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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1997년 봄/제4권 제1호/통권10호/시인을 찾아서 - 안도현
높고 외롭고 쓸쓸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 문 재
안도현의 네번째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뉘우침이다. 뉘우침은 무겁고 낮고 고독하다. 백석 시의 한 구절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그의 연보와 함께 읽어야 하는데,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의 한 지점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서 외롭고 쓸쓸한 삶은 과거와 현재이고, 그 과거와 현재를 앞쪽으로 밀고 나가는 에너지가 ‘높고’의 높음이다. ‘높고’는 미래형이다.
높음은 외로움과 쓸쓸함이라는 낮음 위에 있다. 낮음은 고임이고, 고인 것들은 더럽고 습습하고 밀도가 강하다. 습기는 썩음을 친애해서 오래 낮은 것들은 오래 썩는다. 썩어서 오래 가는 것들. 거개의 삶은 낮아서, 축축하고 축축해서 무겁다. 시간 앞에서 면목 없어짐이여. 이 삶의 거죽과 내장은 공히 축축해서, 눈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발걸음은 단정치 못하다. 불결한 걸음걸이. 길은 늘 구부러지거나 끊겨 있으니. 언제 건조함으로, 물기 없음으로 드높을 수 있을 것인가. 언제 더 외롭고 또 더 쓸쓸하여 드높을 수 있을 것인가.
안도현 시의 해발고도는 뉘우침의 누적과 일치한다. 안도현의 시는 뉘우치고 뉘우치고 또 뉘우친다. 일찍이 70년대 후반, 고등학교 문단을 휘어잡던 문학청년의 감수성은 바싹 말라 있는 한지 같은 것이어서, 세상의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빨아들였다. 그렇게 젖은 창호지에 붉은 물이 들었으니, 갓 스물이 넘은 청년은 80년 5월과 89년 7월 두 번 ‘피’를 흘린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80년대의 한가운데를 포복해온 것이다.
그가 뉘우칠 때, 가서 엎드리는 대상들은 궁핍의 이미지로 뒤범벅된 것들이다. 겨울철 한 벌 윗저고리의 소매처럼, 곤궁함으로써 반짝이는 것들. 그는 다음과 같은 낮은 사물들을 동원한다. 연탄처럼 맨 아래에서 타오르는 일회용 소품들이 있는가 하면, 가장 적은 비용이 드는 한 끼니인 라면에서부터, 기차 안에서 까먹는 우울하고 불편한 간식(허기를 지우기 위한 안주일 때가 더 많았지만)인 삶은 계란, 튀밥, 꼼장어, 순대국. 그리고 국방색 바지와 흑백사진, 백열전구, 칠성사이다, 낡은 자전거와 같은 세대론적 기호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위와 같은 소품과 소도구들은 시인 개인사를 길어올리는 두레박이면서 동시에 이 불우한 한반도의 역사 \ 현실로 발사되는 탄환들이다.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시인은 연탄과 기관차, 그리고 나무라는 은유 앞에서 뉘우친다. 뉘우치면서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연탄과 기관차, 나무는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데 그것들은 하나의 목적에서 동심원을 이룬다. 연탄의 연소는 방구들을, 기관차는 여객과 화물을, 나무는 줄기 끝의 어린 새순을 위하여 자기를 태우고, 달려나가고, 꿋꿋이 버틴다.
연소(연탄)와 추진(기관차), 직립(나무)은 모두 낮고 외로운 과거와 현실을 헤치고 나아가 곧장 미래를 향한다. 연탄과 라면의 세계, 아내와 해직교사의 세계는 그가 그토록 가르치고 싶어하던 어린 학생과 딸 유경이, 아들 민석을 위해 준비되는데, 이때의 은유들은 나팔꽃이나 마늘처럼 작고 여리다. 작고 여려서 생생하다. 연탄과 나팔꽃씨 사이에서 시인은 ‘비로소 푸르게 물드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시인 안도현에게서는 연어 냄새가 난다. ‘연어, 라는 말 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연어』 때문이다. 소설과 동화, 동화와 시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하는 이 ‘어른을 위한 동화’는 종이값 폭등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넓은 독차층을 ‘저인망’으로 훑고 있다는 것인데,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90년대식 성장소설의 한 전형을 읽는다. 『연어』의 전생은 『어린 왕자』거나 『아낌 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였을 것이라고 우리의 ‘연어’는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연어’를 알아왔다. 78년 무렵,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인가, 교복 입은 안도현(그러니까 ‘치어’ 시절이었던 것이다)을 서울 회기동 앞에서 만났거니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리와 전주, 서울 등지에서 띄엄띄엄 만났다. 안도현과의 만남은, 어줍잖은 선배와 명민한 후배 사이였다가 80년대 중반에는 좀 뜨악한 관계였었다. 그는 ‘전봉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나는 ‘상상력 쪽’에서 돌팔매를 맞고 있었다. 이른바 진영이 달랐던 것인데, 그렇다고 그 진영 때문에 서로 못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막 교단에 서기 시작했고, 나는 잡지사에서 수저 잡는 법을 막 배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우리 사이의 관계는 역전했다. 그는 ‘교사 시인’이었고, 나는 눈동자가 늘 풀려 있던 ‘젖은 구두’였고 게으르기만 한 ‘산책시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나는 『모닥불』을 보기가 저어스러웠다. 그 시절, 우리의 연어는 서울 나들이를 할 때마다 ‘조직의 부름을 받고’라는 말을 자주 구사했다. 그는 웃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나는 조직이란 단어 앞에서 또 축축해지곤 했다.
이때의 조직이란 물론 전교조였다. 서울에서 전교조 회의가 있어서 서울에 왔다는 말이었다.
전교조 운동, 참교육 운동의 도화선이 ‘민중교육지 사건’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민중교육지 사건의 한 멤버였던 고광헌씨는 시인인 데다 나의 대학 선배이기까지 해서 이후 전교조 운동은 늘 나의 지근거리에서 체감온도가 높았다.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닌 같은 과 동기, 연극부 선후배 중에도 해직교사가 있었다. 나의 80년대는 광주에서 전교조까지였다.
오늘도 나는 갑니다 해직교사가 되어
내 어릴 적 걷던 것처럼 들길을 걸어 국민학교도
시내버스 타고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갑니다
전교조신문 나르고 설문지 나누고 서명도 받으며
어떤 날은 굴비도 팔고 연하장도 팔러 교무실로 갑니다 라면 끓여 먹고 후딱 설거지 한 뒤 담배 한대 피우고
교장이 앞에서 막아도 교감이 옆에서 눈치해도 갑니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등교하는 아이들 가방 보며
학교로 가는 길에 그렁그렁 눈물도 고입니다
―"학교로 가는 길" 중에서
안도현 시인이 저러할 때, 그는 저러한 사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다 길 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새끼들 데리고 요즘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근심스럽다는 듯이 나의 경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물었을 때
나는 그랬다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잘 먹고 잘 산다고 그게 지금은 후회된다 좀더 고통의 포즈를 취할 것을
―"나의 경제" 중에서
그는 나에게 고통의 포즈를 취하지 않았다. 84년인가, 이리 원광대 앞에 갔을 때도 그랬고, 87년인가, 이리중학교 숙직실에서도 그랬고, “먼 데서 친구가 오면 아이 들쳐 업고 아내는 친정 가서 자”던 그의 집에 갔을 때도 그러했고, 90년대 초반 조직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을 때도 우리의 연어는 그 고단한 삶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늘 밝게 웃었다. 나는 아둔해서 그 웃음의 안쪽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그때 맥주잔 위로 떨어지던 나의 웃음은 얼마나 불결했던 것일까(그때 나는 해직교사 시인의 선배가 아니었다).
겨울의 전주, 전주의 겨울에 가고 싶었다. 지금은 없어졌다는 미원탑 근처, 풍림회관에도 가보고 싶었고 한벽루며 덕진공원 마른 연꽃도 보고 싶었다. 안도현 시인 만나러 가는 길에 이병천형도 만나고 박배엽형도 만나고 싶었고, 또 박남준형 얼굴도 떠올랐다. 저 아름다운 괴물들…… 나도 한때 전주가 고향인 적이 있었거니와, 70년대 후반, 전주의 겨울에서 나는 춥고 배고팠다(하재봉형을 따라 몇 번 전주에 갔었는데, 그때 전주에는 아무도 없었다). “꼭 내려 오세요. 연어 판 돈으로 한잔 사겠습니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언질이 없었더라도 나는 기필코 전주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가지 못했고 대신 연어가 ‘올라왔다’. 밥 벌어먹는 일이 능숙지 못해 늘 시간에 치여 허덕이는 나를 위하여, 연어가 올라와준 것이다. 서울은 그에게 모천(母川)이 아니다. 이튿날 그의 연어 사촌형제 중의 하나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모자랐으므로, 연어의 산란기부터 캐묻기 시작했다(웬만큼 아는 사이에 취재노트를 꺼내놓고 묻고 받아적는 일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다. 술은 이러할 때 편리하다).
현실의 집과 기억 속의 집이 오버랩되는 시 "집"에는 ‘집’을 통해 한 개인사가 압축되어 있다. 거기에 그의 가계가 등장한다. “셋째와 넷째가 태어나도록 우리 여섯 식구는 이사도 안 가고 \ 그 단칸방에서 살았는데 예천농고 농구선수였다는 아버지 \ 주무실 때 두 다리 쭉 뻗는 걸 한번도 못 보았으며 \ 그래서 이불이 천막 같아서 잠잘 때마다 무릎이 서늘하던 집”(시 "집" 중에서)은 그가 태어난 집이 아니다. 연어의 모천은 경북 예천. 초등학교는 안동군 풍산면 풍산초등학교를 다녔다. 5학년 때 혼자 대구로 유학을 떠났는데, 아,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의 연어는 아직 모천으로 회귀하지 못하고 ‘대양’을 떠다니고 있다.
풍산면 소재지에서 연어네는 큰 상점을 했다. 그러나 연쇄점 체제가 출현하면서 수숫대처럼 키가 큰 농구선수 아버지의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중학교 1학년에 다니던 때 식구들은 경기도 여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비닐하우스에 수박을 재배했다. 그의 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그 성실함의 결과를 누리지는 못했다. 81년, 그가 대학교 2학년일 때 돌아가신 것이었다.
“멀고 험한 저승길이거든 아버지 \ 눈발로 훌쩍 뛰어내려 이 세상에 오셔요 \ 제가 땅에 강물이 되어 엎드리지요 \ 열아홉 숫처녀 어머니도 문간에 홀로 서서 바라보시잖아요.” 첫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맨 앞에 나오는 시, 그러니까 첫시집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를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치고 있다. 그의 시 세계에서 아버지는 그만큼 중요한 자리인 것이다. 그는 그 이후 적지 않은 시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일 때를 상상하며 아버지를 노래한다. 아버지의 나이인 젊은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뉘우치며 다짐한다(누가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으랴).
치어는 대구에서 혼자 커나갔다. 중학교 때는 미술반에서 활동하다가 대구 대건고등학교에 입학, 본격적인 문학청년으로 입문한다. 그가 1학년 때 박덕규 권태현 서정윤 같은 시인이 3학년이었고 문학평론가 하응백(현 경희대 국문과 교수)씨가 2학년이었다. 그가 3학년일 때 이정하, 김완준 같은 후배들이 있었다. 대건고 문예반은 당시 고등학교 문단을 휩쓸었다.
“나는 문인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여성작가들처럼 선천적 감수성을 가진 문인과, 80년대에 문학을 시작한 이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일정한 세계관을 갖고 시작한 문인, 그리고 나처럼 문학적 기술을 먼저 습득하고 문인이 된 경우가 그것이다”라고 안도현 시인은 말했다. 당시 대구시의 전통은 목월과 김춘수, 그리고 정호승 이하석 시인 등이 일구어놓은 언어주의가 막강했으니 ‘시는 언어다’라는 강령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안도현 시인은 일찍이 시를 만드는 재주를 터득했다. 그는 대건고에서 이미 시인이었다. 대학입시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최근에 다시 부활되었다고 들었는데, 당시 경희대 국문과는 전국의 ‘고등학생 문인’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문예장학생 제도. 예비고사에서 서울지역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막연했지만 대구를 떠나고 싶었다. 대구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러나 교과서 대신에 황동규나 고은의 시집을 더 가까이했던 이 고3에게 서울 지역 커트라인은 관대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유일한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만 가면 시인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이리 원광대 또한 문예장학생 제도가 제법이었다.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선배들을 배출한 학교였다. 대구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고, 하루빨리 대학에 들어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재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해, 80년에 원광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에는 곧 계엄군들이 진주했다. 교문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계엄군에게 발각되어 구타를 당하고 말았다. “그때 서울에서 온 원재훈과 부산 출신 권오성이 내 동기였다. 그날은 오성이와 교문 앞에서 술을 먹다가 계엄군에게 발각되었다”고 안도현 시인은 말했다. 그날 그 계엄군과 부닥치지 않았더라면…… 계엄군들은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데모질이냐”면서 두 신입생들을 두들겨 팼다. “그날만 아니었어도 나는 순하게 자랐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해 5월 15일,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통이 있던 송수권 시인을 만나러 광주에 갔다가 계엄령이 확대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전봉준’을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더라도 훨씬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시는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한다고 믿어왔던 경상도 출신의 신입생은 이병천, 백학기 같은 선배를 만나면서 궤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라도 시의 한 발원지인 미당으로부터 ‘시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도 얻었다. 한국문학 단편만 읽었던 그에게 이병천, 백학기 형들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위시한 세계문학전집을 들고 나왔다. “경상도 운율이 정격 시조에 바탕한 만들어내기라면 전라도 운율은 판소리의 유장함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가락”이었음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 시절이었던가. 김용택 시인의 습작노트를 보게 되었는데, 발표작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토씨 몇 개만 바뀌어진 것을 보고 경상도 출신 시인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82년까지 그는 언어 형식주의자였다. 군사정권은 침묵을 강요했다. 김지하 복사본 시집이 은밀하게 돌려지고 사회과학 서적을 읽지 않으면 어디 가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던 시절, 문인 사회에서는 광주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대학 선배인 강태형 시인이 주최한 문학의 밤이 치어를 연어로 탈바꿈시켰다. 그 문학의 밤 제목이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시’였다. 치어는 어둠을 확연하게 보았고, 그 어둠을 밝히는 시 쪽으로 유영해나갔다.
83년 졸업 무렵, 시대는 거대한 어둠 속에 조금씩 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문화운동이라는 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시인이 되지 못했다. 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했지만 어디서 원고청탁을 해오는 데가 없었다. 그는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를 매년 노크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한 장의 사진에서 태어났다.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는 한 장의 사진. 그 시는 단숨에 쓰여졌다.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 우리 봉준이”를 보았고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 오늘 나는 알겠네”라고 쓰면서 그는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된 이후 줄곧 그는 “울며 울지 않았다”.
민중교육지 사건은 이리중학교 ‘초보 교사’였던 그를 뒤흔들었다. 원래 교사에 대한 자부심이나 교육에 대한 사명감도 없었다. 학교는 직장이었고 교사는 봉급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1년차 평교사에게 민중교육지 사건이 실린 저녁신문은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이때부터 교사협의회며 소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학교는 ‘현장’으로 바뀌었으니 그의 두번째 시집 『모닥불』과 네번째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현장교사와 해직교사의 쓰라림과 뉘우침, 그리고 희망이 배어 있다.
그가 세번째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펴냈을 때(1991) 그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안도현이 너마저 전향한 것이냐’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그의 세번째 시집은 그가 출간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연시집’이었던 것이다. “이 시들은 중학교 교실에서 쓰여진 것이다. 아이들이 작문을 싫어해서,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 참고하라고 보충수업 시간에 칠판에 적어주었던 것들”이 『그대에게 가고 싶다』의 시편들이다. 그러나 비판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부드러움도 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시를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시집은 10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안도현 시인은 현재 전북의 오지 산서면 산서고등학교에서 ‘치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복직되어 그 학교로 발령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언제 학교가 없어질지 모른다. 학생들이 해마다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는 산서에서 많은 시를 토해냈다. ‘산서일기’ 연작시만 1백 편 가깝고, 그 이외에도 60편이 넘는 시가 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집을 떠난 이후 아직 모천으로 회귀하지 못하고 있는 그는 산서에서 최초의 시골 체험을 하고 있다. 어릴 적 풍산면은 제법 소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어서 자연은 그와 좀 멀리에 있었다. 산서에서 날것의 자연과 흙을 맨발로 밟는 아이들 앞에서 목소리를 낮춘다. 어깨 힘도 빼고 목쉰 사명감도 내려놓고 있다. 뉘우치고 뉘우치고 또 뉘우치면서 그는 ‘비로소 푸르게 물이 드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뉘우침이 이끌어갈 그의 시의 미래를 나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얼핏 읽고 있다. 그것은 연탄과 기관차, 그리고 나무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제비꽃"이나 "땅"으로 난 길을 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모든 시인은 심오한 생태학자’ 아닌가. “다 내놓으라고 \ 간밤에 그렇게 떼를 쓰던 눈보라한테 \ 인간들은 하나도 빼앗기지 않고 \ 몽땅, 그 순결을 빼앗아 \ 독차지하였구나”(시 "눈 그친 들녘" 전문)에서처럼 그는 인간의 탐욕의 끝을 꿰뚫고 있다. 이 탐욕의 문명의 끝에서 그는 우리(시인과 딸)에게 관심을 보이는 햇볕("제비꽃")과,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땅")를, 그리고 비 그친 뒤 한 뼘씩 자라는 마늘순과 통통하게 여무는 “땅속 깊은 곳의 마늘”("마늘밭 가에서")을 “마음의 눈”(『연어』)으로 끌어안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눈,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연어』)을 갖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식 말투이지만) 모든 것이 보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절이 아닌가.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서 ‘높고’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높고 외롭고 쓸쓸한’과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고 ‘외롭고 쓸쓸하고 높은’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높고 외롭고 쓸쓸한’ 시 \ 삶만큼 실패한 시와 삶도 없다. 빗나간 초월의 풍경이다. ‘외롭고 쓸쓸하고 높은’은 생성하고 성장하는 청년의 모습이다. 모든 시, 모든 시인들이여 더 외롭고, 더 쓸쓸하여서 높아지기를. 그렇게 높아져서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뜨거워’지기를. 높아져서 외롭거나 쓸쓸해지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