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어찌하여 그 여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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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남북 합작 영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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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8 / 한승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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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월북으로 한때 ‘최모’라고만 불러야 했던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한국영화가 품어 안는다. 여기서의 전설이란 고색창연한 위인전이 아니다. 여기서의 한국영화란 38선 이남만이 아니다. 껄끄러우면서도 매혹적인 그 이름을 남북 영화계는 어떤 목소리로 부를 것인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다. 일본이 항복했다. 우리 민족은 광복했다.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해방됐다. 거리로, 거리로,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졌다. 서른다섯 살의 최승희는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본군 위문 공연 중이었다. 타향에서 조국 해방 소식을 들은 최승희는 거리로 나가지 못했다. 친일파는 몸을 숨겨야 했다. 열여섯의 나이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제국 최고의 무용가로 우뚝 선 후 중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페루, 멕시코 등을 누비며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최승희가 몸을 숨겨야 했다. 가까스로 조국에 돌아왔으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진 서울에서 또한 몸을 숨겨야 했다. 해방을 맞았건만 최승희는 갑갑했다.
최승희는 무당을 찾아갔다. “서울에서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남편이 북으로 가자는데 평양에서 살아야 합니까?” 무당은 “젊었을 때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명성을 쌓았지만 말년이 비참해”라고 말했다. 무당은 북으로 가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지만 남편 안막은 “여기 있으면 당신이 가는 곳은 서대문 형무소밖에 없어. 하지만 연안독립동맹에 가담했던 나를 따라 평양에 가면 저쪽에서는 개선 여왕처럼 받들어 줄 거야”라며 설득했다. 최승희는 결국 월북했다. 김일성이 만나자마자 대뜸 물었다. “최 여사, 여기에 다니러 왔어요? 아니면 살러 왔어요?” 최승희는 살러 왔다고 답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이름을 내건 ‘최승희무용연구소’(후에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개명)를 세워줬고, 김일성은 외화 벌이로 국가 경제에 큰 보탬이 된 연구소의 수입을 반만 가져갔다. 그러나 최승희는 1960년대 말 반김일성파로 몰려 숙청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카소의 아름다운 모델
최승희(崔承喜, 1911~1969)가 영화로 만들어진다. 최배달(<바람의 파이터>), 김신락(<역도산>), 박경원(<청연>)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살았던 사연 많은 인물들이 속속 스크린에 옮겨지는 가운데 ‘살인적인 인기’를 누렸다던 조선의 무희 최승희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죽어서 이름을 남긴 이들의 이름값을 비교하는 일이 허락된다면, 그 이름값을 재는 일에 다른 이름값을 비는 일이 허락된다면 최승희라는 이름은 이제껏 한국영화에 등록된 그 어떤 인물보다 크고 화려하다.
1939년 최승희는 파리에 있는 프랑스 국립극장 떼아뜨르 사리요에서 공연을 했다. 3천 명의 관중 중에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시인 장 콕도 등이 있었다. 춤추는 최승희에게 반한 피카소는 연필화로 그녀를 그렸다. 2002년 최승희 탄생 9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최승희>의 제작 과정에서 그 존재가 파악된 미공개 피카소 그림은 국내 모 거물급 정치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39년 유럽 공연 뒤 미국으로 떠난 최승희는 역시 춤으로 미국을 사로잡았다. 공연을 본 <애수>의 배우 로버트 테일러가 최승희에게 연서를 보냈다. 편지에는 최승희에 대한 찬사뿐 아니라 함께 영화를 찍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미국 체류 시 교류를 가졌던 명사 중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배우 게리 쿠퍼와 <에덴의 동쪽>의 작가 존 스타인벡이 포함돼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때였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였다.
누가 더 대단한가? 어떤 삶이 더 위대한가? 어리석은 질문은 그만두자. 식민지와 해방, 분단을 거쳐 온 필부(匹婦)의 삶에도 시대의 풍진을 이겨낸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강제혼, 매매혼이 횡행하던 시절, 열댓 살이면 혼인해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누에치며 평생 대여섯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우리 할머니들의 보편적인 위대함이었던 그 시절, 최승희는 열여섯에 처음 본 이시이 바꾸의 무용에 충격을 받아 연구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최승희의 집이 가난해 일본 사람에게 300엔에 팔려 도쿄 기생이 됐다”는 소문은 숙명여학교 출신인 그를 동창회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여론으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향토에 도라온 새 무용가’ 최승희는 165cm(일부 문헌에는 170cm)의 우수한 신체와 세련된 표현력,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로 금의환향을 했다. 후원을 미끼로 몸을 탐내던 부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최승희는 스물한 살에 무산 예술가 안막과 결혼했다. 안막은 와세다대 노문과를 다니던 사회주의자로 결혼 후 문학 활동에서 손을 떼고 최승희를 도왔다. 형 몰래 피아노 부속품을 뽑아 전당포에 잡히고 공연비를 마련하던 사람이었다. 최승희는 승승장구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용에 대한 봉건적인 편견을 뚫고 ‘반라’로 무대에 서서 꼬꾸라질 때까지 춤을 춰서 박수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1937년 잡지 ‘조광’에는 이러한 관람기가 실렸다. '이러한 모양으로 가다가는 정말 사람을 죽이고야 말 것이니, 이러므로 ‘살인적인 인기’라고 하는 것이다. (중략) 그 능청스러운 포즈에 그만 정신을 잃어버리는 바보가 되어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시대를 앞서간 현대인
<최승희 프로젝트>(가제)를 제작하는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첫째 형은 연극인 이필동, 둘째 형은 공연 기획자 이기동, 셋째 형은 영화감독 이창동으로, 모두 이야기를 옮기는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던 어머니 김제랑의 피를 물려받았다. 최승희보다 10년 후에 태어난 1921년 생인 김제랑은 165cm의 장신이었다. “어머니에겐 키가 큰 게 평생 한이었어요. 20세기 초반 한국의 미인이란 아담한 체구에 복스러운 얼굴이었잖아요. 최승희도 당시의 기준에서 예쁜 여자는 아니죠. 그런데 자기를 포장하는데 귀재였어요.” 최승희는 춤추는 여자는 기생 아니면 무당이라고 생각하던 때 몸에 착 달라붙거나 구슬 같은 장식으로 요염하게 몸을 가리는 무용복을 입고 수천 개의 눈동자를 빼앗았다. 관객이 지루해 할까봐 공연 사이 옷 갈아입는 시간은 1분을 넘지 않아야 했고, 이를 위해 피나는 연습을 했다. 또한 공연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라는 복제 이미지의 파급력을 일찍 깨우쳐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서 공연장에서 팔았으며, 북에서 활동할 당시는 개인 선전을 일체 금지하는 규율을 어기고 장구통에 엽서를 숨기고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최승희라는 인물을 얹어보면 참으로 이질적인데 알면 알수록 대단해요. 굉장히 현대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야 최승희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세계 문화의 주변부를 살았던 어린 시절의 이준동에게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과 무용가로 세계를 누빈 최승희는 뿌듯한 자부심을 안겨줬다. 또한 이미 고등학생 때 동아일보 광고 탄압(1974년 박정희 독재 정권은 당시 자유 언론 실천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동아일보를 탄압하기 위해 광고주를 중앙정보부로 불러 광고 해약을 지시했고, 이에 동아일보는 광고면을 백지로 내보냈다)에 반대해 친구들과 함께 동아일보에 언론 자유 지지 광고를 내기도 했던 이준동에게 ‘빨갱이’ 딱지가 붙여진 최승희는 배척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이준동에겐 무용이라는 낯선 예술로 이념을 형상화하고 이념에 포획됐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시대와 이념에 대해 고민하던 청년 시절 이준동에게 최승희는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이준동 대표가 <최승희 프로젝트>에 착수한 건 어머니처럼 키가 컸던 최승희에 대한 어린 시절의 동경이나, 어느 월북 예술가에 대한 청년 시절의 탐구 때문이 아니다. 이준동은 오랜 동안 최승희를 잊었고, <인어공주>를 창립작으로 내걸었던 나우필름으로 독립하면서 세 명의 여자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 하나가 민자영이요, 그 둘은 리심이요, 나머지 한 명이 최승희다. 민자영은 후에 명성황후가 되어 20세기 한국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던 여자다. 리심은 고종 때 궁중 무희였으나 프랑스 공사관의 관리와 사랑에 빠졌다. 궁중 무희가 왕의 재산이나 다름없던 시절 리심은 고종에게 청을 해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최승희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을 ‘해괴한’ 인생 역정으로 통과했던 이들은 현재 ‘근대 여성 3부작’이란 프로젝트로 나우필름의 차기작 리스트에 올라 있다.
남북 영화 교류의 키메이커
그중에서 최승희가 먼저 튀어 나온 건 남북 영화 교류 때문이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통일에 대한 염원과 함께 민간 교류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지난해 7월 남측의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 불허 파장으로 민간 교류가 사실상 중단됐고, 북한 작가 홍석중이 쓴 <황진이>가 남한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긴밀한 교류를 키워온 문학과는 달리 지난 4년간 북측과 제대로 된 신뢰 관계를 쌓지 못한 영화 교류는 현재 오리무중 상태다. 올해는 광복 6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이 되는 해다. 북에서는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이자 김정일의 선군 정치 시작 10년이 되는 해여서 남북 관계에 적잖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지난 12월 남북영화교류특별추진위원회를 두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2004년 남북 영화 교류 제안 공모 사업에 선정된 <최승희 프로젝트>는 이렇게 영화 안과 밖을 아우르며 남북에 걸쳐 있다. 최승희도 최승희를 담을 영화도 분단 한국의 현실적인 좌표에서 장래를 고민한다.
지난 여름 <최승희 프로젝트>의 시나리오 작업이 시작됐다. 작가는 시인 김선우다. ‘피어라 석유’로 2004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우는 영화 작업은 처음이다. “구체적인 이미지의 육화를 통해 살아 있는 언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극찬을 듣는 김선우는 1996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 동화집 <바리공주>를 읽은 이준동 대표가 작가에게 홀딱 반해 해외에 장기 여행 중인 김선우를 불러들였다. 반년 만에 초고가 나왔고 지금은 2고 작업 중이다.
최근 연극과 뮤지컬 등으로 여러 차례 무대에 오른 최승희지만 1995년 MBC 8.15 특집극 <최승희>의 주연을 맡았던 채시라의 모습이 눈에 선한 사람들에게 영화 <최승희 프로젝트>는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커다란 저 화면에서 누가 그 유명한 ‘보살춤’을 출 것인가? 경성에서, 도쿄에서, 상하이에서 펼쳐질 조선 여자의 눈부신 성공기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이준동 대표는 잘라 말한다. “식민지 여자애가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는 ‘인간 승리 드라마’는 아닐 거예요. 그냥 최승희의 삶이 잘 보이는 영화가 되길 바랍니다. 최승희라는 인물 자체가 영화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스타에 익숙한 젊은 관객들도 흥미를 느끼겠지만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던 세대에게도 울림이 있을 겁니다.”
이준동 대표는 감독은 남에서 물색 중이며, 배우는 최승희를 포함해 원칙적으로 남북 모두에 열어두고 있다. 최승희가 전세계에 이름을 떨친,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돼서 동북아시아에 냉전 체제가 확립된 193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가 이 영화가 집중적으로 조명할 시대다. 이 시기 최승희가 남과 북을 넘나들며 살았고, 무용가로서의 체계화 작업을 북에서 주로 했기 때문에 북에서의 로케이션은 영화의 꼴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다. 북한은 비공식적인 채널로 조선영화촬영소 외의 로케이션 촬영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지만 이준동 대표는 양자의 신뢰만 확보된다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라고 얘기한다.
살아서 춤을, 죽어서 이름을
2003년 1월 평양 근교의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은 “왜 최승희 묘가 이곳에 없느냐?”며 최승희의 복권을 지시했다. 1967년 숙청 이후 시골 학교 무용 교사로 살았다는 둥, 탄광 노동자가 되었다는 둥,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둥 갖은 억측이 난무했던 최승희가 ‘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인민 배우’ 등의 직함과 함께 ‘1911년 11월 24일 생. 1969년 8월 8일 서거’라는 묘비명을 달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2005년 1월 26일 국가보훈처는 독립 운동가였으며 해방 전후 민족 지도자로 살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했던 몽양 여운형을 복권하기로 1차 합의를 봤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삼일절, 김구, 안창호와 같은 대한민국장이 수여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운형은 생전 최승희와 절친한 사이였다.
하수선했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떠나고 없다. 죽어서 이름을 남겼으나 잠들지 못했던 영혼들이 이제야 편히 묻혀간다. 개인에게 유난히 가혹했던 한국 현대사에는 작은 묘비 대신 큰 스크린을 헌정하고 싶은 인물이 많다. 최승희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조지훈이 ‘승무(僧舞)’에서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고 찬양했던 최승희의 춤은 유독 빨리 보고 싶다. 다시 강조하자면 올해는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사진은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눈빛, 2004)을 엮은 정수웅 선생이 사용을 허락했다.
"최승희가 남북 영화 교류의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최승희 프로젝트> 제작자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
누가 최승희를 연출하나? 여러 명을 고려 중이다. 이창동 감독이 아니라는 것만 말할 수 있다.(웃음)
누가 최승희를 연기하나? 아직 정해진 건 없다. 배우 문제는 남북 양쪽에 모두 열어두고 가고 싶다.
제작비가 만만치 않게 들 영화인데 북한 배우를 쓸 수 있단 말인가? 현실적으로는 로케이션 촬영 정도로 갈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가 다 정해 놓고 이것만 니네가 들어와라 하면 그건 교류에 대한 태도도 아니고 교류를 성공시키는 방법도 아니다. 교류의 전범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래야 신뢰가 구축된다.
남북 관계에는 변수가 많다. 빨리 확실하게 추진하려면 대안을 생각해 둬야 되지 않겠나?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상업적인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다. 괜한 공명심이나 대의명분 때문에 <최승희 프로젝트>를 하는 게 아니다. 지금 남쪽에는 최승희의 공연을 재현할 만한 공간이 없다. 하지만 북에는 많다. 내가 어려운 길을 가는 게 아니다. 이게 의미도 있고 쉬울 수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다른 방법을 찾게 되겠지만 신뢰만 구축하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최승희의 활동 범위가 한반도를 뛰어넘는 만큼 영화의 비전도 넓을 것이다. 당시 아시아는 일본의 제국주의 자장 안에 있었다. 공통적인 경험을 가진 식민지 민중들은 최승희를 바라 보며 어떤 꿈을 꾸었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 사람들, 조선 여자가 이렇게 잘나가는 것에 어떤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영화적으로 접근하겠지만 최승희의 삶에는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한, 중, 일 삼국 관계의 미묘한 부분이 남아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최승희를 어떻게 평가하나? 최승희는 타고난 자기 중심자다. 최승희는 스무 살부터 스물대여섯 살 때까지 스승 이시이 바쿠를 세번 배반했다. 혼자 살아남으려고 독립했다가 힘들어지면 다시 도움을 청하고.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딴 욕심이 없었다. 오직 무용, 무대 위의 삶뿐이다. 시대는 계속 그걸 흔들려고 하는데 그 여자는 그걸 직각으로 돌파했다. 여러모로 볼 때 조선의 여자는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바로 찔러 들어가면 최승희는 최승희다.
올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영화가 추진력을 받을 것이다. 정상회담이 이뤄질까? 대통령도 어렵겠다고 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전망하나.(웃음) 남북 교류가 잘돼서 영화가 도움받기보다는 이 영화가 남북 교류에 힘이 됐으면 좋겠다. 영화 한 편이 남북 교류만큼 중요한 건 아니잖나. | |
첫댓글 선우님이 쓴 최승희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라 반갑군요.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는군요.
시나리오까지 쓰시다니 대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