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박주병
날씨가 더워지면 옛날이 생각난다. 1955년 고교 3학년 여름이었다. 그 당시 우리 고장에는 학원 같은 것도 없던 때라, 대학입시 준비를 위하여 여름방학 동안 대구의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하숙을 할 처지도 못 되고 해서, 쌀 한 자루를 메고 친척집에 뜬금없이 기어들었다. 지금의 종합운동장 뒤에 있던 옛 방송국 부근이었다. 학원은 ‘경북문화학원’인데, 지금의 유신학원 근방인지 더 먼 곳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하루에 두 번씩 걸어서 다녔다. 요즘 학생들이 들으면 버스를 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삼십 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수두룩한 그 시절에 가까운 거리를 차를 타고 다닌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촌놈으로서는 선풍기 같은 건 들어보지도 못했던 그 시절, 찌그러져가는 학원 2층 건물이 어이 그리도 후텁지근하던지.
다 큰 총각이 팬티 같은 걸 훌렁훌렁 벗어 줄 수도 없고 몸을 씻을 수도 없었던 그 집. 코를 드렁드렁 골아대는, 건넛방에 혼자 세 들어 사는 일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노인과 한방에 거처하기란 또 얼마나 민망스럽고 서럽던지.
노인은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약봉지가 빼곡하게 매달려 있고 향기가 그윽이 풍겼다. 첫날밤 노인은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는 이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나는 속으로 웃으며 성삼문의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라 했더니 해석해 보라고 했다. 더듬더듬 해석했더니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국어 시간에 배웠다고 했더니 점두했다. 또 묻길, 殺(살)과 弑(시)가 어떻게 다르냐고 했다. 초면에 첫날밤부터 왜 하필 ‘죽음’에 관한 것만 자꾸 묻는지 조금 언짢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답을 하지 않았더니 노인은 내가 몰라서 말을 못 하는 줄로 알고 “신시기군 자시기부(臣弑其君 子弑其父 : 신하가 그의 임금을 죽이고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다)”라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저울질 당하지 싶어 한 번 붙어 볼 작심을 하고는, “신시기군 자시기부를 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다(非一朝一夕之故)라고 했습니까?”라고 반문했더니 노인은 움찔했다. “곤초육(坤初六)의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어름에 이른다)를 두고 한 말이 아니냐?”라고 에둘러 얼버무렸다. “그렇다면 곤초육이 왜 ‘서리’가 되고 ‘밟다’가 되고 '굳은 어름'이 되는지 그 까닭을 상(像 : 본뜸)으로 설명해 주세요. 「계사전」에 이르기를 『역(易)』은 상(象)이요 상(象)이란 상(像)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들다시피 했다. 노인은 놀란 얼굴을 하고는, 답변은 하지 않고 『주역』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옛날 한문 공부는 우선 배독(背讀)을 해야 한다. 따라서 『주역』을 “읽었느냐?” “공부했느냐?” “배웠느냐?”라고 묻는 것은 『주역』을 암송하느냐는 물음이 내포되어 있다. 노인의 물음에 냉소를 지으며, “臣弑其君 子弑其父”의 앞뒤 문장을 중 염불하듯 한숨에 달달 외워버렸다. 노인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뻔히 바라보며 ”허 참! 허 참!” 탄성인지 신음인지도 모를 소릴 연발했다. 노인은 아마도, 내가 『십삼경(十三經)』의 우두머리를 암송하는 걸 보니 그 아래 경전들이야 불문가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저울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노인은 빼곡하게 매달린 천장의 약봉지를 쳐다보며 사물탕을 물었다. 숙지황 당귀 천궁 백작약이라 했더니 사군자탕․팔진탕․십전대보탕․육미지황원․총명탕을 물었다. 일부러 쉬운 것만 골라 묻는 것 같았다. 이런 문답이 벌어지게 된 것은 노인이 나에 대한 뭔 소릴 친척집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후 노인은 다시는 내게 뭘 물어보는 법이 없었고 거처는 왠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뒷날, 내가 남이 묻는 말에 여간해서는 다 털어놓지 않고 조금은 냉소를 짓는 것이 아주 발이 되고 만 것은 이런 일이 있고부터다.
내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원서를 내려면 독일어와 물리학 중에서 한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선택해야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물리학은 겨우 한 학기를 배우다가 학생들이 백지동맹을 하는 바람에 대구에서 온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던 교사는 울고 가고 다시는 물리학을 배워보지 못했다. 독일어는 처음부터 시간표에도 없었다. 썩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같은 농업고등학교라도 독일어며 물리학을 그런대로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때까지 대학입시 정보에 등한히 했던 건, 실업학교여서 그런지 학교 당국도 대학입시에 미지근한 태도였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나를 대학에 보내줄지 확실치 않아서 지금의 7급에 해당하는 4급 을류 행정직 공무원 자격시험인 보통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소한 독일어보다는 낯이 좀 익은 물리학을 선택하고 싶었는데 이곳저곳 둘러봐도 물리학이 개설되어 있는 학원은 없었다. 독일어를 배워 보았으나 마음만 쫓길 뿐 공부가 되질 않았다. 한 학기가 남았고 겨울 방학이 있다 하나 필수 과목을 제쳐놓고 선택 과목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수를 할 처지도 못되었다. 당시에는 재수하는 일이 흔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학생은 징집이 연기되던 시절이었는데 만약 재수를 했다가 여의치 못하게 되면 아무 대학에나 들어가든지 학교를 늦게 다닌 탓에 군에 가든지 해야 했다.
그때 나는 배를 곯은 셈이다. 불청객이 겨우 쌀 한 자루를 메고 가서 한 달 간 침식을 의탁한 처지에 밥을 더 달라고 할 계제도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돈도 없지만 뭘 사먹을 줄도 모르고 세 끼 때만 기다리자니 한창 먹을 나이에 양에 찼겠는가. 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보면 아래층에서 저녁밥을 짓는지 풋고추를 넣고 끓이는 된장 냄새가 구미를 동하게 해서 공부가 되질 않았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올 때면 현기증이 났다. 지금의 ‘미창’ 앞 굴다리 밑을 지날 때면 더 노곤해졌다. 그 다리 밑에 잡상인들이 칸델라 불빛 아래 음식물을 팔고 있었는데, 하루는 콩 통조림 한 통을 사서 그 자리에서 대참에 다 먹어치웠더니 그게 그만 꼭 막혀서 죽을 뻔 했던 일이, 아득히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서럽기만 하다.
그 당시 숙부님이 대구에 계셨다. 장래가 뻔한 농사일을 버리고 도회지에서 터를 잡아보겠다고 홀로 대구에 나와 처음에는 우편배달부를 하다가 나중엔 남의 술도가에서 머슴 노릇을 하고 계셨다. 자주 숙부님을 찾게 되었다. 눈치를 챘던지 양조장 주인아주머니가 식은 밥을 양재기째 내주어서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이런 내가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하시는 일이 여의치 못한지 숙부님은 양미간에 우수의 그림자가 역력했다. 그 무렵 내 눈에는 숙부님의 장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것 같았다.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사서(四書)나 휑하니 외우시던 세상 물정 모르는 서른세 살 선비가 아무 기술도 없이 뭘 믿고 도회지에서 어떻게 터를 잡아보겠느냐고, 조금은 경멸하듯 속으로 뇌고 나니 가슴이 아팠다.
“공부 잘되나?” 언젠가 숙부님이 이렇게 물으실 때 나는,
“대구는 너무 더워요.”라고 했다.
“아니다. 조금 뜨스하다.” 숙부님의 이 말씀이 나를 꾸짖는 소리로 들렸다.
“일이 잘됩니껴?” 이런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여름방학이 다 갔다.
“같이 집으로 갑시더.” 숙부님은 말귀를 얼른 알아듣지 못하시는지 한참 만에,
“혼자 가거라. 추석에 가마.” 이러시며 덤덤히 창밖을 바라보셨다.
“그게 아니고 아주 갑시더.” 아까부터 입맛만 쩝쩝 다시는 숙부님, 어쩜 나의 권유에 앞서 고향에 돌아가리라 마음을 정하신 게 아니었을까.
숙부님과 나는 마침내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고향 차에 몸을 실었다. 처지가 엇비슷한 두 패잔병, 두 사람은 싸운 것처럼 말이 없다가 숙부님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야야, 꼭 서울로 갈래? 경북대학도 안 좋나?” 나는 숙부님의 이 말씀에 대답은 않고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먼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도 흐르고 세월도 흘러 내 나이 아흔이 되었다. 아득한 옛날이 되었건만 그 노인과의 문답이 왜 이리도 생생할까. 여태도 여름철만 되면 허기를 느낀다. 이 허기는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나를 저울질 하던 그 노인, 천장에 빼곡하게 매달린 한약 봉지와 그 향기가 생각나서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