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토) 맑음 상쾌한 한국의 초가을 날씨는 고국 내음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장거리 여행과 시차적응을 위해 한국에서 1주일 휴식을 취한 탓으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떠날 수 있어 안심이 되었지만 13시간 동안 좁은 의자에서 견뎌야하는 비행기여행이 부담이 되어 편치 못한 상태로 독일 국적 LH713에 올랐다. 인천국제공항 출발 오후 2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착 오후 6시 35분, 다시 영국까지 1시간 40분, 총비행시간은 13시간 10분 그렇다면 비행기속에서 8시간이 늘어 난 꼴로 시차를 겪게 된다. 새벽잠에서 깨어날 시간에 잠을 다시 청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시차 경험이 없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런던행을 갈아타기 위해 빠르게 이동하는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니 아픈 무릅은 생각할 틈도 없다. 그래도 13시간 넘게 견뎌 중 나의 체력을 생각하니 여행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런던행 비행기를 갈아타고 1시간 40분을 날아 런던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0시10분, 간단한 통관 절차를 거치고 마중 나온 버스에 올라 어둠길을 헤치고 St. Giles Hotel에 도착, 방 배정을 받고 여장을 풀었다. 내일 아침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런던시내관광을 해야 한다며 편히 쉬라는 가이드의 말이 귀에 생생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하기는 평소 같으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인데 자려고 하니 잠이 오겠는가? 자기는 자야겠는데.. 눕기만 하면 잠이 들어 부럽다는 말을 듣던 나였지만 뒤척이다 밤을 샌 것 같다.
9월20일(일)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정신이 몽롱하다. 이런 몸으로 따라다녀야 한다니 걱정이 앞선다. 아침 식사가 더 걱정이다. 음식 알레지가 있어 우유, 빵과 같은 밀가루음식과 치즈, 닭고기를 먹을 수 없는 나로서는 호텔 식당에 내려가 아침 메뉴부터 살폈다. 시리어 밖에 먹을 게 없는데 우유에 타 먹을 수 없으니 더운물을 얻어 풀어서 아침을 때웠다. 그래서 준비해 온 누룽지가 있지만 아껴서 먹어야하므로 참을 수밖에 없다. 시차 문제, 건강 문제, 식사문제 등 모든 것이 악 조건뿐으로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영국은 대륙과 떨어진 섬나라로 그레이트 브라튼(Great Britain)과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의 연합 왕국(Unite Kingdom)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북부에 스코틀랜드, 남부의 잉글랜드, 남서부의 웨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연합으로 주요 산업은 금융업, 철강, 관광산업이며 교역대상국은 미국과 유럽이다.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 4계절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변덕스러워 한여름에도 해가 구름에 가리거나 비가 내려 냉기가 들 정도이다. 런던이 수도이고 인구는 약 5천 8백만 명, 땅 크기는 한반도의 1.1배, 주요 민족은 앵글로 섹슨(Anglo- Saxons)과 겔트(Celts)이며 영어가 공용어이고 종교는 영국 국교(50%), 카톨릭(11%), 개신교(30%)순이며 화폐는 파운드를 쓰고 있다. 안개 낀 런던이라는 말은 옛말이란다. 나무를 때서 취사를 하고 난방을 하던 시절 애기이지 지금은 안개를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비는 많이 오는 편으로 일주일전만 해도 계속 비가 내려 관광 안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우리 일행은 여행을 마치는 날까지 날씨가 좋다는 예보가 있었다며 행운이라고 했다. 템스강을 끼고 돌아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곳에서 가이드의 설명 듣는 것으로 런던 관광이 시작 되었다. 템스강가에 있는 국회의사당(House of Parliament)은 700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국 의회정치의 전당이다. 이곳에는 원래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들어서 있었지만, 1834년 대화재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기 시작해 1860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대화재 이후 디자인 공모에 참가한 97개의 작품 중에서 Crarles Barry and Augustus Pugin의 디자인이 당선되고 이 디자인을 기반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이 합세해 만들어진 고딕 스타일의 의사당 건물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물 정면의 길이가 300미터가 넘고, 1천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다. 그 유명한 빅벤은 95미터로 아직도 손으로 태엽을 감는 전문적인 시간지기이다. 구경을 하면서 사진 촬영을 마친 후 골목길을 걸어서 역대 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한 웨스트민스트 사원으로 자리를 옮겨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시드니에 오래 살았지만 일일관광을 따라 나섰다가 가이드의 시드니 설명을 듣고 나도 모르고 있던 많은 상식을 배웠던 기억이 새롭다. 정말 많이 알고 있으며 조리 있는 설명으로 웨스트민스트를 재조명했다. 카톨릭 시대 고해성사를 잘하기로 유명했던 고백 왕 에드워드 왕이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정세 때문에 방문하지 못하자 스스로 죄라고 생각하고 그 죄를 탕감하기 위해 교회를 지었다고 하여 처음의 공식 명칭은 "처치 오브 세인트(Church of saint Peter)"였다고 한다. 성당 안에 묻히는 것이 최고의 영예였던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안에는 3,300명의 무덤이 있으며 뉴톤, 다윈, 리빙스톤 등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고 했다. 이곳에 묻힌 3,300명은 인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모습이 한 없이 초라해 졌다. 또한 공식행사장으로도 이용하는데 900년 왕정기간 중 9명의 왕이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여왕의 둘째 아들과 앤 공주가 여기서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다. 사진 촬영을 하다 보니 멀리 런던 아이와 런던 타워가 앵글 속에 잡혔다. 런던 타워는 프랑스계 바이킹이라고 불리던 월리암 1세가 1066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 올 당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영국인들을 위협하기 위해 만든 타워였는데 이를 중심으로 점차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화폐 제조창, 병기 제조창, 왕실 동물원(최초로 코끼리를 전시했다고 함)으로도 이용하였고 그 외에 사형장으로도 이용하였으며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쫓기는 일정으로 인해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설명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근처에 런던 아이 (London Eye)의 둥근 형체가 들어 왔다. 2000년 밀리네엄을 기념하기 위해 16개월간의 건설 기간이 소요된 런던아이는 템즈 강변에 우뚝 솟아 있으며 높이 135m, 1회 수용인원 800명의 웅장한 규모의 가설 구조물로 영국의 기술 발전상과 런던 시내의 파노라마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거대한 바퀴형 전망대로 1700명이 넘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체코 등 기술자가 투입되어 만들어졌으며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거쳐 버킴검 궁전(Buckngham Palace)에 도착했다. 영국 여왕의 거주지로, 19세기에 증축한 흰색 건물의 테라스는 공식행사 시 여왕과 가족들이 나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여왕의 깃발인 로얄 스텐다드 기가 게양되어 있으면 여왕이 머물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라는데 깃발 계양이 안 된 것을 보니 부재 중 인 가 보다. 건물 안은 모두 붉은 카펫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여왕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고 한다. 또한 이곳은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여 4월부터 8월까지는 우천 시를 제외하고는 메일 교대식을 거행하며 그 외의 기간에는 격일제로 시행한다. 우리가 간 것이 9월로 격일제의 비번 날이 되어 교대식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다니던 버스에 대한민국이라고 쓴 한글이 선명하게 보인다. 런던 한복판에 대한민국이라고 크게 써 논 버스에 우리 일행이 타고 달리는 기분 정말 한글 자랑을 늘어지게 하고 싶다.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글로 선정되어 세계인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있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조화로 어떤 표현도 표기가 가능한 과학적인 한글, 모발폰 시대 최우수 글자로 인정이 되어 세계 공통 표기문자로 쓰자는 말이 나오고 있는 한글, 인도네시아 바론섬 짜우짜우 민족에게 수출한 한글.. 우리의 자랑이며 긍지이고 이런 한글로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대영 박물관( The British Museum) 관람을 했다. 1753년 '한스 슬로운 경'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8만점의 유물을 국가에 기증한 것을 모체로 생긴 대영박물관은 개인의 소장품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입장료를 받지 않기로 유명하며 지금도 약 100여명의 재정 지원자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서구사회의 도네이션 제도가 부럽다. 대영박물관에서는 전 세계의 유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이집트관, 앗시리아관, 그리스관이 유명하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 뒤쳐지는 바람에 듣지 못해 나름대로 짐작을 하면서 돌았다. 벌꿀에서 나오는 플로포리스를 써서 미이라를 방부해 놓은 고대인들의 지혜에 놀랐다. 벌꿀 중 일부가 꿀을 먹고 토해 내는 플로포리스로 벌통 안을 소독하고 틈새마다 플로포리스를 발라 세균 침입을 막은 벌들의 지혜를 보고 고대인들이 세균으로 인해 시체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 플로포리스 쓴것을 보고 감탄했으며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신비함에 놀랐다. 대영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프랑스로 가기 위해 유로스타 정류장을 향했다. 식사를 할 장소와 시간이 없어 저녁 도시락을 받고 유로스타로 런던을 출발, 프랑스를 향해 바다 속을 달렸다. 저녁 도시락을 비우고 나니 시차로 인해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2시간을 달린다고 한다.
9월 21일(월) 맑음
파리에 도착하여 Ibis Paris Villepinte PC Expo 호텔에 투숙, 잠을 청했으나 시차적응이 안되어 잠을 이룰 수 없어 뒤척이다 프랑스의 아침을 맞았다. 아침 식사가 걱정이 되어 식당에 내려가 먹을 만한 것을 살폈다. 쏘세지와 햄이 눈에 띄어 한 접시 수북하게 챙겨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프랑스는 예술과 낭만이 가득하고, 와인생산지로 유명하며, 세계적인 관광지가 밀집되어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라, 유럽에서 자기만의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나라, 교통 분야에 앞서가는 나라로 한국의 고속전철 (KTX) 가 바로 프랑스의 떼제베( TGV) 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기본정보를 가지고 기대를 하며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 인구는 약 6천 만 명, 국토는 한반도 크기의 약 2.5배, 민족은 골족(Gaul)으로 콧소리를 내는 불어를 쓰며 인구의 82%가 카톨릭으로 영어를 알면서도 모른다며 자기네 말로 떠드는데 난감했다. 자존심으로 뭉쳐진 민족성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하기는 일찍 문명이 발달되었던 시대에 영국은 섬나라 미개민족이 해적으로 변하여 노략질이나 일삼는 천민이었는데 지금은 세계를 지배하는 꼴이 보기 싫은 심정 이해할 만하다. 세계 3대 미술관중 하나이며 모나리자 등 걸작을 보유하고 있는 루브루 박물관(Musee du Louvre)을 관람 했다. 이곳은 프랑스 왕궁인 루브루 궁정을 1793년 왕정을 무너트린 프랑스 공화정이 박물관으로 만들어 현재는 총 40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하는 유럽 최고의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소장품을 꼽는다면 레오날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등을 설명을 들으면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아주 소중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관람했다. 이어서 나폴레옹 개선문(L'arc de Triomphe)를 가 보았다. 개선문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이 문을 통해서 금의환향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만든 로마 시대의 관습인데, 나폴레옹은 자신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06년 건축을 시작했으나 정변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생전(1836년 사망)에 완공을 못 보고 1840년 완성이 되자 손자인 나폴레옹 2세에 의해 유해만이 그 밑을 통과 했다고 한다. 그 후 1차 대전의 승전행진과 2차 대전 후 드골이 파리에 입성할 때 개선문을 통과하는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금색 아취형 지붕이 나폴레옹 묘라는 설명을 듣고 나폴레옹의 위대성을 실감했다. 실각해 유배되었다 타계한 할아버지의 후광을 딛고 집권하여 할아버지 나폴레옹 1세를 다시 부각시켜 유해지만 개선문을 통과케 한 나폴레옹 가문... 격세지감이 앞선다. 개선문과 콩코르트 광장을 연결하는 넓은 길이 유명한 상제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Elysees)로 도로 양쪽에는 가로수가 아름답게 늘어져 있는데 단풍으로 물든 풍경은 도심 속에서도 조용한 전원의 향취를 맛보게 해 주는 쾌적한 번화가로 이 거리에 유명 카페와 레스토랑, 부티크 등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삼삼오오 노천식탁에서 차를 즐기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 일행도 골목길로 들어서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는데 말 뿐이지 별로였으며 얼큰한 김치찌개 생각이 많이 났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전망대와 세느강 유람선 관람은 옵션으로 저녁에 갖기로 해서 우선 에펠탑 사진 찍는 가장 좋은 언덕이라며 안내를 했다. 나는 끌려 다니느라고 지치고 힘이 들어 저녁 스케줄은 포기했으며 호수공원이 있는 언덕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에펠탑(Tour Eiffel)은 파리의 상징으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인 1889년 ‘구스타프 에펠’이 만국 박물관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건립 당시 철골을 그대로 들어 낸 외관이 보기 싫다는 반발로 곤역을 치렀지만 지금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콘크리트와 우아한 시루엣으로 파리의 상징물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다. 총 높이가 약 300m로 그 속에 전망대가 있고, 제 1전망대는 57m 지점에, 제 2전망대는 115m 지점에, 제 3전망대는 274m 지점에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되고 무룹까지 아파오는 고통으로 일찍 어제 묵었던 호텔로 돌아와 쉬었지만 파리 시내를 보지 못 한 것과 세느강 유람을 못 한 것이 아쉽다.
9월 22일 화요일 맑음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이유로 이동하여 중세유럽의 초호화 궁전인 베르사이유 궁전을 관광했다. 베르사이유 궁전(Palais de Versailles)은 1661년부터 1710년까지 5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만들어진 궁으로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왕권을 누렸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파리의 루브르궁에 싫증을 느껴 기존 사냥터였던 베르사이유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방대한 정원을 조성하여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매일 같이 연회를 베풀어 재산을 탕진케 하여 왕권을 더욱 굳건케 했다고 한다. 궁전 내부의 호화로움에 놀라고 말았으며 여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몰락을 한 귀족들의 말로가 보이는 듯 했다. 점심은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도시락을 수령하여 해결하고 스위스로 가는 초고속열차 떼제베(T.P.V)에 탑승 4시간을 끝없이 펼쳐진 프랑스 평야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산악 지대인 스위스로 향했다. 로잔에 도착 모처럼 한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인터라겐으로 이동 Hotel Christina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 일정 대부분을 버스 또는 기차 속에서 보낸 셈인데. 걷는데 자신이 없는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으로 안도했다.
9월23일 수요일 맑음 스위스에서 아침을 맞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프스의 영봉들, 보석처럼 아름다운 호수, 수 천 만년의 웅대한 빙하 등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 스위스...겔트민족이 살던 선사시대부터 오늘날 까지 동서 유럽의 교차점에 자리하여 역사와 문화유산, 개성 넘치는 건축물, 사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이 있는 매력의 나라로 수도는 베른(Bern) 인구는 약 720만, 국토는 한국의 1/5, 독일인, 프랑스인, 이태리인들이 모여 살고 있어 언어도 다양한 나라, 만년설이 있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지만 겨울 날씨는 한국보다 따뜻한 나라,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90%인 나라, 이 정도로만 스위스를 소개 하려고 한다. 스위스의 산악 도시 인터라겐은 융프라지역의 중심 마을로 투 호수와 브리엔스 호수 사이에 있는 산악 도시로 이 지역에서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이다. 오스트역에서 융프라우 고지대까지는 버스 또는 산악 기차 편을 이용하는데 우리 일행은 산악 기차 편을 이용해서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융프라우(Jungfrau)는 Top of Europe이라고 불리는 영봉으로 한국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으로 해발 4,158m고지로 그 이름과 함께 탁월한 전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멋이 깃들여 있었다. 산악 열차를 타고 올라 갈 때 아름다운 알프스의 전형적인 마을이 눈에 들어 왔고 만년설로 하얗게 덮인 준봉들의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곳곳에 펼쳐지는 빙하, 특히 알레치(Aletsch)빙하의 장관은 조물주를 찬양하게 만들었다. A Guyer Zeller(1829~1899)가 분이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산악 철도를 계획할 때 반대도 많았고 투자자들이 돈을 회수해 가 여러 번 위기를 맞았지만 이를 극복하여 만들어 진 산악 열차길... 이 열차는 가운데 톱니바퀴를 연결하여 끌어 올리는 특수 장치를 가진 열차로 이런 열차가 아니면 올라 갈 수 없는 험준한 산에 굴을 뚫고 기차 길을 만든 지혜와 용기, 앞을 내다보는 혜안에 감탄했으며 이로 인해 스위스가 많은 돈을 벌고 있음을 보고 한 사람의 힘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 산악 열차는 3번을 갈아 타는데 갈아 탈 때 마다 열차 모양이 다르고 철로길 모양도 다른 이유는 공사를 중단 했다가 다시 만들 때 더 발달된 기술을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 길은 터널로 이루어진 길인데 터널중간에 바깥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일부러 만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굴을 팔 때 나오는 돌을 버렸던 장소를 잘 꾸며 전망대로 만든 것이다. 이 역은 유럽 최고 높은 지점의 역이라는 또 하나의 애칭이 붙어 있다. 정상에 있는 융프라우 요호(3,454m)에 올라가니 인공 얼음 동굴이 있고 여기를 통과해 나가니 산 정상으로 하얗게 덮인 만년설을 접하게 되어, 만져 보고 밟아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얼음 동굴이 있는 건물에는 다양한 레스토랑 등 부대시설이 있어 편리했으며 카페에서 마셨던 진한 커피의 향기가 아직도 입안을 맴 돌고 있다. 건너편 아래에 쉴트호른(2,967m)이 보인다. 이곳은 수많은 봉우리들을 한 눈이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자랑하는데 이곳에서는 융프라우는 물론 묀히(Monch), 아이거(Eiger)봉우리까지 한 눈에 펼쳐지는 조망으로 찬사를 받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곳도 산악 열차와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올라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멀리 알프스의 영봉 몽블랑(Mt. Blanc)가 눈에 들어 왔다. 수려한 산세로 알프스의 파노라마라고 찬사를 받는 곳, 에귀 디 마디(Aiguille Du Midi)전망대, 브레방(Le Brevent)전망대 등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돌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곳으로 여유가 생기면 알프스는 다시 한 번 꼭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을 현지식으로 해결하고 Kirchhofer을 방문 스위시제 시계를 구입한 후 17km 나 된다는 고타트 터널을 통과하여 이태리 밀라노를 향해 이동 했다. 4시간 40분동안 스위스 산악 지대를 벗어나 이태리 북부 산악지대를 누비는 버스길은 지루했지만 색다른 풍경은 흥미로웠으며 특히 고속도로 모습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와서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경부고속도로는 이태리 기술을 도입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이라는 가이드에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길 고속도로를 보고 계획했었으나 이태리 기술을 받아들인 것은 산악지대가 많은 이태리와 한국이 비슷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태리 밀라노에 도착하니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태리는 로마제국의 찬란한 역사와 르네상스의 화려한 꽃을 피운 나라로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각각 승전국과 패전국의 자리에 서게 되었으며 2차 대전 뒤 패전국의 어려움을 자동차 공업, 패션 산업, 관광 등으로 경제를 재건했다. 지역적으로는 공업 발달로 부유해진 북부지역과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남부 이태리가 공존하고 있다. 수도는 로마이며 인구는 약 5,800만 명, 국토는 한국의 1.4배, 라틴족으로 빠른 이태리어를 쓰고 있다. 아나운서의 말이 어찌나 빠른지 숨을 어떻게 쉬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기후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살기가 좋으며 98%가 카톨릭을 믿는 종교의 나라, 고대 문화 유적과 카톨릭 유적이 많은 나라다. 밀라노(Milano)는 해발 122m의 이태리 롬바루디아주의 주도로 예로부터 경제의 중심지였다. 현재도 19세기 후반에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공업 덕분에 북 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도시로, 또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패숀, 음식, 오페라가 유명하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 그리고 네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 유명하다. 도착했을 때는 날이 어두워 두오모 성당의 외관과 스칼라 극장의 모습을 어둠속에서 보는 것으로 끝났다. 두오모(Duomo) 성당은 3159개의 거대한 조각군으로 장식되어 있고 100M 높이의 유리 청탑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길이가 157m, 높이 108,5m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이어 세계 2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1386년 잔 갈레아치오 비스콘티 공작의 명으로 착공되었으며, 450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어 19세기 초에 완공되었다고 하는데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은 세계적인 오페라의 메카로 불리 울 만큼 유명한데, 1778년 세워졌으나 제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것을 1946년 재건했다고 한다. 19세기 이후로 푸치니, 로시니, 베르니 등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이 초연되었다. 내부는 들어 가 보지 않았으나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붉은 카펫, 화려한 상들리에 장식 등 고급스런 장식을 자랑한다고 했다.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 갈레리아( Galleria Vittorio emanuele)는 1865년부터 13년에 걸쳐 1877년에 완공된 아케이트로 이탈리아의 통일 기념을 위한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했다. 유리로 장식된 높은 둠형의 천장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예약된 한국 식당에 가니 예고도 없이 문이 닫혀 있어 당황했고 상도의가 없는 식당주인의 인격을 의심했으며 해도 너무 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단체 예약 손님의 저녁을 먹을 수 없게 한 일,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헤매다가 가까운 이태리 식당을 교섭하여 스파게티로 끼니를 해결했는데, 스파게티를 먹을 수 없는 나는 채소 한 접시로 저녁을 대신한 것을 호텔에 돌아와 누룽지로 허기를 채우고 꿈나라로 들어갔다.
9월 24일 목요일 맑음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약 4시간을 남서쪽으로 달려 피사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세서부터 사탑까지 가는 거리는 꽤 멀었는데, 좁은 골목길로 흑인장사꾼들이 판을 치고 있어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유명한 곳이라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으며 소매치기가 많으나 귀중품 조심을 하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쓴 웃음을 지었다. 피사는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중세에는 해양도시 국가로 군사적, 상업적 입지가 강력했으나 1905년 피렌체에 정복되면서 소박한 한촌으로 변했다고 한다. 피사는 사탑으로 유명하지만 과학자 ‘갈릴레오 갈리레이’와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 ‘조반니 피사노’의 고향으로 도 이름이 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현재 기울기가 5도 30분으로 매년 1mm씩 기울고 있어 이를 바로 잡아보려고 모든 기술을 동원 연구를 하여 기우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1174년 착공하여 10m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 앉아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 건설하여 1350년 8층탑을 완공했다고 한다. 사탑 내부에는 294개의 계단이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시가지 전경을 볼 수 있다고 했으나 입장료도 문제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탑 경내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닭튀김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용기를 내어 닭다리 한 개를 먹었더니 역시 소화가 안 되어 설사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다행으로 잘 넘어가 안도했다. 식사를 마친 후 또 다시 4시간을 달려 로마에 도착 현지식으로 저녁을 들고 호텔 Villaa Lina에 들어가 피곤을 풀었다. 결국은 4시간을 달려와 잠깐 구경하고 다시 4시간을 이동하는 식의 여행, 다시는 단체 관광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9월 25일 금요일 맑음 로마 시내 관광이 시작되었다.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 사랑의 도시 로마는 한마디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가진 도시라고 말하고 싶다. 로마에 도착하기 전 버스에서 그레고리 팩과 오드리 햅번의 ‘로마의 휴일’을 감상했다. 내가 20대 본 영화이니 50년도 넘은 영화를 그것도 로마를 향해 가면서 보니 감회가 새롭고 기대로 흥분이 되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주인공인 공주가 남자 친구를 사귀고 평민처럼 로마 관광지를 다니면서 사랑을 나누던 곳을 그대로 보게 된다고 해서 더욱 기대를 하였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는 옛 유적을 그대로 보존한 채 현대문명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광이 시작되었다. 바티칸 시국을 보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하며 관광객이 많을 경우 여러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겁을 주어 걱정을 했으나 다행으로 10분 만에 입장이 되어 홀가분한 기분으로 관광을 했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안에는 또 하나의 국가가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으로 알려져 있는 전 세계 카톨릭의 총 본산인 성스런 장소가 바티칸 시국이다. 여기에는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인 ‘천지창조’ 와 ‘아테네 학당’ 등 을 볼 수 있다는 흥분된 상태로 한나절을 보냈다. 바티칸 시국은 인구가 약 1,000명, 면적은 0.44제곱km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고 했다. 바로 들어서니 성 베드로 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의 웅장한 모습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베드로 무덤에 세워진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어 마침내 1626년 교황 우르반 8세 때 성 베드로 성당으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크며, 성당 내부에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우뚝 서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Piazzadii San Pietro)은 성 베드로 성당 입구 앞에 있는 폭이 240m로 30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광장으로 좌우로 반원형의 화랑에 4열의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원주 284개가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또한 광장 중앙에는 서기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운반해 왔다는 높이 25,5m, 무게 320톤의 오베리스크가 서 있었다. 매주 일요일이면 교황의 집무실 창문이 열리면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강복을 내린다고 한다. 시스티나 예배당(Capella Sistina) 내부를 관람했다. 교황 궐위 시 새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하는 곳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인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벽화 ‘최후의 심판’ 과 ‘천지창조’를 바라보면서 웅장함에 놀라고 말았다. 그림 앞에 한참이나 서서 바라 볼 때 어떤 힘으로 인해 내 몸이 전율하고 있었다. 정말 위대한 작품이다. 이런 그림을 볼 수 있는 행운에 감사했다. 관람이 끝난 후 중국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로마 시내를 관람했다. 집시들의 소매치기와 좀도둑이 극성을 부린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으나 연간 천 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있다니 놀랄 만 일이다. 정말 관광객으로 로마는 넘치고 있었다. 길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나는 걷는데 자신이 없어 벤츠를 타고 다니는 관광 여행을 거금을 들여 선택하고 기분 좋게 관광을 시작했다. 2~3십만 불이 넘는 벤츠 승용차를 타 보는 기분... 타 보니 돈이 좋기는 좋다. 오래전 시드니 남부 도로 장거리 여행을 이런 벤츠로 운전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조심해서 운전을 하느라 제대로 기분을 못 내었는데. 운전기사를 두고 다니는 기분은 하루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먼저 간 곳이 콜로세움(Colosseum)이다. 로마의 심장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AD 72년에 네로 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 연못에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공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었다고 한다. 대리석과 대리석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뺏어 온 동판을 썼는데 성당을 짓기 위해 뜯어내어 몰골이 흉했지만 그 규모에 놀랐다. 옛날 생사를 겨루는 검투사와 짐승의 격투 장면이 보이는 듯 했다. 5,5000명이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로 최대지름 188m, 최소지름 156m, 높이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이다. 고대에 이런 건물을 건축한 로마인들의 업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음에 들린 곳이 포로 로마노(Foro Romano)였다. 이곳 ‘포로’라는 뜻은 공공 광장을 말하는데, ‘포럼’이라는 어원이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이곳은 고대 로마의 상업, 정치, 종교, 등 시민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관을 밀집해 놓았던 지역으로 로마의 중심지로서 로마제국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쇠퇴와 멸망이라는 2500년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심 부분 몇 군데를 제외하고 283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흔적도 없는 상태이다. 다시 벤츠를 타고 이동해서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분수를 구경했다. 교황 클레멘스 13세 때 공모전에 당선된 니콜라 실비의 작품이다. 이 분수의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불리며, 유래는 전쟁에서 돌아 온 목마른 병사에게 한 처녀가 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에 분수를 설치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분수에서 등 뒤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동전 던지는 모습을 보았으며, 이 돈을 수거 자선사업에 쓴다고 한다. 카타콤베(Catacombe)에 대한 설명은 들었으나 일정 관계로 가 보지는 못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교회를 말한다. 로마는 크고 작은 카타콤베가 25곳 정도 있는데, 대부분 2,3층의 미로로 되어 있어 가이드가 없으면 길을 잃기 쉽다고 한다. 카타콤베의 천장과 벽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으며, 수많은 성인들이 묻혀있어 초기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로 성지 순례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은 86년 도미티우누스 황제가 조성한 길이 240m, 폭 65m의 전차경기장 유적지인데, 코로소 거리와 테베레 강 사이에 있으며, 차가 들어 갈 수 없는 이곳은 아늑하고 조용했으며 세 개의 분수가 주위에 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였다. 판데온(Pantheon)의 Pan은 ‘전부’, Theon은 ‘신’이란 뜻으로 로마들이 믿고 있는 모든 잡신을 봉헌하기 위해 BC25~17년에 건립한 신전이다. 잦은 외침과 오랜 풍상 속에서도 청동 문과 둥근 천정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소개를 했다. 16개의 웅장한 정면 기둥은 코린트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고, 원형 천정은 격지무늬 장식이 5열로 천장 전면을 덮고 있는 것이 장관이 였다. 대전차 경기장(Circo Massimo)은 장방형의 길쭉한 건물은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든 전차경기장으로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1인승 이륜 전차경기장이다. 지금은 무너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실제로는 그 크기가 664mx124m에 이르렀으며 2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 (Piazza di Spagna)은 17세기 스페인 영사관이 있던 곳으로 ‘로마의 휴일’로 더 유명해 졌던 곳으로 한국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 광장은 137개의 스페인 계단과 트리니티 디몬티 교회(삼위일체교회)의 종탑 및 오벨리스크가 이채로웠다. 관장에는 보트 모양의 대리석 분수가 있는데 베르니니의 아버지 피에트로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바로카시아(조각배 분수)라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여행자들의 쉼터로 애용되는 계단에서 우리 일행도 아픈 다리를 쉬면서 단체사진을 찍기는 했는데 저장된 것이 없어 아쉽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은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성당 입구 한쪽 벽면에 있는 진실을 심판하는 얼굴 모양의 원형 석판 조각품으로 그레고리 팩이 입속에 손을 넣었다가 손목이 잘려 나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오도리 햅번이 놀라는 장면을 연출한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입속에 손을 넣으면 손목이 잘린다고 한다. 여기서도 한 컷 찍었는데.. 사진이 없어 진 것 같다. 이 원형 석판은 강의 신 ‘폴라비오’ 얼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고, 중세 로마시대 때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은 포폴로 광장에서 남쪽으로 늘어선 코루소 거리의 하단에 있으며, 로마 교통의 중심지로 6개의 중요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광장 정면에 ‘하얀 웨딩케익’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 통일 기념관이 있었다. 이 기념관은 이탈리아 통일 50주년 기념으로 1911년에 완성된 네오 클래식 양식의 건물로 유명하다고 한다. 엠마누엘 2세 국왕의 기마상 아래에는 제 1차 세계대전 무명용사의 묘가 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모처럼 한식으로 저녁을 들어 개운한 기분으로 밤을 마지 했다. 호주에 산지도 30년이 되어 가지만 식습관은 바꾸지 못했으며 음식 알레지로 밀가루를 먹을 수 없는 나로서는 한식의 고마움을 더 느끼게 해 주었다.
9월 26일 토요일 맑음 Hotel Villa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일찍부터 서둘렀다. 르네상스의 발생지 피렌체 까지 4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피렌체(Firence)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14~15세기 에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르네상스를 ? 피운 도시라고 한다. 약 46만 명의 인구의 소도시로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지이다. 도시 정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도시이다. 로마 다음으로 유적지가 많아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으로 많은 유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했다. 거리 중심에 들어서니 꽃의 성모 마리아 대 성당(Duomo)의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 왔다. ‘가능한 장엄하게, 더욱 더 화려하게’라는 컨섭에 따라 1296년 공사가 시작되어 1371년에 본당이 완성된 곳으로 그 규모와 화려함에 놀라고 말았다. 특히 아취형 돔은 피렌체 어디에서도 보이는 명물로 거대하고 찬란했었다. 버스가 미켈란젤로 광장(Piazzaie Michelangelo) 언덕에 멈췄다. 도시 동남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지만 피렌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두오모를 비롯 해 베키오 다리, 아르노강과 언덕 등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점심을 이탈리아 스파게티로 해결하고 단테의 생가를 지나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로 갔다. 중세 이래로 피렌체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은 정치적인 연설과 시위에 장소로 많이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치렌체 관광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3시간 30분이 걸리는 물과 운하의 도시 베니스로 이동해서 Hotel da Vito에 여장을 풀었다.
9월27일 일요일 맑음 ‘물의 도시’ 베니스(venice)..낭만의 도시 베네치아(이탈리아어)(Venezia),,.9~15세기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던 베니스...동양과 서양이 함께 공존하는 도시... 등으로 표현하지만 이 도시가 있기 까지 시련과 아픔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중국 북쪽에 훈족(몽고족)은 만리장성으로 인해 더 이상 중원에서의 노략질을 할 수 없게 되자 서쪽으로의 대 이동을 해서 유럽 전역을 유린했던 것이다. 터키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프랑스와 독일 스칸디나 반도를 빼앗으면서 서진할 때 이들이 지나간 곳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고 갔던 것이다. 바로 유럽의 암흑시대가 열린 것이다. 몽고족이 고려를 침범하자 강화도로 임금이 피접을 해 저항 한 것처럼 베니스 근방에 살던 이탈리아 사람들은 훈족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150여개의 작은 섬으로 피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늘어나는 많은 피난민들로 섬이 포화상태사가 되자 호주에서 자라는 컴츄리와 같이 물에 썩지 않는 나무를 구해다 갯벌에 말뚝을 박고 집을 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바다 위에 말뚝으로 만든, 인구 30만 명이 사는 물의도시가 탄생되었으며, 9~15세기에는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던 곳이다. 바다위에 떠 있는 도시에 거대한 건물이 들어 선 모습은 불가사이 했다. 특히 산 마르크 성당(Basilica San Marco)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동양의 비잔틴과 서방 양식의 혼합 구조로 건축되어 동서양을 함께 보는 듯 했다. 1063년~1073년에 산 마르코(마가복음의 마가)의 무덤을 덮는 교회로 세워졌다가 황금의 교회로 이름이 붙여진 성당으로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에 걸쳐 개축을 하여 다양한 양식이 가미 된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대리석과 모자이크의 조화는 눈을 부시게 했으며 세 개의 깃대가 꽂혀 있는 모습이 특이 했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 왕국 깃발이라고 했다. 성당 내부를 구경할 때는 정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미니 스카트 등 옷차림이 야한 관광객들은 바깥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다. 성당 앞에 큰 산 마르크광장이 있는데, 길이 175m 폭 80m의 주변에는 회랑이 설치되어 유명한 시인, 묵객이 찾아와 한담을 나누었다는 유명한 플로리안(Florian) 카페에서 아주 비싼 커피 한 잔을 마셨던 기억이 새롭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명품만 파는 고급상점이 줄 지어 있었다.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라고 해서 바라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다리였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베니스는 참으로 많은 다리가 섬과 도시의 여러 지역들을 이어주는 것인데 탄식의 다리가 다른 것은 총독부가 있던 두칼레궁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가게 되어 세상과 완전히 절단됨을 한탄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한 작가이자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가 이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탈옥을 하여 더 유명해진 곳이다. 베니스에서 제일 멋진 건물을 꼽으라면 단연 두칼레 궁전(Paiazzo Ducale)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물로 9세기경, 베니스 공화국 총독인 도제의 공관으로 지었던 것인데 고대의 고딕예술과 베니스의 동방적인 장식과 융합되어 특별한 베네치안 고딕을 탄생시킨 원조라고 했다. 콘도라는 옵숀으로 되어 있어 역시 거금을 냈지만 와인 잔을 들면서 고대 베니스 의상을 한 뱃사공과 특별히 팁을 주고 모신 낭만의 이탈리아 가수의 멋진 이탈리아 민요를 듣던 일, 아직도 이탈리아 특유의 음색으로 부르던 산타루치아가 귓가에 맴돌고 있다.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 5시간이 걸린다는 오스트리아 티톨지방의 아름다운 소도시 인스부르크를 향해 달렸다. 인스부르크로 가는 길은 이탈리아 북부 산악 지대를 통과하는 기로 한국의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로 착각할 정도로 풍치가 한국과 유사하여 향수를 갖게 했다.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들어 섰다고하나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국경통관 절차가 생략된 유로국가임을 실감했다. 오스트리아(Austria)는 호주국명과 혼동이 되는 곳으로 ‘동쪽의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1278년 함스부르그 왕가의 속령이 되었으며 이후 함스부르그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하여 중부 유럽을 지배하는 강대국이었다. 거리, 숲, 예술과 음악 등에 다채로움과 우수성을 발휘한 나라로 다른 유럽국가 보다 앞섰던 나라로 수도는 비엔나이며 인구는 약 750만 명, 민족은 게르만족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97%가 독일어를 쓰고 있다. 인스부르크(Innsbruck)는 인구 12만으로 오스트리아 알프스인 티롤 지방의 중심도시로서 해발 574m 고원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인스부르크란 ‘인(Inn)에 걸린 다리’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시내 한복판에 인 강이 멀리 노르트케테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2000년 전에는 로마 군단의 주둔지였고, 예로부터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재 못미처에 있는 주막 마을로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리아 테래지아 거리(Maria-Theresien-strasse)는 인스부르크 시를 가로지르는 중심 거리로 시내를 내려다보는 Nordketle산의 바위 벽의 풍경이 평풍처럼 쳐져 있었다. 신성 로마제국 카롤 6세의 장녀이며 남편 프란츠 1세와 함께 통치했던 마리아 테레지이의 이름을 딴 이 거리는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고 있으며 관광개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다. 가옥들이 17~19세기 고풍으로 이루어 졌으며 티롤지역의 복장을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어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었다. 황금지붕(Goldenes Dach)는 pfmchzm 프리드리히 거리의 막다른 곳에서 있는 금빛 찬란한 지붕인데, 16세기에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아래 관장에서 개최되는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만든 발코니 위에 설치한 것으로, 궁전건물의 5층에서 내민 이 지붕은 금박 입힌 동판 2657개로 덮여 있고 발코니에는 여덟 영지의 문장과 황제, 왕비상 등이 부조되어 있으며, 벽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내부는 올림픽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성 안나 기념탑(Annas Ule)마리아 테레지아 거리의 중심에 있는 기념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바비에른 군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한 것을 기념하여 1706년에 세워진 탑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흰 대리석탑 위에는 성모마리아가 대좌에는 성인상과 성 안나 상이 놓여 있는 것을 구경하고 호텔식으로 저녁을 마친 후 Neuwirt Hotel에 잠자리를 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9월 28일 월요일 맑음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마지막 코스인 퓌센으로 향했다. 독일로 향한 것이다. 독일(germany)은 라인 강의 기적, 중세를 그대로 옮겨 놓은듯한 로만틱가도, 다양한 맥주와 게르만 민족의 나라로 어디를 가던 화제가 많은 곳이다.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발전을 조화시키며 유럽의 핵심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는 나라이며 명차 BMW와 Mercedes-benz, 그리고 Audi를 생산하는 자동차의 나라, 60년대 우리나라의 광부와 간호사들의 진출로 조국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해 준 나라 등등..우리나라와는 밀접한 관계를 갖은 나라로 수도는 베를린이며 인구는 8,300만 명이고 국토는 한반도의 1,6배이고 신교와 구교가 반반씩 공존하는 나라이다. 유럽여행의 마지막은 독일의 백조의 성이 있는 퓌센 그리고 뮌헨을 거쳐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까지인데, 먼저 로만틱 가도(Romanic Street)는 라인 강변을 따라 뷔르츠부르크 퓌선까지 총 360km에 달하는데 중세시대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성과 아름다운 마을들이 곳곳에 있었다. 우리들은 바이에른 알프스 산맥 동쪽 기슭에 위치한 퓌센으로 갔다. 이곳은 레히 강을 비롯해서 주변에 아름다운 호수가 많아서 독일 내에서도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했다. 백조의 성을 바라볼 때는 동화속 마을에 온 듯 착각을 불러 일으켰었다. 노이슈반슈타인성(Schloss Neuchwanstein)은 백조의 성이란 뜻이며,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가 권력과 재력을 총 동원해서 만든 성이라고 한다. 월트 디즈니가 이 성을 모델로 해서 ‘디즈니 성’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멀리서만 보았지만 높은 산 중턱에 거대한 성을 만든 것은 지금의 기술로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여길 정도이며 일반 가정집도 산 중턱에 많은 것을 보고 어떻게 오르내리며 생활을 하나 걱정이 앞섰다. 백조의 성 숲길을 따라 10분 쯤 올라가면 마리엔 다리가 보인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버스를 타고 올라가 정류장에 있는 마리엔 다리(Marienbrucke)부터 보게 되었고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백조의 성 모습에 취해 한참이나 눈을 돌리지 못했다. 백조의 성은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도보로 올라 간 일행들도 내부는 들어가지 못하고 외관만 보았다고 해서 덜 섭섭했었다. 멀리 또 하나의 성이 보였는데, 이 성은 알프스호를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진 네오 고딕 양식의 건물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고딕 양식도 그 종류가 다양하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구별이 안 된다. 이는 루드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1832~1836년에 건축했다고 한다. 성 내부는 동양 미술품으로 장식된 화려한 모습이라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점심을 해결하고 뮌헨(Munch)을 향해 갔다. 뮌헨는 인구 130만 명의 독일 제 3의 도시로 남부 독일의 중심도시이다. 12세기 이래 700년동안 독일에서 가장 화려한 궁정문화를 꽃피웠던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로 르네상스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히틀러가 나치당을 창당한 곳이며, 제 2차 대전 때 피해를 제일 많이 받은 곳이나 전쟁전의 모습으로 재건해 놓았다고 한다. 시내에 들어서자 BMW본사 건물 앞에 버스가 멈추고 전시된 자동차를 구경도 하고 타 보기도 했다. 또한 시내 중심에 있는 마리엔 광장(Marienplatz)을 거닐어 보았다. 이곳은 시내 중심부에 있으며 신 시청청사로부터 프라우엔 교회 등 관광 명소가 집중되어 있어 차량이 다니지 않는 광장으로 고급 상접들과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어, 산책을 하면서 쇼핑도 했다.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는 벽돌로 지어잔 고딕양식의 건물로 구슬모양의 돔 형태의 청탑이 인상적이었다. 광장을 산책한 후 현지식으로 저녁을 들고 소도시에 위치한 Ibis Munich City 호텔에 투숙하기 위해 1시간을 달려 잠자리에 들었다. 9월 29일 화요일 맑음 드디어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을 들고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향하는 길은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는 안도의 순간이다. 사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탈 없이 마치게 된 것을 감사했다. 프랑크푸르트는 역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한 곳이며, 대 문호 괴테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는 금융, 상업의 중심지이자 다양한 박람회가 많이 열리는 국제도시로 더 이름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국제공항이 있어 유럽각지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중심에 있는 도시이다. 10시간 30분을 날면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는 여정 2번이나 나오는 기내식 때마다 와인을 여러 잔 주문해서 마셨다. 그리고 꿈나라로 깊이깊이 빠져 들어 갔다. ‘나는 여행이란 길 위의 학교라고 굳게 믿는다. 그 학교에서는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단순하게 사는 삶, 돈이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삶에 대한 과목을 최고로 잘 가르친다. 한번 배우면 평생 쓸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수업이니 필히 수강하시길 바란다.’고 한비야의《그건, 사랑이었네》중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여행은 길 위에 움직이는 학교란 말이 수긍이 간다. 운명과도 같은 새로운 만남이 있고 새로운 삶을 접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 감동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또한 나를 용서하는 법과 화해하는 법도 배우고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기술도 배우고, 기쁨과 행복도 배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주입식 교육처럼 따라다니는데 급급했던 단체 여행만은 삼가 하리라 다짐했다. 그 나라를 충분히 연구하고 음미하고 문화 속에 깊숙이 파묻혀 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여유를 갖고 하는 여행, 이런 여행을 앞으로는 할 예정이며 ‘걸어서 세계속으로’ 처럼 내가 다닌 곳을 영상으로 담아오고 싶다. 우선은 해외보다 호주 일주를 하면서 영상물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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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드니의 문학과 사진의 만남 원문보기 글쓴이: 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