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곡지맥(2008년 7월 7일)
문수봉을 가기위해 양주동 마을의 창고 우측으로 오른다.
문수봉 직전의 선바위
이곳도 출입금지 구역이다. 50만원 과태료가 강아지 이름인가!
지맥 첫날이라 얼굴에 살이 좀 붙어 있다.
막아 놓으니 역시 보존의 가치는 있다. (출렁이는 물결같다, 풀이름, 거렁)
만고풍상을 겪은 나무
바위와 함께한 나무
등곡지맥이란?
白頭大幹 대미산(1115m)에서 북쪽 문수봉(1161.5m)쪽으로 1km정도 진행하면 1049봉 헬기장 옆에서 분기하는 산줄기이며 이는 모녀고개, 배재, 등곡산(589m), 중치에서 충주호(월악교)까지의 약 40여km를 말하며 백두대간에서 남한강의 물줄기 모임인 충주호의 월악교에서 그 끝을 맺는 지맥은 송계 계곡물과 광천물이 만나는 합수점이기도 하며 이 지역은 월악산을 계속 조망 할 수 있으며 등곡산 일원은 충주호를 바라보는 매력적인 지맥이라 할 수 있다.
구 간 : 1049봉 분기점-문수봉-석이봉(812m)-모녀재-누리티재
같이한 사람 : 김태영 김우항,
7월의 초순이지만 벌써 熱帶夜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기온현상으로 밭에 일하던 노인이 日射病으로 사망을 하고 일부 초등학교는 휴교령을 내리기도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는 시점에 산줄기를 찾아 나서는 나의 마음 또한 그렇게 편하며 낭만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등곡지맥을 무사히 종주할 수 있다는 확고한 信念과 아울러 나는 본래 산과의 인연을 갖고 태어났기에 산과는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라 는 숙명적인 관계가 있다는 동질감에 자신을 위로하며 지맥탐사 길에 들었다.
서울에서 덕산으로 가는 차편이 그렇게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동서울에서 6시 출발하니 충주까지 1시간 40분 걸린다(운임 9700원)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차를 타고 중간 덕산에서 내리면 되는데 무려 2시간을 기다린다.
도착 하니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서울을 떠나올 때 또 다리공사를 하는데 한강을 건너며 바라보니 (암사동 - 구리) 교각은 그 진 다 세워진 모양이다.
안개 자욱한 고속도로의 우등버스는 안개를 가르며 잘도 달린다. 그중에 대원여객의 상주 함창 가는 버스는 그야말로 우리차를 추월하며 손살 같이 잘도 달린다,
첫차인데도 滿員이다. 승객들 모두 잠을 자고 있었지만 나는 설레 임에 잠이 오질 않는다.
미지의 산줄기를 찾는다는 것은 항상 흥분되고 긴장과 함께 나의 좁은 마음을 가만두지 않는다.
안개가 너무 많아 항공기 離 着陸은 불가능할 것 같다.
엊그제 모내기 한다고 하더니만 벌써 들녘은 새파랗게 벼가 많이도 자랐다,
충주는 우리나라 국토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984.02km2의 면적과 약 21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인심이 후(厚)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한 고장이며 전국 제일의 수질을 자랑하는 수안보 온천과 앙성온천, 문강온천이 있으며 충주호와 월악산 국립공원과 중원 고구려비, 탄금대, 미륵사지등 역사유적과 골프장 및 스키장등 관광지가 풍부한 고장이다.
특히 충주에서 단양까지 충주호의 130리 뱃길은 주변의 풍치관광과 더불어 역사탐방코스로도 유명한 곳이다.
만남과 동시 배재(덕산면과 수산면계)로 가서 공터에 차를 주차 시켜놓고 534도로인 모녀재 비포장 길로 올랐다. 약간의 장애물이 있을 거라는 각오는 했지만 도저히 오를 수 없었다. 결국 아까운 시간만 손해보고 다시 돌아 내려와 코스를 수정했다.
양주동 마을창고 앞에 차를 주차하고 우측 계곡 길로 오르기로 했다. 11시 15분에 산행을 시작한 셈이다, 부지런히 걸었다, 경사가 심하긴 해도 길이 잘나 있어 문수봉 정상에 11시 55분 도착하니 출입금지 안내판 앞에 2등 삼각점도 있었고 맨발과 홀대모 조진대. 죽천부부의 시그널이 먼저 와 있었다.
좁은 정상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다. 기념사진 한 장씩 찍고는 조금 내려가 시원한 계곡바람이 불어주는 언덕 빼기에서 간식을 먹으며 쉬어갔다.
본래 계획은 대미산을 거치는 여우목 고개에서 시작하기로 했는데 시간관계상 이번에는 문수봉에서 하기로 하고 다음 운달지맥 때 빠진 구간을 마저 하기로 했다.
날씨는 맑고 좋았으나 개스가 많아 옆 봉우리조차 잘 안보일정도이며 날씨는 후덥지근한 것이 너무 덥다.
완전 원시림 같은 오래된 나무와 짙은 숲이 지맥을 찾는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큰두리봉 오름길엔 암릉 구간도 있어 우회하며 조심스럽게 오르기도 하며 석탄 매장량조사를 했는지 두어군데 파다만 현장이 있었고 거렁(쇠털풀)이 많이도 자라서 흐르는 물결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런대로 길의 흔적은 잘나 있는 편이고 대신 바위가 물기를 머금어 미끄럽기도 하여 조심스럽게 이동 하여야한다,
3시가 되자 두리봉을 통과했다, 3시 45분 880봉 부터는 길이 차츰 희미해지고 사람이 다닌 흔적은 차츰 적어지며 숲은 갈수록 짙어진다,
5시 26분 석이봉(812m)정상에 닿았다 G,P,S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정상이고 이곳에서 모녀재로 내려가는 길은 자갈길이라 조심도 해야 하지만 마루금이 뚜렷하지 않아 독도에 상당히 어려움을 느끼는 구간이며 짙은 수림에 거렁이 멋지게 자라있어 정말 보기 좋았다.
푸른 호수 위를 걷는 느낌이다. 5시 50분 모녀재에 도착했다, 이곳은 차가 다닐 수 없는 곳이다,
길의 노면은 좋았으나 나뭇가지와 잡풀이 많이 자라 길을 거의 덮고 있었으며 지방도로 번호까지 부여받은 길임을 안 우리는 설마하고 차가 모녀재를 넘어 지맥 분기점으로 바로 오르려 고 했던 우리가 어리석기도 한 셈이다.
모녀재엔 오래된 느티나무가 양쪽을 지키고 있었으며 국립공원 출입금지 현수막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잔뜩 겁을 주고 있었다.
모녀재 좌우 모두 독도 주의 구간이고 작은 돌들이 많아 특히 발목을 주의해야하고 728봉에 6시 19분 도착했다. 407 복구 74.7 건설부 삼각점만 보고 빠르게 이동했다,
누리터재 인 군도에 7시 30분 도착했다,
결국 계획대로 산행을 못하고 이곳에서 접어야 했으며 지나가는 차를 히치하여 배재까지 가서 차를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계곡물로 간단히 몸을 닦고 도기마을 삼거리 가로등 아래서 밥을 지어먹고 아스팔트 포장길에 바로 노숙하였다.
모기가 많을 것을 염려하여 양말도 신은채로 긴팔 옷을 입고 수건은 얼굴을 덮고 그렇게 잤다. 등허리는 온돌방처럼 뜨끈뜨끈하고 약간의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잤다.
“山”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봄,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로 순환하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있음과 역동성이 우리를 리드하고 삶에 지친 낙오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하는 것은 역시 순수한 아름다움이 깃든 “산”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격정의 노여움도 보여주는 자연이지만 모든 것이 신의 거처로만 여겨지는 것은 그만큼 넓고 크며 무한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한한 존재의 본질과 영구함은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간과 비례한다 할 것이다.
나에겐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山”이 나의 삶의 질과 그 범위를 넓혀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의 그 언저리에서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나에게 주어진 고귀한 시간을 멋지게 활용하려고하는 노력의 손길은 잠시라도 늦출 수는 없는 것이다.
“山”은 나에게 많은 처방을 내려주지만 나는 그 처방을 실제 생활에 옮겨 보려고 노력은 많이 하지만 제대로 그릇이 준비 안 된 나에겐 100가지 처방도 소용없음을 많이도 느끼며 산다.
한번 주어진 시간은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 기회는 두 번 다시 나를 찾아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느 정도 나이조차 먹고 보니 그 기회는 영원히 꼬리를 감춰버린 듯 찾아내기조차 정말 어려워진다.
자연과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가야한다, 그래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서로 아끼며 배려할 수 있는 기회도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가 배신하여 멀리라도 하게 되면
그 댓가는 스스럼없이 받게 되는 것이 자연의 조화요 섭리인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재앙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뭄도 홍수도 태풍도 모두가 재앙이고 유류 값이 폭등하는 것도 신종 재앙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완전 노숙으로 종주 첫날밤을 보낸 나는 그래도 자고나니 몸이 가볍다.
아름다운강산
시루떡 같은 바위
모녀재(534지방도로이다)
곳곳이 단속지역이고 출입 금지구역이다.
누리티재 첫날산행을 이곳에서 마쳤다.
누리티재 아래마을
당초 계획으론 배재인 이곳까지로 잡았지만 누리티재에서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