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0월 12일부터 13일까지 양일간 남명(南冥)조식(曺植 : 1501∼1572)선생
을 기리는 제37회 남명선비문화축제가 열렸다. 남명의 선비정신을 기리는 ‘남명
선비문화축제’ 는 지리산 아랫마을이면서, 생전에 남명이 후학을 길러내던 경남
산청군 시천면 덕천서원(德川書院 : 원장 전부총리 趙純)과 남명기념관(南冥記
念館) 그리고 산천재(山天齋) 일원에서 해마다 열린다.
▲ 지리산자락에 <제37회남명선비문화축제>를 축하하는 애드벌룬이 높이 떠있다.
▲ 덕산(德山)의 길거리에 <제37회남명선비문화축제>를 알리는 프랜카드와 천막 등 축제준비상황
▲ <제37회남명선비문화축제>에서 "한국우수가훈전시회"도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남명선비문화축제’ 는 남명선생의 탄신 500주년이 되던
2001년부터 확대 개편되어 시행 되었으며, 실천유학의 큰스승인 남명선생의 실
천정신을 기리고, 지리산의 고유한 전통문화인 선비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개
최되는 축제이다. 올해로 제37회를 맞이하여 사적제305호인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일원에서 다양한 전통문화와 체험 위주의 행사 프로그램으로 열렸다.
▲ 덕천서원(德川書院) 본채에서 제례식장으로 옮겨가는 제례(祭禮)참가제관들
▲ 제례식장 앞에 도열하여 제례(祭禮)에 참가한 제관들
10월 12일 남명선생의 묘소 참배 및 한량무 식전공연이 있고나서, 남명선생 탄
신 512주년을 기념하는 전통 제례의식으로 치러지는 남명제례와 기념식에 참가
하기 위하여, 두류봉은 10월 8일 석달이상이나 계속되던 여행 끝에 귀국하여 겨
우 추석을 쇠고 또 다시 공자탄신 2564주년 제공대전(祭孔大典)에 참가하기 위
하여 중국 산동(山東)의 곡부(曲阜)에 갔다 오느라 너무 피곤했으나, 11일 저녁
까지 현지에 도착하라는 연락을 받고는 불야불야 11일날 현지로 가서 시도기(時
到記)에 이름을 기재하고 제관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제복을 받아 여러 가지 준비
를 하였다.
▲ 덕천서원 안에서 집례하는 헌관
▲ 남명(南冥)의 학문사상과 철학은 敬과 義 - 이 두글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중기 실천 유학의 큰 스승인 남명 조식(1501-1572)은 경(敬)과 의(義)를 바
탕으로 개성교육을 강조하고 문하에서 당대의 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김
해 거주시절부터 왜구의 노략질을 직접 목격하고서는 오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해
올 것을 예견했다. 제자들에게 이를 대비하도록 하여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
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 진법 등의 학문과 참다운 선비정신을 가르쳤으며,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3대 의병장과 조종도를 비롯한 50여 명
의 의병장이 선생의 문하에서 일어나 국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 남명기념관 마당에 세워져있는 남명상(南冥像)과 유명한 단성소(丹城疏) 문구
▲ 남명선비문화축제에서 전국시조경창대회가 펼쳐진 "덕산문화의 집"
올해의 남명 선비문화축제는 산청군과 덕천서원이 주최하고 남명선비문화축제
집행위원회가 주관하며, 문화체육관광부、문화재청、경상남도、경남사립중고
등학교 교장회 등 관련 학계 언론기관이 후원한다.
▲ 남명기념관마당에 설치한 무대장치 - 기념식개회식이 거행된다.
▲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함께 할 수 있는 덕산 3곳이라면 덕천서원,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다
금년 축제는 종전의 제례형식 중심에서 탈피해 선생의 탄신이 가지는 정신적
의미로서 전통 제례의 봉행과 선생의 실천정신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의병활동
의 참뜻을 기리는 의병출정식을 중심구도로 설정해 선비문화를 재현한다. 또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체험 프로그램과 소리극 ‘장날’, 큰들문화예술센터
의 마당극 ‘약초골 효자전’, 극단 입체의 ‘아리아리아라리오’ 연극이 펼쳐진다.
▲ 남명선생이 직접 쓰신 산천재(山天齋) 현판
▲ 남명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산천재(山天齋) 건물
축제 기간 중 참여와 체험 프로그램으로 남명 선생의 유적을 따라 선생의 얼과
행적을 체험하는 중고생 남명문화유적 탐방이 열린다. 또 선비의 일상、남명학
강연、남명학파 유물전시회、남명 유적전시회、문집 목판 인쇄체험、전통선비
복장입어 보기 등과 경남 초등학교학생들이 참여하는 민속놀이경연대회가 열리
며 남사예담촌의 전통혼례식이 재현된다.
▲ 남명(南冥)의 후학들이 설립한 선비대학의 정문인 성성문(惺惺門)
▲ 여재실(如在室) : 남명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묘(家廟)
그리고 서예체험、인쇄문화체험、선비복장 입어보기 체험(사진찍기)、민속놀이
체험、국립공원사진전、시조경창대회、가훈작품전시 등 부대 행사도 짜여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끌었다.
▲ 산천재(山天齋)가 위치한 경내의 나무와 풀밭
▲ 산천재(山天齋) 소개와 <題德山溪亭柱>와 <德山卜居>라는 두 수의 詩
▲ 산천재(山天齋) 앞뜰과 숲 - 멀리 남명연구소신축건물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남명선생이 쓰신 그 유명한 “두류산 양단수를……”로 시작하는
시조를 올리고 그것의 해설로 글을 마감한다.
▲ 선비문화축제에서 남명의 사상과 철학을 적어 걸어두다.
▲ 선비문화축제에서 남명의 사상을 철학을 써서 걸어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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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流山(두류산) 兩端水(양단수)를 녜 듯고 이졔 보니,
桃花(도화) 뜬 맑은 물에 山影(산영)조차 잠겻셰라.
아희야 武陵(무릉)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해동가요(海東歌謠)>
▲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 : 다리밑으로 흘러들어오는 강이 내대천(內大川)이고 오른쪽 붉은 풀
다음의 자갈너머로 흘러들어오는 강이 덕천강(德川江)이다. 이 두줄기 강물이 합해져서 덕천강이라
말하고, 덕천강은 하동군 옥종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흘러내려가 진주 남강(南江)의 큰 지류이다.
▲ 양단수(兩端水)가 합해지고 난 다음의 덕천강(德川江)의 흐름
◐ 시어(詩語), 시구(詩句) 풀이 ◑
♠ 두류산(頭流山) : 지리산의 별칭, 지리산(智異山)은 방장산(方丈山)과 두류산(頭
流山)의 별칭이 있다.
♠ 양단수(兩端水) : 두 갈래로 갈라진 물줄기. 물 이름. 지리산 아래 산청군 덕산에
삼장과 중산리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의 물이 합해지는 지점.
삼장에서는 德川江이 흘러내려오고, 중산리에서는 內大川이 흐른다.
♠ 녜 듯고 : 옛날에 듣고
♠ 산영(山影)조차 : 산 그림자까지
♠ 잠겻셰라 : 잠겼구나. 잠겨 있구나
♠ 무릉(武陵) : 무릉도원의 준말로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상향
◐ 전문풀이 ◑
지리산의 두 갈래 흐르는 물을 옛날에 듣기만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복숭아꽃이 떠내려가는 맑은 물에 산 그림자까지 잠겨 있구나.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 우리나라 청사에 빛나는 남명(南冥)선생의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
▲ 남명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 <무진봉사(戊辰封事)>의 내용에 "나라를 망치는 것은 서리들이다" 라 주장
◐ 핵심 정리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조선 명종 때의 대학자로 어려서부터 제자백가(諸子
百家)에 통하고 학문이 깊었으나, 산야에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퇴계 이황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 등의 가사와 3수의 시조가 전해진다. 지리산 양단수의 승경(勝景)을
찬미(讚美)함. 절경에 대한 감탄. 자연에의 귀의(歸依)
▲ 20번 구국도(旧國道) 길가에 남명묘소로 가는 안내석이 있다.
▲ 남명묘소 안내문
▲ 남명선생의 묘소는 임좌원(壬坐原)으로 정남향에서 동쪽으로 15도기운 방향이다.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지리산의 승경(勝景)을 선경(仙境)에 비유하여 찬미하면서, 자연 속에
은거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종장의 '무릉'은 '무릉도원'을 뜻하는
말로, 낙원을 가리킨다.
지은이가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받은 산림학파(山林學派)의 한 사람으로,
수차에 걸친 관직에의 부름을 물리치고 지리산의 덕소동(德小洞)에 살며 산천재(山
天齋)라 당호(堂號)를 짓고 사색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초장에서 지리산 양단수를 정적(靜的) 조화에 감흥하고, 중장에서 맑은 물에 잠겨
있는 산영(山影)을 동적(動的) 조화에서 노래했으며, 종장에서 이 동이정(動而靜)의
승경(勝景)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확인한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학문 수업에만 전념한 지은이는, 이곳 지리산양단수
를 무릉도원에 비유하고 있다. 무릉도원은 동양인들이 동경하는 이상향이다. 또한,
자연귀의(自然歸依)를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 즉 선경(仙境)인 것이다. 지은이는
그 곳을 지리산에서 찾고, 그 속에서 마음껏 즐긴 것이다.
▲ 선비문화축제에 오는 내빈들을 위한 임시주차장 시설
▲ 頭流山 兩端水의 兩端水가 흘러드는 마을과 뒷산 頭流山(=지리산)의 情景
첫댓글 문헌으로만 조금 알고 있던 남명 조식님에 대하여 두류봉님께서 올려주신 자료를 보고
더 많은 것을 알게되었네요. 후학들에 의해 잘 가꿔진 서원 환경이 그 분의 생전 자태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딧불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추구는 너무 깊습니다. 조선중기의 영남학파의 2대산맥을 흔히들 경상우도의
지리산을 중심한 남명학파와 경상좌도의 청량산을 중심한 퇴계학파로 나누고 있지요. 퇴계는 벼슬길에서 출세
하여 성균관 대제학까지 오른 분으로 말년에 청량산으로 들어가 후학을 길렀지요. 그러나 남명은 일체의 어떤
벼슬도 사양하고 오직 지리산에서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러서 훌륭한 석학을 길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
을 주역으로 예견한 분으로 제자들에게 이에 대비토록 하였으며, 후세에 최고의 스승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두류봉 집안은 정통적인 남명학파 가문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제야 두류봉 님의 박식 하심이 이해가 됩니다.
두류봉님께서는 학문의 길로 정진하셨어야 했는데, 진로 선택을 잘 못하신 것 같아 제 마음에 아쉬움이 남네요.
너무 과분의 말씀을 하시네요. 두류봉은 일단 정부투자기관이던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가
나름대로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단위관리자가 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모리배꾼 같은 정치꾼놈들로 인하여 정권이 바뀌자, 쫓겨나서 학교로 늦게 간 것일 뿐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