그것을 유지할 수 없다.”

 

 

1919년에는 스탠더드 석유사(Standard Oil Co.)를 통해 전국 정유업계의 90%를 독점했던 석유왕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최대의 납세자였다. 소득세가 처음 공개된 것은 1925년으로 존 D. 록펠러 2세는 628만 달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260만 달러, 그 아들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216만 달러씩 세금을 납부하였다.

10년이 더 지난 1929년, 윌가에 대폭락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잃은 가운데 부의 집중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2년 뒤에 열린 하원 상무위원회에서는 당시 미국 최대의 자산이었던 철도의 85% 정도를 15개의 기업집단이 소유하고 있다는 불평등 문제가 지적되었다. 그 집단이란 밴더빌트?모건?해리먼?휘트니?스탠더드 석유사의 간부들이었다.

한편 1935년에는 독신이나 세대 구성 여부를 망라하고 미국인의 47%가 연간 수입이 1,000달러 이하였다. 1937년에 사망한 존 D. 록펠러의 유산이 10억 달러로 이야기되던 시기다. 미국 총인구의 절반인 6,400만 명이 열심히 벌어들인 총액은 밴더빌트 일가?모건 일가?록펠러 일가 등과 같은 최고 소득자, 즉 인구 대비 1.5%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의 소득과 같았다.

 

 

1929년 9월 3일 허버트 후버(Herbert C. Hoover) 대통령 재임시에 기록된 최고치 381.17달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한동안 깨지지 않았고, 한국전쟁 종전 뒤인 1954년이 되어서야 400달러 대를 기록했다.

이렇게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5,000만 달러를 소유한 최고 소득자의 자손들이 전국에 수백 명씩 존재하게 되었다. 이 기준을 1,000만 달러로 내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의 자산은 거의가 유산 상속으로 이룬 것이었다.

 

 

대부호 듀퐁 가는 피엘 새뮤얼 듀퐁(Pierre Samuel du Pont)이 프랑스에서 도미하여 미국 독립을 지원해 군수 재벌을 세웠다. 260년 전인 1739년 생인 듀퐁의 자손은 1986년 시점에서 1,700명으로 늘었다. 화약 제조로 남북전쟁에서 거재를 이룩해 ‘죽음의 상인’으로 불린 듀퐁 가는 가문의 지주회사 크리스티애나 시큐러티즈(Christiana Securities)를 세워 개인 자산을 관리해 왔지만, 1977년 그 자산이 듀퐁사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손실을 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도 초대 자손 약 300명이 듀퐁사 주식의 15%, 시가로 약 100억 달러 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20세기가 되고 드디어 1909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과세법이 미국의회를 통과하였다. 1911년에는 독점 방지를 위한 트러스트 해체가 실행되어 록펠러 가의 스탠더드 석유나 듀크 가의 아메리칸터바코(American Tobacco) 등이 몇 개의 회사로 분리되었다.

1912년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여 1,5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1등 객실에 탔던 부자들은 많이 탈출했지만 3등 객실에 있던 사람들은 배에 갇혀 많이 사망한 사실이 여론을 자극하여, 이듬해인 1913년에는 개인에 대해 일정한 소득세를 징수하게 되었다.

 

 

1930년대 금융 공황의 와중에 새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부유세’를 도입하였다. 그러자 부유한 계층은 더욱 소득을 숨기기 시작하였다. 루스벨트가 밴더빌트의 요트에 초대되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부호들은 호화 요트를 구입하고 사실상 탈세를 시도해 카리브해의 면세국(택스헤이븐)에 소득을 은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치하에 실시된 뉴딜 정책은 대재벌을 소멸시키고자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유산 추정액 10억 달러에 대해 91%라는 높은 상속세를 매겼다. 나아가 1941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직후부터 기업에 대한 소득세율이 50% 전후로 대폭 인상되었다. 조금씩 빈곤 계층에 유리한 민주적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제정된 세입법이 최초의 대중세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 제도’라는 미명 아래 자택 수영장?호화 요트?렘브란트(Rembrandt)의 그림 같은 미술품 등은 수입을 발생시키지 않는 자산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자산가는 거기에 투자함으로써 면세 혜택을 누려 온 것이다.

 

 

이레네 듀퐁(Irenee du Pont)은 듀퐁사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사용한 폭약류의 40%를 제조해 죽음의 상인이라 불렸다. 그는 모건 상회와 공동으로 제너럴모터스(GM)를 인수한 뒤 1963년 유산 4,000만 달러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이레네 듀퐁의 아들 이레네 주니어는 1998년 현재 자산이 5억 2,500만 달러인 부자이다.

 

 

그러면 지난 50년 동안의 다우 평균 주가의 ‘장기 실적’을 살펴보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의 최저치가 162.60달러였다. 그랬던 것이 50년이 지난 1999년 8월에는 앞서 말한 최고치(약 70배)를 기록하였다. 이 실적을 복리로 계산한 은행 금리로 환산하면 연리 8.86%에 해당한다. 평균적으로 50년 동안이나 매년 9%에 가까운 주가 상승을 계속했으므로 경이적인 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밴더빌트가 사망한 때는 1877년으로 유산이 1억 달러였다. 그로부터 122년 뒤인 1999년 현재 불법 투기가 없다고 가정해도 3조 1,392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개인 자산만으로 비교해도 「아메리칸 헤리티지(American Heritage)」지에 따르면,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 40인에 드는 사람은 1998년 「포브스」가 선정한 억만장자 400명 가운데 빌 게이츠를 포함해 3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대부분의 미국 자산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잡지는 세습 재산을 뜻하는 ‘헤리티지’란 말답게 미국의 보수적인 유산 상속인들의 잡지이다.

 

 

1998년의 자산가치

1위 석유왕 존 D. 록펠러 1,896억 달러

2위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1,005억 달러

3위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959억 달러

4위 호텔왕 존 제이콥 애스터 780억 달러

5위 미디어왕 빌 게이츠 617억 달러

도표 2.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 순위

 

 

 

뉴욕 증권 거래소는 미국 정부가 ‘독립전쟁’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거래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1792년 5월 17일 24명의 상인들이 설립하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거래소에서는 죽음의 상인 듀퐁의 화약과 총 등 군수 물자에 대한 투기가 과열되었고, 전쟁중인 1863년 뉴욕 증권 거래소로 명명되었다. 바로 지금의 월가는 두 차례 일어난 전쟁의 소산으로 탄생한 것이다.

 

 

도둑 귀족 밴더빌트는 많은 내부 정보를 주워들으며 모건 상회 특권자로서 특별한 배당을 받았고, 그에 더하여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로부터 파격적인 리베이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보유 자산 1위는 애스터 가의 1조 6,459억 달러, 2위는 록펠러 형제, 3위는 밴더빌트가, 4위는 멜런 형제가 차지하였다. 참고로 듀퐁 가와 모건 가도 표시하였다.

 

 

미국의 유산 상속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미국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확립된 부국과 빈국간에 빈부 차이가 없어지면, 이자율의 국제적 가치가 떨어진다. 그 결과 금리나 주식의 상승률이 저하하면, 유산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유럽과 미국의 부호 사회가 투자하고 있는 증권의 가치가 엔/달러 같은 환율의 급변으로 인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큰 공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월가에 투자하면서 여유 자금을 사용해 금?은?다이아몬드 등과 같은 귀금속을 구입하고 있다.

 

 

401(k)란 미국 정부가 내국세법 제401조의 K항을 근거로 도입한 기업 연금 제도로 고용주의 분담금과 종업원의 적립금을 매달 연금으로 불입하는 기업 연금의 한 종류이다.

현재 401(k)에 가입한 미국 기업의 종업원 수는 무려 3,000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운용자산 규모도 1조 달러에 이르고 있다. 401(k)는 일본에서도 2000년 중에 도입이 검토되고 있으며,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시행이 될 것으로 보인다.

401(k)는 부금의 갹출액이 확정되어 있는 연금 제도였다. 이 연금 제도에서 부금의 운용은 가입자 개인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따라서 운영 여부로 미래의 연금액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노후 생활을 자신이 책임지는 ‘자기 책임의 원칙‘을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401(k)는 연금 상품의 특성상 장기간 증권시장의 수요 기반이 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결국 증권시장의 안전성과 성장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100년 전인 1900년에 벨기에 령 콩고에서, 1912년에는 포르투갈령 앙골라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의 최대 소유자가 된 미국인 토머스 포천 라이언(Thomas Fortune Ryan)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1928년 사망할 당시 유산은 1억 3,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라이언은 전세계의 광산을 지배한 구겐하임(Guggenheim) 재벌과 함께 활동하여 그만한 자산을 형성하였다. 1912년 타이타닉 호를 타다 차가운 바다에서 생을 마친 광산왕 벤저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의 회사에서는 광산 노동자가 시급 5센트로 일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일급은 타이타닉 호 침몰 당시 최고 1.8달러였으므로 365일 일해도 1년에 657달러밖에 안 되어, 끊임없는 파업이 일어나고 있었다.

샤갈?모딜리아니?피카소 등의 명화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전쟁 중이던 1943년에 벤저민의 형 솔로몬 구겐하임 (Solomon R. Guggenheim)이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1959년 완성한 뉴욕에 있는 미술관이다. 타이타닉 호에 사망한 벤저민의 딸 마르그리트(Marguerite, 통칭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는 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하였다.

 

 

 

100년 전, 구겐하임 일가에 융자하여 광산 이권을 확장한 이는 윌리엄 휘트(William Whitney) 해군 장관이었다. 그의 아들 해리(Harry F. Oppenheimer)는 앞 장에서 말했듯이 거트류드 밴더빌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뉴욕의 맨해턴에서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유명한 휘트니 미술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휘트니(Cornelius Vanderbilt Whitney)가 바로 광산 회사인 허드슨 베이 마이닝 & 스멜팅(Hudson Bay Mining & Smelting)을 창업한 휘트니 금속 재벌의 호주였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금을 교환함으로써 무역 수지 결제를 할 수 있는 금본위제에서는 환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금본위제의 형식상의 필요론이다.

 

 

1998년까지 계속된 금 가격의 침체는 분명 인위적인 세계 전략이었다.

금 업계는 남아공의 오펜하이머 일가가 움직여 왔다. 일찍이 영국인 다이아몬드 왕 세실 로즈(Cecil Rhodes)가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을 받고 1888년 드비어스를 설립해 아프리카 남부 전역을 지배하였다. 그의 사후인 1917년에 어니스트 오펜하이머(Ernest Oppenheimer)가 앵글로아메리칸을 설립해 남아공의 광구를 완전히 지배한 이래 아들 해리를 거쳐 3대째 니콜라스(Nicholas F. Oppenheimer)에 이르렀다. 「포브스」에서는 니콜라스 오펜하이머가 1999년 1월 드비어스 회장에 취임하여 공칭 자산 28억 달러(3,360억 엔)라고 보도되었다.

 

 

금본위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의 힘은 종이(지폐)에 있다. 전례 없는 월가 호황을 맞게 되면, 기축 통화인 달러 지폐를 마음껏 찍어내서 재벌들이 마음껏 금과 광구를 몽땅 사들일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이권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

 

 

1999년 1월 1일에 유럽 경제 통합에 따른 새 통화 ‘유로’가 탄생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은행간 거래나 신용 카드 등 장부상의 통일 통화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2년 1월 1일부터 현금 통화가 유통되고, 7월 1일부터 마르크?프랑?리라 등 각국의 통화가 사라질 예정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유럽 전력에서 화폐가 수거되어 새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녹여질 예정이다. 경화가 될 금?은?동?니켈 등은 수천만 톤에 이르는 방대한 수요가 예상되고 있다.

 

 

19세기 초두에 유럽 전력의 국가 자산을 다 모아도 대항하지 못할 정도인 세계 최대의 로스차일드 재벌이 탄생하였다. 각국의 호전가(好戰家)들은 로스차일드 상회의 문을 두드려 빚을 져야만 했다.

 

 

금이나 은?동?니켈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한 가지 가정으로 단기적인 가격 급변이 생각된다. 그에 따라 주식시장도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금이나 은의 가격이 조금이라도 상승하면, 자금이 귀금속 투기로 흐르게 된다. 이를 계기로 월가의 과열된 주가가 단번에 폭락할 가능성이 생긴다.

주목할 것은 빌 게이츠가 1999년 9월에 캐나다의 은 채굴 회사의 주식을 10% 취득했고, 뒤이어 미국 제2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1999년 2월 전세계 생산량의 20%에 이르는 대량의 은을 구입한 일이다. 버핏의 투자 원칙은 “첫째 절대로 손실을 보지 말 것, 둘째 절대로 첫째 원칙을 잊지 말 것”이기 때문에 금 가격은 틀림없이 상승할 것이다.

2002년에 시행될 유로 화 유통 전에 갑자기 대량의 귀금속 수요가 늘어 가격이 폭등한다. 이것이 한 가지 예상되는 시나리오이다. 그 반대의 시나리오도 있다.

 

 

금 가격 상승은 주가 폭락의 신호이다. 이 경우 금괴는 투기가 아니기 때문에 서민이 지니고 있는 사소한 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월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1999년 3월 다우 평균 주가가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러한 상승은 전세계를 환류하고 있던 유산 상속인들의 자금이 국제 금융 마피아의 활동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뉴욕으로 많은 돈을 끌러 모은(훔친) 결과였다. 아시아 경제 위기 등으로 지구 전체가 소비를 억제해야 했던 세계적인 메커니즘에 기인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증권 거래소도 투자 의욕을 자극할 만큼 주가가 오를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갈 곳을 잃은 돈이 뉴욕에 계속 축적되어 주가가 오른 것이다.

컴퓨터?전자공학?통신 분야가 활성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투기성이 짙은 자금이 투입된 데 따른 상승률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과대 평가였다. 주가 상승으로 미국인의 ‘명목상 개인 소득’이 급상승하고 그 돈이 방대한 소비 증가로 흘러들어 물건이 잘 팔렸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소비가 수그러들면 곧바로 떨어질 생산성 향상에 불과했다.

월가가 순간치 1만 달러를 돌파했던 1999년 3월 16일 직후, 전세계의 경제 전문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지만, 그 원인을 미국의 국내 사정만 가지고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금융은 그렇게 성립된 것이 아니다. 미국인의 자산이 증가한다면, 외국으로부터의 자산유입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다.

 

 

?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ants)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배상 문제를 청산하기 위해 스위스 바젤에 설립된 조직이다. 현재는 전세계의 중앙은행 협동조합조직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대출은 자본의 8% 이내여야 한다”는 BIS 기준을 내세워 거품에 들떠 있던 일본 금융 기관을 단번에 지옥으로 내몬 국제 금융의 총본산이다. 1999년에는 12% 기준안을 제시하였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동 환율제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은 결코 안정적인 제도가 아니다. 순금을 화폐가치의 기준으로 하는 금본위제는 일찍이 1816년 영국이 채택하였다. 그 후 1900년에 미국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금본위제를 시작했으며, 각국의 중앙은행은 발행한 은행권의 약 1/3 내지 1/2에 상당할 만큼의 금괴를 준비해 항상 태환에 대비해 왔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과 동시에 주요국들에서 금본위제가 붕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누구나 ‘불안정한 지폐’를 ‘현물인 금’과 교환하려 한다. 따라서 전시에는 금본위제를 사실상 정지시켜 교환을 막고 중앙은행은 지폐를 많이 찍어 군사비를 창출해 군대를 강화함으로써 전쟁을 치른다. 이 지폐의 담보는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전이 끝난 1919년 미국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였고, 1925년에 영국이 복귀하였다가 다시 1931년에 폐지하는 등 많은 변천이 따랐다.

이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 12월 27일 발효된 IMF의 브레턴우즈 협정에서 ‘금이나 달러를 척도로 삼아 각국 통화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통화 교환 규칙이 정해졌다. 전후에는 전세계의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금 중에서 거의 70%에 가까운 방대한 양이 미국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달러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만큼 금이 모인 미국에서 금속 재벌들이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무역수지가 악화되자, 1971년 8월 15일 닉슨 쇼크를 계기로 변동 환율제로 이행한다. 이와 같이 환율제는 미국이나 영국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빈국의 예상을 뒤집고 180도 반전되는 불합리한 것임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1997년 태국의 통합인 바트(baht) 화가 폭락한 이래 한국에서 거의 200톤에 가까운 금괴가 스위스로 매각되었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가 매각한 대량의 금괴를 매입한 구매자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제 위기를 맞은 러시아도 1998년에 대량으로 금괴를 매각하였다. 1998년 브라질과 폴란드에서는 공적 보유 금이 2배로 급증했고, 캐나다?네덜란드?벨기에서는 공적 보유 금을 매각하였다. 도대체 그러한 금들은 어떤 이유로 어디에 얼마나 모여 있는 것일까? 그것들이 대량 확보된 단계에서 금 가격이 급등한다면, 단번에 금의 자산가치가 올라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록펠러 재벌의 스탠더드 석유

지금으로부터 130년쯤 전인 1870년에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라는 인물이 남동생 윌리엄(William), 프랭클린(Franklin)과 함께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 스탠더드 석유라는 정유회사를 창업하였다. 막내 동생 프랭클린은 중도에 목장 경영자가 되어 두 형과 다른 길을 걸었다.

존과 윌리엄 형제는 차례로 정유업자를 설득하여 담합 신디케이트를 조직하고 9년 뒤에 미국 전체 석유의 95%을 스탠더드 석유의 정유탱크 속에 틀어쥘 수 있었다. 남에게 단 5%만 남겨 주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독점이 아닐 수 없다.

그 수법은 이러하다. 창업한 지 불과 8년 뒤에 미국 전체의 정유액 3,500만 달러 가운데 3,300만 달러를 장악하고, 1882년 스탠더드 석유의 전 재산을 뉴욕에 집결하여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를 결성한 존 D. 록펠러는 일찍이 5대 부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로 인해 1890년 반트러스트 법이 제정되고, 1892년에는 그들의 아성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Standard Oil Co. of Ohio)의 해체가 명령되었다. 그러나 그는 뉴저지 스탠더드 석유(통칭 저지 스탠더드)를 트러스트의 아성으로 삼아 더욱 독점을 넓혀 나갔다.

 

 

드디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치하에서 이 거인도 34개 사로 분해될 운명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때 록펠러가 타격을 입기는커녕, 트러스트 해체라는 대사건으로 월가에서 이 회사의 규모가 재인식되어 사행심이 조장되면서 이전보다 더 투기열이 높아졌다. 오히려 작게 분할된 새로운 스탠더드 석유 주식 값이 30%나 치솟아, 록펠러 가는 가만히 앉아서 자산을 30%나 불리는 횡재를 만난 것이다. 트러스트 해체 2년 뒤인 1913년, 존 D. 록펠러의 자산이 9억 달러에 이른 것을 보면 그 사실은 자명해진다.

 

 

석유 제국을 이룩한 록펠러 자신은 뉴욕 주 포칸티코에 200만 달러 짜리 대저택을 세워 350명의 고용인을 고용하며 저택을 유지하는 데만도 연간 50만 달러를 썼다. 그밖에 3채의 거대한 저택을 소유했으며, 대부분의 자산을 형성한 1913년에 당시 총액이 9억 달러를 넘었다.

 

 

1812년 창업한 시티 은행은 1865년 내셔널시티 은행으로 개명하여 윌리엄 록펠러가 투자를 계속하면서, 1893년 스틸먼이 은행장으로 재임시에 뉴욕에서 1위로 올라섰고, 스탠더드 뱅크로 불리었다. 1909년에는 모건 상회가 대주주가 되어 1912년 JP 모건 주니어(통칭 잭)가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편 1863년에 창업된 뉴욕 퍼스트내셔널 은행(First National Bank of New York City)에서 1912년까지 은행장과 회장을 역임한 조지 F. 베이커(George F. Baker)는 ‘월가의 스핑크스’로 불리며 모건 상회의 철도 이권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지켰지만, 체이스내셔널 은행 5만주를 구입한 모건과 스틸먼의 친구였다. 그의 손녀 이디스는 월가의 로스차일드 계 대은행가인 제이콥 헨리 시프(Jacob Henry Schiff)의 손자와 결혼했으며, 이 은행의 대주주이자 임원을 맡은 이가 밴더빌트 일가의 페인 휘트니라는 식으로 얽혀 있었다.

이리하여 1955년에 앞에서 말한 내셔널시티 은행과 합병해 뉴욕 퍼스트내셔널시티 은행이 되었다. 1976년에 개명해 지금의 시티 은행이 탄생했으며, 이름 표기도 시티 은행(City Bank)에서 시티뱅크(Citibank)로 바뀌었다. 이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의 3대 재벌인 로스차일드?록펠러?모건이 합친 금융 기관임을 알 수 있다.

이 은행이 1998년에 자산 7,000억 달러(약 100조 엔)의 세계 최대 금융 기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트래블러스 그룹(Travelers Group)이 일본의 4대 증권사의 하나인 닛코 증권을 인수하여 1999년 4월 22일 일본에서 발족한 새로운 전국은행협회에 시티뱅크가 정회원으로 가맹한 것이다.

이에 비해 체이스 맨해턴 은행은 그 모체가 1799년 창업한 맨해턴 은행(Bank of the Manhattan Company)이다. 이에 거의 1세기 뒤늦게 시작한 체이스 내셔널 은행(Chase National Bank)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은행장과 회장을 역임한 윈슬럽 W. 올드리치(Winthrop W. Aldrich)가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처남이라는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록펠러 재벌의 금융기관이 되었다. 이 은행은 1955년 맨해턴 은행과 합병해 체이스 맨해턴 은행이 되었다.

록펠러 일가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원인이 미국의 엉터리 소득세법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원인 또한 명백하였다. 1909년 소득세 도입안에 대해 의회가 뜨거운 논쟁을 전개하는 바람에 법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소득세 도입에 가장 거세게 반대한 이는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이었던 백만장자 넬슨 W. 올드리치(Nelson W. Aldrich)였다. 그는 체이스 내셔널 은행장인 윈슬럽의 부친이었는데, 반대 이유는 그의 사위가 존 D. 록펠러 주니어였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민주당도 공화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가 최저 수천만 달러를 모금해야 하기 때문에, 정책으로 부호의 양해를 얻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양당 대립이 연출되고 국민이 총동원되는 큰 ‘파티’인 것이다. 그래서 정당을 영어로 ‘파티(party)’라 하는가보다.

 

 

미국에는 재벌당이라고 하는 하나의 정당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거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 문제 때문이다.

이미 이 사실은 많은 미국 언론인들이 지적하였다. 이 자금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금융 기관과 산업과 유산 상속인의 연줄로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록펠러 가의 경쟁자이자 협력자로서 같은 석유 재벌을 형성한 가문이 멜런 가였다. 걸프 석유를 창업하여 텍사스 주, 오클라호마 주 등 남부의 석유를 지배한 멜런 가는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이 스스로 금주법 시절 재무 장관에 취임했고, 외아들 폴 멜런(Paul Mellon)은 멜런 내셔널 은행(Mellon Naitonal Bank)의 임원이 되었다.

 

 

멜런은 솜씨를 발휘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0년에 걸쳐 하딩, 쿨리지(Calvin Coolidge), 후버의 3대에 걸친 공화당 내각에서 재무 장관을 맡으면서 “멜런 발치에 세 대통령을 거느렸다”는 평을 들었다.

 

 

멜런은 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예상대로 자신들 부유층의 자산이 보장될 수 있도록 즉각 세율을 낮추었다. 그 때문에 “멜런에게 재무 장관을 시키는 것은 카사노바에게 여학교 교장을 맡기는 것과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0년대 초에 세율은 세 번이나 인하되어 백만장자들에게 부과되는 최고 세율이 25%까지 제한되었고, 중산층은 거의 비과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뒤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세금을 줄이는 정책이니만큼 당연히 국가 재정이 어려워질 것으로 모두가 예상하였다. 그런데 거꾸로 세입이 증가하고 납세의 형평성이 향상되었다.

 

 

“세율을 올리면 세입이 증가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예로부터 이야기되었듯이 철도 승차율은 철도가 무엇을 운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최다 승객을 수송하면 최대 승차율이 되고 수입이 늘어난다. 정부 또한 이 사업 원리에 따라 달려야 한다”며 멜런은 의기양양하게 낮은 세율에 대해 설명하였다.

 

 

존 D. 록펠러와 같은 해인 1937년에 사망한 앤드류 멜런의 유산은 2억 달러(1998년 시가로 약 5조 엔)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실제 발표된 유산은 3,500만 달러였고, 그밖에 200만 달러의 부동산뿐이었다. 이는 7,500만 달러 이상을 아들과 딸들이 주식을 보유한 회사들에 미리 투자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래도 액수가 너무 적다. 멜런 가의 자산은 알코아나 걸프 석유 등의 주식만으로 1960년대에는 47억 달러에 이르렀고, 리처드?폴?사라?에일사 멜런이 각각 7억 달러를 가지고 있었으니, 상당한 액수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재벌은 대폭락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들 폴 멜런은 석유 남작이라 불리며 1999년 2월 세상을 뜨기 전까지 부친이 워싱턴에 설립한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 관장으로서 또 세계 제일의 미술품 수집가로서, 이 갤러리와 예일 대학에 각각 1억 달러 이상의 미술품을 기증하였다. 멜런이 경매에서 낙찰받았던 현란한 로마노프 가의 재물이 소장된 갤러리야말로 유산 상속세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랜드 사는 레밍턴 암스(Remington Arms Co.)가 전후에 해군업계의 스페리랜드(Sperry Rand Corp.)와 합병하여 레밍턴랜드(RemingtonRand Corp.)가 되어, 해군과 공군의 잠수함이나 미사일 방위의 두뇌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 사장을 지낸 이가 일본 점령군 총사령부(GHQ)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이다. 부사장에는 맨해턴 계획의 책임자로서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레슬리 그로브스(Lesile Richard Groves) 장군이 취임하였다. 이것이 조직 개편을 통해 랜드 코포레이션이 되어 펜타곤의 중추적인 두뇌 집단으로 활동하면서 록펠러 재벌의 지배를 받아왔다.

 

 

록히드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으로 유명한 대형 군수 산업체인 마틴마리에타 사(Martin Marietta Corp.)도 매수하여 록히드 마틴(Rockheed Martin Co.)으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록히드 마틴은 “북한 핵 미사일을 우주 공간에서 격추한다”는 선전 문구를 내세워 전역미사일방위구상(TMD)의 주력 제조업체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막대한 예산을 노렸다.

 

 

백악관과 정보 수집 군사 체제는 투자 은행의 화신이다.

CIA와 국방부의 입장에서는 현 정권이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에 따라 대외공작이 변해서는 안될 것이다. CIA 인사를 감독하는 재벌과 유산 상속인에게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위신이 흔들리는 일은 재산의 감소를 뜻하는 중대사이기 때문이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hel Rothschild)와 그 다섯 아들들의 지혜였다.

금융 제국의 기초를 세운 초대 마이어 암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1994년 2월 23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묘지에 일족 70여 명이 모였을 때, 당시 독일 총리였던 헬무르 콜(Hlemut Kohl)도 내방해 일족의 번영을 축하하였다. 바스티유 감옥을 뒤흔든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0년대에 마이어가 이미 거상으로서 한 재산을 이룬 시기부터 세어 보면 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밴더빌트 재벌의 두 배 가까운 세월이 흐른 셈인데, 그 기간의 투자와 금지를 계산하면 월가의 50년 간의 실적만 적용해도 당시 자산은 지금까지 600만 배로 증대된다.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게토(getto)에서 환전상을 경영하던 로스차일드 가의 마이어 암셸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본점을 장남이 이어받았고 차남이 빈(오스트리아), 3남이 런던(영국), 4남이 나폴리(이탈리아), 5남이 파리(프랑스)에서 로스차일드 상회를 열었다. 다섯 점포의 장부는 통일되었고, 자산과 이익 배당은 평등하게 이루어졌다.

나중에 일족 가운데 최대의 자산을 이루게 된 3남 네이선이 21세 때 2만 파운드를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에 거처를 정한 때가 1798년, 지금부터 200년 전이었다. 1800년 56세가 된 마이어 암셸은 자산이 10억 플로린(florin)에 이르렀다. 이 네덜란드 통화가 지금의 시가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태 상인 중 열 손가락 안에 든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독일 영주들에게 로스차일드 가가 신뢰할 수 있는 금융업자로서 자리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폐가 처음 생긴 것은 애초에 로스차일드 가와 같은 금 세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화를 맡아 보관하기 위한 훌륭한 금고를 가지고 있어서, 당시 영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금화?은화?동화 등 귀금속을 소유한 사람들은 전쟁 발발과 같은 특수 상황에 처하면 로스차일드 상회에 자기 재산을 맡기고 보관증을 받았다.

‘로스차일드 상회’라고 쓰인 보관증은 금화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금화처럼 무겁지 않았고 가벼운 종이로 충분히 교환가치가 있었다. 그 자체가 금화와 등가인 지불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지폐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에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된 시기는 로스차일드 가가 대두하기 1세기 전쯤이므로 지폐를 고안한 것이 로스차일드 가는 아니지만, 이 보증서 유통 메커니즘이 금본위제에서 지폐의 원형이라 생각할 수 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10년에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금융왕 베어링과 세를 다투고 1인자에 오른 이래 수년간 영국이 유럽 동맹국들에 제공한 자금인 4,200만 파운드의 절반을 자신이 조달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자가 되었다. 1812년에는 막내 동생 제임스가 파리에 정주하였고 부친 마이어 암셸이 68세로 사망하였다. 이 때 재벌의 시조로 추앙받던 그가 “우리 집의 자산은 일체 공표하지 말 것”이라는 유훈을 남겼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일가의 자산은 비밀에 싸여 있다.

 

 

1822년에는 5형제가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 받아 단번에 유럽 상류 사회의 정점에 올랐다. 그리고 빈 회의 의장을 지낸 메테르니히(Matternich, 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 등을 회유해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 모두가 로스차일드 상회에 의지하게 하였다. 유럽 전역의 왕실들은 로스차일드가에 염치없이 손을 벌렸다.

 

 

1875년이었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주식을 팔려는 것을 안 영국은 프랑스보다 선수를 쳐서 서둘러 구입하려 했지만, 잉글랜드은행으로부터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디즈레일리(Disraeli) 총리는 뉴코트에 있는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에게 급사를 보내어 “내일까지 400만 파운드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라이오넬이 담보가 무엇이냐고 묻자 “영국 정부”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바로 400만 파운드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7만 6000주를 매수해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입에 머금고 있던 청포도 씨를 뱉어내며 라이오넬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액을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400만 파운드라는 액수이다. 대영제국 역사상 최대 부호는 당시 디즈레일리 총리를 후원하며 여전히 건재했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으로, 그 자산은 아무리 많아도 500만 파운드 정도로 추정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19세기의 100년 동안 로스차일드 일족이 획득한 부는 4억 파운드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로스차일드 일족이 빅토리아 여왕보다 수십 배의 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 주식마저도 청포도 씨나 다름없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유산의 크기를 재는 한 사건이 1949년 6월 30일 파리 증권 거래소에서 일어났다. 이 날 아무 이유 없이 리오틴징크?로열더치셸(Royal Dutch/Shell Group)?르니켈(Le Nickel)?드비어스 4대 종목이 일제히 크게 폭락하였다. 원인은 기 로스차일드의 부친 에두아르가 81세로 사망한 데 있었다. 프랑스은행 이사를 지내고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주였던 에두아르는 고령으로 사업과 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과 주가는 유산 상속인에게 중대한 이해 관계가 있었다. 유산 상속세 가운데 에두아르가 보유하던 주식에 대한 과세는 사망 시의 증권 시가로 산정되기 때문이었다. 4대 종목은 로스차일드 주였는데, 일족이 보유 주식의 시가를 폭락시킴으로써 유산 상속세를 대폭 줄인 것이다.

 

 

미국 재벌의 역사를 생각할 때, 밴더빌트는 네덜란드 계, 듀퐁은 프랑스 계, 록펠러는 독일 계이다. 그러나 미국 산업계를 형성한 주인공의 대부분은 모건?카네기?포드 등 대영제국의 자손에서 탄생하였다. 대영제국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이탈리아의 메디치(Medici)가를 유럽 금융 재벌의 시조로 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 동인도회사, 로이드 보험(Loyds Insurance), 잉글랜드은행, 베어링 상회가 탄생함으로써 근대적인 금융가가 런던 ‘시티지구’에 확립되었다.

베어링 가와 로스차일드 가의 런던 시티가 뉴욕 월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의 호텔와 애스터 가가 영국에서 작위를 수여받고, 미국에서 재산을 이룬 석유왕 게티(J. Paul Getty) 일족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국적을 옮기는 등 상류 계급에서는 끊임없는 이동이 이어지고 있다.

 

 

베어링 재벌은 1763년 베어링 상회가 설립된 이래 로스차일드 가가 대두하기까지 런던 금융계를 지배했으며, 이후에도 양가가 세를 다투어왔다. 베어링 상회는 1995년 젊은 딜러가 거액의 손실을 내어 도산하고 네덜란드의 ING뱅크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이미 과거의 존재로 잊혀졌지만, 그렇다고 베어링 일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100년쯤 전인 1890년 가을에도 발생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경쟁자인 로스차일드 은행이 비밀리에 구제 자금을 마련해 베어링 상회를 궁지에서 구출했고, 그 이전인 1839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의 위기를 구한 것이 베어링 상회였다.

 

 

18세기에 동인도회사 회장으로서 세계 무역에 군림하고 대영제국의 이권을 7개의 바다로 확장한 ‘유럽 제일의 상인’ 프랜시스 베어링의 자손들은 영국 귀족의 중심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월가의 대표적인 투기꾼으로 이름을 남긴 이가 제이 굴드(Jay Gould)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견실하게 사업 투자로 일관하면서 금융재벌을 형성해, 미국 전체 산업과 국가를 지배한 투자가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한 세기 전인 1892년에 제이 굴드는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에도 ‘월가의 악마’라는 악명이 전해지며 그 투기 전설이 미국 경제지에 종종 인용되는 까닭은 요즘의 기업 탈취꾼의 수법이 굴드가 이용한 악질적인 수법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헤리티지」가 미국의 모든 부호 목록을 만들었을 때 역대 9위에 기록된 굴드의 개인 자산은 1998년 시가로 환산해 421억 달러(5조 엔)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 ‘지명 수배자’이던 깡패 제임스 피스크(James Fisk)를 동업자로 삼고, 도둑 귀족의 대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에게 도전해, 5대호 주변의 에리 철도(Erie Railroad)를 빼앗았다. 후에 밴더빌트에게 관권을 이용하는 방법을 일러 주어 손잡았고, 검은 돈을 건네 주며 차례로 주주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축재뿐만 아니라 눈감으면 코 베어가듯이 태연스럽게 약한 동료들을 배신하고, 뇌물로 뉴욕 판사를 포섭해 악법을 제정하게 해 인수 사건들에서 상대방을 물리쳤다. 심지어는 경쟁 회사에 밀고 들어가 주식 대장을 훔치기까지 했다.

굴드의 검은 돈에 엉겨 붙는 이들 또한 배후 동정을 계속 그에게 귀띔해 주고 제 몫을 챙겼기 때문에 한때는 굴드 일파가 휘두르는 권력이 ‘미국의 법’이 되었다. 이들은 철도 회사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기관차를 탈선시키기까지 하였다.

에리 철도에서 굴드의 배임 소동이 일어난 1869년에는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Grant, Ulysses Simpson) 장군이 대통령에 재임 중이었다. 굴드는 대통령에게조차 “금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며 일갈하고, 금 부족 사태를 연출해 금 가격을 끌어올린 다음 재빨리 팔아치워 ‘검은 금요일’로 불리는 대폭락을 일으켰다.

갖은 사건을 일으켜 에리 철도에서 쫓겨나자, 그는 서부로 가 주식매점에 착수하였다. 유니온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의 임원이 되자 거금을 여기저기 굴리면서 남서부 철도주를 사들여, 일대의 철도 가운데 약 절반을 장악하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인 조지 제이 굴드(George Jay Gould)가 사업을 이어받아 미국 횡단 철도를 둘러싸고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arriman)과 가공할 경쟁을 전개하였다. 굴드는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만년을 맞이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투기꾼의 활동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굴드가 뉴욕 시의 악덕 판사를 이용해 에리 철도의 관련 회사를 빼앗았을 때, 그에 대항하는 판사와 총명한 변호사들을 이끌고 교묘히 굴드에게 덫을 씌우면서 그 철도 회사 부사장에 취임해 폭력단 무리를 내쫓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 인물이 바로 JP 모건으로 이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런던에서 금융왕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세상을 떠난 1836년 7월 28일에서 불과 9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837년 4월 17일, 그 환생이라고도 할 금융왕이 태어난 것이다.

옛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철도는 철로의 이름을 빌려 쓴 금융 자본 - 거대한 상업 은행이었다. 20세기 초두에 철도 개척 시대가 끝나가던 때, 미국 전체 증권 발행액이 철도를 10이라고 할 때 여타 모든 산업의 합계가 5도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기업이 철도 자본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1925년 무렵 모건 상회가 지배한 주요 15개 철도의 자산은 합계 85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 금액은 1998년 시가로 7,31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금액으로 오늘날의 거대 헤지펀드도 발 끝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의 철도회사 산하에 각기 수십 개의 산업회사가 문어발처럼 꿈틀거리며, 미국 내 발행 주 중 47%가 철도 회사 소유이고 총 1,000개를 넘는 기업들이 모건 상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모건 상회의 자산 총액은 여러 역사가들이 계산을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밝힐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1913년 사망한 JP 모건의 유산은 놀라울 만큼 적었다고 모든 기록에 쓰여져 있다. 미술품 수집 1억 달러, 부동산 7,000만 달러, 기타 현금이나 신탁기금 등의 유산이 합계 3,000만 달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음의 상인 듀퐁, 철도왕 밴더빌트,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곡물왕 카길(Cargil), 담배왕 듀크, 광산왕 구겐하임, 석유왕 멜런, 자동차왕 포드 등은 비록 악랄한 트러스트를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대중을 상대로 상품을 판매하는 산업가였다.

 

 

JP 모건이 국제 금융업자로 성장한 역사는 세계적 금융가였던 미국인 조지 피보디(George Peabody)가 런던 금융계에서 대활약하던 시대인 1854년에 JP 모건의 부친인 주니어스 모건을 영입한 날에 시작되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키더피보디(Kidder Peabody) 증권의 일족이 창업한 조지 피보디 상회(George Peabody & Co.)는 당시 영국 제일의 미국 금융 기관 대표였다. 빅토리아 여왕을 배알한 피보디가 사망한 뒤 주니어스 모건 상회(Junius Morgan & Co.)로 바뀌어 로스차일드 상회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투자 은행 모건 그렌펠이다.

 

 

“그 분야의 1위나 적어도 2위가 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수 없다. 3위 이하는 소용없다”

웰치의 이 말은 20세기 초두에 JP 모건이 한 말 그대로이다. 웰치는 키더 피보디 인수로 금융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하고 나서 항공기 대여 회사 GPA 그룹과 방송계의 거인 NBC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보석상 티파니(Tiffany)의 첫째 주주가 되더니,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카르텔과 공모해 다이아몬드의 국제 시장 가격을 조작하였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에 FBI가 조사에 나설 정도였다.

 

 

1843년 조지 피보디 상회(런던) 설립 → 1854년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 파트너가 됨 → 1864년 개편해 JS 모건 상회(런던) → 1900년 로스차일드 일족의 에드워드 그렌펠이 지배인이 됨 → 1910년 개편해 모건 그렌펠

 

 

1861년 JP 모건 상회 설립(뉴욕)

 

 

JP 모건이 투기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유명한 사건은 금본위제가 공포되기 전인 1893~1895년에 걸쳐 일어났다.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 시절에 경제 위기가 닥쳐, 금과 은의 빈번한 교환 때문에 재무부의 보유 금이 바닥나면서, 국가 비상 사태가 야기되었다. 이 때 어거스트 벨몬트와 런던 로스차일드 가가 움직여, JP 모건이 백악관을 직접 찾았다. 그리하여 각료들에게 지시가 내려지고, 삼자 제휴 플레이를 통해 금을 동원함으로써 미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마저 조종하게 된 JP 모건 부자는 증권 투자를 독점, 금융 트러스트를 형성하였다. 당시 록펠러의 석유 트러스트를 따라서 담배 트러스트?소금 트러스트?설탕 트러스트?술 트러스트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와중에서 JP 모건은 트러스트의 트러스트라 불린 모건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미 1892년에 발명왕 에디슨을 농락해 GE를 설립하고 전기 사업에 진출했던 모건은 1901년에 철강왕 카네기를 매수해 철강 트러스트라 불리는 US스틸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는 미국 전역의 전화를 독점하는 AT&T 인수를 마쳤으며, 1920년에는 죽음의 상인 듀퐁과 손잡고 GM을 지배하였다.

“기원전 4004년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서기 1901년이 되어 JP 모건과 존 D. 록펠러가 지구를 바꾸어 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다우 산업주 30종 가운데 모건 주로는 GE?GM?듀퐁?텍사코?US스탈(현재 USX)?AT&T?IBM?JP 모건?시티뱅크를 꼽을 수 있다.

 

 

이렇게 다소 오래된 이야기에 조바심이 나은 이유는, 우리가 살아온 1980~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대형 은행과 증권 회사의 합병 바람이 거세게 불었기 때문이다. 체이스 맨해턴 은행, 케미컬 은행,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Manufacturers Hanover Trust), 도이치 은행, 뱅커스 트러스트, 드레스덴 은행(Dresdener Bank), 스위스 은행, 스위스유니온 은행, 트래블러스, 시티뱅크, 메릴린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Bank of America), 시큐러티퍼시픽(Securities Pacific), 홍콩 상하이 은행(Hongkong & Shanghai Banking Corp.), 미들랜드 은행(Midland Bank) 등 무수히 많은 합병을 목도한 바 있다. 모건 전성기인 1919~1928년 사이에도 그와 비슷한 은행 합병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친 바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 10년 동안에 놀랍게도 1,358개 은행이 합병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었다.

 

 

이듬해인 1930년 체이스가 미국 1위가 되기까지 4,000개 은행이 도산해야 했다.

 

 

지금까지 등장한 밴더빌트?카네기?포드?록펠러에게는 “별다른 자금도 없었으면서 막대한 재산을 이룩하였다”는 ‘미담’이 있는데 비해, JP 모건은 애초부터 자산가였다. 즉 미국 상류 사회의 정통파였다는 데 그 해답이 있다.

 

 

영국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산업혁명의 기계화와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 발명 및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의 증기 기관차 발명에 의한 철도의 발달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의학?시계 세공?문화 예술?철강?화학?약품?통신?항공 산업 등이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하였다. 미국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로버트 풀턴(Rovert Fulton)에 의해 증기선이 발명된 뒤에 철도?철강?석유?화학?통신?전기?할리우드 영화?자동차?텔레비전?컴퓨터?항공기?우주개발?인터넷을 육성해 어느 시대에나 대재벌과 억만장자를 배출하였다. 산업은 모든 것의 어머니이다.

일본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모든 산업 기술에서 미국을 추격하여 소형화와 개량이라는 편의를 제공하며 세계를 석권하였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컴퓨터 서비스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 쓰러져 가던 미국 금융계를 부활시킨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면적만 넓은 나라가 아니다. 잇따라 새로운 것을 세계에 제공할 공업력과 독창성에서 19세기 말 이래 한결같이 최고의 자리를 지켜 온 나라이다. 미국 경제가 전락하던 시대에는 반드시 기술 정체 상태가 관찰되었다. 한편 산업계의 배후에 늘 군사력이 있어서 국가를 지치게 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것도 미국의 특징이다.

따라서 투기꾼은 가난한 나라에는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다. 빌 게이츠 등 산업가가 있고서야 비로소 조지 소로스가 월가에서 활약할 수 있다.

 

 

또한 1991년 영국의 신문왕 로버트 맥스웰(Robert Maxwell)이 배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뒤에 막대한 채무와 자금 유용이 드러났는데, 그 금융 범죄에 관여한 회사가 골드먼 삭스였다.

사실 1986년에 골드먼 삭스는 스미토로(佳友) 은행으로 하여금 자사주 3,900만 주를 보유하도록 투자를 강요해 1,000억 엔 가까이 자금을 주입시키고는 경영에는 일체 간섭하지 못하도록 한 바 있었다.

 

 

절대로 손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1998 8월~9월에 걸쳐 헤지펀드 LTCM이 러시아 금융 붕괴의 영향을 받아 40억 달러의 손실을 내가 파산해, 일시적으로 월가에 대폭락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월가와 백악관이 나서 LTCM은 곧바로 구제되었다.

 

 

만주철도 이권을 노렸던 인물로서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해리먼은 유니온퍼시픽 철도를 키워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최대의 철도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에서 폴 뉴먼(Paul Newman)과 로버트 레드퍼드(Robert Redford)가 연기한 열차 강도 부치 캐시디(Butch Cassidy)와 선댄스 키드(the Sundance Kid)가 유니온퍼시픽 철도를 습격한다. 이 철도 강도들을 남미 볼리비아로 추방한 미국 최초의 철도왕이 해리먼이었다. 1909년 사망 당시의 유산이 1억 달러라고 하니, 1998년 시가로 3조 엔 가까이 된다.

그가 지배한 철도 길이가 30,000km, 보유하던 기선의 항해 거리는 90,000km를 넘었다. 사생활에서는 뉴욕의 50실의 아파트, 교외에 150실의 별장 등을 소유하고, 정계에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철도왕이 바로 해리먼이었다. 투기꾼 제이 굴드와 경쟁하고, 금융왕 JP 모건과는 평생 반목을 거듭하였다.

 

 

1946년부터 영국 대사, 그리고 1946~1948년 트루먼 정권의 상무 장관이 되어, 상무 차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휘트니를 부하로 두었다. 패전 후 일본에서 점령군이 활보한 시절을 19세기 2대 철도왕의 유산 상속인이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 그가 사망하고부터 8년이 지난 1994년 9월, 유산 6,500만 달러를 남긴 애버럴 해리먼의 유족 4명이 “미망인 파멜라는 1,860만 달러의 4개 신탁기금을 제멋대로 이용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투자 등에 수백만 달러를 불법 운용하고 있다”고 항의해, 반환하도록 버지니아 주 재판소에 고소하였다.

 

 

파멜라 딕비의 첫 남편은 영국 처칠 총리의 아들 랜돌프 처칠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처칠 총리의 관저가 있던 다우닝 가 10번지에 살고 있었다. 밴더빌트 가의 근친이었고, 그녀의 부친은 영국의 에드워드 딕비(Edward Digby) 남작이다. 모친은 한나 로스차일드, 사촌 오빠가 앨버트 프림로즈(Albert Primrose)였다.

 

 

역사책에는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황태자비 조피(Sophie) 부처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방아쇠가 당겨졌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6년 전인 1908년에 오스만투르크의 쇠퇴를 틈타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강제로 합병했기 때문에 슬라브 민족주의의 세르비아가 격분하고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했던 것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었다. 그 후 1912년~1913년에 걸쳐 발칸 전쟁이 전개된 당연한 결과로서 황태자가 암살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자는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으로 조종되는 유럽 대제국 합스부르크 가였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토와 항로의 권익 확보에 노골적으로 욕심을 보인 여러 나라들이 일제히 참전하였다. 8월 1일에는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하고, 영국 해군 장관이던 처칠이 함대 동원을 명령, 4일에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해 전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영토로서 중요한 곳은 당시 세계 최대의 바쿠 유전 루트의 열쇠를 쥔 터키였다. 11월 5일, 영국이 터키에 선전 포고했고 처칠의 전략에 기초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비너스)가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터키 남동부 앞 바다의 섬 키프로스 합병을 선언하였다. 처칠은 중근동 지배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바쿠 → 아제르바이잔 → 그루지야 → 흑해 → 보스포루스 해협 → 다르다넬스 해협 → 에게 해 → 유럽의 석유 루트를 장악했던 나라가 불가리아?터키?그리스였고, 그 서쪽에 이웃한 곳이 세르비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였다.

이듬해인 1915년 2월 19일에는 영국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기뢰에 패퇴하여 전쟁이 확대된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254만 명의 사상장를 내고 무참히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방대한 수의 사상자를 낸 데 대한 가장 큰 책임자는 강행군을 주장한 작전 사령관 처칠이었다. 처칠의 의도는 연합국 측에 속한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대를 군사적으로 지배해 영토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영국 정계에서는 “독일인보다 위험한 사나이가 처칠”이라고까지 얘기되었었다.

 

 

예로부터 어느 나라에서나 ‘관리들은 게으르다’고 비판받곤 했지만, 예외인 곳이 있다. 세무서만은 밤늦게까지 봉급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 세무서 직원의 근면성 덕분에 누구나 골치를 앓는다.

 

 

담배왕 제임스 듀크(James B. Duke)의 딸 도리스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소녀’라는 별명을 간판 삼아, 여러 남자를 거쳐가며 80세로 수명을 다하였다. 먼저 담배왕의 활동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통칭 백 듀크(back Duke)로 불린 제임스 듀크는 담배 종이 마는 기계 발명자를 거느리고 담배업계에서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19세기 말에 록펠러가 석유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수법을 보고는 담배업계도 트러스트를 결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884년 뉴욕에 경쟁 업자인 4대 담배 제조업자를 모으더니 “경쟁을 그만두고 가격을 끌어올려 왕창 벌자”며 담합하였고, 1890년에는 5개 사를 합병해 아메리칸 바코(American Tobacco)를 설립하였다.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자 담배왕은 독점과 인수를 한층 강화해 해외로 진출, 영국의 임페리얼터바코(Imperial Tobacco)와 합병해 브리티시아메리칸터바코(British American Tobacco)를 설립하였다. 전 자산의 2/3를 아메리칸 터바코가 보유하고 스스로 회장을 맡아 세계에 군림하였다. 그런데 아시아 진출에 따른 폭리가 원인이 되어 각지에서 독점에 반대하는 노동자 시위가 일어나, 셔먼 반트러스트 법(Sherman Anti-Trust Law) 위반으로 1911년 트러스트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와 마찬가지로 14개 사로 분리되고 브리티시아메리칸터바코가 영국 자본으로 바뀌어도 듀크는 여전히 모든 새 회사의 대주주 자리를 지켰다. 뉴저지에 32만 평의 대저택을 세웠고, 1912년에는 세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뉴욕 78번지에 보르도에 있는 라보띠에르 성(Chateau Labotiere)을 모방한 300만 달러 짜리 대저택을 지었다. 딸 도리스 듀크는 그 해 태어났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미국 어린이 부자 등급’에서 도리스가 1억 달러, 윌리엄 밴더빌트의 아들이 6,000만 달러, 존 제이콥 애스터가 300만 달러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밴더빌트 가와 애스터 가에는 상속인이 많았지만 도리스는 외동딸이라서 두드러지게 많은 액수를 기록했던 것이다. 미국인 평균 소득이 343달러이던 시절에 1억 달러(1998년 시가로 2조 4,360억 엔)를 소유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30만년 동안 일해야 버는 돈을 아기가 소유한 것이다. 그녀는 커서 10만 달러나 나가는 금제 식기로 식사를 하고, 대리석 욕조에 수도꼭지는 금제인 호화 생활을 하게 된다.

1925년에 제임스가 세상을 떠나자, 13살의 도리스가 받은 유산은 3억 달러였다. 이 날부터 도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돈인 많은 소녀’로 불리게 되었다.

 

 

듀크 가는 당시 대통령?부통령?법무 장관?금괴업자(뉴몬트마이닝 창업자)?모건 상회 간부 등 폭넓은 규벌을 형성해 당국으로부터 추궁 받지 않을 위치에 있었다.

 

 

맥아더 원수의 부친 아서(Arthur)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필리핀을 소탕하고 최초의 필리핀 군사총독이 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훗날에 아들 맥아더가 일본군을 물리쳤을 때, “나는 돌아왔다”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필리핀 지배자로 복귀한 것이다.

 

 

더지 자동차의 창업자 더지 형제는 1903년에 포드 자동차에 투자해, 1925년에 딜러리드가 더지 형제의 유산 상속인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했을 때 현금으로 1억 4,600만 달러(1998년 시가로 1조 5,000억 엔)를 지불한 일로 유명한 큰 자산가였다.

 

 

JP 모건이 사망한 반년 뒤에 개인소득세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부동산왕 애스터, 철도왕 밴더빌트, 죽음의 상인 듀퐁, 곡물왕 카길,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금융왕 모건, 석유왕 록펠러, 담배왕 듀크, 광산왕 구겐하임, 석유왕 멜런 등의 재벌이 모두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과세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1959년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혁명으로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로 바뀐 뒤 1961년에 재벌의 당주 이레네 듀퐁의 재산이 쿠바 정부에 압류되는 등 자산 은닉처가 위기에 빠졌다. 이 때 미국의 부호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20세기 말까지 미국이 지나칠 정도의 적개심을 보이며 쿠바에 경제 제재를 계속해 온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홍콩상하이 은행은 로스차일드 가의 ‘아편왕’ 일족, 아서 사순(Arthur Sasson)이 창업했기 때문에 사순 일족의 로런스 카두리(Lawrence Kadoorie)가 홍콩 경제를 장악하였다. 1993년 로런스가 사망하자 아들 마이클이 승계해, 1997년 홍콩 반환과 동시에 초대 홍콩 행정 장관으로 둥젠화(董建華)를 배출하였다.

이 사순 재벌의 세력이 초기에는 아편 산업과, 이후에는 담배 산업과 결합해, 전세계 밀무역에 깊이 관여하여 택스헤이븐의 루트를 구축하게 되었다. 담배왕 제임스 듀크 이후, 담배 ts업은 RJ 레이놀스(RJ Raynolds)에 고배를 마신 아메리칸터바코가 아메리칸브런즈(American Bronze)로 개명해 영국에 남은 브리티시아메리칸터바코(BAT)에 담배 부문을 매각해야 했다. BAT는 순 영국 자본으로서 필립모리스(Philip Morris Companies Inc) 다음 가는 담배 제조 회사가 되어, 1999년 1월에 네덜란드의 로스만인터내셔널(Rosman International, 로스차일드 재벌)과의 합병을 발표했으며 세계 1위 자리를 다투고 있다.

 

 

국민 소득을 구하기 위해서는 국민총생산(GNP)을 인구수로 나누면 되지만, 최근의 통계는 외국인의 노동을 국력에 포함시킨 국내총생산(GDP)으로 산출되고 있다. GDP에 대한 GNP의 최근 비율은 외국기업의 현지 생산이 많은 미국에서는 0.94인데 비해, 자국의 기업이 해외에 대량 진출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1.01이다.

 

 

스위스가 유럽 통화 통일에도 참가하지 않은 것은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유로 화의 가치가 정해지기 전에 스위스 프랑화의 교환 가치가 변하는 것을, 비밀 계좌를 가진 국제적 자산가들이 꺼렸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Lenin, Vladimir Ilich)이 스위스를 거점으로 활동하였고, 소련 당시에는 동서 무역의 지불 창구가 중립국 스위스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전후에 국제 금융 마피아의 본거지인 BIS(국제결제은행, 별칭 바젤 클럽)가 소련의 금괴를 접수하는 창구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지난 70년에 걸쳐 공산당의 자금이 운반된 루트를 알고 있는 관료들이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신흥 재벌로 거듭난 인맥-별칭 모스크바 마피아-이 되었다.

러시아 기업의 다수가 자금을 해외 은행에 맡겼는데, 은행 계좌의 대부분이 스위스 취리히나 제네바에 있었다. 산업계의 대표 빅토르 체르노미딘(Viktor Chernomyrdin) 총리나 공산당의 대표 예프게니 프리마코프(Evgenii Primakov) 총리도 이들 러시아의 신흥 재벌을 택스헤이븐으로 이끌어 왔다.

옐친 대통령의 차녀 타치아나(Tatiana Yeltsin)를 농락해 에어로플로트 항공(Aeroflot Russian Int'l Airlines)의 자금을 유용한 CIS(독립국연합) 사무국장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oris Berezovskii)도 공산당 관료를 비판하면서 그 자신이 스위스를 통해 돈세탁에 정신을 팔았다. 그 결과 1,500억 달러(18조 엔)라는 거대한 대외 채무를 지게 된 러시아는 1998년 말까지 상환 유예를 선언한 모라토리엄(moratorium)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채무 금액은 해외로 도피한 외화 액수와 거의 같다.

 

 

카길은 전세계의 농지를 지배하고 있지만, 가족이 경영하는 일족 회사이기 때문에 증권 거래소에 상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식이 비공개인 까닭에 자금의 흐름이 완전한 비밀에 싸여 있다.

카길은 밀을 중심으로 한 곡물 상사로서 1865년에 창업되었다. 1990년대의 카길은 완전히 종합 식품 상사로 변모해 예전의 동인도회사와 비슷한 성격을 띠며, 영국의 PO기선 및 자댕매서슨처럼 해운업에서 금융업으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카길은 1997년 도산한 야마이치(山一) 증권의 자회사 야마이치 파이낸스와 식품 전문 회사 도쇼쿠(東食)를 인수하였다. 1998년 5월, 카길의 전세계 매출액은 500억 달러(6조 엔)를 넘었다. 유통 루트를 장악해 본격적인 일본 시장 진출을 꾀했지만, 일본에서의 매출액은 아직 4%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카길 본사가 노리는 목표 달성은 이제부터이다.

카길 사업의 특징은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 65개국에 연결망을 잇고 컴퓨터로 기후 변동과 곡물 수확량을 추적하는데, 그 배후에 CIA의 조사 활동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사업 내용을 비밀에 부치는 것은 8만 명의 종업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악관의 국책으로서 필요한 조치이기도 하다. 다음에 서술되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전체 상을 파악할 수 있다.

카길에 자본을 제공한 체이스맨해턴 은행의 CIA 커넥션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이 은행의 회장을 지내고 지미 카터를 대통령으로 밀어준 이래 꽤 뚜렷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자본은 다른 한편에서 CIA 위원회를 조직한 형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미망인 마가레타 머리(Margaretta Murphy)가 1970년대 소련으로 곡물을 대량 수출한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Daniels-Midland Co., ADM) 임원이 되어 산하에 버드와이저(Budwiser)와 패권을 다투는 쿠어스(Coors) 맥주의 자회사인 쿠어스 식품까지도 소유하는 메커니즘으로 성장하였다. 그 ADM 회장 드웨인 안드레아스(Dwayne O. Andreas)가 카길의 전 부사장이기도 하였다.

록펠러 재단이 ‘녹색 혁명’으로 불리는 밀 개량의 성과를 올리고 카길이나 ADM과 공동으로 아시아 전역의 농지를 지배하게 된 것은, 초대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딸이 미국의 농경기계를 지배한 발명가 사이러스 맥코믹(Cyrus H. McCormick)의 아들과 결혼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International Harverster, 현재 나비스타인터내셔널 Navistar International)라는 곡물 제국의 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 식품 무역 상사와 연결되는 것이 소매업계이다. 소매 연쇄점 월마트(Wal-Mart)의 창업자 샘 월튼(Samuel M. Walton)은 1992년에 사망하기까지 미국 제일의 부자로서 오늘날의 빌 게이츠와 같은 존재였고, 그 자산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유족인 월튼 가는 1998년 「포브스」에서 억만장자 목록의 6위부터 10위까지 차지했고, 그밖에 두 사람의 가족도 목록에 올랐다. 도합 7명의 월튼 가족의 자산을 합하면 570억 달러(6조 8,400억 엔)에 이르러, 빌 게이츠의 584억 달러와 맞먹는 대부호인 것이다. 다만 여러 명의 가족으로 자산을 나누었느냐 혼자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칸소 주에 있는 월마트 본사에는 주지사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소문난 변호사가 임원을 맞고 있었다. 그녀 뒤에는 역시 아칸소 주가 배출한 식품 회사로서 미국 제일의 치킨업자인 타이슨 후즈(Tyson Foods)도 있었다. 업계에서 타이슨이 미국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사업을 미국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카길의 곡물 사료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식품 회사를 매입해 치킨 붐을 타고 아칸소에서 시카고 거래소로 가는 치킨 수송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체이스’가 자금을 제공하고, ‘나비스타’가 농기계를 농민에게 팔자, 소매 체인점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서 판매하는 일련의 콘체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의 아칸소 주지사가 윈슬럽 록펠러, 후계자가 빌 클린턴, 현재 부지사가 윈슬럽 록펠러 주니어이다.

 

 

스탠더드 석유와 아메리칸터바코의 간부인 올리버 페인의 여동생과 결혼한 윌리엄 휘트니는 뉴욕 시가철도 등의 유산으로 막대한 수입을 받았다. 그는 저택을 지을 때, 로마 도리아 궁에서 청동으로 만든 문을, 이탈리아 각지의 고대 궁전 터에서 대리석을, 유럽의 저명한 가옥에서 천장을 그대로 운반하는 사치의 극을 달렸다. 그의 소유지로는 뉴욕 시가지에 있는 대저택 외에도 롱아일랜드에 5,000 에이커, 매사추세츠에 700에이커, 뉴욕에 16,000에이커 켄터키에 3,000에이커의 농장,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수렵장과 경마장이 있는 2,000에이커의 저택, 또 뉴욕에 면적을 알 수 없는 광대한 농장 등이 있다. 여기에 든 것만으로도 3,273만 평이다. 게다가 본인은 해군 장관으로서 침략에 몰두하며 쿠바 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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