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의 풍속은 그저 질박하고 너그럽기만 할 뿐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장마나 가뭄이 들기만 하면 번번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 또 자신들의 생활은 매우 빈약하기만 해서 귀천(貴賤)과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음식이라고 해야 채소나 건어물 혹은 육포(肉脯) 따위가 고작이요, 미곡(米穀)만 중시하고 기장 같은 곡식은 경시하는가 하면 삼베나 모시만 많이 생산하고 명주나 무명에는 관심이 적은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으로는 뱃속이 허전하고 밖으로는 살을 제대로 감싸지 못한 나머지, 그들을 바라보면 마치 병들었다가 금방 일어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이나 되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상례(喪禮)나 제례(祭禮) 때에는 채식만 하고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다가, 잔치라도 한 번 벌이게 되면 소와 말을 때려죽이고 야생의 짐승들을 사냥해서 푸짐하게 먹는 광경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사람이 일단 이목구비를 갖춘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이상에는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욕망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볍고 따뜻한 옷을 몸에 편하게 여기고 살지고 맛난 음식을 입에 달게 여기면서 넉넉하게 남겨 두기를 좋아하고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야말로, 오방(五方 중국과 사방의 주변 민족)의 사람들 모두가 천성적으로 똑같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고려만은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단 말인가.
풍성하게 하되 사치스럽게 되지 않도록 하고 검소하게 하되 누추하게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인(仁)과 의(義)에 근본을 두고 하나의 표준을 만든 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중제(中制 중용의 도에 맞는 예법)인 만큼, 사람들이 일을 행할 때마다 이를 아름답게 여기면서 따르고 있는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마리의 닭이나 두 마리의 돼지 같은 것은 사람의 손으로 길러지기만 할 뿐 사람의 힘을 돕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데도 차마 죽이지를 못하고, 소와 말은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해 주는 공이 무척이나 큰데도 모질게 때려잡고 있다. 또 사냥을 나가서 치달리는 수고를 하다 보면 혹 몸을 상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나오는데도 이런 일은 과감하게 행하고, 추환(芻豢)을 우리 속에서 꺼내어 잡는 일은 감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경중(輕重)을 식별하지도 못한 채 의리를 해치고 중제(中制)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본심(本心)을 잃는 것이 이 정도까지 이르게 한 것이 어찌 백성들의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 점을 나름대로 가슴 아프게 생각해 왔다.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면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나의 뜻이었는데, 결국에는 이를 행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 내가 또 어떻게 하겠는가.
봉선대부(奉善大夫) 지합주사(知陜州事) 강시(姜蓍)가 나에게 글을 급히 보내 말하기를, “《농상집요》를 행촌(杏村 이암(李嵒)) 이 시중(李侍中)이 외생(外甥)인 판사(判事) 우확(禹確)에게 주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다시 이 책을 우확에게서 얻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의식(衣食)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과 전재(錢財)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씨 뿌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번식시키는 방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조목별로 같은 내용끼리 정리해서 세밀하게 분석하며 환하게 밝혀 놓았으니, 실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 있어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가 합주(陜州 합천(陜川)의 옛 이름)의 치소(治所)에서 판각하여 널리 전파시키려 하는데, 글자가 크고 책이 무거워서 멀리 보내기에는 어려운 걱정이 있기에 이미 작은 해서(楷書)로 베껴서 다시 적어 놓았고, 안렴사(按廉使)로 있는 김공 주(金公湊)가 또 비용에 보태 쓰도록 포목 약간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이 책 뒤에다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 역시 이 책에 대해서는 일찍이 완상(玩賞)을 하며 음미한 바가 있다. 그런데 내가 우리 고려의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또 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던 기간 역시 하루나 이틀 정도가 아니었는데, 조정에 건의해서 이 책을 간행하도록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강군(姜君)의 뜻이 나와 같다는 것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면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그 일로 말하면 또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인데, 강군은 이에 대해서도 일찍이 강구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 일을 기필코 시행해 보려고 한다면, 이단을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고려의 풍속을 변화시킬 길이 없을 것이요, 따라서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것들도 한갓 글자로만 남게 될 것이니, 강군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첫댓글 목은집(牧隱集) 목은문고 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