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이라크 침략은 일단은 미국의 의도대로 귀결되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부는 소멸했으며, 미국이 바그다드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왕정민족주의자들과 친미세속주의자들 그리고 쿠르드족 집단 및 친터키 투르크멘 그룹 등 반 후세인 세력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제스처를 총동원하고 있다. 특히 친미 세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반후세인 노선 및 친미연합 노선을 정당화하려는 듯 사람들을 내세워 미군을 환영하고 사담 후세인 동상에 침을 뱉고 무너뜨리며 후세인 통치 하에 자행된 고문 등 반인륜적인 행태들을 낱낱이 카메라 앞에 가져와 공개성토하고 있다. 이러한 일부 시민들의 모습을 미국의 보수주의 CNN 방송과 애국주의 선봉 FOX TV는 연일 앞 다투어 방송하고 있다.
미국의 전쟁명분은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사담후세인을 제거하고 살상무기를 폐기 처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찾지 못해 국제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미국이 무기를 찾았다고 해도,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면서까지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사담 후세인에 대해서 미국은 뭐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지난 10여년 동안 엄청난 살상무기를 보유한 미국의 끊임없는 체제전복과 전쟁 그리고 암살의 위협을 받아온 사담 후세인이 정작 미국의 무력공격 앞에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무기가 모종의 전쟁방지 시위용 혹은 자기 방어용이었지 공격용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은 유사이래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살상무기를 사용했으나, 후세인은 전혀 그러한 무기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미군 포로를 보복용으로 살상하지도 않고 살아있는 채로 방치했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역사는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비난하기보다는 미국의 야만성과 패권적 야욕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대통령 부시 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모든 리더십과 이 전쟁을 지지한 미국의 대다수 교회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이라크침략 전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 특히 이 문제를 우리 기독교 공동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언론에서 회자되었던 몇 가지 분석들이 있다. 유일 초강국 미국이 주도하는,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신국제질서 재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미국이 미국의 방위산업체를 지원하고 중동석유 장악을 위한 석유사업가 부시 가문이 주도하는 석유전쟁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신앙심이 두터운 조지 부시 대통령과 참모들이 강행하는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의 충돌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미국은 집요하게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라고 주장해 왔다.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불량집단인 사담 후세인의 일당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먼저 미국 국민들의 대부분이 이 전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국 내 기독교인들의 절대 다수는 이 전쟁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세계 57개 이슬람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제 NGO를 주도하는 세계의 지식인들 및 제3세계 지도자들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들 대다수는 이 전쟁을 미국의 불법적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 실상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에 대해 살펴 보아야 한다. 1991년 이전에는 미소 양대 대립체제가 오래 동안 구축되면서 세계는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돌연 해체되면서 미국은 유일한 초일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이러한 새로운 국제상황에 걸맞는 신국제질서 재편을 주도하게 되었다. 미국이 구상하는 신국제질서 재편은 이미 100년 전부터 오랜동안 꿈꾸어 온 미국의 세계비전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질서있고 통일된 세계공동체 구축이다. 유럽의 지성 단테(Dante)에서부터 추구해 온 세계주의에 따른 세계적 보편제국 건설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부른다.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은 두 가지 방향으로 세계질서 재편을 추진했다. 첫째, WTO체제 출범을 통한 세계 단일 자유시장 경제체제 구축이다. 인류는 그 동안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왔다. 이러한 도전을 극복한 것은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의 능력과 지혜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능력을 어떻게 계발할 수 있는가? 이것은 경쟁을 통해 가능해 진다. 개인과 개인, 기업과 기업, 국가와 국가 등 모든 개체가 전지구적인 경쟁체제 속에서 무한히 그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지구적 자유경쟁체제 구축만이 앞으로 우리 인류가 직면하게 될지 모르는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안정된 세계를 구가할 수 있다. 즉 성장과 발전을 통한 안전보장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제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라 부른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세계장악을 의미한다. 둘째, 지구적 보편주의의 실현이다. 하나의 보편적 가치가 세계를 지배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끝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 왔다. 그 이유는 세계에 이질적인 다양한 종교적 및 민족적 가치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가치의 충돌이 전쟁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적 가치-불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을 해체시키고, 특수한 민족적 가치나 이데올로기들을 제거함으로써 하나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러할 때 세계평화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가치가 종교와 민족의 규범을 넘어서 초월적 가치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유"라는 가치라고 미국의 지도자들은 주장하며 미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믿고 있다. 또한 미국의 국민교육 전반이 이러한 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인류사회에서 검증된 자유라는 가치가 유일한 가치로서, 세계 운영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세계 장악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국 지도자들의 논리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초월해서 미국 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요 미국의 세계비전이다. 우리는 왜 미국 국민들의 대다수, 특히 기독교인들이 이번 전쟁을 지지하고 있는지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 이슬람 세력은 저항운동을 하고 있다. 이미 100년 전 서구문명이 이슬람 세계에 진출했을 때 이슬람권의 지식인들은 서구적 가치 -물질주의(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인본주의)-에 대항하여 종교 및 정신적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무슬림 엘리트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서구물질문명에 대해서 타락한 문명이라고 비난했다. 이기주의, 술, 섹스, 돈이 난무하는 타락한 서구문명이 이슬람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권에서는 술, 섹스, 금력이 현저히 제어되어 있으며, 움마(umma) 즉 공동체주의가 강해서 개인주의가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무슬림 엘리트들의 주장에 대해서 서구인들은 과학과 경제적 성장의 우세함을 내세우며, 가난한 나라, 백성을 굶기는 국가의 지도자들이라고 이슬람권 지도자들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비난에 대해 무슬림 지도자들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물질적(경제적) 풍요로움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1년 중동 걸프전쟁 이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미군기지를 구축하고 이슬람세계를 무력경영하기 시작하자, 청년 무슬림들이 무력저항은 격화되었고 급기야 9.11사태가 발발하게 되었다. 무슬림 근본주의자 청년들은 서구문명의 "힘의 상징"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수도 워싱턴의 국방성을 공격한 것이다. 대다수 제3세계 지식인들은 세계무역센터는 자본주의(물질주의)적 팽창주의의 상징이며, 국방성은 군사적 패권주의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유럽의 명문대학에서 석사,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던 분노한 무슬림 청년학생들이 서구문명의 힘의 두 상징을 공격하면서 비행기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은 그들을 ‘알카에다 테러집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미국에 대해서 테러리스트이지만 세계 57개 이슬람권 무슬림 청년들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마치 안중근 의사가 우리에게는 민족영웅이나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였던 것처럼. 이러한 무슬림 전사들의 무력 투쟁은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이슬람 종교(정신) 문명의 대결구도로 발전하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종교문명들 간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물질문명과 종교문명 간의 대립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미국의 논리에 따른다면, 미국은 왜 중동석유를 장악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세계경제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인류공동체의 경제발전에 가장 중요한 에너지인 석유는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에너지를 예측이 어려운 중동의 불량자들에게 맡겨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한 강자’ 미국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한" 세계구상에 반대하는 세력은 세계의 "자유와 평화"에 도전하는 불량자요 불량국가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안정적 질서와 통일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라는 가치가 세계 유일의 가치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물질주의)의 세계장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대답해야 한다. 그 다음에 기독교공동체 내에 일고있는 이 전쟁의 정당성 논쟁이 어느 정도 정착될 수 있으며, 그 전망이 가능해 진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100년 전에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기독교 지성사회를 황폐화 시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 프린스턴 등 명문 기독교대학을 세속화시켰으며, 우리나라의 연세대나 이화여대 등도 형식뿐 내용은 다른 대학과 거의 차이점이 없다. 지금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엄청난 전쟁과 지구적 갈등의 문제들 앞에 왜 세계교회는 잠잠한가를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관계보다는 능력을, 다양성보다는 질서와 통일이 우선시 되는 가치의 획일성(보편주의)을, 평등(공동체)보다는 자유(개인)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지배, 즉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세계지배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논의와 연구가 우리 기독교공동체 내에 선행되어야 한다.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이라크 국민들이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대적하며 미군을 환영하리라 생각했다. 1991년처럼 수백만 명의 난민이 쏟아져 나오리라 생각하고 요르단 등에 난민캠프를 구축했다. 그러나 전쟁이 수주 진행되는데도 유럽으로 간 소수 부유층 이외에 전쟁 난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도리어 요르단에 장기 거주하던 이라크인들 수천 명이 이라크를 지키기 위해 바그다드로 귀향했다. 전쟁이 끝나는 지금 중동 이슬람 국가들 가운데 반미, 반기독교 감정은 극에 달해 있다.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이자 미래학자인 폴 케네디가 말한 것처럼 건국이래 지속해온 "미국의 평화"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제 미국 국내는 늘 불안정할 것이며 미국인의 해외 여행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교강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이번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라크에 약700억 달러라는 전비를 사용하며 전례없는 대량살상 무기를 쏟아 부었다. 700억 달러는 아프리카 20개국 1년 예산과 맞먹는다. 이 자금을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 국민들에게 주었더라면, 그들은 일찍이 친미국가의 선봉에 섰을 것이며,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존경받는 리더가 되었을 것이다. 친미국가를 만드는 방법은 무력만이 아니다. 미국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기독교교회의 세계선교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백인 형제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를 경영하던 시대는 급속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비서구교회, 특히 한국교회의 세계선교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잘 준비되어서야 아니라, 세계환경이 우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피묻은 손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서구와 비서구가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의 구도에서 오랜동안 고통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때에 친서구적이며 아시아에 속해있는 우리 한국과 한국교회의 화해자(peace maker)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또한 깊은 분노와 좌절감 및 허탈감 속에서 그 상처를 붙들고 울고 있는 이슬람권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겨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용서와 희생의 십자가만이 이스마엘과 후예들 가운데 내려온 그 어떤 저주도 끝낼 수 있다. 이제 바야흐로 Global Christian Leadership 즉 세계교회에서 리더십은 공히 한국교회로 이전되고 있다. 우리 한국과 한인 교회들은 하나님의 세계경영, 즉 세계선교에 더욱 더 헌신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