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림병 1
송도를 떠난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나고 있었다.
길은 산비탈을 돌고 강을 건너며
끊어질 듯 말 듯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대기가 한여름막바지 더위로 후끈 달아올라
한 걸음 옮기는 것이천근 만근되는
태산덩이를 들어옮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담은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더위에 지친 지함과 지화를 다독거리며
길을재촉했다.
지리산 산천재에서 산청쪽으로 내려와
그걸음에 합천, 창녕을 거쳐
사뭇 달리다시피 강행군을해온 사람 같지 않게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죽음을앞둔 마지막 투혼일는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땀도 안 흘리십니까?"
화담은 여름 땡볕에 몇십 리를 걸으면서도
땀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묻는 박지화의옷은
아랫도리까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비틀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화담은 잠시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다시 내달리듯 빨리 걸었다.
여름이라서 좋은 낯으로 객을 받아들이는 집이없었다.
양민들 집에는 이미 보리마저 거의 다 떨어진뒤끝이라
피죽 한 그릇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여름손님은 죽어 뱀이 된다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여행하는 동안 살이 내려
그야말로뼈다귀에 살가죽으로 도배만 한 형상이었다.
그러나화담은 먹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떠날 때 모습 그대로화색이 돌았다.
밤이 저물었다.
조금 전에 지나쳐 온 마을에서
비어 있는헛간이라도 빌렸으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었을터였다.
그러나 기어이 더 걷자는 화담의 말을따르다보니
인적도 없는 산중에서 밤을 만나고 만것이었다.
천황산과 가지산이 잇닿아 있는 태백산맥의 마지막자락,
가지산의 남쪽 끝부분인 밀양재 부근이었다.
지리산 만큼 깊지는 않아도 높이가 천미터에 가까운
고개 꼭대기에서 밤을 만났으니
오도가도 못할처지였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밀양재.
나그네들이대낮에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는 고개였다.
그래서이곳 사람들은 일행이 스무 명쯤은 될 때까지
주막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고 했다.
이런 말을 미리 들었으니,
아무리 담대한대장부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판이었다.
나뭇잎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지함은 머리카락이 쭈빗쭈빗섰다.
어디선가 늑대가 울었다.
여운을 남기듯 울음소리를길게 끌면서.
그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이름 모를 산새들이
음산하게 울어대었다.
어두운 숲이 이러한 산짐승들의울음소리에 일렁였다.
맨 뒤에서 걷는 지함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섬뜩섬뜩하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가 자신을뒤따라오는 인기척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기도했다.
그때마다 컴컴한 어둠이 매번 낯선 얼굴로
지함의 두려움을 키웠다.
그동안 집요하게 지함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있던
희수라는 여인,
해사에서 보낸 하룻밤 기억이씻은 듯 달아났다.
지함은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연약한 짐승이 되어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박지화도 마찬가지였다.
지함이 뒤를 돌아보느라잠시 걸음을 늦출 때마다
지화도 두려움으로 핼쑥해진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이렇게 밤새 걸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디 바위 밑에서라도 밤을 보내지요."
마침내 박지화가 화담에게 청했다.
내처 걸을 것만 같았던 화담은
웬일인지 박지화의청을 쉽게 받아들였다.
화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둘러보더니
길을 조금 벗어나 산비탈을 오르기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인데도 덩쿨이 우거져 있는숲을 헤치며
익숙한 길을 가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얼마 후 세 사람이 간신히 밤이슬을 피할 수 있을만한
작은 바위굴에 다다랐다.
굴에 들어선 화담은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박지화가 궁금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화담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하루종일 쌩쌩하게 걸어온 것으로 보아
기력이 쇠한것 같지는 않았다.
"이보게, 지함. 불이라도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박지화가 몸을 움추리며 지함에게 말했다.
"여름에 불은 무슨… 그냥 자도 그리 춥지는않겠습니다."
지함은 불이고 뭐고 피곤해서 그저 빨리 눈을붙이고 싶었다.
"추울까봐 하는 말이 아닐세. 호랑이가 있다고 하지않던가.
호랑이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불에는기겁을 한다네."
"그렇군요. 그런데 형님, 불을 피우실 줄 압니까?"
"해본 적은 없네만…
일단 불이 잘 붙을 만한가랑잎 하고 마른 나무를 좀 구해보세."
화담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눈을 반쯤 감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지함과 박지화 두 사람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굴을나섰다.
한창 물이 오른 여름나무들이라
불이 쉽게 붙을만한 마른 나뭇가지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초승달이 떠 있기는 했지만 숲이 우거져 달빛을 가린탓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마치 바람이 살랑거리듯 조심스런 소리가
먼 발치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지함은 바싹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박지화가 소리를 질렀다.
"저, 저기…"
장승처럼 굳은 박지화가 간신히 입을 떼고 신음을냈다.
박지화가 보고 있는 쪽을 돌아본 지함도
박지화처럼온몸이 굳었다.
마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시퍼런 불꽃 두 개가 저만치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있었다.
몸집이 거대한 호랑이었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두 눈만 아니었다면
커다란 바위로 여겼을 것이다.
호랑이는 소리없이 나뭇잎을 밟으며
두 사람 쪽으로다가왔다.
오줌보가 꽉 찬 것처럼 터질 듯한 긴장이
온몸을훑고 지나갔다.
호랑이는 두 사람의 코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크고 불타는 눈으로 두 사람을 계속 응시했다.
박지화가 지함을 뒤로 밀며 한발짝 물러섰다.
호랑이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흐린 달빛 속에서도
날카로운 어금니가 번쩍 빛을 냈다.
순간,
세상을 뒤엎을 듯 우렁찬 호랑이의 포효가들려왔다.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메아리가 이 산 저산을 치며
수없이 반복해 울려왔다.
그 기세에 눌려 지함은 자기도 모르게
호랑이를쏘아보던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였다.
휘익, 바람소리가 났다.
지함은 감았던두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 바람에
박지화와 지함은 뒤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고
나자빠졌다.
화담이었다.
화담은 두 사람 앞을 가로막고 서서
호랑이를쏘아보고 있었다.
순간, 숲속이 고요해졌다.
세상의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담과 마주보고 있던 호랑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몸을홱 돌렸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지함과 박지화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화담은어느새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숲은 여전히 어두웠다.
늑대의 울음도 산새의울음도 그친 숲은
태고의 적막 속인 양 고요했다.
풀숲을 헤쳐가는 화담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않았다.
지함이 몸을 추스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박지화는 땅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도못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지함이 박지화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박지화는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박지화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뭐가 말씀입니까?"
"선생님 말씀일세.
평소하고 너무나 다르지않은가?"
"글쎄요.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만…
뭐 짚이는 게있으십니까?"
박지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르겠네. 나도 모르겠네."
"언젠가 처음 화담 산방에 갔을 때
선생님이 산새와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
선생님은
세상 미물들과도 기가 통하시는 건지도 모르지요."
박지화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은 나무를 구하러 갔던 것도 잊어버리고
화담의 뒤를 따라 굴로 돌아왔다.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그냥 편히 자게나."
화담은 차가운 바위에 풀을 한 겹 깔고 모로 누워있었다.
지함도 자리를 잡아 몸을 뉘었다.
생사의 기로에직면해 바짝 달아올랐던 긴장이 풀리자
몸은당장이라도 땅속으로 가라앉을 듯 무거워졌다.
그러나좀체 잠이 오질 않았다.
지함은 굴 바깥에 아득히 높이 있는
하늘을쳐다보았다.
무수한 별이 더러는 영롱하게, 더러는 어둡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함은 태사성을 찾아보았다.
지함은 낮게 신음을냈다.
태사성은 거의 기력이 다 한 상태였다.
위치를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존재조차 찾기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화담의 별, 태사성.
그 태사성이 빛을 거의 다잃어버렸다면
화담의 목숨 또한 막바지에 이른것이다.
생명의 힘이 저토록 미약한데
화담이여기까지 강행군을 해 왔다는 것은
기적이나마찬가지였다.
어서 여행을 마쳐야겠구나 하고 다짐하며
지함은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누군가 지함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한가닥 햇살이 새어들어
지함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구만.
흔들어 깨워야일어나니.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지화는 깜깜밤중일세."
어느새 일어났는지 화담이 정좌한 자세로
지함을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함은 정신이 들자
어젯밤태사성을 본 기억이 났다.
"선생님. 여행을 그만 두고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러자 화담이 빙그레 웃었다.
"태사성을 본 모양이구만.
괜찮네. 아직 더 버틸힘이 있으니…
이왕 시작한 여행이니 힘 닿는 데까지가보기로 하세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보고 싶네."
화담의 말투는 자신있었다.
더 이상 이견을내세우며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지화나 깨우게나. 이제 슬슬 떠나보세."
아직 잠이 덜 깬 지화를 채근하여
세 사람은 다시길을 떠났다.
얼마 안 가 밀양재 마루턱에 다다랐다.
멀리 골짜기에 마을이 아스라히 내려다 보였다
워낙 인적이 드문 길인지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아침을 거른 배가 요동을 쳤다.
이번 여행 내내 두 끼를 찾아 먹으면 잘 먹는 축에들었다.
어쩌다 한양 소식에 굶주린
가세 좋은양반집이나 만나면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을뿐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때가 조금 지나자 뱃속은 곧잠잠해졌다.
화담은 퍽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저러다 길거리에서임종을 맞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본인의 의사가 그토록 확고하니
지함으로서도 어쩔도리가 없었다.
밀양재를 거의 다 내려섰을 무렵,
허름한 주막이하나 나타났다.
대낮인데도 문에 빗장이 질러져있었다.
이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막집 문을두드렸다.
요기나 하고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아무런응답도 없었다.
아예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태양은 벌써 머리 바로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있었다.
"이렇게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야
주막이나온전하겠나. 좀더 가보세."
아쉬운 마음으로 박지화가 한번 더 문을 두드리며
주모를 불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점심도 거른 채
곧장 밀양재를내려갔다.
잠시 후 왼편 가지산 자락에 자그마한 절이
멀찌감치 보였다.
비구니들만 수도한다는 석남사였다.
화담은 비구니들만 있다는 곳을 들어가기가
민망한지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습니까.
남자라고 해서 설마 객을내치겠습니까?"
활달한 박지화가 성큼 앞장서서 길을 잡았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자
넓진 않지만제법 물이 깊은 계곡을 가로지른
돌다리가 나타났다.
계곡은 꽤 깊었다.
젖빛 바위 사이사이를 맑은 계곡물이
요란한 소리를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가지산 정상으로부터 내리뻗은계곡은
수천 년을 두고 물길을 잡아왔을 터였다.
바위마다 모난 데라곤 하나도 없이 둥글둥글했다.
오랜 세월 동안 흐르는 물에 갈고 닦인 때문이었다.
석남사는 계곡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법당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결에 한가로이흔들리며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스님, 스님. 계십니까?"
여전히 풍경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얼굴을 내미는사람이 없었다.
"지나던 객이올시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던 지함이 대웅전 앞에 멈추어섰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지함은법당문을 열어보았다.
여름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향불조차 타오르지 않는 법당 안은
대낮인데도어두침침했다.
"선생님, 여기도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모양인데요?
향불도 꺼진 지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가는 곳마다 문을 닫아걸었으니…"
화담도 머리를 갸웃거렸다.
"내 참. 하루종일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게 될모양이구만."
박지화가 툴툴거리며 되돌아섰다.
"어? 그런데 저기 저 사람은 혼자 뭐하는 거지?"
기암괴석이 줄지어선 계곡을 따라
얼마나내려왔을까,
앞장 섰던 박지화가 앞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