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7년에 태어난 정몽주는 주공이 아버지 정운관의 꿈에 나타나
예언한 대로 죽는 날까지 고려을 위해 살다간 고려의 충신이었다.
그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고려와 명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왜구
토벌에도 주력하는 등 슬기롭게 고려의 외교 정책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고려의 명장이었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새로운 왕조
조선을 세우게 되면서 나라를 잃은 슬픔과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리하여 고려의 충신 정뭉주는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에세 협조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정뭉주의 나라에 대한 충성과 절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고려의 마지막 기둥 정몽주!
그는 유학자이며 정치가이고 , 외교에 능한 고려 말의 충신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쓰러져 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은
고려의 기둥이었다.
정몽주는 1337년에 경상도 영천군 동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스물네 살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조의 부흥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364년에는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족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그 뒤 서장관으로 홍사범과 명나라에 갔다가 임무를 완수하고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인임 일파의 배명 친원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다가 귀양살이도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귀양지에서도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열의를 보였다.
그 무렵, 고려는 북쪽으로 원나라와 명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으며.
남쪽으로는 왜구들의 잦은 행패로 쩔쩔매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나라 안팎의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은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그 주위에는 간신들이 들끊었다.
더구나 권세를 잡은 대신이나 귀족들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나쁜 일을 서슴없이 했다.
정몽주는 이처럼 안으로 병들어 가는 나라를 매우 걱정하며 옳고 그름을 가려
임금에게 그른 것은 배척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하지만 임금은 간신들의 말만 듣고 그를 귀양까지 보내게 되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정뭉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왜구들의 침략을 엄중하게 항의하고,
붙잡혀 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정몽주는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우도록 하여
후진 교육에도 힘썼다,
또한 그 당시 성행했던 불교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자신이 먼저 유교에
따른 예의 볌절을 지키며 유학을 진흥시켰다.
또 외교면에서도 수차에 명나라를 왕래하며 그들과의 상호 통상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했다.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들을 돌려 개성으로 들어와
우왕을 귀양 보내는 등 고려를 멸망시키려 하자.
정몽주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정몽주는 한때 이성계와 힘을 합쳐 고려를 지키기도 했기 때문에 이성계
또한 정몽주에게 깊은 신뢰와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굳은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느낀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죽이도록 했다.
그 후 선죽교에는 충신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정몽주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나라 사랑의 길로 일생을 보낸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단심가 하나만 보더라도 조금도 굽힘없이 쓰러져가는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킨 충절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기린초
수호초
회양목과이고 늘푸른 여러해살이풀이다.
일본 원산으로 전국에서 재배하거나 산 속 나무그늘에서 자라는 귀화식물이다.
개화기는 4~5월이며 흰 색의 작은 꽃이 줄기 끝에 수상화서로 조밀하게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