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밤 우산을 쓰고 무심천엘 나갔다.
하상도로를 달릴 때마다 눈길이 가던 조깅로, 삼매경에 빠진 듯 홀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이던 길, ‘언제 시간을 내서 나도 한번 저 길을 걸어야지’
마음먹던 바로 그 무심천 생활건강도로를 걷고 싶어서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산을 쓰고, 운동화를 신고, 오래도록 비를 맞아도 괜찮을 비막이 옷까지 챙긴 채 나갔다. ‘이런 날은 온전히 나만의 길이겠구나’하는 비밀스런 기분으로. 그러나 웬걸. 그 길엔 이미 먼저 나온 사람들이 길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드 달린 방수복을 입고 거친 숨을 내쉬며 조깅로를 달리는 사람도 있었고, 둘이 한 우산을 쓰고 다정히 걷는 연인도 있었고, 마사이족처럼 빠르게 파워워킹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경쾌하게 발걸음을 떼며 ‘아, 이 밤에 이렇게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길이 도시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생각했다.
무심천에 조깅로가 만들어 진 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며 즐긴다. 직접 걷지 않는 사람들도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도심 한가운데서 마음놓고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있으랴. 무심천을 따라 분평동에서 운천동까지 이어진 이 길은 아직은 8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지만 앞으로 더 길게 뻗어갈 것이다.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좋은 행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자치단체는 시민을 위해 건강한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마련하고, 시민을 대표한 의회는 흔쾌하게 동의해주고, 시공업체가 성실히 도로를 만들면 시민들은 즐겁게 이용하는 것이다. 마치 여러 악기가 화음을 이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처럼. 사실 이 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시민들이 알지 못하면 어떠랴. 무심천 둔치의 박토에 보리를 심고 자운영을 심고 유채꽃을 뿌리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어서 무심천이 아름워지는 것이고, 하수처리에 대한 끝없는 투자와 자연친화적인 하천 보전으로 탁류가 흐르던 무심천이 바닥이 보이도록 맑아진 것이고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행정가들은 이런 일을 생색을 낼 필요도 없고 자랑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즐겁게 무심천 길을 걷는 시민들과 강태공들이 편안히 낚시줄을 드리우는 모습을 보면서 뒤에서 조용히 미소짓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보람인 것이다.
몇 년 전인가. 이 길에 대해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내 발로 땅을 딛는 것이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를 깨닫게 되고보니 주위에 마음놓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기존의 도로를 새로 뜯어고치는 것은 쉽지 않을테니 무심천 길 같은 곳을 시범적으로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피력했었다.
“무심천을 따라 서쪽 둔치를 이런 길로 만들면 어떨까. 우선 분평동부터 까치내까지 길을 만든다. 길은 넓을수록 좋다.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은 물론 인라인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함께 이용해야 하니까. 그 길가로는 지금 둔치에 심은 것들을 다시 재배치해 심는다. 몇 백 미터는 유채꽃을 심는다. 그리고 몇 백 미터는 메밀꽃을, 몇 백 미터는 코스모스를 심는다. 해바라기도 심고, 목화도 심고, 어릴적 생각이 나게 분꽃도 맨드라미도 심는다. 그리고 억새도 심고, 수수도 조도 심는다. 밤에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달맞이꽃도 심어볼 일이다. 그 꽃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면 무심천은 꽃밭이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심천 물소리를 들으며 그 꽃사이를 달리거나 산책할 것이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차를 타고 다닐 땐 보이지 않던 길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길가에 자라고 있는 작은 풀과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벌레들로부터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무심천 길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이 아름다운 길에서 오는 21일 오후‘무심천 사랑-거북이마라톤’이라는 이름으로 걷기행사가 열린다. 시정넘치는 이름 때문에 청주시민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가슴에 그리움을 품게되는 시내. 어린 시절 물장구 치고 송사리 잡으며 놀던 추억의 냇가, 토요일 오후 그 길을 가족과 친구와 직장 동료들이 가슴을 펴고 함께 걷게 되는 것이다. 아직 무심천 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때 한번 걸어보면 색다른 즐거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