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호는 일타원(一陀圓). 법훈은 대봉도. 소태산대종사의 여성 구인제자 가운데 한 사람. 장적조ㆍ최도화와 더불어 초기 교단 3대 여걸로 불렸다. 1867년 12월 18일 전북 남원시 동충리에서 부친 규록(圭祿)과 모친 이춘직(李春稷)의 1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18세에 이순명(李順明)과 결혼했으나 혈육도 없이 부군과 사별했다. 이후 서울에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생활했다. 58세되던 1924년(원기9) 최도화의 안내로 서울에 상경한 소태산을 만나 제자가 되고 전무출신을 발원했다. 이어 이동진화ㆍ이공주 등 여러 인연들을 대종사 문하에 인도했다.
만덕산 초선에 참여하여 소태산의 시봉과 아울러 대중에게 식사를 공급했고, 익산총부 건설에 알뜰히 조력했다. 총부 동ㆍ하선에는 반드시 참여했고, 수선 대중을 위해 고령임에도 갖은 궂은 일을 하는 등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소태산이 설법할 때에는 문정규ㆍ김남천 등과 더불어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어 무상의 법흥을 일으켰다.(《대종경》 전망품29) 박사시화는 서울ㆍ광주ㆍ남원 등지를 두루 다니며 교직 없는 전문순교로서 교화활동을 펼쳐 교단 창립 제1대내에 무려 5백 75명을 입교시켜 최다 연원자가 되었다. 1946년 10월 18일 염주를 들고 염불을 외며 열반했다.
일타원 박사시화 대봉도
‧ 1867년 12월 18일 전북 남원 출생
‧ 원기 9년(1924) 4월 29일 출가
‧ 회상 초기 순교 / 수위단원 역임
‧ 법랍 22년
‧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32년(1947) 1월 30일 열반
‧ 원기 73년(1988) 대봉도 추서
일타원님은 그 어떤 제자들보다 대종사님에 대한 신심이 제일이라고 하십니다.
선학원생들의 인사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박사시화(朴四時華) 선진님께서 대종사님께 [저는 대종사님은 물론 다른 선생님과 동지나 후배 중 대종사님과 같은 인격자가 계신다면 그분들에게도 몸과 마음을 다 내놓고 바치며 일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때 처음 출가하여 박사시화 선진님과 같은 분이 이 교단에 많이 계신 것을 보고 큰 믿음이 솟았으며 장래가 기대되고 큰 회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반드시 큰 스승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것도 한두 분만 모시면 안된다. 세세생생에 오고 가면서 어떻게 될 줄 누가 알겠느냐.
말씀하시기를 {전삼삼, 박사시화님의 신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께 바치시는 신성은 무엇에 비할 수 없으셨다. 내 나이 스무살 전후에도 새부처님이라고 큰절을 하시며 마음을 연하고 마음을 풀으셨다. 또 육타원 원정사도 그 때부터 내가 큰 힘 얻었다고 믿으신 후 일생을 한결같이 마음을 연하시었다. 보통분들이 하기 어려운 심법이시다.} (63.2.7)
-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1편 신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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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원 박사시화(一陀圓 朴四時華)는 초기 교단에 모든 교무들로부터 「할머니」로 통했다.
원기 9(1924)년에 삼타원 최도화(三陀圓 崔道華)의 인도로 입교하여 원기 31(1946)년에
열반 했는데, 이 기간에 575명을 입교시켰다. 이는 창립 제 1대 내에 가장 많이 입교시킨 것이다.
육타원 이동진화·구타원 이공주를 비롯하여 초기교단의 중요한 선진들이대부분 박사시화 의 연원으로 입교하였다.
박사시화는 입교 후 교직은 갖지 않았으나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키거나, 총부에서는 후진들을 친 자녀처럼 알뜰히 보살폈다.
처음 입교한 후에는 서울 지방을 다니면서 헌 양복 떨어진 양말이나, 명태 대가리 등을 모아다가초창기 총부의 가난한 살림을 도왔다.
총부에서는 후진들의 흙묻은 신발을 깨끗이 씻어주거나, 떨어진 고리짝을 예쁘게 발라주거나, 이불을 튼튼히 누벼주거나, 옷을 빨아주거나, 휴지를 물에 담가 찧어서 바구니를 만들어 주는 등 부지런히 일했다.
지방의 교무들이 총부에 올 때는 반드시 박사시화를 친부모처럼 찾아 뵈었다.
후진들을 꾸짖을 때는 언제나 『이 부처될 놈아!』였다. 그것은 욕이라기 보다 차라리 간절한 기도였다.
박사시화가 많은 교도들을 입교시킨 것은 헌신적 봉사정신 때문이었다. 이 집 저 집 찾아 다니면서 빨래를 해주거나, 청소를 해주거나, 채소밭을 매주거나, 신발을 씻어주거나,
무슨 일이든 내일처럼 도와주었다. 한 번 찾아가서 입교하지 않으면 몇 번씩이나 찾아다녔고, 가는 집마다 싫어하지 않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때로는 사주를 봐주기도 하는데, 사람마다 기쁜 마음을 갖게끔 희망적이고 좋은 말을 해주었다. 가족끼리 서로 원한이 맺혔던 가정도 박사시화가 몇 번 찾아 다니고 나면 어느 새 서로 원한이 풀어지고 화목한 가정이 되었다.
박사시화는 후진 정녀 교무들에게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네가 생기기는 잘 생겼다마는 팔자가 세어서 시집가면 큰 일나게 생겼다.』
『결혼했더라면 큰 인물 한 사람 잃어버릴 뻔 했다.』
『반드시 성불하겠다.』 이렇게 정녀들을 격려하고 권장하였다.
교무 훈련 때 병이 났는데, 교무들마다 서로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앞 다투어 시탕과 간병을 자원했다. 그래서 밤마다 둘씩 교대로 간병을 하게 되었다.
열반하는 날 저녁, 자꾸 입을 달싹거렸다. 간병했던 후진들이 물었다.
『할머니 무얼하십니까?』 『응, 염불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염불하며 숨을 거두었다.
* 불법연구회 3대 여걸
어느 비오는 여름날 나(박장식)는 걸어서 호곡 어머님이 계시는 본가로 가는 도중이었다.
길가 주막에 들려 비를 피할 겸 쉬고 있었다. 젖은 두루마기를 벗어놓고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두루마기를 챙기니 젖었던 옷이 얌전히 소질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 모르는 사실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운 생각이 들어 어느 분이 이런 선행을 했는가 찾아보았지만 전연 아는 분이 아닌 낯모르는 여자 분이 내 비에 젖은 옷을 말끔히 손질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고마운 생각으로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는데 이분이 다름다닌 우리 가족을 일원대도 회상에 연원 지어 주신 朴四時華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시화님은 남원에서 출생, 일찍이 부군을 死別하고 구례 화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자 되기로 결심했고 전국을 순회하는 교직 없는 巡敎로 교단 초창기에 동지규합에 많은 정성과 열을 다하였던 분이다.
그리하여 창립 제 1대내에 6백여명에 가까운 사람을 입교시켰다. 그래서 법호가 一陀圓이신 박사시화님을 비롯 三陀圓 崔道華님 二陀圓 張寂照님을 3대 여걸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 세분들을 지역을 나누어 교화 활동을 했는데 一陀圓님은 주로 남원방면에서, 二陀圓님은 진안 마령지역에서 순교 역할을 유감없이 하셨다.(원불교신문, 구도역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