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41회 대한민국연극제가 제주에서 열려 끼많고 피아노천재 한동일 교수가 있던 텍사스 노던주립대학인가에서 성악을 전공한 조카 룻이 출연했다고 속보?가 올라왔다....
끼가 많은 조카는 중학교때 이민을 왓는데 영어도 잘 못하던 시절(고려대 대학원 출신인 나보다는 훨 잘햇지만... ㅋㅋ)
학교 수업으로 그림을 그려가는데 잠시 조언과 지도를 해 줬는데...
놀란것은 그녀의 선?이었다.
창덕여고와 부산대를 나온 4째누이 재선엄마가 그림과 연극을 좀 하기도 하고...
이제 찾아보니 70년도 부터 74년까지 부산대 간호학과 등 부산의 대학들이 주축이 되여 시작하여 전국대학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알던 허영길선생이 부산교대 연출을 맡아 멋진 공연을 했다고한다.
서울출신에 표준말을 쓰고 부산대 의대 합창단에도 소속되어던 누이가 이의 시작이 됐음을 알수 있다.
하여간, 내 기억에는 내가 부산수산대학 1학년이었을 때는 대학연극제가 아닌 전국연극제 였던것 같은데...
전국연극제를 찾아보면 대학연극제가 74년도에 끝나고 전국연극제는 78년부터 시작되엇단다. ㄷㄷㄷ
하여간 우리가 전국연극제 1회에 참가한것일 것이다.
하여간 1975년 부산예선에 이사벨인가하는 여고생들이 유명배우 김진규의 서자같은 아들 김진철인가하는 사람의 지도와 연출로 아주 뛰어난 공연을 해서 우리와 결선에서 경합을 했다.
우리는 극작가 이근삼인가의 비석을 했고 역시 나는 주연,..
김진철씨의 연출은 가히 우리 구닥다리 허영길, 부산 MBC 의 전선생, 또 수대 선배로 부산의 심볼 '자갈치 아즈매' 라디오방송을 만든 김선생, ㅋㅋ 김선생이 아니고 이이가 바로 설령선생이네...등의 연출과는 확연히 틀린것이엇다.
그리고 그 이사벨인가 뭔가하는 여교생들의 연기역시 아마추어 선을 넘는 것이엇다.
그중에 주연을 맡은 여학생은 거의 유명배우의 미모와 신체조건을 갖춘 뛰어난 학생이었다.
당연히 모두 그 학생들이 1등을 할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정작 발표는 우리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들 조차도 부산 방송국 사람들과 우리와 밀접하게 관계하던 허, 전, 설선생들이니 당연할수 밖에 없었고,
전국대회에 참가할 대표로 미성년자를 뽑을 수는 없었던 핑계??가 있었다.
성년이고 지식인들이었던 우리는 그 발표에 챙피하게도 환성을 너무 크게 내질렀다. 질줄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여간 우리는 단체로 서울을 향해 처음 고속버스라는 것을 타고 서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했다.
같이 연극하던 2학년 선배, 3학년 이상복형 또 4학년 연출담당 형등이 거의 모두 서울 사람이었고
여주인공을 맡은 내 상대역 2학년 선배는 경상도 사람인데 표준말을 썼다.
그녀는 원래 연극부는 아니 였는데 당신 부산 예선과 전국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상복이 형이나 연출이 찾아냇던것 같다.
그녀가 나도 연극을 그만둔 2학년때 76년 이후 연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의 절친 환경과 이배정과 증식과 김옥수가 있었는데 이들이 나랑 친해서 연극부에 들어온것인지
그냥 연극부가 좋아서 들어온것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들 역시 표준말을 쓰지는 못해서 배정이는 한마디 던지는 단역을 옥수는 음악등을 담당하는 스테프역활을 했다.
어쨌던 우리는 서울 장충동으로 명동에서 막 이사온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국대회를 치루게 되었는데,
그 전날 오후인지 저녁인지 우리는 공연할 소극장으로 구경을 갔는데,
새로 지어진 어마무시한 국립극징에 비해서 뒷문? 으로 들어가는 소극장은 엄청 초라하고 조그마 했다.
간김에 대극장도 구경했는데..
공식적으로 누구 허락을 받고 한것은 아니고
소극장과 공연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당연히 넘어가? 본것이다.
정확한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카르멘을 공연하고 있어서 거대하게 높은 성벽을 무명천을 이용해서 장식을 해 놓았고
나는 발을 헛딛어 떨어졌지만 그 무명천이 생각보다 튼튼해서 사고도 나지 않고 나는 걸어서 나왔던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이근삼이나 정비석 선생의 신기리로 2등에 해당하는 대상 밑의 상을 탓다.
그날 저녁 장충동 포장마차 거리 어딘엔가 있었던 숙소에서는
2등의 포상으로 주어지는 연출상과 주연상의 선택이 있었는데...
내가 주연이었으므로 주연상을 택할 경우 그 영광이 1학년인 내게 돌아오겠지만
당연히 그 영광은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4학년 선배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부산 예선전 이후 우리 연극에 참여한 김진규씨의 아들 김진철씨가 실질적인 연출은 자기가 했으므로 자기가 연출상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것이다....
우리는 연극후 소극장 계단에서 사진도 찍기는 했는데,,, 부산에서 또는 다른 연극에서 사진을 찍은 것과는 달리 국립극장 측에서 이야기 한것인지 우리자체가 연극에 몰두 하기 위해 공연중 사진이 금지 되어있어서 계단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것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다.
그때 명동근처 IBM에 다니던 큰매형이 아침 출근길에 사진기를 갖다 주어서 그것으로 찍고 여학생들과 한국 첫 여성 승선으로 친해진 당시 해군중장출신 수산대 학장의 딸이 이화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같이 덕수궁등을 놀러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남아있다.
하여간 부산의 연극사도 엄청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들 뿐이지만 이 1975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당연히 개검들로 법이 없는 나라이니 당연하겠지만
어런것 조차도 조작이 되는 것인 알수 없다.
1975 국립극장 소극장에 대한 기사는 이것 뿐인데..
같은 시기에 공연한 것일 수 있어서 올려본다.
찾다보니 지금 대한민국 연극제가 41회인데
제1회는 2016년 청주에서 잇엇다는것이다. ㅋㅋㅋ
얼마전 까지 전국대학연극제가 전국연극제의 전신이어었다는 등 분명 클리어한 정의가 잇었는데..
갑자기 인터넷의 정보는 엉망이 되어있다. 나라꼴 잘되간다. ㄷㄷㄷ
....
음악살롱
1973년 5월 국립극장이 명동에서 장충동 신축 국립극장으로 옮기기 바로 전에 예그린악단을 국립가무단으로 명칭을 바꾸어 국립극장 전속단체로 존속시켰다. 그해 국립무용단이 국립발레단으로 분리 독립하게 된다. 국립가무단은 국립예그린예술단이라는 이름도 함께 썼다. 1974년 5월21~26일 박만규 작, 김희조 작곡, 이기하 연출, 최현 안무로 『대춘향전』을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현 해오름극장)에서 성황리에 공연했다. 제작진은 모두가 예그린예술단(악단)에 관여한 사람들이다. 제2회는 1974년 11월12~17일 오영진 작, 박만규 각색, 김희조 작곡, 이기하 연출, 최현 안무로 『시집가는 날』을, 제3회 공연은 『이 화창한 아침에』(1975년 5월6~11일 이근삼 각본, 최창권 작곡, 허규 연출, 김학자 안무)를, 제4회와 5회는 『상록수』(심훈 작, 박만규 각색, 김희조 작곡, 임영웅 연출, 송범 안무)를, 제6회는 『태양처럼』(박만규 극본), 제7회는 『어린 사람 허생 이야기』(이근삼 각본, 최창권 작곡, 허규 연출, 김학자 안무), 그리고 제8회는 『시집가는 날』로 허규 연출로 바뀌고 1977년 10월에 공연했다. 그해 소극장에서 조다리온 작곡의 서구 뮤지컬 『돈키호테』도 실험 공연했다. 국립가무단은 제8회 공연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후 세종문화회관 개관 뒤 국립가무단은 해체되고, 서울시에 시립가무단으로 옮겨졌다가 지금 서울뮤지컬단이 되었다. 1985년 남북교류와 세계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서울88예술단이 탄생했다. 방송공익자금으로 운영되었는데, 예술의전당도 같은 공익자금으로 지어졌다. 창단 당시 차범석 씨가 단장으로 총체극적인 공연으로 색깔을 굳혔다. 남북교류와 때마침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3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이종덕은 ‘88’을 뗀 서울예술단으로 명실공히 정착을 시켰다. 서울예술단은 그동안 예술인과 행정가 대표가 교차되는 가운데 예그린악단 시대의 음악극 전통을 이어가며 오늘에 우뚝 서 있다. 그동안 서울예술단의 명칭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해왔다. 신선희 이사장 재임 기간에 영문으로 ‘서울 퍼포밍 아트 컴퍼니(Seoul Performing Art Company)’라 번역해서 영어로는 그 뜻이 이해되었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한 이름이다. 더구나 지방자치단체 시대에 헷갈리는 이름이다. 그리고 지금은 방송공익자금도 끊기고 국고가 지원되는 단체이다. 국가지원 예술단체가 모두 국립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유독 코리안심포니와 서울예술단만이 그 이름을 못 가졌다. 1973년 국립가무단(가무극단)으로 출발했던 그 이름을 다시 회복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30주년을 지낸 과업의 하나이다. |
여기 1975년도 에 전국소인극연극제라는 것을 했고
대구팀이 대상을 탔다는 글이 있는데
연결된 곳으로가면 해당 글은 나오지 않지만 인터넷에 떠있는 글은 다음과 같다.
dgartime.complay
연극
마이어 교수(독일 뮌헨대학) 초빙 연기워크숍 개최(대구연극협회 주최) 대구시민회관(현 대구콘서트하우스) 개관 1975. <우리들 세상>, 전국소인극경연대회(국립극장 주최) 대상 수상 이강백 작, 김천봉 연출의 작품으로 대상, 연출상, 최우수 연기상(홍문종) 수상. 소인극은 아마추어 즉 학생, 직장인, 노동자, 농민...
가능성이 충분한데 전국소인극경연대회라는 단어는 무척생소하다.
우리는 이걸 그녕 전극연극대회라고 불렀는지...
대?국립극장에 흔적이 있어야하는 데 없다니...
에고 법도 없는 나라에 뭘 기대하겠냐만은...
그날 , 1975년 참석한 대회는 문명 무슨 간판이라도 있었어야하는데 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