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보고
EBS에서 영화를 보았는데
오래만에 영화를 보았다. EBS에서 방영한 ‘아제 아제 바라아제’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나올 당시 보았었다. 1989년 개봉되었기 때문에 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이다. 그런데 TV로 영화를 다시 보니 오래 전에 보았던 장면이 그대로 기억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화를 통하여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별다른 생각 없이 보았다. 불교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단지 상식적인 불교지식을 가지고 영화를 접하였다. 그런데 다시 영화를 보니 느낌이 달랐다. 그 사이에 불교를 접하고 경전을 접하고 법문을 듣고 나름대로 사유해 왔기 때문에 불자의 입장에서 보았더니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똑 같은 영화에 대하여 언제 보았느냐에 따라 받아 들이는 느낌은 모두 다른 것 같다.
요즘은 TV로 영화를 보아도 볼만하다. 가로로 긴 와이드 화면에 HD고화질이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도 그렇다. 이렇게 깨끗한 화면으로 영화를 보니 출연한 배우들의 얼굴이 매우 고와 보인다. 더구나 이십여년전의 영화이어서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변함 없다. 그때 당시 본 것이나 지금 본 것이나 전혀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 갔지만 한번 만들어 놓은 콘텐츠는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뚜렷하게 대비 되는 불교관
영화에서는 뚜렷하게 대비 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순녀’라는 비구니와 ‘진성’이라는 비구니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두 비구니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영화가 전개 된다. 그런데 두 비구니 스님이 가는 길은 정반대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
순녀는 비구니가 되었지만 도중에 파계하여 환속하였고, 진성은 끝까지 비구니로서 삶을 살아 갔다. 그런데 두 비구니의 불교관은 다르다. 순녀의 불교관은 철저하게 대승보살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구원함으로서 합일에 이르고 스스로 부처가 된다고 본 것이다.
반대로 진성의 불교관은 수행으로 자신을 청정하게 하여 먼저 깨달음을 성취해야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순녀의 불교관에 대하여 “미망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미망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런 차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순탄치 않은 순녀의 일생
영화에서 순녀의 일생은 험난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정상적인 생활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있긴 하였지만 월남전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속죄하는 의미에서 스님이 되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하여 어린 딸을 데리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마치 매춘부 처럼 생활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순녀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비구니가 되기 위하여 입산한다.
비구니가 된 순녀는 좀 특별한 데가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산중에서 도나 닦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세상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 본 것이다. 평소 이런 생각을 가져서 일까 순녀의 앞날은 순탄치 않다.
어떤 남자를 구해 주었더니
순녀는 자살하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온 어떤 남자를 구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전혀 다른 인생이 전개 된다. 그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냈으니 책임지라고 생떼를 쓰는 것이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견져 냈는데 보따리 내 놓으라’식이었다. 이렇게 전과 경력이 있고 사회부적응자인 남자는 절에 들어와 생떼를 부리며 순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순녀를 강제로 성폭행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순녀는 절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녀는 이 사회부적응자에 대하여 대승보살정신을 발휘한다. 비록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이긴 하지만 불쌍한 영혼을 구제해 준다는 보살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광산촌에 가서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삶도 오래 가지 못한다. 사회부적응자는 순녀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광산의 흙더미에 깔려 죽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되어 주기로
영화에서 순녀는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된다. 입산전에 간호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보건소 간호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항상 대승보살정신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환자들을 돌본다.
그런데 응급차를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있었다. 그는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운전기사는 자꾸 순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도 순녀는 보살정신을 발휘한다. 아들과 함께 홀아비로 사는 운전기사의 아내가 되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둘은 함께 살게 된다.
운전기사는 유별나게 성욕이 왕성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덤벼 드는 것이다. 심지어 근무 중에 허위로 보고 하고 순녀를 찾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 순녀가 단호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순녀는 남자의 요구를 모두 들어 준다. 그러나 남자의 과도한 욕심은 결국 큰 불상사를 내었다. 오로지 성욕에 지배당하여 과도한 짓거리를 한 결과 ‘복상사’한 것이다.
순녀의 품에서 안식처를
영화에서는 순녀의 상대역으로서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사회부적응자이고 또하나는 과도한 성욕을 가진 자이다. 두 명의 남자는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순녀는 보살정신을 발휘하여 이들과 함께 한다. 세상속에서 세상사람들과 함께 하여 합일 하는 것이 중생을 구원한다고 믿는 보살정신이 두 명의 남자에게 투영된 것이다. 비록 두 명의 남자는 비록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순녀의 품에서 안식처를 찾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다시 절을 찾았으나
두 번째 남편의 죽음으로 인하여 순녀는 다시 절을 찾는다. 처음 머리를 깍었던 절이다. 그래서 노비구니스님을 찾아 뵙는다. 그러나 노비구니스님은 늙어서 중병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순녀가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채로 나타나자 옛날 동료비구니 스님들은 가까이 하려 않는다. 일종의 타락한 여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자신과 견해가 다른 진성비구니와 짧은 대화만 있었을 뿐이다.
중병에 걸린 노비구니스님은 순녀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일어난다. 그리고 반가이 맞아 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진성비구니 보다는 다정다감한 순녀를 더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이 꺼질 때 마지막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노비구니스님의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순녀를 보고 난 노비구니 스님은 임종을 맞는다. 그리고 다비식이 열린다.
천개의 탑을 쌓겠다고
다비식에서도 순녀는 따돌림을 받는다. 다비장을 도는 신도들로 부터도 부정한 여자로 간주 되어 쫒겨 난다. 다비식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밤중에 순녀는 노비구니 스님의 유골 몇 점을 수습한다. 이를 지켜 본 라이벌과 같은 진성비구니는 “허망한 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그러자 순녀는 “이 큰스님의 뼈를 추려서 그 조각들을 천개로 나누어 천개의 탑을 쌓겠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뼈조각을 가지고 순녀가 절의 문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진성비구니는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로 시작되는 게송을 들으라고 읊는다. 그러나 순녀는 들은체 만체하고 절을 떠난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많은 여운을 남긴 영화
영화가 끝나자 많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처럼 생각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극명한 불교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유발의 순녀는 보살정신에 입각하여 세상속으로 들어가 천개의 탑을 쌓겠다고 하였고, 반면 삭발의 진성비구니는 수행으로 청정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과연 어느 길로 가는 것이 더 옳으냐는 식으로 화두 아닌 화두를 던진다.
영화가 처음 나올 당시 본 것과 지금 본 것은 차이가 있다. 영화는 똑 같은 내용이지만 받아 들이는 것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영화를 보는 느낌이 모두 다르다고 하였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교에 대하여 모르고 영화를 보았을 때와 불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보았을 때 느낌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 때 당시에는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는 마치 화두처럼 다가온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영화가 만들어졌을 당시 1980년대 말은 지금과 상황이 다르다. 그 때 당시 영화에서 전하고자 메세지는 분명히 ‘대승보살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현실참여를 강력하게 표출하였다. 그래서 순녀가 두명의 하찮고 별볼일 없는 남자들에게 보살정신을 발휘하여 구원하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 또 별 볼일 없는 남자들은 순녀의 품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서는 비록 유발의 몸이지만 천개의 탑을 쌓겠다고 발원을 하면서 다시 세상속으로 들어 간다. 과연 순녀가 세상속에서 어떤 탑을 쌓았는지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영화에서는 시청자들의 판단에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순녀의 아름다운 보살행을 전하려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진성비구니의 입장 또한 수긍이 간다. 이는 순전히 시대적 차이라 본다. 왜 그런가? 영화 말미에 순녀의 천개의 탑을 쌓겠다는 것에 대하여 진성비구니는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을 읊었기 때문이다.
Dīghā jāgarato ratti 디가 자가라또 랏띠
dīghaṃ santassa yojanaṃ 디강 산탓사 요자낭
dīgho bālāna saṃsāro 디고 발라나 삼사로
saddhammaṃ avijānataṃ 삿담망 아위자나땅.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hp 60)
순녀의 보살행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성비구니가 법구경 게송을 읊는 장면은 초기불교가 확산되고 있는 한국불교 현실에서 더 가까이 다가 온다. 바로 이것이 같은 영화를 보아도 시대에 따라 느낌이 다른 예에 해당될 것이다.
2013-12-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