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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위대한 어머니들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지난 수천 년 간 세상은 남성이 지배해왔고, 역사는 남성에 의해 쓰여 왔다. 하지만 천지만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듯이 여성 없는 남성이란 있을 수 없다. 인류의 절반은 여자요,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고통 덕분에 태어나 삶을 얻기 때문이다.
세상이 처음부터 남성 중심은 아니었다. 선사시대에는 여성이 가족과 씨족의 중심인 모계사회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세상은 남성 중심으로 바뀌었다.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완력이 강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남성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며 역사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갈수록 낮아졌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전리품이 되기도 하고, 노예가 되기도 하고, 남성의 쾌락을 위한 성적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보내는 공물의 일종인 공녀로 바쳐지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비록 5천년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여성에게는 전혀 자랑스럽지도, 빛나지도 않은 세월의 흐름에 불과했다. 남존여비라고 하여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은 조선왕조시대로 접어들자 더욱 심화했다. 아녀자라고 하여 여자는 어린아이와 한 묶음으로 대접하기 일쑤였고, 사내들은‘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여자의 목소리가 담장 밖까지 나가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마구 해댔다. 사내는 아무리 못생겨도 버젓이 얼굴을 들고 다녔지만 여자는 아무리 잘생겨도 외출할 때는 온몸을 가리고 나가야 했다. 그나마 신분이 미천한 여자는 사람대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수천 년 간 남성 중심으로 이어져온 우리 역사 속에서도 남성에 못지않게 눈부신 활약으로 민족사, 여성사를 빛낸 걸출한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가정에서 최선의 헌신을 다했다. 우리 역사, 아니 세상의 모든 위인 뒤에는 그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의 거룩한 헌신과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잘났든 못났든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고통 덕분에 삶을 얻어 살아간다. 어떤 어머니들은 보통 여성들보다도 더욱 빼어난 슬기로 자식들 훈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우리 역사를 빛내고,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충효를 가르쳐 위인으로 키워낸 장한 어머니 몇 분을 찾아서 소개한다.
웅녀
(단군왕검 어머니)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여걸은 누굴까.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여성은 당연히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어머니 웅녀(熊女)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한민족의 시조 단군왕검에게도 당연히 어머니가 있었다. 단군신화는 그 이름을 웅녀라고 전한다.
신화는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사화(史話)이다. 단군신화는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 어머니가 웅녀라고 전한다. 이를 신화 그대로 웅녀는 암곰이 변신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웅녀는 고조선이 건국될 무렵 살고 있던 우리 조상 가운데 한 분의 여성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웅녀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했다. 단군왕검을 낳은
고조선의 국모요 한민족의 국조모인 웅녀가 누구의 딸인지, 단군을
낳고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길렀는지 기록이 없다 뿐이지 웅녀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내세울 당당한 여걸인 것이다.
웅녀는 단군왕검을 낳은 단군의 어머니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 여성사에서 으뜸자리에 올려놓아도 그릇됨이 없는 여걸이다.
유화부인
(동명성왕 어머니)
웅녀 다음으로 우리 역사에 우뚝 선 여걸이 고구려의 국모 유화부인(柳花夫人)이다. 유화부인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의 어머니이다. <삼국사기> 제사편 고구려조에 따르면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동명왕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그 나라의 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를 갖춰 장사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고 했다.
고구려는 국모 유화부인을 부여신(扶餘神)으로 모시고 시조 동명성왕을 고등신(高等神)으로 모셨다.
유화부인은 본래 물의 신이라는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어느 날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라는 사람을 만나 정을 통해 임신했고, 집에서 쫓겨나 동부여 왕궁에서 주몽을 낳았다. 서기전 58년 음력 5월 5일에 태어난 주몽은 골격이 튼튼하고 영리하게 생겼으며,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금와왕과 아들 대소 형제들이 이를 미워하고 두려워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 유화부인이 말했다.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는 미리 살 길을 찾는 것이 좋겠구나.”
동부여에서 후궁 아닌 후궁으로 살면서 오로지 아들 주몽만을 바라보고 살던 유화부인은 그렇게 아들의 안전을 위해 살 길을 마련해주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유화부인은 길 떠나는 아들에게 보리씨앗을 함께 챙겨주는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그때 주몽은 혼인하여 부인 예씨는 아이를 배고 있었다. 주몽은 동부여에서 달아나 졸본부여로 망명했다. 그리고 고구려를 세우고 나라가 점점 안정되자 본부인 예씨와 유복자 유리(琉璃)를 데려왔는데, 그때 유화부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동명성왕 이후 국왕들이 동명성왕을 시조신인 고등신으로, 유화부인을 부여신으로 받들어 신상을 만들고 모셨던 것이다.
소서노
(온조왕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백제를 세운 비류(沸流)와 온조왕(溫祚王)의 어머니이다. 그에 앞서서 소서노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부인이기도 했다. 서기전 19년 4월, 동명성왕 재위 마지막 해에 대왕의 본부인 예씨(禮氏)가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왔다. 예씨는 남편 주몽이 망명한 뒤 20년 동안 시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모시고, 유복자 유리(琉璃)를 낳아 기르며 힘겹게 살아오다가 대왕의 부름을 받고 아들 유리와 함께 찾아온 것이었다.
기다리던 적자와 본부인이 오자 대왕은 유리를 태자로, 예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그동안 황후 노릇을 하던 소서노는 소후로 강등하고 말았다. 말이 좋아 제2부인이지 사실은 후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소서노와, 그녀의 전 남편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 3모자는 하루아침에 뒤통수를 맞고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느 날 3모자가 소서노의 처소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맏이 비류가 입을 열었다.
“이거야 어디 억울해서 살갔시오? 옛날 대왕이 동부여에서 도망쳐왔을 때 오마니와 계루부(桂婁部)의 군장(君長)이신 우리 외할아바지가 발 벗고 나서지 않았다면 이 고구려란 나라가 어드렇게 세워질 수 있었갔시오?”
비류보다 두 살 아래인 온조도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기래요! 형님 말씀이 옳습네다! 우리 일족이 건국에 으뜸가는 공로를 세웠는데, 이제 와서 덤받이 자식 신세가 됐으니끼니 억울해서 못 살갔시오! 이거야 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서 내팽개치는 격이 아니고 뭐란 말입네까?”
두 아들의 말을 듣던 소서노도 마침내 이렇게 대꾸했다.
“옳거니! 너희 말이 맞구나! 이 어미도 뼈가 쑤시고 살이 떨려서 이 나라에선 더 살고 싶지 않구나! 깨끗이 이 나라를 떠날 수밖엔 없지 뭐갔네? 우리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면 빈 땅은 얼마든지 있을 기야! 새 나라를 세우는 기야요!”
소서노는 동명성왕보다 여덟 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 땅으로 망명해 고구려를 세울 때에 계루부의 군장이며 거부인 아버지 연타발과 소서노 부녀가 재산을 다 기울여 조력한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 그것도 여덟 살이나 연상의 여인이건만 기꺼이 소서노에게 새장가를 들었던 것이다. 그해에 대왕은 40세의 장년,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덧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소서노는 그 몇 해 전부터 대왕에게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왕은 들은 척도 않았다.
그러자 대왕은 동부여에 있던 본부인과 친아들을 불러 각각 황후와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답변에 대신했던 것이다. 사랑에 속아 몸도 주고 돈도 주고 결국에는 배신당한 연상의 여인 소서노,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그지없이 뼈저리고 살 떨리는 절망감을 그 누가 알아주랴!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으랴. 배신의 아픔도 그렇지만 더욱 급한 것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은 대왕이 살아 있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뒷날 대왕이 돌아가고 유리가 뒤를 이어 대권을 장악하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인 소서노와 두 아들의 목숨은 어찌될 것인가.
결국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대왕에게 찾아가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자 고구려를 떠나겠노라고 통고했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겉으로는 서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서 말리기는커녕 막대한 망명 경비를 주기까지 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열 명의 심복과 그 일족, 그리고 전부터 졸본 땅에서 살던 수많은 부여족 계루부 부족민이 남부여대하여 소서노 3모자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졸본을 떠나고 고구려 국경을 지난 소서노 일족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그때가 서기전 18년 9월이니, 망명길에 오른 지 13개월 만의 일이었다.
비류왕과 온조 형제의 틈이 벌어진 것은 그 뒤부터였다. 이유는 형 비류에게 자신의 여생의 여력을 몽땅 쏟아 새 나라를 세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는 어머니에게 아우 온조가 시기를 하고 불만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라를 세우고도 10년이 가깝도록 정착을 못한 채 강적만 만나면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남쪽으로 도망만 치는 소서노와 비류의 소극적이며 온건한 정책에 보다 젊고 혈기 넘치는 온조가 강경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기를 들고 나섰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남하하여 배를 댄 곳은 미추홀이었다. 미추홀에 상륙한 소서노는 두 아들과 신하들을 보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비류왕은 온조와 신하들을 데리고 부아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때 나이든 중신들은 소서노를 모시고 미추홀에 남아 있었고, 비교적 젊은 신하들이 비류왕 형제를 수행했는데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모아 비류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살펴보건대 이 하남의 땅이 북쪽으로는 큰물을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뫼들에 의지했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졌으며 서쪽은 바다가 막고 있으니 이는 하늘 이 내린 요지인 듯하옵니다. 원컨대 여기에 도읍을 정하심이 마땅한 줄 아룁니다!”
비류왕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십 년 동안이나 강적의 핍박을 받은 것은 내륙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숱한 싸움을 치르며 여기까지 쫓겨 내려온 게 아니오? 이제 우리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하면서 힘을 길러야 할 것이오! 따라서 이제는 바닷가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온조가 강력히 반대했다.
“짐승도 힘이 없으면 다른 짐승에게 잡아먹히고, 나라도 힘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게 먹히는 법이오! 자꾸만 싸워서 백전연마의 강병을 길러야만 살아남는 법이오! 험한 산에 의지해 성책을 두르고 들판에는 백성들이 살게 하여 적이 오면 싸워 물리치면 될 게 아니오? 어찌 지친 백성들을 이끌고 도망칠 궁리부터 먼저 한단 말이오?”
두 형제는 대판 싸우고 부아산에서 내려왔다.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는데 대부분 온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소장 강경파였으므로 비류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싸움은 미추홀로 돌아간 다음에도 재개되었다. 어머니 소서노는 비록 예전의 패기를 잃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미 60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 그녀는 이번에도 맏이 비류의 편을 들었다. 소서노와 비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노장파와 온조를 축으로 삼은 강경 소장파의 틈은 점점 벌어져갔고, 마침내 태어난 지 10년밖에 안 되는 나라, 그나마 작고 힘 약한 백제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온조가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내륙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비류도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 온조도 내 배를 아프게 하고 태어난 아들이니 그 누구도 파멸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국모 소서노는 바닷가 미추홀과 내륙의 위례성을 오가며 꾸짖고 타이르고 눈물로 설득해보았지만 이미 틈새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어느 쪽도 고집을 꺾기는커녕 나중에는 타협조차 하려고 들지 않았다.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위례성에 분립해 스스로 임금을 자처한 온조는 다시는 어머니와 형의 밑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양 진영을 오가며 설득하던 소서노는 마침내 상심하여 병들어 죽으니 그해 나이 60세였다. 고구려 건국에 헌신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는 우리 역사상 초기의 여걸 가운데 한 분이다.
만명부인
(김유신 어머니)
김유신(金庾信)을 가리켜 신라 제일의 명장이라고 한다. 이른바 ‘삼국통일’을 이룩한 데에는 김유신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유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영웅호걸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분별력이 미숙하고 의지가 나약한 소년시절, 술에 취하고 미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방황하던 청춘시절이 있었다.
젊은 김유신의 고민은 망국 가야의 후예라는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대우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가야 왕족의 후손이고,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신라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가야 출신이란 이유로 좀처럼 신라 정계의 핵심부에는 들어설 수 없었다. 김유신은 법흥왕(法興王) 때에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이다. 가야의 왕손이지만 신분상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이 신라 17관등 가운데 1위인 각간(角干) 벼슬을 받은 데에 비해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3위인 소판(蘇判) 벼슬에 그친 것만 보아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만큼 신라 귀족사회에서 골품, 혈통에 따른 차별의 벽은 높았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평왕(眞平王)의 모후인 만호태후(萬呼太后)의 딸이다. 만호태후가 본남편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죽은 뒤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며 진흥왕의 친동생인 숙흘종(肅訖宗)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김만명이 길에서 김서현과 눈이 맞아 김유신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진평왕 17년(595년)이었다.
김유신이 신라의 대표적 명장이 된 데에는 본인의 자질이 뛰어나고 힘써 노력한 덕분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잘 키워주고 이끌어준 부모와 외할머니 만호태후, 그리고 선배 화랑들 덕분이다. 그런데 은인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출세 이면에는 진정한 사랑을 희생한 한 가련한 여인의 희생도 숨어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천관녀(天官女)이다.
전설 가운데는 천관녀가 술을 팔고 웃음을 파는 천한 기생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이 생긴 것은 고려 때였으니 신라 중기에 기생이란 직업여성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관녀의 신분은 신궁(神宮)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天官), 즉 신관(神官)의 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무당의 딸이었다. 천관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은 그녀의 출신 성분에서 비롯되었다.
김유신이 화랑이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인 진평왕 34년(612년). 화랑 김유신이 제15세 풍월주가 된 것은 18세 때였다. 그리고 그 해에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명에 따라 장가를 들었다. 신부는 제11세 풍월주를 지낸 김하종(金夏宗)의 딸 영모(令毛). 김유신이 천관녀를 만난 것은 영모와 혼인하기 전이었다.
김유신과 천관녀는 하루도 못 만나면 죽고 못 사는 뜨거운 사이였다. 매일같이 낭도들과 함께 수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관녀의 집으로 달려가 황홀한 시간을 보낸 뒤에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세상만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날도 유신은 천관녀와 더불어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때 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고구려를 막기 위해 중동부전선에 나가 있었고, 집에는 어머니 만명부인과 세 살 터울인 아우 흠순(欽純), 그리고 훨씬 나이 어린 보희(寶姬)와 문희(文姬) 두 누이동생이 있었다. 유신이 말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서니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리던 어머니 만명부인이 불러 앉히더니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맏아드님. 인자 오십니꺼? 온종일 가시나와 꼭 붙어서 재미있게 노시느라꼬 얼매나 노고가 많으셨능교?”
전에 없이 빈정대는 어머니의 말씀에 유신은 술이 일시에 깨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한 채 있자니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꾸짖었다.
“니는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다꼬 이 에미를 무시하는 기가?”
“어데예? 절대로 아입니더!”
“니도 잘 알다시피 너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야 출신이지만 여러 차례 고구려와 백제군을 물리쳐 나라 안에서 유명한 장수가 되지 않았노? 이 에미는 니가 하루빨리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는 걸 보고 죽는 기 소원이구마. 내사 더 늙으면 니한테 의지하고 살아야 할 낀데 요즘 니가 하고 댕기는 꼴을 보문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으니 장차 이 일을 우짰으면 좋겠노? 니는 저 어린 동생들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노? 이 일을 장차 우야꼬!”
“어무이예! 갑자기 무신 말씸을 그렇게 심하게 하십니꺼? 지가 뭐 우쨌다꼬예?”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캤는데 내사 마 모릴 줄 알고 오리발을 내미나? 니가 요즘 신궁의 천한 가시나한테 폭 빠져갖고 죽고 몬 사는 사이라고 소문이 짜하게 났다 아니가? 그럼 이 에미는 눈뜬 봉사에 귀머거린 줄 알았드나? 한심해라 한심해! 내는 밤낮으로 니가 가문을 빛내기만 바래고 있는데 니는 가시나 궁디(궁둥이)에 쏙 빠져갖고 무골충이처럼 팔다리가 흐물흐물해서 다니고 있으니 기맥힌 노릇이 아니고 뭐꼬?”
그러더니 어머니는 마침내 치맛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유신이 국면 전환을 노리고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다.
“어무이예, 지 나이도 인자 열다섯 살이나 됐으니 고마 장가를 보내주이소! 지는 그 처자를 색시로 삼고 싶어예!”
“택도 없는 소리! 니는 이자 아무 여자하고 함부로 혼인할 수 없는 기라!”
“우째서예? 서로 마음에 들어 정을 주고 사랑하면 되는 기지 우예 혼인을 몬 해예? 지는 그 처자를 가시(아내)로 삼기로 하마(벌써) 약속을 했어예.”
“안 된데이! 니 색시가 될 처자는 하마 정해져 있는 기라! 영모란 아가씬데, 대왕폐하께서 끔찍하게 총애하시던 미실궁주의 손녀딸이라카더라. 그 처자하고 혼인해야만 니 앞길이 훤하게 열릴끼구마. 인자 알아듣겠나?”
“그라문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 사랑을 희생하란 말씸 아닝교? 그렇게까지 말씸하시니 지도 더는 드릴 말씸이 없어예! 무조건 어무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네예. 이자부턴 정신 바짝 채리고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 되겠심더. 어무이예, 내일부턴 안심하고 지켜봐주이소!”
“오냐 오냐, 참 잘 생각했다! 과연 우리 아들 유신이답구나!”
그날 밤 유신은 그렇게 어머니한테 맹세를 하고 정말로 다음 날부터는 천관녀의 집에 발길을 뚝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낭도들과 더불어 산으로 들로 누비고 다니고, 또 멀리 바닷가도 찾아다니며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수련하는 데에 온 힘과 정성을 다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도 사라졌다.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 79세에 노환으로 죽었는데, 죽기 얼마 전이었다. 늙고 병든 김유신은 종복들의 부축을 받으며 옛날 옛적 자신의 앞날을 위해 희생시킨 첫사랑 천관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녀의 집은 이미 잡초 무성한 폐허로 변해 쓸쓸한 바람만 불어대고 있었다.
김유신이 신라 최고의 명장이 된 데에는 이처럼 그를 바른길로 이끌어준 어머니 만명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그녀를 고대의 훌륭한 어머니라고 아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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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신씨
(율곡 이이 어머니)
몇 년 전 sbs-tv에서 방영된 신사임당(申師任堂)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잠시 보다가 너무나 황당해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불과 7세의 어린 아역이 자신의 이름을 '사임당'이라 하고 또 그의 부모도 자식에게 '사임당'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신사임당은 어릴 적 이름은 '인선(仁善)'이다. '사임당'은 당호(堂號)로서 이름 대신 부르는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이다. 여성의 경우 당연히 혼인한 뒤에나 당호가 붙여지지 어린 아이에게 당호가 있을 턱이 없다.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사전 제작하는 작품이라면서 이런 기본상식적인 실수를 그냥 놔두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제작진은 사학자들에게 고증도 한 번 받지 않고 사극을 제작했는가? 또 역사를 전공한 사학자들도 어찌하여 이런 망발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하는가?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했다. 당호 사임의 뜻은 고대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유교에서 태임을 훌륭한 아들을 기른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기 때문이었다. 사임당 신씨는 훌륭한 아내요 어머니였지만, 빼어난 화가요 서예가요 시인으로서 훌륭한 작품들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했다. 여성이 천대받고 억압당하던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두각을 나타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사임당은 그 숙명의 굴레를 감수하면서도 그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소질을 유감없이 드러낸 뛰어난 여인이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진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1504) 10월 29일에 외가인 강릉 북평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 어머니는 용인 이씨(龍仁李氏) 사온(思溫)의 외동딸이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연산군의 폭정과 거듭되는 사화(士禍) 등으로 숱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난세를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과거를 보지 않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인 중종 11년(1516)에 진사시를 보아 합격했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41세였다. 하지만 3년 뒤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또다시 피바람이 불자 아예 처가인 강릉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딸만 다섯을 낳았는데, 사임당은 이 가운데 둘째딸이었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나 글공부를 좋아했고, 수놓기를 좋아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특히 일곱 살 때부터 안견(安堅)의 작품을 모사하며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그림은 산수화에 이어 벌 ․ 나비 ․ 풀벌레 ․ 포도 등으로 갈수록 대상이 넓어졌으며, 마침내 수많은 걸작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사임당이 이처럼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고 예술적 소질을 계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벼슬길을 단념한 채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자식들을 열심히 교육한 덕택이었다.
사임당은 19세 때인 중종 17년(1522)에 세 살 위인 이원수(李元秀)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혼인을 하고도 친정에 계속 머물렀는데, 그 사정을 율곡은 자신의 외할아버지 신명화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딸을 두었지만 네 처만은 내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게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해에 아버지가 47세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사임당은 강릉 친정에서 3년상을 치르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시어머니 홍씨(洪氏)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남편을 따라 그의 고향인 파주 율곡리로 내려갔다.
남편 이원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탓인지 성품이 유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다가 아내가 자신보다 슬기롭고 학문도 깊으며 천성이 어질다는 사실을 알고 웬만한 일은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남편은 하늘이요 아내는 땅이라던 당시로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부부였다. 하지만 이원수도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남편의 틀에서 아주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비록 아내가 자신보다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점을 인정하여 아내를 존경하고 그녀의 의견을 대부분 들어주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할 턱이 없었다. 부부생활도 불편한 점이 많았던지 첩살림을 차렸다. 사임당 또한 삼종지도(三從之道)나 칠거지악(七去之惡)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 여성인지라 첩 문제 때문에 한동안 남편과 불화했다. 그렇다고 해서 못 배운 여자들처럼 드러내놓고 투기를 하거나 강짜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사임당은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다. 시집간 지 3년 만인 21세에 맏아들 선(璿)을, 26세에 맏딸 매창(梅窓)을, 그 뒤로 둘째아들 번(璠)과 둘째딸을 낳았다. 그리고 33세 되던 중종 31년(1536)에 셋째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율곡 이이였다. 율곡의 뒤로도 차례로 셋째딸, 넷째아들 우(瑀)를 낳아 모두 7남매였다. 맏딸 매창과 막내아들 우는 어머니의 재주를 물려받아 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매창은 시서화에 빼어나 ‘여중군자’ 소리를 들었고, 호가 옥산(玉山)인 우는 시서화와 거문고에도 뛰어나 ‘사절(四絶)’ 소리를 들었다.
사임당은 서울과 강릉, 파주 등으로 오르내렸지만 한 번도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가사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한 차례 가정불화가 있었지만 인생사에 그런 굴곡도 있으려니 하고 전과 같이 남편을 상냥하게 대하고 커가는 자식들의 가정교육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혹시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경우라도 그 동안 읽어야 할 책이나 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적어주고 나중에 확인하는 등 신경을 썼다.
이원수는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550년에 종5품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어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
율곡이 태어난 곳은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의 보물 165호 오죽헌이다. 오죽헌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또 어머니 사임당이 어린 시절을 보낸 친정이기도 했다. 오죽헌 본채의 오른쪽 끝방은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고 하여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부르는 방이고, 왼쪽 끝방은 율곡이 6세 때까지 공부하던 방이다.
신사임당은 명종 6년(1551) 5월 17일에 48세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때 남편 이원수는 맏아들 선과 셋째아들 이를 데리고 수운판관으로서 평안도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임당은 사람을 시켜 자신의 임종을 알리도록 하고, 남아 있는 자식들을 머리맡에 불러놓고 마지막으로, “얘들아. 내가 다시는 일어나기 어렵겠구나”하는 한마디만 남겼다.
이에 앞서 사임당은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어느 날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제가 먼저 죽더라도 재혼은 하지 마세요, 네? 우리는 자식이 일곱이나 되니 아이는 더 필요 없지 않겠어요?”
빼어난 화가요 서예가요 시인이며, ‘모범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으로도 추앙받는 신사임당도 살아 있을 때에는 질투도 할 줄 알았던, 어디까지나 보통 여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 이원수는 죽은 뒤에야 새장가를 들더라도 살아 있을 때에는 그러마고 해도 좋았으련만 고지식하게도 중국의 고사까지 들먹이며 사임당의 말을 반박했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해서 새장가를 든 것인데, 하필이면 괴퍅한 여자를 만나 고생을 했던 것이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보다 10년을 더 살다가 죽은 뒤 다시 사임당의 곁에 묻혔다.
율곡의 사후 아버지 이원수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 어머니 사임당은 정경부인의 품계가 추증되었다.
정경부인 초계변씨
(이순신 장군 어머니)
올해 4월 28일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탄생한 지 474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지 427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은 위정자들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을 무시했기에 빚어진 참화였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임진왜란이란 재앙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은공도 되새겨야 한다. 불굴의 이순신정신과 역사교육의 중요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계속되는 북핵 위기와 불안한 국제 안보 상황을 생각하면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을 수 없다. 아울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이순신정신도 되새겨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부인이다. 아버지는 덕수 이씨(德水李氏) 정(貞). 이순신은 1545년(인종 1년) 4월 28일에 서울 건천동에서 탄생했다. 어머니가 이순신을 낳기 전에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나타나 “이 아이는 장차 귀하게 될 터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고 잘 기르도록 하라.”
벼슬하지 않은 가난한 선비 이정은 가세가 곤궁하자 가족들을 아끌고 처가인 충남 아산으로 낙향,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아산에서 보냈다. 이순신은 20세에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혼인하였고, 그때부터 무과시험 준비를 했다. 이순신이 문신보다 천대받는 무인이 되려고 하자 부모님은 처음엔 반대했으나 무인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이순신의 간곡한 설득에 마침내 허락을 했다. 28세에 한 번 실패하고 32세에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두만강 건원보 권관을 하던 39세에 아버지가 73세로 별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조산보 만호로 복직했다. 43세에는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다가 상관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하고 1차 백의종군을 했으며, 45세에 정읍현감을 맡았다.
그때 아버지와 두 형이 돌아가 어머니와 부인과 자식, 조카들 등 20여 명의 식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면, “내가 차라리 남솔의 허물을 쓰고 벼슬이 떨어지더라도 어찌 가족을 버리라.”고 했다.
벼슬살이 15년 만에 마침내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가 됐고, 이듬해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수군을 이끌고 옥포해전부터 사천해전, 한산대첩 등 연전연승했다. 그리고 이듬해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어머니를 여수 근처에 모신 이순신은 잠시도 어머니 걱정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상관인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이런 휴가를 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어머님께서 얼마 전에 하이;s 편에 글월을 보내셨는데 늙은 몸의 병이 나날이 더해가니 앞날이 얼마나 되랴. 죽기 전에 네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일흔을 넘기셔서 해가 서산에 닿은 듯한바 이러다가 만일 또 하루아침에 다시는 모실 길 없는 슬픔을 만나는 날이 오면 이는 제가 또 한 번 불효한 자식이 될 뿐만 아니라 어머님께서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애틋한 정곡을 살피셔서 며칠 휴가를 주신다면 늙은 어머님 마음이 적이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게 해서 한산도에서 여수로 가서 어머님을 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할까봐 조금도 외롭거나 몸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려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격려했다.
“잘 가거라. 내 걱정은 말고 나라의 욕됨을 크게 씻어라.”
참으로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다운 분이었다.
이어서 이순신은 모함에 걸려 하옥됐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러 합천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83세의 노모가 아산 본가로 올라오다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들었다.
그날 <난중일기>에 이렇게 나온다.
- 일찍 길을 떠나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호곡을 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간에 나같은 사람이 어디에 또 있으랴! -
원균(元均)이 대패한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자사 괴어 명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고,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고 장렬히 순국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必生卽死 必死卽生).” 그런 필사의 각오로 싸웠기에 원균(元均)의 칠천량패전으로 거의 다 전멸하고 남은 13척의 전함으로 500여 척의 왜적 대 함대를 물리치는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기적적인 대첩을 이루었다.
돌이켜보건대 이순신은 단순히 명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열세를 우세로, 수세를 공세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탁월한 지도자였다. 이러한 출중한 리더십은 오로지 이순신만의 비상한 지휘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과 같은 난세난국에 이순신정신을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한다.
정경부인 해평윤씨
(김만중의 어머니)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조선 숙종 때의 정치가요 학자요 대 문장가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김만중은 효성이 지극한 만고의 효자였다.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그의 대표작인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도 옛이야기 좋아하시는 어머니 정경부인 해평 윤씨를 위해 그가 귀양살이를 할 때에 지은 것이다.
예나 이제나 세상에 나와 높은 벼슬을 하고 많은 돈을 벌었노라 행세하는 사람은 많지만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부간에 화목한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서포는 충효와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진정한 인격자였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대해 이재(李縡)의 <삼관기(三官記)>는 이렇게 전한다.
- 서포 김공의 효도가 매우 지극했다. 어머니의 사랑도 지극했지만 또한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드리려는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닭 앞에서 삐약삐약거리는 것과 같았다. 부인은 옛 역사나 이상한 사실을 적은 책을 좋아했으므로 서포는 많은 이야기책을 모아 밤낮으로 그것을 읽어드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렸다. -
서포 김만중의 일생은 바다에서 시작되어 바다에서 끝맺었다. 그는 인조 15년(1637년) 음력 2월 병자호란 중 강화도 인근 바다 위 배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처음 이름은 선생(船生)이라고 불렀다. 피란 중인 배 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사실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예고하는 듯했다. 병자호란이 치욕스러운 항복으로 끝난 뒤 불과 21세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 해평 윤씨는 다섯 살 위인 형 만기와 만중 형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시집도 친정도 모두 명문가였으나 그녀는 궁핍한 전란 직후라 몸소 길쌈을 하고 수를 놓아 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만기와 만중 형제는 이처럼 자애롭지만 엄격한 어머니의 훈육 덕분에 스승이 없이도 열심히 공부하여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윤씨 부인은 난중에 지아비를 잃고 어렵게도 두 아들을 키우며 평생토록 소박한 차림에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다.
난후에 모든 것이 궁핍하여 아이들을 가르칠 책이 없었다. 윤씨는 길쌈과 삯바느질로 돈을 마련해 두 형제의 책을 샀고, 그것도 모자라자 성균관에서 책을 빌려 필사를 하여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두 형제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종아리에 매질을 하며, “사람들이 못난 자식들을 아비 없는 아이들이라고 하니 너희는 남들보다 갑절이나 노력해야만 겨우 따라갈 수 있으리라.”고 훈육을 했다. 그런 어머니였으므로 두 아들의 효성 또한 남달리 지극했다. 두 형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공무가 없으면 날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행복한 날들은 빨리 지나가버렸다. 처음 10년간은 비교적 순탄하던 김만중의 벼슬길이 삽시간에 가시밭길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포는 권모술수와 처세술에 능한 소인배를 싫어했고, 좀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높고 깊고 넓은 지식과 재주를 가슴 깊이 감춘 채 평소에는 어리석은 듯 얼굴을 숙이고 몸을 낮추어 늘 겸손하게 처신했지만,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할 말이 있으면 묻어두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에 계속 관운이 좋을 수 없었다.
또 그는 송시열 ․ 김수흥 ․ 김수항 등과 더불어 서인에 속했으므로 대체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벼슬길에 오른 반면,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파직과 유배를 당하는 등 영욕이 엇갈렸다. 현종 14년(1673년) 9월에 영의정을 탄핵하다가 강원도 고성으로 첫 번째 유배를 당했고, 숙종 5년(1679년)에 다시 조정에 나아가 대사간 ․ 대사성 ․ 대사헌 ․ 부제학 ․ 도승지 등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지만, 숙종 13년(1687년)에 임금이 후궁 장씨(장희빈)에게 빠져 쓸모없는 인물을 중용하는 처사를 충간하다가 또다시 괘씸죄에 걸려 함경도 선천으로 두 번째 유배를 당했다. 백발의 어머니가 귀양가는 50객 아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귀양살이 간다는 것은 옛적 훌륭한 어른들도 오히려 면치 못하던 일이었다. 가거든 스스로 몸을 돌보고 이 어미 걱정은 말아라.”
<구운몽>은 서포가 선천에서 귀양살이하며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걸작이지만, 또한 자신이 응시 ․ 관조 ․ 통찰한 인생관을 담은 깨달음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숙종 14년(1688년)에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를 나라의 경사라면서 사면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서포의 귀양도 풀렸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세상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장희빈을 등에 업은 남인의 집권으로 서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포는 간신히 목숨이 붙어 머나먼 절해고도 남해 노도로 세 번째이며 마지막인 귀양길에 올랐다.
맏아들을 먼저 보낸 80노모를 두고 귀양길을 떠난 서포의 비통함이 어찌했으랴. 서포는 남해 노도 한귀퉁이에 쓸쓸히 앉아 지나온 이승살이의 발자취를 뒤돌아보았을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벼랑 아래 끊임없이 밀려와 흰 거품으로 부서지는 파도와 훨훨 나는 갈매기들,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돛단배들, 저 바다 저 하늘 위로 떠가는 흰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어지러운 나라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귀․공명․영화도 한바탕 꿈이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의 모든 것이 그지없이 무상하다는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서포가 민중전을 폐서인시키고 장희빈을 중전에 앉힌 숙종의 어두운 처사를 풍간하기 위해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은 것도 남해 유배시절이었다.
서포는 그해 3월 7일에 귀양길을 떠났는데, 그해 12월 25일에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 해평 윤씨가 온통 가시밭길 같았던 73년의 세상살이를 마치고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서포는 이듬해 초에야 들을 수 있었다. 부음을 들은 서포의 가슴은 미어질 듯했을 것이다. 머나먼 남쪽 바다 한가운데 갇힌 몸으로 임종조차 못한 불효자가 되었으니 그의 애통함을 어디에 비기랴.
나이 지긋하여서도 노모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해마다 생신날이면 두 형제가 색동옷 입고 언니가 피리불면 아우는 춤추던, 그렇게 즐거웠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제 우리 어머니 차가운 지하에 말없이 누워계시겠구나. 아아, 어머니! 어머니! 서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어 어머니의 행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데 그 이듬해 8월 <정경부인해평윤씨행장>을 쓰고, 다시 해가 두 차례 바뀐 숙종 18년(1692) 4월 30일에 서포는 애통한 가슴에 병까지 골수에 스며 파란만장하고 중첩했던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서포 김만중은 그렇게 쓸쓸히 유한(有恨)의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남긴 문학작품은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고, 그의 지극한 효성은 만고효자로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조성녀 마리아
(안중근 의사 어머니)
올해 10월 26일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 올해로 안 의사가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109주년이 지났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조성녀(趙姓女) 여사이다. 조 여사는 1862년 배천 조씨 선(煽)과 원주 원씨의 둘째딸로 태어나 동갑인 순흥 안씨 태훈(泰勳)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일찍이 천주교에 귀의하여 마리아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에 일제는 안 의사에 대해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에 앞서 안 의사는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으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나는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하다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홍범도(洪範圖)ㆍ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청산리전투가 항일독립전쟁 최대의 승첩이라면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쾌거였다. 하얼빈역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한 곳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울려 퍼진 총성 네 발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대한국인’ 안중근의 용장(勇壯)한 기개를 한껏 떨친 장쾌한 의거였다.
안 의사는 1909년 이전부터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싸우다가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민족의 원수, 동양 평화의 적 이토를 몸소 처단하고자 결심했다. 안 의사는 그 해 10월 21일 동지 우덕순 ․ 유동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하얼빈에 도착해 그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와 멎고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권총을 뽑아 들고 뛰쳐나간 안 의사는 이토에게 총탄 네 발을 연사했다. 첫 발과 제2탄은 이토의 가슴에, 제3탄은 배를 관통했다. 의거가 성공하자 안중근 의사는 “대한만세(코레아 우라!)”를 세 번 외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하얼빈역에서 300m쯤 떨어진 만주 동청(東淸)철도국 사무실로 끌려간 안 의사는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장을 총살, 응징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러시아군에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진 안 의사는 그 뒤 200여 일 동안 뤼순 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가 이듬해 3월 26일 조국을 위해 귀중한 한 목숨을 바쳤으니 꽃다운 나이 31세였다.
안 의사가 의거에 성공한 뒤 평양에서 조 마리아 여사를 만난 일본 헌병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아들이 이토를 살해했으니 이는 당신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므로 당신에게도 잘못이 있다.”
그러자 조 마리아 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아들이 밖에서 한 일을 알 수 없지만 나라일을 위해 죽는 것은 국민의 사명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도 아들을 따라죽을 것이고, 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는데 내 아들이 이토 하나를 죽인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일본 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부한 것도 무지의 극치다!”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이런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모두 감탄했다. 또 조 마리아 여사는 여순감옥으로 면회를 가는 작은 아들들에게 안 의사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했다.
“네가 국가를 위해 그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을 통해 맏아들에게 죽을 때 입고 가라면서 흰색 명주 수의를 보냈다. 그 뒤 조 마리아 여사는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나중에는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金九)의 모친 곽낙원 여사와 함께 임정의 안주인 노릇을 했다. 조 마리아 여사는 1927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고, 둘째아들 안정근은 북만주 독립군을 통합하여 청산리대첩의 기반을 구축했다. 셋째아들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의거를 뒷받침했다. 딸 안성녀도 오빠 안중근의 의거 뒤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의 군복을 만드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처럼 조 마리아 여사는 네 자식을 모두 항일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이 땅의 참으로 장한 어머니였다.
한스럽고 통탄스러운 사실은 안 의사가 순국한 지 백년이 넘었건만 아직까지 무덤과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우리 못난 후손들은 참으로 안 의사를 비롯한 선열들께 면목이 없다.
해마다 안 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만 되면 기념관을 새로 더 크게 짓느니 세미나를 여느니 하지만, 이보다는 안 의사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제대로 진지하게 되새겨보는 것이 좋겠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국가적으로 난국을 맞았다. 정치도, 안보도, 경제도 앞길이 험난하기만 하다. 국난 극복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안 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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