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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의 사람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자료: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공간역사/부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역은 수많은 문물과 사람을 경험했다. 연락선 부두까지 이어져 있던 철로는 한반도를 근대의 세계와 만나게 하는 관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부산역은 지금의 부산역과는 다른 위치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외벽을 감싼 르네상스 양식의 이 두 건물은 모두 일본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했다.
오늘날의 중구 중앙동4가 부산무역회관 근처에 세워졌던 옛 역사(驛舍)의 상층부는 호텔로 쓰였다.
하지만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가 발표된 해인 1953년 역전 동네에 난 대화재로 옛 부산역은 40년 넘는 세월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우편국과 세관 등 많은 근대 건축물이 이때 함께 폐허로 변했다. 동구 초량동에 새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세대의 기억이 쌓이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서면 산비탈을 빼곡히 채운 집들이 마주 보였고, 드넓은 경사로를 따라 분수가 치솟는 광장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보기 드문 여유로운 광장 위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역사는 반대편의 바다를 잊어버린 건물이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도시와 바다는 교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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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연혁 자료출처: 위키백과
1905년 1월 1일 : 초량역(草梁驛)으로 영업 개시. 보통역(그룹대표역) 1급으로 변경. 새마을호의 종착역을 용산역으로 임시 변경
부산역(부산정거장) 자료출처:부산시청
경부선(京釜線, 1901. 8.~1904. 11. 10)은 부산(초량)과 서울(영등포)에서 동시에
공사를 착공, 준공하여 1905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동년 4월 1일 임시 부산역사에서 철도업무를 개시하였다. 착공하여, 1910년 10월 31일 준공하였다.
건물은 외관 장식은 붉은 벽돌로 벽돌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처마 밑에는 벽돌과 화강암을 엇갈린 사라센 계통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지붕은 둠(Doum)형으로 슬레이트로 이었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角塔)이 있었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최종 종착지로 함경도 함흥 등지에서 부산항으로, 또한 전국 각지에서 피난열차에 몸을 싣고 남으로 내려와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피난행렬 속에서 부모 형제들과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고 한다.
당시 피난시절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생이별한 가족들의 그리워하였는지는 당시 유행하였던 대중가요의 가사속에서 느낄 수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용두산 엘레지」「이별의 부산정거장」등이 대표적인 노래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역과 관련하여 피난민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라는 가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당시 피난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이 1,000만명에 이른다.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려던 부산역사(釜山驛舍)는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중앙동·동광동·영주동 일대가 초토화되면서 부산우편국과 부산일보사 사옥 등과 함께 애석하게도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1965년 11월 구 초량역과 함께 부산진역으로 통합되었다가, 1969년 6월 지금의 부산역사가 준공되면서 영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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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명 유래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 1월 28일『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경상도속찬지리지(1469)』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70년(성종 1) 12월 15일자의『성종실록』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이름하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兩鎭)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동국여지승람(1481)』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해사록』에 실려 있는 「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釜山鎭城)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鄭公壇)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詩文)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왜관도(倭館圖)」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 「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 하고「부산호장소(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 嶺)은 우리 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을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山]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현재 부산 중구 중앙동 유래 동남쪽으로 국제 페리부두와 연안 여객부두, 제1부두와 제2부두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동광동, 북쪽은 영주동과 접해 있다. 1902년부터 1911년까지 진행된 북빈매축공사(北濱埋築工事)로 된 지역에 좌등정(佐藤町) ·대창정(大倉町) ·고도정(高島町) ·경부정(京釜町) ·안본정(岸本町) 등의 지명이 생겼다. 1947년에 부산역을 가진 중심부라는 뜻으로 중앙동 1~4가로 개칭하였다. 행정동인 중앙동은 법정동인 중앙동 1~7가와 대창동 1가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동내의 고유지명 논치어장 자료출처:부산중구청
동남쪽으로 국제 페리부두와 연안 여객부두, 제1부두와 제2부두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동광동, 북쪽은 영주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부산면(釜山面) 지역이었으며, 1902년부터 1911년까지 진행된 북빈매축공사(北濱埋築工事)로 된 지역에 좌등정(佐藤町) ·대창정(大倉町) ·고도정(高島町) ·경부정(京釜町) ·안본정(岸本町) 등의 지명이 생겼다.
1947년에 부산역을 가진 중심부라는 뜻으로 중앙동 1~4가로 개칭하였다.
행정동인 중앙동은 법정동인 중앙동 1~7가와 대창동 1가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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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영선고개
영선고개 자료출처:부산중구청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 ~ 코모도호텔 앞 ~ 메리놀병원 앞 ~ 가톨릭센터 앞 ~ 대청 국제시장 입구 사거리(오늘날 위치) 예전엔 영주동 시장 남쪽 입구 ~ 부원아파트 뒤 ~ 논치시장 ~ 대청로로 이어지는 길을 영선고개라 한다.
그러나 이 고개는 본디 "영선고개"가 아니라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한때 불렸었다.
이 고갯길은 6.25 동란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아스팔트 길로 닦아 냄으로써 "부산 아스팔트 도로 제1호"가 됐었다. 그래서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렸던 것이다.
동쪽 밑에 있는 언덕 바로 윗길이 통하고 있는 고개였다.
"영선산" 등성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이름을 따서 붙인 고개 이름이다.
이와 같은 "영선고개"를 넘나드는 고갯길은 "초량왜관"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낮에조차 사람이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던 소름 끼치는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무렵 초량왜관 담장을 함부로 넘어다녔다가 우리나라 번병(番兵)에게 들킨 사람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영선상에 우거져 있던 숲은 대낮에도 하늘을 가려 "영선고개"가 아주 어두컴컴해서 이 고갯길을 넘나들 때는 누구나가 으슬으슬 해졌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낮에도 무리를 짓고 "영선고개"를 넘나들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무렵 사람들이 "영선고개" 오솔길을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초량왜관 객사(客舍)와 임소(任所)가 있던 영주동에서 초량왜관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 바로 이 고갯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영선고개" 오솔길을 사람들 누구나가 마음 놓고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은 1912년 영선산이 깡그리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작로가 닦인 뒤부터였다. 소름 끼치도록 음침한 처형장 영선상이 헐리고 나자 "영선고개" 오솔길은 이때부터 우거져 있는 녹음이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하면 전망 탁 튀어 시원한 고갯길로 탈바꿈했었다고 한다.
1910년 영선산과 옛부산역
영선산 착평공사장면 뒤쪽이 있는 건물 옛부산역사
영선산 착평공사 자료출처:부산시청
영선산착평공사(營繕山鑿平工事) 이전 부산항은 동·북·서가 산으로 둘러싸여 남으로 절영도가 가로막아 천연의 양항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를 형성한 주위 산지(山地)로 말미암아 시가지를 형성하는 데는 좋은 편이 못되었다.
부산 매축회사의 공사로 얻어진 땅으로 넓은 지역을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항만을 가진 서쪽 지역이 좁아 경부선 철도와의 연계가 불편했다.
따라서 항구의 선박과 철도의 열차 사이를 연결시키면서 육로교통의 원활을 위해 시가지 확장과 그 연결이 필요했다. 그 확장 연결로 가장 요긴한 일은 부두는 오늘의 중앙동에 있는데 경부선 종점은 초량에 있어 바다와 육지의 물량 양하역(揚下役)이 원활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전관거류지 지역인 현재의 중구지역과 동구지역인 초량을 연결되어 일본인 거류지에서 부산진으로 북상(北上)하는 일이 일본
인들로 보아서는 요긴했다.
그렇게 북상과 해륙연계를 하려니 현재의 중구지역과 동구지역 사이 영선산(營繕山)과 영국 영사관산(영국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해발 130척(尺)으로 큰 장애물이 되어 부산항은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 꼴이었다.
그래서 이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을 1909년 5월 착공하여 산을 깎아 내려[鑿平] 평지를 만들면서 그 산의 흙과 돌로 바다를 메워 1912년 8월 공사를 완료하여 4만4천7백80평을 얻었다. 공사에 소요된 총 공사비는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105만1천5백원이었다.
이 공사로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이 없어지고 초량 앞바다와 제1부두 사이 매축지에 호안(護岸)의 돌벽[石垣]과 바다에서 짐을 부리는 물양장이 축조되었다.
이 호안과 물양장 매립에는 영선산과 영사관산에서 나온 바윗돌을 이용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을 그때는 초량이 종점이 되어 있었다.
영선산과 영사관산이 가로막아 더 이상 남쪽으로 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산이 없어지자 초량 종점의 경부선 부산 본역이 중앙동의 세관이 있는 제1부두 쪽까지 뻗어나와 부산항의 선박의 물자와 인력이 육지의 경부선 철도에 바로 연계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륙침략의 길은 더욱 확고한 터전을 잡은 셈이었다.
이 부산항과 경부선 철도의 연계는 일제로 보아서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부산에 형성하는 요긴한 일이었다.
그것은 대륙침략의 또 하나의 관문인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鴨綠江架橋工事)와 부산의 경부선 종점의 연장을 같은 시기에 획책한 일로서도 알 수 있다.
부산의 경부선 종점을 제1부두까지 연장하는 영선산 착평공사는 1909년 5월에 기공되어 1912년 8월에 준공된 데 대해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 또한 같은 시기인 1909년 8월에 기공되어 1911년 10월에 준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일본에서 오는 물자와 인력은 바로 중국대륙까지 나아가고 중국대륙의 물자와 인력은 바로 일본으로 수송하게 되었다.
오늘의 경부선 종점인 부산본역은 1969년 중앙동에서 초량으로 되돌아갔지만 옛 부산 본역이 중앙동에 있을 옛부산역 광장을 새마당이라 한 것은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새로운 마당이 되었다고 해서 새마당이라고 했다.
영선산 착평공사는 부산 일본거류민단 사업으로 시행되었지만 형성된 토지 소유권은 구한국정부에 귀속되게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공사비는 일본 거류민단이 일본 제일은행에서 대부하되 원리금 상환은 토지소유자인 구한국정부가 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본 거류민단의 필요에 의한 이 사업이 한국정부가 관장하는 형식이 되었던 것은 토지의 소유문제와 일본정부의 힘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의 시작은 구한말이었지만 완공은 일제강점기 때로 공사대금의 원리금 상환도 일제강점 이후의 조선총독부가 정리하고 형성된 지역의 시설도 조선총독부 의도대로 이용되었다.
제1잔교 현재은 국제여객부두
부산잔교역(釜山棧橋驛)은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했던 경부선의 역이었다. 경부선의 종착역인 부산역에서 선로를 연장하여 지금의 부산 제 1부두에 설치한 잔교까지 연결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운항하였던 부관연락선과의 연계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일부 열차가 이 역에서 시종착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폐역되었다.
출처:부산일보 1913년 3월 29일 개통됐다. 압록강 가교, 만주 안봉선(안동-봉천) 등 대륙연결시설이 완성되는 것과 연계해 진행됐다. 잔교 내에 식장, 휴게소 식당을 갖췄다. 철로를 부두로 끌어들여 연락선과 열차가 곧바로 연결될 수 있게 했다.
부산부두 도착하는 관부연락선
제1잔교부두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11일 이끼마루호가 취항하면서 개설됐다. 당시 부두는 지금의 중앙동 연안여객터미널이 자리한 곳에 잔교(棧橋·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를 이용했다.
1912년 6월 15일 지금의 제1부두가 제1잔교부두로 완공돼 관부연락선 부두로 이용됐다. 1930~40년대만 해도 제1부두는 경부선 열차의 시발점과 종착역이었다.
사진은 1930년대 관부연락선 부두 터미널의 모습.
부산의 역사의현장3 부관연락선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은 1905년 1월 1일부터 부산의 초량과 서울(당시 경성)의 영등포 사이의 경부선 철도가 개통에 이어 부관연락선(취항 당시부터 일제시대까지의 공식명칭은 관부연락선이었음) 이 운항되면서 일본 구주(九州)의 동해철도선(東海鐵道線) 과 산양철도(山陽鐵道)가 이 부관연락선과 연계가 되었다.
이 부관연락선이 처음 취항한 것은 1905년 9월 11일로 시모노세키에서 첫 출 항의 뱃고동을 울린 산양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 소속의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 1,680톤]으로 여객정원 317명의 1천680t급 객화선(客貨船)으로 일류 호텔 수준의 일등 선실이 12엔, 다다미로 된 삼등 선실 가격이 3엔50전이었다.
운항시간은 11시간 30분,도쿄~산요~규슈철도와 한반도 경부선 연결고리가 완성돼 경성과 도쿄 여행시간이 60시간으로 단축됐다.
그 연락선은 일본의 산양철도를 거쳐 일본의 경제적 한국침략의 핵심지인 대판(大阪)과 신호(神戶)를 연결하게 돼있었다.
이어 11월에는 대마환(對馬丸, 1,602톤)의 취항으로 釜山과 下關에서 매일 출항하게 되었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 동경에서 기차표 한 장으로 조선의 서울까지 올 수 있었다.
이를 여객선이라 하지 않고 연락선이라 한 것은 일본의 산양선철도와 조선의 경부선철도 사이를 연락하는 배라 해서 연락선이라 했다.
그때의 일본 산양철도도 부관연락선도 우리 나라의 경부선, 경의선 철도도 일본 국유의 철도원 소관아래 있었다.
이 연락선이란 말 자체에도 그때 이미 일본의 조선과 대륙으로 침략을 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의 정치?군사? 경제상의 우월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만주의 여순(旅順)?대련(大連) 부근을 조차하는 한편 장춘(長春)?여순 사이의 철도를 러시아에서 양도받았다. 이로써 대륙침략에의 일본의 발판은 굳어졌다.
1905년 조선의 정치 외교를 보호한다는 이른바『을사조약』을 맺게 되자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이 구체화되면서 부관연락선 운항이 다시 가속화되었다.
1908년에는 다시 1천 9백톤급의 살마환(薩摩丸)을 취항시켰고, 1911년에는 다시 1천 9백톤급의 매향환(梅香丸)과 앵환(櫻丸)을 취항시키으로써 부산과 하관에서 아침과 저녁 두 번씩 출항하는 선편이 늘어났다.
1912년에는 매향환이 일본 문사항(門司港)에서 침몰되자 홍제환(弘濟丸)을 취항케 했을 뿐 아니라, 1913년 1월 31일 3천톤급의 거대한 고려환(高麗丸)과 4월 5일에는 신라환(新羅丸)이 증강되었다.
이때의 내왕 인원은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는데 1908년은 약12만명(1,226회 취항) 이었지만 4년 뒤인 1912년 약 20만명(1,416회 취항)으로 불어났다.
1912년 이전까지는 연락선이 닿는 자리는 지금의 연안여객부두 안쪽 자리쯤이었다가 1912년 제1부두의 개장되자 자리를 옮겼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급진화 함으로써 1922년 5월 11일에는 3천6백톤급의 경복환(景福丸)과 11월 22일 덕수환(德壽丸)과, 1923년 3월 12일 창경환(昌慶丸)을 취항하자 종전의 여객선인 고려환(高麗丸)과 신라환(新羅丸) 두 척을 화물선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선박 증가는 중?일전쟁(1937년)을 도발할 병력 및 군사물자의 수송과 함께 일본인을 이주시켜 식민정책을 강화하자는 데 있었다.
태평양전쟁을 앞둔 1936년 11월 16일에는 7천5백톤급의 금강환(金剛丸)과 1937년 1월 31일 흥안환(興安丸)을 취항시켜 시속 16노트로 종전의 11시간의 운항시간을 7시간 30분으로 단축시켰고, 1942년 9월 27일에는 7천 5백톤짜리 천산환(天山丸)과 1943년 4월 12일 곤윤환(崑崙丸)을 증강 취항시켰다.
이러한 연락선의 증강은 대륙의 침략 과정과 병행되어 갔지만, 부산항을 찾는 일본인은 조선 또는 대륙침략의 책략을 수행하기 위해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었다.
그 반면 부산항에서 떠나는 사람으로는 일본 유학으로 떠나는 우리나라 유학생 (일본유학생수는 1926년 3,945명, 1930년 약 4,000명, 1935년 4,944명, 1938년 12,356명, 1942년 29,427명)도 있었지만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농토를 잃고 탄광의 광부로, 부두의 노무자로 가족을 두고 삶의 길을 찾아 단신으로 떠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제의 강점이후 10여년간 부산에서 일본으로 노동자가 되어 이 연락선을 타고 간 사람은 70만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 약 40%는 경상남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일본으로의 도항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져 1927년에는 한해에 14만 8천여명이나 되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전환될 무렵에는 징용?보국대?징병?학병?여자정신대로 본의 아닌 타의로 끌려가는 우리나라 사람의 수가 날로 많아져 갔다.
강제징용의 예만 해도 1940년에는 1,892명이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1년 뒤인 1941년에는 6,898명으로 4배 가까이나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 10월 15일 밤에는 下關을 출항한 7천5백톤급 곤륜환(崑崙丸)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544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이 사건 후에는 전쟁 수행상 다급한 수송이 요구되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야간운항을 줄이고 낮에만 수상기의 엄호를 받고 운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6월 30일부터 태평양전쟁으로 전세악화로 관부연락선 항로가 폐지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연락선의 구실은 사라지고 한동안 미군의 통제아래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본인 귀환민과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우리나라 귀환동포 수송을 부정기적으로 담당하다가 그 일이 마무리 지어져 가자 운항이 중단되었다.
1960년대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1964년 부산과 오사카 사이에 ‘아리랑호’가 취항하여 운항되었다.
1969년 8월 3일 부관패리주식회사가 설립되고, 부관연락선이 끊어진지 25년이 지난 1970년 6월 17일 부관페리호(3,875톤)가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을 운항하게 되었다.
이후 1983년 4월 27일 국적선 훼리부관호(5,631톤)가 부산~시모노세키간을 취항하였다. 1986년 3월 31일 부산~오사카간 정기여객선인 올림피아 88호가 첫 출항을 하였고, 1989년 12월 13일 부산~하카다간 훼리 카멜리아호 취항하였다.
부산국제여객부두의 대지면적은 86,833㎡이며, 건물 연면적은 12,053㎡이다. 터미널 건물은 4층으로 출입국 대합실과 통관장 그리고 귀빈실을 갖추고 있고, 부대시설로는 문화재감정관실, 세관사무실, 여행사, 선박회사 등이 상주하고 있다.
여객부두는 4개선석 652㎡로서 연간 소형컨테이너 약 6만개를 처리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한?일간의 국제여객 노선에 초고속 괘속선인 카훼리선 취항으로 운행 시간이 2시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으면서 많은 일본관광객들이 부산을 찾고 있다.
또한 2008년부터는 2만톤급의 초대형 크루즈여객선인 ‘펜스타’를 투입하여 패키지 일본여행 상품권을 판매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1926년 부산본역
부산세관건물
1952년 부산역
중앙동 40계단
1953년11월27일 부산역대화재1 영주동에서 본 모습
1953월11월27일 부산역전대화재2 가운데 빨강 벽돌집이 부산역 건물임
역사현장4 부산의 대화재
광복 이후 부산의 도시변모는 화마(火魔)의 도시라 불릴 만큼 대형 화재가 많았다. 1945년 광복 당시 부산의 인구는 30만명으로 중 일본인이 6만 명이었다. 일본인들은 철수한 대신「우환동포」라고도 불리던 귀환동포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혼란을 이루었다.
여기에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공지?도로변 산중턱까지 할 것 없이 시가지는 온통 판자으로 메워졌다.
판자집은 용두산일대를 비롯하여 중구?서구?영도구?부산진구 등을 중심으로 부산전역이 분포하고 있었다.
당시의 산중턱까지 지어졌던 판자집으로 인해 이후 꾸준한 주거정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산중턱까지 주택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자집의 난립으로 화재에 대한 무방비 상태였다.
1953년 11월 27일 저년 8시 30분경 영주동 서쪽 산비탈에 있는 피난민 판자촌에서 불이 일어나 때마침 거세게 불어닥치는 하늬바람을 타고 영주동?동광동?중앙동? 대청동 입구 일대까지 불길이 번져 그 이튿날인 11월 28일 새벽 6시 30분이 돼서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
역전 대화재로 인한 피해를 살펴보면, 피해 총액은 1백 77억환으로 집계되었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주택이 3,132채, 29명의 인명사상자가 발생했는가 하면 6,000여 세대 30,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당시 피해액은 국제시장 대화재 때의 12.6배에 이르렀다 한다.
부산역전 대화재는 지금의 중구지역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초토화시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국제시장 대화재 발생한지 10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 화재로 르네상스 양식의 부산역사(釜山驛舍, 1910. 10 준공)과 부산우편국(釜山郵便局, 1910. 5 준공), 부산일보사 사옥, 부산방송국이 불타 버림으로서 교통과 우편통신 그리고 방송시설과 같은 도시의 중추 기능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이 화재는 부산에만 충격을 주었던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이 전국에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었다.
구 부산역 (현재는 중앙동 외환은행 부산지점)
지금의 현재은 중앙동 (오른쪽위 중부경찰서)
1966년 부산항풍경 빈공터(부산역옛자리)
중앙동 왼쪽의 산위의 건물이 남성여고
항공사진(지금 현재의 부산역자리은 빈공터로 보입니다)
부산세관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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