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을 보내고 계사년을 맞으며
―계사년 설날을 맞으며―
충북 옥천향교(전교 전북렬)는 지난해 12년 28일 오전 11시 관내 노인들을 초청해 옥천읍 한 식당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기로연(耆老宴)을 ‘기영회(耆英會)’라고도 하였는데, 환갑(環甲)을 넘긴 어르신을 기로(耆老)라고 불렀다. 기(耆)는 늙은이(老), 스승(師), 어른(長)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지만 나이 60세를 가리키는 말이고, 노(老)는 70세이다. 그러니까 눈썹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때다.
기로연은 태조 3년(1394) 임금의 명에 따라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하고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의 노신(老臣)들을 특별히 예우하기 위해 봄, 가을에 거행되던 행사였다. 이것은 조선의 통치이념인 ‘경노존현’(敬老尊賢)―어르신을 공경하고 현명한 이를 존대함―을 실현하고자 하는 국가정책 중의 하나였으며, 나라의 권위와 평온을 증명하는 정치행위이기도 하였다. 이 기로연이 현대에 와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경로잔치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연회는 식사는 당연히 제공되었지만 부수적으로 술이 따랐다. 식사와 더불어 하는 반주나 그 외 섭외를 위해 마시는 술이든, 이 술이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문제가 된다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인데 적당하게 마셔 즐길 수 있으면 다행인데 대부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담배는 폐해가 많다고 하여 금연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전 국민을 금연운동에 동참시키고자 하는 국가도 있다고 하니 흡연인구는 줄어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음주에 관한 규제는 일부 아랍 국가를 제외하고는 규제 대상국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술에 대한 폐해가 많았는지 술을 금했던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종이 내린 ‘계주교서(誡酒敎書)’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술 때문에 금전과 곡식이 낭비되고, 내면의 의지를 잃게 되고 외면의 권위마저 잃게 된다. 술 때문에 부모를 잊고, 남녀 간의 분별을 잃고 끝내 가정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잃게 된다. 술 때문에 살해당한 이들이 허다하다. 술 때문에 장이 썩어 죽은 자, 가슴이 상해 죽은 자, 정신을 잃어 죽은 자가 있으니 부디 술의 폐해에 대하여 조심하라.”는 교서를 내린 것으로 보아 당시 술의 폐해가 상당히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술을 완전히 금한 것은 아니었다. 단서 조항을 두었는데, 술은 살아생전 세 가지의 일이 있을 때 마심을 허락한다고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손님을 접대할 때, 어르신을 봉양 할 때이다. 이후 중종(中宗) 때는 책문(策問)―과거의 마지막 합격자 33인의 등수를 매기는 논술시험―에 술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으며[주 참조], 영조도 금주령을 내렸다.
전통 주법에 세 가지 계명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서양 사람처럼 밤낮 때 없이 마시지 말고 저녁에만 마시라는 유시계(酉時誡)다. 유시는 오후 6시에서 8시 사이다. 그렇게 유(酉)시에만 마시라 해서 술 주(酒)라는 해석도 있다.―허신의 설문해자를 보면 “酉 就也. 八月黍成, 可爲酎酒(유 취야. 팔월서성, 가위주주) 즉 유는 나아간다는 뜻이다. 8월에 기장이 익으면 술을 빚을 수 있다”라고 하여 술과 관계있는 글자라고 설명했다[필주 주]― 또한 12일 만에 돌아오는 유일(酉日)에만은 금주하는 것이 주도인데 이날 술을 처음 만들었다는 두강의 기일이라는 것이 명분인데 요즈음 휴간일(休肝日)을 합리화하는 것이 된다. 그 두 번째는 술을 마시고는 물을 마셔 입안과 식도를 씻어 내리라는 현주계(玄酒誡)다. 한나라 때 술자리에는 물통 하나를 들여놓고 술을 마시고 물을 떠마시게 했는데 이를 현주라 했다. 세 번째는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삼배계(三杯誡)다. 술 좋아하는 윤회(尹淮) 등 학사들에게 석 잔 이상 마시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는데 어명은 지켰으되 그 잔이 양푼보다 더 커지는 바람에 삼배계를 내리지 않은 것만 못하구나했다고 한다.(이규태, <이규태 코너-酒道 강의>, 조선일보, 2002.09.08) 이 인용문에서 언급한 윤회는 세종이 아낀 신하였다. 이 분의 술과 관련된 일화를 보면서 건전한 음주문화와 술과 관련된 세시 풍습을 알아보고 명절을 맞이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세자의 학문을 높이기 위해 진강(進講)하는 곳인 서연(書筵)에 나갈 시간이 되어도 술잔 속에 열려진 문밖의 정경을 마시고 있는 분이 있었으니 정2품의 벼슬인 세자의 스승 윤회(尹淮, 1380~1436)였다. 윤회는 본관이 무송(茂松)이며,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이다. 학문이 높았으며 벼슬은 대제학을 역임했다. 맹사성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그의 학문과 문장은 당대 최고라고까지 일컬어지게 되었으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이 흠이었다.
어느 날 세종이 베푼 대궐연회에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신이나 술을 마셨는데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연회가 끝날 무렵쯤엔 고주망태가 되어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나가고 다음날 세종 앞에 불려가 앞으로 석잔 이상의 술은 절대로 마시지 말 것과 이를 어기면 벌로 다스린다는 어명을 받았다. 세종이 이와 같이 명한 것은 그만큼 그의 학문과 재주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렇게 좋아하는 술이지만 석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 생각 끝에 한 가지 꾀를 내었는데 어명을 어기지 않으면서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방법은 조그만 술잔대신 지름이 한자(1척, 30센티미터)나 되는 놋양푼(놋버러기)을 잔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도 잔은 잔인지라 어명을 어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결과는 윤회에게 술을 더 먹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술에 취해 서연에 나가지 못한 윤회를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대사헌 이승직이 세종에게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진강(進講)을 맡은 신하가 술에 취해 서연에 참석치 않은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어명으로 친히 석잔 이상의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내심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아끼는 신하를 함부로 죄를 물어 내치고 싶지 않았다. 어명을 어겼다면 벌을 내릴 것 이되 그 명을 지켰다면 다시 한 번 경계하는 말을 내리고자 경연장으로 윤회를 불렀는데 경연이 파할 무렵에서야 나타난 윤회는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탑전에 꿇어 엎드린 윤회에게 노한 세종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태연히 한 마디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잔의 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하교가 계시질 않아 신이 놋양푼을 잔으로 쓴 것이니 이는 결코 어명을 거역한 것이 아니오니 통촉 하옵소서”라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었고 세종의 경연청을 흔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연 윤회로고!” 하시고는 “서연에 참여치 못한 것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대신 세 가지 문제를 내어 모두 답하면 용서하겠노라”
경연장에 있던 우대언 김종서(金宗書), 지신사 황보 인(皇甫 仁), 좌부대언 남지(南智), 좌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대사헌 이승직,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鄭麟趾), 시강관 설순(薛循) 등이 감탄하리만치 문답이 오간 후 세종이 말한다. “윤빈객은 과연 천재로다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의 정기가 모여 이 현인을 낳았으니 어떻게 죄를 묻겠는가.” 윤회와 같은 기인을 대견히 여긴 세종, 세종은 그만큼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았기 때문에 태평성대를 열어 후세에 두고두고 성군으로 칭송받는 왕이 되었다.(여주 이씨 문성공파 홈페이지―자유게시판 글번호 47, 주법(酒法)/주도(酒道) = 향음주례(鄕飮酒禮) 참고)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술에 취해 집에 누워있는데 세종이 급히 찾았다. 사람들이 부축하여 세종에게 데려 오니 모두들 걱정하였다. 세종이 실망한 빛이 역력한 가운데 윤회에게 선포할 조서(詔書)의 초안을 잡으라고 하니, 지필묵(紙筆墨)을 준비시키고는 붓을 나는 듯 놀려 임금의 뜻에 맞게 작성하자 세종이 감탄하며 “정말 천재로다”라고 하였다.
왜 이렇게 마신 걸까? 이유는 본인만이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마시다보니 5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윤회의 젊었을 때 일화인 ‘거위와 구슬’이『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려 전한다.
윤회(尹淮)공이 젊었을 때, 시골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유숙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뜰에 앉아 있는데, 주인의 아이가 커다란 진주(眞珠)를 가지고 놀다가 뜰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곧 삼켜 버렸다. 얼마 안 되어 주인이 구슬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여 묶어 두었다가 날이 새면 장차 관에 고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구슬이 거위 항문으로 나왔으므로 주인이 부끄러운 얼굴로 말하기를,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라고 사과하니, 공은, “만일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필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았을 것이오. 그래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尹淮 少時 有鄕里之行 暮投逆旅 主人 不許止宿 坐於庭畔. 主人兒 持大眞珠出來 落於庭中 傍有白鵝 卽呑之. 俄而, 主人索珠 不得 疑公竊取 縛之 朝將告官. 公不與辨 只云, “彼鵝亦繫吾傍.” 將朝 珠從鵝後出. 主人慙謝曰, “昨何不言?” 公曰,“昨日言之 則主必剖鵝覓珠. 故 忍辱而待]”
라고 하였으니 “말을 참지 못하면 화를 당하든지, 어떤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게 되면 의심받은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된다.”는 교훈과 함께 하찮은 생명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선생의 안온한 성품을 읽을 수 있다. 선생의 주요작품으로는 <봉황음(鳳凰吟)>, <유림가(儒林歌)>, <오륜가(五倫歌)> 등이 있다. 다음이 <봉황음(鳳凰吟)>의 일부이다.
천리 강토 이 나라에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도다. 금으로 꾸민 훌륭한 궁전․구중문 안에 일월같이 밝은 덕을 밝히시니 뭇 신하 천년에 구름 탄 용 같은 영걸을 모으도다. 화평한 백성의 풍속은 춘대 위에 있거늘 많고 많은 뭇 백성은 잘 다스려진 강역 안에 있도다. 많고 많은 뭇 백성은 잘 다스려진 강역 안에 있도다. 천지같이 높고 두터우며 사가 없으시어 아름다운 천복이 이르시니 요순 같은 은택 송축하는 이 다들 태평성대 사람이로다. 요순 같은 은택 송축하는 이 다들 태평성대 사람이로다. 치열하고 창성하시니 예악의 광화가 한당보다 더하도다. 임금의 자손이 빼어나게 나서 천년토록 거룩하시니, 면면한 외 덩굴 더욱더 융성하여 만세의 터전 되도다. 국가의 잦은 경사가 예전보다 더하시니 천지가 함께 화평한 것이 바로 이때로다. 천지가 함께 화평한 것이 바로 이때로다. 맑은 새벽에 즐겨 놀매 옥여가 오시니 사람들이 남산을 기려 축수하는 잔을 드리도다.(하략)(박기호 지음, 『고려 조선조 시가문학사』, 국학자료원, 262쪽)
한시체(漢詩體)의 악장으로 조선 왕조가 이룩한 문물제도를 찬미하고 왕가의 영원한 태평을 기원한 송축가로, 궁중 잔치 때 연화대 학춤에 덧붙여 불린 노래라고 한다.(조성재 외 지음, 『문학사전』, 교보문고, 1153쪽)
세종이 앞서 본 ‘계주교서’에서 술로 인한 폐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간곡하게 금주하도록 권유한 것에 이어 “옛날 신라는 포석정에서 패하였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망했으니, 모두 술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는 아래 위가 술에 빠져 방자하게 굴다가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다.” 또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지언정 제 한 몸의 생명도 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배우고 벼슬하는 자들이 그럴진대 거리의 백성들이 무슨 짓을 안 하겠는가?”라고 금주를 명하였지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신하는 말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인재가 술로 인해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이렇게 술을 양으로 마시는 음주문화가 조선시대도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우리나라 음주문화도 미취(微醉)의 앙양된 기분을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 마시는 문화이다. 특히 여성과 술이 약한 사람들을 겨냥한 도수가 낮은 소주를 개발하여 더 많이 마시는 것 같다. 그리고 주폭(酒暴)도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모양이다. 바람직한 음주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역시 주도를 강의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술과 관련된 명절에 풍속인 세주(歲酒)와 도소주(屠蘇酒)가 있었다.
내일이 계사년(癸巳年) 설날이다. 명절이라도 명절 같지 않으니 세월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이런 변화에 동승하여 흐르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버려 한탄만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생각의 회한(悔恨)이 깊은 순간 문득, 문득 옛날로 돌아가 그때를 회상하게 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인 것 같다. 이런 느낌은 나만 갖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도 그랬나보다.
섣달그믐 날, 제야(除夜)를 보내는 아쉬움이 있어서 그랬을까? ‘수세(守歲)’라고 해서 제야(除夜)에 집안 구석구석에 등촉을 밝히고 어른 아이, 주인 노복 할 것 없이 모두가 밤을 새우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오는 잠을 참느라 고생한 기억도 난다. 아쉬움이 있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라도 해야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묵객들도 다르지 않았다. 소동파는 <섣달 그믐날 밤에 상주 성 밖에서 야숙하며[除夜野宿常州城外]>라는 제하의 시 2수를 지었다. 그 부분을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