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大梁州都督金舒玄將軍紀蹟碑
신라 대양주 도독 김서현장군 기적비
原文,譯文:1978年(戊午)刊 安敬公派譜
解釋;2006, 11. 19. 金順大
新羅蘇判 大梁州都督 安撫大梁州諸軍事 金舒玄將軍 紀蹟碑
신라 소판 대양주 도독 안무대양주제군사 김서현장군 기적비
公姓金氏 諱舒玄 駕洛國 始祖王後也 始祖王 以後漢 建武十八年 開國駕洛 至九世孫 仇衡王十二年 卽新羅法興王十九年也 與妃桂花 及三子 世宗 武力 武德 歸于新羅 法興王 授位上等 以本國 爲食邑 武力 仕至角干
공의 성은 김(金)씨이고 휘(諱)는 서현(舒玄)으로서, 가락국(駕洛國) 시조왕의 후예이시다. 시조왕께서 후한 건무18년(서기42)에 가락국을 세우셨고, 9세손 구형왕(仇衡王) 12년, 곧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이르러, 왕비 계화(桂花) 및 3왕자 세종(世宗), 무력(武力), 무덕(武德)과 함께 신라로 들어가시니, 법흥왕은 상등의 직위를 수여하고 본국(가갈)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으며, 뒤에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1등관)에 이르렀다.
眞興王十四年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武力 時以阿湌 爲軍主 十五年 百濟聖王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 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武力以州兵赴之 殺百濟王 斬佐平四人 卒二萬九千六百人 寔公之祖若考也
진흥왕14년(553)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방 변읍을 빼앗아 신주(新州:廣州)를 설치하여, 무력은 당시 아찬(阿湌:6등관)으로써 군주(軍主)가 되셨고, 15년(554)에 백제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沃川)을 쳐들어오므로, 군주인 각간(1등관) 우덕(于德)과 이찬(2등관) 탐지(耽知)등이 역습하여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던 것을, 무력께서 신주의 군사로 달려와 백제왕을 죽이고, 좌평(1품관) 4인과 병졸 25,600인을 무찔렀으니, 진실로 공의 조부와 부친이셨다.
公以眞興王二十五年甲申生 旣長 娶王弟肅訖宗之女 是爲萬明夫人 生二男 曰庾信 曰欽純 二女 曰寶姬 曰文姬 文姬 卽太宗武烈王妃也
공은 진흥왕 25년 갑신(564)에 태어나서 이미 장성하매, 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따님을 맞이하시니, 이가 만명부인(萬明夫人)이 되신다. 2남을 낳았으니 유신(庾信). 흠순(欽純)이요, 2녀는 보희(寶姬). 문희(文姬)인데, 문희는 곧 태종무열왕비 이었다.
初爲萬弩郡太守 莅郡數月 百姓歌之 曰侯來何暮 可以解吾民之慍兮 眞平王五十一年己丑八月 以蘇判爲大將軍 攻高句麗娘臂費城 庾信拔劍入敵陣 斬其將軍 城中兇懼 皆出降
공께서 처음 만노군(萬弩郡: 鎭川) 태수(太守)가 되시어 고을을 다스리신지 두어 달에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성주님이여! 오시기를 어찌 더디셨습니까! 가히 우리들의 원한을 풀었습니다.』고 하였다. 진평왕51년 기축(629) 8월에 소판(3등관)직으로 대장군이 되시어, 고구려 낭비성(淸州:上 黨山城)을 공격하매, 부장군 유신이 칼을 빼서 적진에 들어가, 그 장군을 베니 성중은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文武王八年戊辰 旣破平壤 還到南漢城 謂群臣曰 昔者 百濟聖王 在古利山城 謀侵我國 庾信之祖 武力角干 逆擊之 俘其王及宰相四人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 安農桑之業 君臣 無宵旴之憂 今庾信 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蹟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문무왕8년 무진(668)에 이미 평양을 격파하고 남한주(廣州)로 돌아오신 왕은 여러 신하에게 말씀하시되 『옛날 백제 성왕이 고리산성(沃川)에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함에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이를 역습하여 그 왕과 제상 4인을 무찔러 그 야망을 꺾었고, 또한 그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梁州) 총관(摠管)이 되자 여러 번 백제와 싸움하여 그 예리한 칼날을 좌절시켜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으므로, 변방 백성은 농상(農桑)의 직업에 편안하였고, 군신(君臣)은 밤낮의 근심이 없게 하더니, 지금 유신은 조부와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직의 신하가 되어서는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공적이 거룩하다. 만약 공의 한 가문에 의뢰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고 하셨다.
其在大梁州也 恩威幷行 人皆畏服 今梁山新基里 舊都督府址也 有影幀閣 右曰大都督金舒玄之像 左曰蘇判夫人萬明之像 雖不知起於何代 然其能威福於梁之民 可知矣
그 대양주(梁山)에 재직하심에는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지금 양산 신기리(新基里)는 신라 도독부(都督府)의 옛터 이었다. 영정각이 있으니, 우편에는 대도독 김서현의 상(大都督金舒玄之像)이라 하고 왼편에는 소판부인 만명의 상(蘇判夫人萬明之像)이라고 하였다. 비록 어느 시대에 창설했는지 모르기는 하거니와 그 양주의 백성에게 복록을 누리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嘗以父命 多種箭竹於境內 及庾信統一之戰 取而爲用云 而今北亭山城之東 尙有産焉 其手擇之滋於草木者 亦可徵也
일찍이 부친의 명령으로써 수많은 살대(箭竹)을 경내에 심으셨더니 뒷날 유신의 통일 전쟁에 가져다 사용했다는 바, 지금까지 북정산성(北亭山城) 동쪽(살대밭)에서 아직 생산되고 있으니, 그 직접 선택하셨던 초목의 무성함을 또한 징험할 수 있다.
歲己亥之秋 自本郡郡守 爲公創紀念事業會 將立碑於白鷺峰之春秋園 其後孫鍾源甫 請余爲文 玆綴出於諸傳記者 以撰次之 係之以銘曰
기해년(1959) 가을에 본군 군수로부터 공을 위하여 기념사업회를 창설하고 백로봉의 춘추원(春秋園)에 비석을 세우고저 함에, 그 후손 종원(鍾源)씨가 글을 청하므로 이에 여러 전기(傳記)에서 나타난 것을 엮어서 찬술하고 계속하여 명문에서 말한다.
白山之東 環三千里 檀箕己邈 群雄替起 爪分爲國 厥數幾十 次第夷滅 三國鼎立 眇如蠻觸 棲于蝸角 動興干戈 生齒日剝
백두산의 동쪽에 3,000리가 뻗어있도다. 단군 기자 이미 아득하니 뭇 호걸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손톱처럼 나누어 나라를 삼으니 그 수효는 몇 십리나 되었다. 차례차례 없어지고 3국만 솥발같이 분립하도다. 조그마한 만. 촉 두 나라가 달팽이 뿔에서 깃들이듯 하도다. 간과(干戈)를 움직여 일으키니 백성만 날마다 줄어들었다.
帝憫于斯 將胥有德 先降帥材 庸補閫職 其人繄誰 駕洛之民 仇衡之孫 武力之子 名曰舒玄 官大都督 多智足謀 庶幹大局
하늘이 이를 민망히 여겨서 유덕한 분으로 보필케 하였다. 그 인재는 누구인가? 가락의 성씨(姓氏)로서, 구형왕의 손자이요, 무력공의 아들인데, 이름은 서현(舒玄)이시오, 벼슬은 대도독(大都督)이시다. 많은 지혜와 풍부한 계획으로 큰 시국을 거의 간여하셨다.
安撫梁州 民樂農桑 威震隣國 敵遠邊疆 統三爲一 兆于此時 生子庾信 英武之姿 乃呑麗濟 倂于新羅
양주(梁州)를 편안하게 다스리니 백성은 농상(農桑)을 즐기었다. 위엄이 이웃 나라에 떨쳤으니 적병은 국경에서 멀리 갔도다. 3국은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기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들 유신을 탄생하온 바, 영특한 무인의 자질이었다. 고구려 백제를 정복하여 신라에 병합한 것이었다.
功高百世 肩者無多 人言周業 成于武王 爰自太王 實始剪商 我推斯義 歸美於公
백세 천추에 공로가 높으니 어깨를 견줄 자 많지 않도다. 사람들은 주나라의 통일사업을 무왕이 이뤘다고 말하지만, 실은 태왕때부터 시작하여 상나라를 쳤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의의를 추리하여 공께 그 미덕을 돌려 드리려고, 비석의 명문을 소상히 새겨 무궁한 후세에 보이는 터이다.
駕洛紀元一千九百二十三年 甲辰(1964) 五月 日
가락기원 1923년 갑진(1964) 5월 일
昌山 曺圭喆 謹撰, 裔孫 鍾河 謹書
창녕 조 규철 근찬, 후손 종하 근서
【備考】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五 梁山郡 名宦 『新羅 金舒玄 良州摠管, 金巖 良州太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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