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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우리집 대소사
* 혁진 조카스타스 매니저로 입사
* 큰 며느리 연방정부 사법부 토론토 첫 출근
* 희수연
* 집사람 고희
* 한옥 여행
* 집사람 대학 동창. 다낭 호이안
* 집사람 마산복지관 음악, 코엑스 음악
* 태극기 집회
* 집사람 민요선생 칠순잔치 노래
* 해외 여행
요르단 이스라엘여행
괌 휴가
북해도 여행
터키 여행
캐나다 혁진 회사 이전
카나다에 살고 있는 큰아들 혁진이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를 옮기겠다는 말을 해왔다.
IT 중견기업으로 12년간 다닌 회사인데 회사를 옮긴다는 것이 마음에 많은 심적 부담이 오는 모양이다.
다행히 토론토에 있는 규모가 큰 같은 IT 업종으로 게임개발업체인 조카스타스 매니져로 입사가 확정되었다.
2019년 7월 22일 첫 출근을 하였다.
전 회사보다 싸라리가 약간 높고 상황으로 봐서 옮길만한 시점이 되어 잘 되었다고 했다.
신입은 의료보험이 3개월간 정지된다고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고 있다.
현지 회사에 입사하여 안정되게 자리 잡고 집안을 꾸려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큰 며느리 사법부 첫 출근
토론토 대학교 법대를 나온 큰 며느리는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희들 키우느냐고 집안 살림만 하였다.
아희들이 커서 학교에 들어가니 로우 스쿨 공부한다고 하더니 캐나다 연방정부 사법부 토론토에 공무원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출근 일자가 공교롭게도 큰아들 첫 출근하는 날과 똑같이 7월 22일이다.
집안에 겹경사가 난 것이다.
이제 큰아들 가정은 큰 변고가 없는 한 일생동안 생활하는데 근심할 것 없이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부모의 마음이 놓여 내심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집사람은 아들 부부가 각기 출근을 하는데 교통편이 문제라며 보테서 승용차를 사라고 C$3만불을 송금하였다.
희수연
나는 압구정 더차림 식당에서 77세 되는 희수연을 치렀다.
임오생 동지섣달 음력 12월 18일 양력으로는 1월 23일이다.
금년에는 음력과 양력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이다.
사촌 조카들과 손주들 삼십 여명이 참석하여 식구들만 조촐한 저녁을 하였다.
7남매 중 막내로 1880년대 생인 부모에게서 쉰둥이인 내가 태어났다.
큰누이가 생존해 계시다면 100세이고 누이의 아들인 장질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나는 한 세대를 뛰어넘어 살고 있는 셈이다.
18세기에 태어나신 부모님 밑에서 19세기를 살고 20세기에 신세대와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해방 전에 태어나 광복과 6.25때 피죽으로 연명하며 중학교 때 장질 덕분에 판교에서 서울로 올라와 누이 집을 전전하였다.
4.19와 5.16을 거치며 월남참전 용사로 청룡부대 포병 전포대장을 하였다.
굴곡 많은 우리나라 현대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세대다.
국민소득 60불에서 3만 불 시대를 살고 있으니 국가가 천지개벽을 하는 것을 다 본 산 증인이다.
전 세계 최빈국에서 영광의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한국뿐이다.
지겹게 가난한 시절에서부터 풍요로운 현시대를 살고 있으니 고생한 환갑전의 일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식구들 앞에서 나는 내 나이가 77세라는 것이 나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환갑만 살면 장수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환갑 장이를 청년이라고 한다.
군대를 전역하고 말단 봉급쟁이시절 판교에서 서울 영등포 까지 출퇴근 하던 시절이 가장 고생스러운 시절이었다.
대중교통으로 판교에서 서울로 출퇴근 시간만 다섯 시간 이상 걸리니 육체적으로 피곤하였다.
더구나 고대 MBA 다닐 땐 안암동까지 들르니 교통시간에 체력이 달려 버스간에서 졸기가 일쑤였다.
집에서는 온 집안을 도맡아 살림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 말단 봉급을 가지고는 교통비도 빠듯한 판에 조카들 학비로 등록금 때가 오면 피가 마르며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가 된다고 식구들에게 옛날 일을 이야기 하였다.
시간이 지나 70년대 말 경리부장 시절에 친척들에게 어음할인을 주선해 주었는데 부도가 나서 내 책임도 아닌데 내가 다 변상을 해 주었다.
그 당시 금액이 일억이나 되니 당시로서는 거금이다.
커미션도 받지 않고 어음할인을 주선해 주었으면 내 책임은 없는 것이다.
어음할인을 해준 사람들이 모두 내 친척들이다.
이 친척들을 부도났다고 내 책임이 아니니 모른척하고 있어도 되는 일이다.
그러면 내가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을 그 많은 돈을 내 개인 돈으로 모두 다 변상해 주는 바람에 내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거꾸로 몇 년 동안 생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 친척들에게 욕먹고 외면당하지 않으려고 내 개인 돈으로 변상을 해 주었는데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서운하고 배신감을 느꼈다.
그 이후 우리 집에 들락거리던 친척들의 발 거름이 뚝 그쳤다.
내 인생에 두 가지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다.
하나는 장조카가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전 재산을 갖고 판교 토지 보상 시에 나르샤 한 일이다.
그 바람에 칠 남매 중에서 나 혼자 부모님의 재산을 한 푼도 못 받고 빈손으로 자수성가하게 되었다.
70년대 초 말단 봉급생활자로 전기도 안 들어오는 판교에서 서울로 출퇴근할 때다.
집안 생활을 책임지고 조카들 학교에 보내는 것을 보고 동네 어르신이 나를 보고 이런 효자가 없어, 자기자식도 키우기 어려운데 조카를 키우니 효자가 따로 없어, 하시며 조카가 커서 삼촌 가슴에 못이나 박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며 뒷일을 걱정하였다.
나는 장조카가 선량하고 똑똑하여 나의 가슴에 못을 박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고 집안을 잘 키워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장조카가 작은 아버지인 나를 배신하고 집안의 전 재산을 가지고 지금까지도 연락도 하지 않고 잠적해 있는 것이다.
나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궁금하더라도 참고 있다.
장손주 들의 근황도 궁금하지만 참으며 기다리고 있다.
손주가 군대 갔다 와서 회사 다닌다는 말을 바람결에 듣고 있다.
그래도 배신한 장조카가 쾌심하지만 관계 개선이 되어 원상회복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풀지 못한 우리 집의 문제다.
또 다른 하나는 내 사촌 형들의 문제다.
청계산과 음성 종중 땅 문제다.
사촌큰형이 청계산 하오고개 남쪽 산을 야금야금 팔아먹으며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시골에서 어렵게 살며 끼니를 걱정하는 형편인데 작은집인 우리 집에 쌀 한말도 보태준 것이 없다.
사촌 큰형이 죽으니 사촌 작은형이 자기 앞으로 종중 땅을 등기해 버렸다.
사촌 작은 형은 당숙에 양자를 갔는데 상속법에서는 친자로 되어 상속도 된단다.
내가 군대를 전역한 후에도 청계산 종중 땅만 160정보(480,000평)이상이 있었다.
하오고개 남쪽 산을 사촌 큰형이 다 팔아먹고는 사촌 작은형이 북쪽 땅을 거덜 내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북쪽 땅의 한 등성이만 남아 있다.
이 등성이에 고조부 산소와 우리 부모님 산소가 있다.
금토동에 있는 증조할아버지 묘소를 몰래 파헤쳤다.
판교 제3 테크노 벨리를 확장한다고 하니 기획 부동산 덧에 걸린 모양이다.
사촌 작은 형에게 왜 증조부 묘소를 파묘하면서 나에게 연락도 없었느냐고 따지니 나한테 알리면 반대할 것 같아 연락을 안했다는 것이다.
양반이라는 안동 권씨 집안에 큰집이라는 사촌들이 하는 꼬락서니다.
현재 있는 땅이라도 종중 땅으로 등기를 하라고 하니 못한다고 법대로 하란다.
사촌 작은형이 처음에는 음성 땅이고 청계산 땅이고 모두 큰아버지가 산 것이라고 우겨대서 내가 조목조목 따지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말이 막히니 법대로 하란다.
사촌 작은 형에게 1, 2, 3차 보낸 장문의 문서를 정리하여 종중 땅으로 등기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문서를 사촌형에게 등기로 보내는 방법밖에 없으니 내 자신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종중 땅으로 결론을 못내 세향도 제대로 못 잡숫게 되어 선조들에게 미안함뿐이다.
큰집인데 조상에 대하여 제사나 차례를 한 번도 안 지내며 조상이 만들어 놓은 종토를 팔아만 먹고 사는 사촌의 심보가 쾌심할 뿐이다.
더구나 조상의 차례나 사초를 우리가 맡아서 계속 하고 있는 내 꼴이 웃기는 꼴이다.
내가 못한 것을 종토 문제를 다음 세대에서나 기대해 보자.
70년간 고조부 산소가 어데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차례한번 안 지낸 큰집의 큰형이나 작은 형이나 조상의 땅만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동네 이웃보다도 못한 이런 사촌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이야기하기도 창피한 일이다.
내가 희수연을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식들 덕분이다.
큰 자식은 토론토에서 작은 자식은 수원에서 자식 둘이 다 성가하여 살림을 잘 하고 있으며 자기 자식들을 잘 키우고 있다.
안전한 직장을 얻어 살림도 알차게 잘 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다.
자식이 결혼을 안 한다던지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부모에게 툭탁하면 돈 달라고 손 내미는 일이 있으면 꼴도 보기 싫고 생각도 하기 싫었을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과 며느리가 참으로 고맙다.
예민한 성격의 집사람과 툭탁거리지만 큰 사고 없이 지금까지 잘 살아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옛날의 가난하던 그 세월이 지나 환갑 후에는 우리 집안의 행복과 평화가 지속 되었다.
지금같이 즐거운 우리집안의 행복한 생활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집사람 고희
집사람 고희
8월 말일(음8/2일) 집사람 고희연을 남부터미널 두마리스에서 했다.
조카들을 부르지 않고 아들과 처제 식구만 불러 조촐한 생일잔치를 하였다.
내가 고희연을 치룬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 했는데 집사람이 벌써 칠십이 된 것이다.
환갑이 지나고 부터는 나이가 안 가는 것 같아도 어느새 칠순이 된다.
집사람 얼굴은 처녀 때는 나이가 들어 보이더니 지금은 아주 젊어 보인다.
화장도 안했다는데 십년은 젊어 보인다.
얼굴에 주름살도 안보이고 살결도 팽팽하니 칠십 노인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본인도 자기 친구들 보다 젊어 보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간호부장을 마지막으로 직장을 고만두고는 노후에 소일거리를 찾는다고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 하였다.
재봉틀, 주역, 태극권, 노래교실, 민요 등 하루도 쉴 틈이 없다.
재봉틀은 노량진 재활쎈타에서 배워 아희들 고등학교 때 오바코트를 만들어 입히는 등 열심히 공업용 재봉틀을 익혀 지금은 자신의 옷가지를 만들어 입는데 손색이 없다.
백화점에서 사는 옷에 못지않은 작품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데 칭찬해줄만 하다.
막내 누이와 손잡고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끊어와 같이 만드는데 재주들이 좋다.
막내 누이는 한복 제품을 했던 솜씨라 프로급이다.
주역은 사주팔자를 보는 명리학을 한남동 동호회에서 배우고 계속 익혀 웬만한 점쟁이를 능가한다.
파도 파도 힘든 주역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습에 계속 연마를 해야 하는 학문으로 통계학의 진수다.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현대인이 터부시하는 사주를 보니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주역의 깊은 맛은 오묘하기만하다.
태극권은 신사동 문화쎈타에서 배우고 대만 원정까지 가서 메달을 따오기도 했다.
중국 공원에 가면 노인들이 여러 명이 모여 군무로 갖가지 태극권 운동을 하는데 무척 좋게 보였던 모양이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운동을 하니 참 좋은 일이다.
압구정동 복지 쎈타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실버악단과 한조를 이루어 초청하는 곳에 가서 노래봉사도 한다.
마산 복지쎈타 개관식에도 가서 한곡 부르고 왔다.
이때 부른 처녀 농군과 섬마을 선생님은 유투브에 떠돌아 다닌다.
민요는 남한산성 학원에 가서 배우며 한복을 입고 창을 하러 다닌다.
자기 목소리가 빼어나서 선생도 감탄 한단다.
성남 시청 강당에서 합동 공연도 하였다.
지금은 장구도 치고 있다.
동창들을 만나면 친구들이 이거 네가 만든 옷이냐? 하고 뭇고, 자기 아들 생년월일 가지고 사주를 봐달라고 한다.
그리고 유투브의 처녀 농군 노래를 듣곤 깜작 놀란다.
이제는 성질만 고치면 나무랄 데 없는데 말투나 성질을 고치려고 하지를 않는다.
한옥 여행
이번 여행은 7/24일 1박 코스로 선비의 고장이라는 영주와 정신문화의 본고장이라는 안동을 순회하였다.
제네시스를 구입하니 한옥호텔 1박 권을 주어 이번 기회에 사용하는 것이다.
한옥호텔은 인천 남원 여수 안동 평창에 있는데 나는 안동 한옥 리조트를 선택하였다.
아침 일찌감치 서울에서 출발하여 영주의 소수서원에 도착하였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회헌 안향을 기리고자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우고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된 서원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교인 소수서원이 유명세를 타는데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운치를 더하고 소수서원 뒤 다리 건너에는 소수 박물관이 있다.
그 옆에는 선비 촌이 있는데 영주에 살았던 선비의 고택을 복원하여 한마을을 이루었다.
인동 장 씨 종가나 해우당 고택 등 명문가의 주택을 한곳에 모아 놓아 쉽게 고택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선비 촌에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민생활상이 없어 처음 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옛날에는 다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게 만들었다.
소수서원을 기점으로 저자거리와 수련원까지 지자체에서 노력한 흔적이 보이고 단지도 넓어 한 가족의 쉼터로 누구나 들릴만한 관광구가 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가는데 첩첩산중의 산골자기를 계속 달려니 가슴이 답답하였는데 도산서원에 도착하니 안동호를 끼고 있어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퇴계 이황을 기리는 서원으로 한석봉의 친필인 도산서원의 현판을 사액 받았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으로 도산서원을 부각시키고 있다.
안동 땜 밑의 월령교와 안동 민속촌을 보았다.
월령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목책교로 운치도 있고 야간에도 볼 수 있게 등을 달아 시민을 즐겁게 하며 강을 끼고 산책길도 있다.
민속촌은 아직은 미완성 단계라 다른 민속촌과 비교 상대는 안 된다.
한옥호텔 리조트 ‘구름에’에 여장을 풀었다.
민속촌에서 얼마 안 떨어진 언덕바지 골짜기에 있는데 모든 방과 부대시설이 한옥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16세기 초에 지은 골짜기 맨 위의 한옥 박산정이다.
마루에서 내려다보니 한옥호텔 지붕들이 보이며 푸른 나무와 어우러져 정취가 흐른다.
박산정은 선조때 공조참의를 지낸 이치의 호다.
안동댐 공사로 수몰지구에 있는 집을 이전한 곳에 우리가 숙박을 하는 것이다.
집은 마루 양쪽에 방으로 세칸으로 이루어 졌으나 방을 현대식 살림살이로 변형하느라고 작은 방이 더 작아져 협소한 느낌이 든다.
외부에서 보기엔 별도 대문과 반듯한 기와집이 보기에 아주 훌륭하다.
구름에 한옥 호텔에 11채의 객실이 있는데 각 기와집이 크고 작고 제 각각이다.
모두 이전한 한옥인데 수몰되어 없어질 한옥을 살려 이렇게 호텔로 운영을 하니 잘한 일이다.
고급 한옥호텔이라 개인당 10만 원 정도이니 만만한 금액은 아니다.
영주 선비마을의 축소판 같다.
한옥호텔에서 1박을 하고 안동 시내에 있는 웅부공원 옆의 태사묘로 갔다.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삼태사는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의 위패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유린하고 고려의 왕건을 팔공산에서 완파하고 밀려난 왕건이 안동 병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승승장구한 견훤은 안동(고창)에서 왕건만 무찌르면 삼국을 통일하는 형세가 되었다.
신라의 호족인 고창성주 김선평 김행 장정필이 왕건을 도와 병산에서 견훤을 대파하니 이 여세를 몰아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왕건은 김선평 김행 장정필에게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의 직위를 제수하고 태사에 오르게 하였다.
삼태사에게 시조를 허하고 특히 김행에게는 권이라는 성씨를 하사하여 김행이 권행으로 바뀌었으며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봉정사는 천년고찰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극락전과 대웅전이 국보다.
우리나라 고찰의 대부분 입구에서 일주문을 거처 대웅전까지 가는데 노송이 어우러져 운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멋있다.
봉정사 역시 노송이 어우러져 눈을 즐겁게 한다.
국보 외에 보물도 여러 점이 있어 고찰의 가치를 더해준다.
능동재사는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을 모시기 위한 재사다.
앞에 2층으로 된 추원루가 있고 뒤에 능동재사가 있다.
능동재사 옆에는 권태사 신도비가 있다.
재사 앞에 천등산 자락에 안동 권씨 시조 권행의 묘소가 있는데 재사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시조의 아들 인행의 묘소가 더 잘 되어 있다.
청도에서 이전한지 얼마 안 되어 관리가 잘된 모양이다.
이번 여행은 일부러 계획한 것이 아닌데 돌아보니 모두 한옥만 둘러본 결과가 되었다.
영주의 소수서원을 비롯하여 선비마을 저자거리도 모두 한옥이고 안동의 도산서원도 한옥 1박한 호텔도 한옥호텔 안동 민속촌이나 봉정사나 능동재사도 모두 한옥이다.
심지어 흥취 있게 둘러본 월영교도 목책다리다.
선비의 고장이라는 영주와 정신문화의 본고장이라는 안동을 잘 둘러보았다.
현대 제네시스에서 선물로 주는 안동소주와 버버리 찰떡을 받으니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장맛비가 어제나 오늘 관광하는데 는 별 불편 없이 내려 오히려 여름 열기를 식히는 효과를 보았다.
그런데 오후에 귀경하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장난이 아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앞차가 잘 안보여 승용차의 크루즈를 작동하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니 기상이상으로 크루즈를 작동할 수 없단다.
그래도 앞차와의 거리를 못 맞추지 악세레타를 밟지 않아도 된다.
손으로 운전대 휠만 꼭 잡고 달리는데 손에 신경을 쓰니 손이 뻑적지근하다.
온 신경을 앞만 보고 달리는데 장거리 주행이니 비가 온다고 속도를 마냥 줄일 수도 없다.
서울에 도착하니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운전하며 손의 팔꿈치가 아픈 건 처음이다.
그래도 제네시스 덕분에 여행 잘 다녀왔다.
집사람 대학동창 베트남 여행
집사람이 금년에 동기동창회장을 맞고 있다.
동창들이 네가 추진해야 해외여행을 갈수 있다고 부추겨 2019.3.6.일부터 3일간 베트남 여행을 갔다 왔다.
베트남 중부 다낭 호이안 후에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고급호텔을 잡고 즐겁게 갔다 왔다.
여자들 13명중 미국에 있는 4명의 동창은 다낭에서 합류했다.
전에 회장할 때 하와이 여행에 이어 두 번째다.
마산복지관 개소식 공연과 코엑스 힐링 콘서트
집사람이 마산 복지관 개소식 공연에 출연한다고 한 달 전부터 옷은 어떤 것으로 입고가나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하며 신경을 쓴다.
여태껏 쫓아다닌 공연보다는 한수 윗길이라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집사람은 압구정 복지관에 다니면서 실버악단과 합류하여 노인회관 회원들에게 노래봉사를 하고 있다.
압구정 복지관 운영단체에서 마산에 노인 복지관도 운영하기 위하여 마산회원 노인종합복지관을 개관하는데 개소식을 거창하게 할 모양이다.
개소식에 서울의 실버악단이 내려가는데 공연 가수로 합류하는 것이다.
7월 15일 월요일 새벽에 서울서 마산에 내려가 개관식 오후 공연에 출연하고 귀경하는 것이다.
마산에서 공연하고 올라와 피곤했던지 긴장이 풀려서 인지 저녁에 골아 떨어져서 잔다.
마산공연에서 부른 처녀농군과 섬마을 선생님이 유튜브에 올라와 자식들한테 올려주었다.
자식들이 어머니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 일색이다.
자기 목소리는 악단에서도 알아주고 자기는 마이크 없이도 자신 있다고 흰소리 친다.
토요일인 7월 20일 코엑스 오크호텔에서 힐링 콘서트 한다고 실버악단에서 집사람보고 가자고 하니 내친김에 흔쾌히 허락하였다.
주혜란 의학 박사와 힐링 콘서트인데 집사람은 똑같은 노래에 자신이 붙어서 두렵거나 거칠게 없다.
여기서 부른 노래를 유튜브로 집사람은 대학교 동창들에게 뿌렸다.
대학교 동창들을 만나니 이런 정도인줄은 몰랐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하여 모임에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집사람 민요선생 고희잔치
집사람이 압구정 복지쎈타에서 민요선생을 만나 성남 민요 학원에 다니며 민요를 익혔다.
서울서는 집사람 친구인 신사동 어린이원장하고 같이 성남으로 민요를 배우러 다닌다.
민요선생과 집사람 친구 원장 이 셋이 모두 칠순인데 민요선생을 깍듯이 선생으로 대접한다.
성남 민요학원에 배우러 오는 다른 늙은 제자들과 같이 민요선생 칠순 잔치를 무대를 꾸며 학원 원장답게 고희연을 열 계획이라 집사람도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한복으로 무대 치장을 하고 간 집사람은 6.30일 고희잔치가 끝나고 서운해 하며 돌아왔다.
민요학원 원장 고희연은 좋은데 그래도 제일 연장자인 집사람과 집사람 친구도 같은 고흰데 무대 일정에 하나도 고려않고 똑같이 제자들 행세만 하고 와 서운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배울 만큼 배웠으니 그만 다니라고 하였다.
태극기 집회
시청 앞과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매 주말 열심히 나간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박사모도 아니고 조용히 늙어가는 노인네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보니 장관이나 청와대 인사나 국회의원 이름을 들으면 생소하다.
그러다보니 야당국회의원인지 여당국회의원인지도 구별을 잘 못하는 편이다.
이런 순수한 백성이 박근혜대통령 탄핵 할 때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탄핵할 타당한 이유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좌익에선 탄핵이 안 되면 폭동이라도 일으켜야 된다며 세월호 7시간 가짜 태브릭 PC 등으로 모략해 나가는데 박통은 반박을 하지도 않아 국민을 의아하게 만든다.
이때에 우리나라 정치인이 얼마나 썩었고 당략만 일삼지 국가 이익을 생각지도 않는 인간들이라고 절실하게 느꼈다.
모든 언론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의혹을 지어내어 사실인 것 같이 곡필을 하고 시민을 우롱한다.
그 많은 태극 시민이 시청광장에 모여도 신문 방송에 사진 한 장 안 나온다.
신문 방송이 사회를 리드한다는 제4부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언론 방송이 이렇게 썩을 수가 없다.
나는 구독하던 신문도 끊고 방송도 정규 방송은 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나는 사법부는 믿었다.
우리나라의 엘리트 산실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반 고위 판사라도 모르겠는데 대법관의 판결을 보고 저 사람들이 과연 학식이 많고 우리나라 사법부를 끌어나가는 사람들이 맞아 하며 면전애서 욕을 해대고 싶다.
전광훈 목사가 불을 붙여 10월 3일은 광화문 시청에 사람이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이 모여 국민들이 이제 정신을 차리나 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너희는 너희고 우리는 우리다 라는 식으로 눈 하나 깜작하지 않는다.
데모만 하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에게 태극집회의 이런 시위는 깜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국가 정의나 시장경제 자유 민주는 안중에도 없는 기본적인 양심이 없는 인간들이 국권을 휘두르고 있다.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 나가면서도 허탈하기만 하다.
이렇게 좋은 명석을 깔아주었는데도 지리멸렬한 야당을 보면 부화가 난다.
그래도 정의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다음을 기약하자.
국민은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대우를 받는데 과연 우리나라 국민의 수준은 어느만큼 일까,
해외 여행
괌 휴가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연속적으로 겹치는 황금연휴의 시절이다.
작은아들 덕분에 7일부터 3/4일 괌으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힐튼 호텔에서 아들 식구와 조우하기로 하고 7일 우리 식구와 먼저 출발 하였다.
괌은 1996년 괌 사이판을 가고 두 번째다.
첫 번째는 패키지 여행으로 가고 이번은 자유여행이라 리조트에서 쉬러 가는 데 제대로 쉴지는 의문이다.
힐튼호텔에 짐을 풀고 괌에 살고 있는 군 동기생 고인철을 콜 했다.
전화 통화가 되어 저녁식사를 같이하기로 하고 와이프도 동행하라고 하였다.
괌 호텔 뷔페에서 저녁식사를 두 부부 4명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즐겼다.
고인철은 옛날 괌 주민회장 할 때의 전성기는 지난 듯 얼굴이 경직되고 주름살에 미소가 사라진 듯이 보인다.
나는 내가 가지고 간 임관 50주년 기념문집인 ‘질풍’ 과 고등학교 문집인 ‘감지인’을 주고 해병대 키걸이(변영준 작품)도 주었다.
집사람이 집에서 만든 간장도 정성으로 알고 받으라고 조금이지만 페트병에 넣어 건네주었다.
고인철도 늙었는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는지를 묻는다.
수훈자가 아니면 참전용사는 이천이나 영천으로 가야 되는데 이천도 이미 만원이 되어 금년이 아니면 안 되고 새로 지정된 곳으로 가야된다고 알려 주었다.
와이프가 먼저 죽으면 가묘에 있다가 남편이 죽을 때 같이 묻는다고 하니 와이프는 많이 어려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재혼한 와이프는 젊음의 건강미가 보인다.
말하는 모습이 솔직하고 자립심이 강하고 남에게 페를 끼칠 형이 아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가서 태극기 집회하는 것을 보고 차창 문을 열고 힘내라고 소리첬다고 한다.
태극집회 이야기를 하니 집사람이 이때다 하고 열을 내어 자기는 매주 나간다며 유튜브의 우익 채널을 가리켜준다.
동기생 카페가 있으니 들어와 네 근황도 알려주고 괌의 현항도 알려주라고 하였다.
얼마 전에 연대 동창이고 해병대 사령관인 전도봉이가 다녀갔다고 한다.
우리 동기생의 호프인 전 사령관이 동기생회에 잘 나타나지 않아 서운함도 있다.
두 시간 동안 이야기 하다 헤어지고는 귀국 짐 싸고 잘 있으라고 전화만 했다.
힐튼 수영장에서 놀다 힐튼 앞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열대 태양아래서 휴가를 즐기다 보니 피곤이 엄습한다.
작은 아들식구가 나타나 렌터카로 쇼핑센터와 음식점을 섭렵하였다.
귀국 전날 밤에는 힐튼호텔 바비큐 장에서 디너쇼로 차모르 민속춤을 보며 바비큐보다는 바다가재만 열심히 먹었다.
아들 덕분에 괌 휴가 잘 다녀왔다.
혹가이도
일본사림도 겨울여행은 일본의 최북단에 있는 혹가이도를 선호한다.
혹가이도 여행은 온천여행이 주류고 겨울의 눈 구경이고 유적은 별로 볼 것이 없다.
특산물은 게 요리가 유명하고 혹가이도 산 쌀로 만든 정종인 삿께와 혹가이도 맥주가 유명하다.
마유를 인기상품으로 보고 일본 전역에서 보는 초콜릿과 과자를 일본 특유의 방식으로 조그맣고 예쁘게 꾸며 비싸게 파는 것이 특색이다.
도야 유람선상
나의 희수 여행이라 하나투어를 선택해 호텔이나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식사에 컨시어지(Concierge) 상품이 있다.
식사할 때 다양한 게요리를 맛볼 수 있게 만든 상품인데 대게만 무제한 먹을 수도 있어 다른 여행사에선 볼 수 없는 상품이다.
여행비가 3박4일에 팁까지 포함한 95만원/1인당 이라 다른 여행사보다는 비싼 편이다.
2019년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겨울에 추운 북해도 지방에서 우리 부부가 놀다 왔다.
1월 20일 점심에 인천공항에서 3시간 비행하여 혹가이도 치토세 공항에 내려 조잔케이로 이동하여 조잔케이 뷰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내에 온천장이 있는데 우리나라 대형 찜질방 같다.
이 호텔은 온천장이 주요 시설이고 이 온천장을 이용하려고 일본 곳곳에서 오는 것이다.
온천장에 탕이 여러 개가 있으며 탕의 크기나 온도나 내용물이 다 다르다.
아무래도 겨울에 야외온천탕에서 온천욕을 하는 것이 제일 느낌이 좋다.
마음 놓고 푸근하게 온천욕을 하고 식당에서 북해도 클래식 맥주로 반주를 하니 내 세상 같다.
여기는 호텔 밖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투숙객은 모두 호텔식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호텔식당도 매우 크고 뷔페식이다.
조잔케이 아침 산보
다음날 지옥계곡이라고 하는 노보리베츠로 가서 활화산의 분화구에서 나오는 희뿌연 연기를 보았다.
화산이 활동을 하여 뻘건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촌 동네에 산 계곡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려고 관광객이 몰리는 것을 보면 화산의 잔재도 돈벌이가 되는 것이다.
도야로 이동하여 유람선으로 도야호수를 돌고 산 정장에 있는 산장 같은 전망대에서 호수를 관망하였으나 감탄할만한 곳은 아니다.
호텔의 온천장에 들어가니 조잔케이 온천장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찜질방과같이 온천욕을 하고 사우나 같은 곳에서 남녀가 같이 만나게 하면 좋으련만 부부가 꼭 헤어졌다 다 끝내야 만날 수밖에 없다.
여기는 남탕과 여탕을 새벽에 바꿔서 남탕이 여탕이 된단다.
화산지대에 덮인 일본이 화산 덕분에 일본열도 곳곳에 온천장이 있어 화산의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자연 온천장을 즐길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오타루 운하
3일차에 오타루에서 아름다움의 상징이라는 오타루 운하를 보는데 이런 곳도 관광상품이 되는구나하고 실망하였다.
크리스털의 가라스 공방거리 초콜릿이 주류인 과자거리가 도회지라는 냄새를 풍기는데 오르골 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유럽에서 노래하는 인형을 오르골이라고 불러 초창기 노래하는 악기로 보았다.
오타루의 오르골 상점은 유럽과 달리 인형이 화려하고 각양각색에 오르골만 파는 상점이 매우 크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르골만 파는 상점은 오타루뿐인 것 같다.
북해도의 제일 큰 도시 삿뽀로에서 혹가이도에서 제일 큰 제과사인 이시야 공장을 방문하였다.
공장안은 초콜릿 과자 판매하는데 열을 올리고 공장 밖에는 테마파크를 만들어 남녀노소가 다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하얀 연인이라는 초콜릿 한가방 사들고 나왔다.
모이와 야마 전망대에 올라가 삿포로 전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제법 큰 도시다.
저녁식사로 게 요리코스 잘 먹고 식당에서 나오며 집사람의 강짜가 또 나왔다.
트집잡을만한 일이 아닌데 걸고넘어지니 나도 속에서 울화가 치민다.
나보고 호텔로 먼저 들어가라고 하는데 정말로 들어가려다 참고 있었다.
여행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 이렇다.
분을 참고 삿뽀로 거리를 거닐며 상점에 들어가 약을 사는 데 약값이 여행비보다 더 많게 샀다.
정원수 가지마다 줄로 묶어 나무위에서 묶어놨는데 가지에 눈이 쌓여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일일이 가지를 잡아매 놓은 것이다.
가지에 눈이 소복히 쌓이니 보기에 참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삿뽀로 중심가에 TV 타워가 있는 오오도리 공원이 있는데 동네 공원 같은 느낌이 든다.
눈꽃 축제로 눈 조형물로 공원을 덮기 전에는 구경 가치가 없다.
맥주 공장 견학을 가면 생맥주 한잔은 공짜로 주는데 여기서는 돈을 받는다.
나는 여기서 오늘이 내 77세 되는 생일이라고 하니 나이가 그렇게 많으냐고 일행들이 깜작 놀란다.
혹가이도 관광을 하다 보니 일본인들은 관광지에서 종사하는 사람도 영어를 쓰려고 애쓰지 않고 일본말을 한다.
호텔의 카드 키도 잊어버리면 괜찮다는 유럽과 달리 악착같이 돈을 만원이나 받는다.
비행기는 한국까지 오는데 3시간이라 고생하지 않고 올수 있어서 좋다.
나는 일본에서 장비를 구입하여 운영하는데 고생하느냐고 3년간 여행을 별로 가지 못했는데 베네룩스와 북해도를 갔다 오니 이제 여행의 갈증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요르단 이스라엘 9일간 여행을 하나투어에 예약을 했더니 인원이 구성되지 않아 취소하고 1개월 후에나 된단다.
11월은 여행 비수기라 여행사가 계획만 해 놓고 손님이 없으니 일정을 늦춘다.
열흘 전부터 여행준비는 하기 시작했지만 막상 확정이 되니 여름 가을 옷 준비하느냐고 부산하다.
인천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까지 열두 시간 반 동안 대한항공 비행기 속에서 영화를 다섯 편이나 보았다.
장시간 비행거리라 온몸이 뒤틀리고 좀이 쑤셔 여행갈 때 제일 신경이 쓰이는 문제다.
7시 반에 버스로 출발하여 점심에 마사다 에 도착했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의 고지 꼭대기의 유대인의 요새가 있다.
황무지에서 평지나 고지에서나 살기위한 기본적인 것이 물이다.
고지에서 물을 보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엔게디 국립공원을 갔는데 골짜기에서 물이 흐르고 물가 근처에만 나무가 자란다.
민둥산에 동굴이 많은데 다윗이 사울 왕에게 피해서 숨은 곳이라고 한다.
쿰란에 가니 풀 한포기 없는 산등성이에 동굴이 있는데 여기에서 항아리 속에 있는 성경 필사본을 발견하여 유명한 곳이다.
기원전 1세기경이라니 현존 최고의 성경자료인 것 같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밑에서 햇빛을 피했다고 하는데 나는 엘리야란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로템나무도 처음 들어 보는데 사막의 이 나무는 조그마하여 햇볕을 피하기도 어려운 나무다.
엘리야가 모세에 버금가는 유명한 인물인데 종교에 무지한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날씨는 아침 점심 저녁의 시차가 커서 옷을 입는데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생물이 살수 없다는 사해에 들어가서 네 활개를 펴니 온 몸이 물위에 뜬다.
온 몸이 물위에 뜨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반 바닷물 보다 5배나 염도가 높다는 사해에 들어가서 있으면 소금에 배춧잎 절이듯 입술이 쪼그라든다,
바닷물에서 수영할 때 눈을 뜨고 하는 식으로 눈을 떴다간 큰일 난다.
해발 400m에 있는 사해는 물이 유입만 되고 나가는 데가 없는데 유입양이 작아 면적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 사해의 진 흙속에 있는 미네랄로 화장품을 만드는데 질도 좋고 인기도 있고 비싸다.
가이사리아에 가니 로마식 경기장 흔적만 남은 궁궐터 선착장 기찻길 같은 수로 등 옛날에 번성했던 도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쳤다는 이 도시는 지금 관광 리조트로 변모하고 있다.
바하 알리가 창시한 이슬람교 시아파로 이스라엘에서 이 바하이교 본부가 제일 볼거리가 있다.
황무지만 보다 울창한 나무를 보니 더욱 나무가 반갑게 보이며 이 바하이교 본부에서 내려다보면 하이파 도시와 항구가 멋있게 보인다.
아코는 해상 활동의 중심지로 헤롯 왕이 견고한 요새로 세우며 번성한 도시가 되었다.
성 안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말이 올라가기 쉽게 일반 계단의 반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로쉬 하니크라는 해안 절벽이 파도로 인해 석회암 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이스라엘 해안의 북쪽 끝으로 레바논과 경계를 하고 있다.
레바논과 서로 적대 관계이나 우리나라처럼 중립지대가 없고 철망 문만 열면 레바논 땅이고 레바논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다.
티베리아스는 베드로와 요한이 태어난 곳으로 갈릴리 호수가 있다.
해발 -212m의 갈릴리 호수는 호수가 넓어 옛날에 바다라고도 했다.
호수 옆 동산이 예수가 산상 보훈을 했다는 산이 있는데 기대했던 만큼 신비롭지가 못하고 조그만 민둥산이다.
벳산은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가는 국경 출입국이 있다.
페트라를 보고 다시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오는 여정이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은 주변 모든 나라가 적국이고 단지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하여 요르단과는 출입국 수속이 수월하다.
이삭이 나이 육십에 쌍둥이를 낳았는데 장자가 에서고 차자가 야곱이다.
장자인 에서가 차자인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다는 놀라운 일이 있다.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하드리안 개선문을 통과하면 전차 경주 장을 비롯하여 히포드럼 원형경기장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가장 오래된 제우스 신전이 있고 가장 넓은 부지를 지닌 시장거리가 있다.
모든 유적은 모두 기둥만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시장거리의 유적 기둥은 압권이다.
시장거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대형 기둥이 있고 원형광장의 빙 둘러선 기둥도 옛날의 번영과 영화를 짐작하기 에 충분하다.
원형공연장은 지금까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도 도시의 공연을 실재로 하고 있다고 한다.
앞 중앙에서 노래를 하면 원형극장 전체에 골고루 퍼진다고 한다.
우리 집사람이 각국의 여행객이 있는 원형 경기장에서 노래를 한 곡조 부르고 앙코르를 받았다.
마다바의 성 조지교회는 예배당 바닥에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성서 지도가 유명하다.
2만개 이상의 각각 색이 다른 돌로 만들어진 이 모자이크 지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레바논 요르단 시나이 반도와 에집트 까지 그려져 있다.
아르논 계곡은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깊은 계곡과 높은 산으로 적을 방어하기 좋은 계곡이다.
이 천혜의 방어선에서 적이 처드러 오는데 천혜의 방어선을 내주고 후방에서 결전을 하여 나라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격은 계곡이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 추풍령을 내주고 충주에서 맞서 싸워 왜군에게 전멸당한 꼴과 흡사하다.
사막이 붉은 모래로 되어 있으며 곳곳에 사암으로 형성된 바위산이 있다.
이 붉은 사막을 지프차로 달리며 낙타를 보며 모래바람을 맞는 짚투어는 새로운 맛이다.
사막 안에 사막방갈로를 지어 관광객을 받는데 방마다 샤워시설까지 되어 있어 불편이 없다.
저녁은 전통적인 양구이로 드럼통을 모래 속에 넣고 4시간 동안 구워낸 고기로 맛도 좋다.
밤에는 청명한 하늘의 별을 보기위해 언덕에 오르니 별은 보이나 방갈로를 위한 가로등 같은 전기불이 신경을 건드린다.
새벽에는 해 뜨는 장면을 보기위해 반시간 동안 기다렸다.
이 와디럼 사막이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의 주 촬영장소이고 끊어진 철도나 기차도 그대로 있다.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요르단은 중동에서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로 국가가 가난하여 원조를 바라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패드라는 관광수입이 국가 예산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비율이 높다.
패드라 입구에서 패드라 신전 까지 약 2km 가 되는데 기암괴석이 줄지어 있고 높은 기암 사이로 좁은 협로가 뚫어져 있는데 천혜의 비밀 통로다.
통로가 끝나는 기암 사이로 보이는 패드라 신전의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신전 안으로 입장을 불허해 겉모습만 보는 것으로 끝이다.
절벽을 옆으로 파서 정교한 석조 신전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석조 건축 공사다.
패드라는 엘로라 보다 규모가 훨씬 작고 예술적인 면에서도 떨어지는 모습이다.
패드라 신전 옆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든 트리클리니움 무덤이 있는데 상부는 태양을 숭배하는 오벨리스크로 조각되어 있으며 밑에는 사각 방같이 파여 있어 제사상자리 같다.
조금 더 가면 원형극장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암석에 파여 있는 왕궁의 흔적이 있다.
암만성에서 보면 암만성의 흔적만 보이며 암만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중동에서 기름이 나지 않는 요르단은 지하에 요르단이 30년간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발견되어 중동의 부러움을 살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중동에 와 보니 물이 이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중동이란 것을 새삼 느꼈다.
모세의 샘은 바위 밑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원형 복원 부족으로 시멘트로 보강하여 실망스러웠다.
모세는 출애급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이끌고 가나안 문턱에 와서 죽은 것이다.
느보산에서는 꿀과 젖이 흐른다는 가나안의 시작인 여리고와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이다.
모세는 느보산 계곡에 묻혔는데 아직 묘소를 못 찾았다는 것이다.
모세 기념교회 앞에는 교황이 다녀간 기념식수로 올리브나무가 있다.
요르단에서 알렌비 국경을 통과하여 이스라엘로 다시 들어왔다.
여리고 에 있는 시험산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시험에 든 산이다.
40일간 금식을 한 예수에게 빵을 가지고 유혹을 한 산 이라고 한다.
이 산에 동굴도 있고 지금도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도원이 있다.
시험산도 황량한 흙더미 산인데 산 밑에는 흘러나오는 물로 농장을 경영하여 푸른 농장이 있으니 보기가 좋다.
장벽에는 울분을 낙서나 그림으로 분무 페인트로 칠해 표현하기도 하였다.
예수탄생교회는 예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수가 태어난 자리에 만든 교회이며 출입문의 높이가 1.2m 밖에 안 되어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예수가 탄생했을 때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동방박사가 온 마구간은 우리나라 외양간 같이 나무기둥이 있는 허술한 마구간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에 와서 보니 동굴 안에 마구간이 있고 요셉은 그 옆 석회암 동굴 방에 있었다.
우리는 중동의 지형과 동굴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식으로 마구간을 연상하고 그림도 그렇게 그렸던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자기들 성지라고 종교 싸움이 그치지 않는 복잡한 도시다.
유대교는 통곡의 벽을 신성시 하고 이슬람교는 알라가 승천했다는 황금의 돔을 신성시 하고 기독교는 예수가 죽은 곳에 지은 성묘교회를 신성시 한다.
이 성지의 성묘교회를 유대교 천주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여러 교파가 구역을 나누어 관리하며 예배도 자기들 의식대로 한다.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메고 가는 길이 좁은 상가 골목이고 몇 걸음마다 단계적으로 숫자 표시를 해 놓았고 성묘교회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며 가는 성화가 걸려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는 지고 가지 않았고 횡목만 지고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십자가의 종목은 골고다 언덕에 박혀있고 횡목만 지고 올라갔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나 어느 기독교 국가에서나 기독교 영화나 모든 성화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지 횡목만 메고 올라가는 성화는 본적이 없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지 당시의 십자가형은 종목은 미리 형장에 박혀있었다는 것이다.
그 많은 신부나 목사가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알고도 왜 함구하고 있었을까 의심이 간다.
구브린 국립공원이라고 하는데 우리 눈엔 국립공원으로 지정할만한 명소가 안 보인다.
지하 동굴에 비둘기를 사육하기위한 비둘기 집을 화강암에 파 놓았고 수백 개의 동굴이 있는데 지하 교회도 있다.
지상의 야산은 나무도 울창하지 않아 우리나라 산을 하나 갖다 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라도 없던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설하고 이 척박한 땅에서 세계강국으로 도약한 것은 국민들의 뼈 빠지는 노력과 합심이 있어 가능 했다고 본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신자들이 성지 순례로 꼭 가봐야 할 핵심 순례지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는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금요일은 유대교의 안식일이라 쉬고 토요일은 이슬람의 예식이라 쉬고 일요일은 기독교의 예식일이라 쉰다.
가을에 처제가 우리부부와 자기부부가 같이 터키 일주 여행을 가자고 하여 승낙하였다.
아들 식구와 같이 해외여행을 한 적은 있어도 처제식구와는 처음이다.
우리부부는 해외여행을 많이 한 관계로 습관적 준비를 하였다,
이에 비해 처제는 초등하교 정년퇴임을 하고 하는 여행이라 관심이 매우 많고 동서는 특히 관심이 많아 관광지의 정보를 습득하는데 입시공부 같이 유투브를 보며 메모까지 한다.
2019.09.23.일부터 10.01까지 7박 9일간이다.
인천공항 10시 반 출발인데 롯데투어에서 8시까지 나오란다.
집에서 6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9시까지 가자고하니 집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잔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공항 가서 멀건히 한 시간 동안을 보낼 생각을 하니 은근히 부화가 난다.
이스탄불은 13년 전에 지중해 여행 할 때에 와본 터라 이번이 두 번째다.
이번 여행은 앙카라 카파도키아 안딸리아 에페소에서 이스탄불로 터키만 한 바퀴 도는 여행이다.
보스프러스 해협을 끼고 유럽과 아시아를 잊는 양 대륙에 걸쳐있는 터키는 지형적인 조건으로 얼마든지 커질 수 있는 나라다.
힘이 약하면 우리나라같이 열강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동로마제국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로 바뀌고 터키의 수도가 되었든 국제도시다.
그랜드 바자르 시장에서 터키의 명물 젤리 로쿰을 사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완공직전 이슬람에 점령되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는 비운의 소피아 성당을 집중적으로 구경하였다.
옛 모습을 재현할 수가 있어 전 세계 관광객이 많이 모여 큰 교회가 사람이 붐빈다.
지금은 이슬람 사원이 아니라 소피아 박물관으로 지정이 되어 입장료를 받는다.
이슬람의 포용정책으로 성당에 십자가를 가리고 사원으로 변모시켜 지급까지 옛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만약 반대로 기독교가 이슬람을 점령하였다면 이슬람 사원 전체를 해체하고 교회를 새로 지어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베이파자르는 오스만 터키시절의 가옥들이 현존하고 있는 소도시다.
옛날의 정취와 생활방식이 그대로 전해오고 있으며 물건 값이 싼 편이다.
생필품이 싸다보니 처음 보는 농산물과 오니 보석까지 챙겼다.
케말 파샤가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이전하는 바람에 터키의 행정수도이고 이스탄불에 이은 제2의 도시다.
터키는 6.25참전 국가라 앙카라에 조그만 한국공원도 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의 묘가 있는데 접근 방법이 쉽지 않아 먼 거리에서 기념관만 관망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관광거리가 별로 없는 앙카라에 아타튀르크의 묘를 관광 활성화 시키면 시나 국가적으로 유익할 텐데 성역화해서 특별 관리하는 모양이다.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투즈괼 소금호수는 평야에 눈이 내린 것 같이 하얗다.
소금을 밟으면 얼음 위를 밟는 것 같고 알갱이를 먹으면 소금이라 짜다.
이 많은 소금으로 화장품이나 식품 등 여러 가지로 개발하여 관광 상품화 하면 좋으련만 현재 개발한 상품은 관광객의 호응을 못 받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괴레메 계곡은 황폐한 대지에 지진이 나서 큰 계곡을 이룬 듯 깎아지른 계곡 밑에는 나무가 울창하다.
척박한 땅에 집이 동굴이고 동굴에 붙여 집을 짓기도 하였다.
오래된 동굴교회도 있고 성화는 퇴색되었지만 벽화도 아직 있다.
파사바 계곡은 거대한 바위들이 고깔을 쓴 것같은 버섯같은 바위들이 즐비하며 구경할 만 하다.
바위 밑에는 사람이 은거한 집으로 바위를 판 흔적도 있다.
우츠히사르는 높은 바위산을 뚫고 바위굴을 파고 살림집이 빼곡히 있다.
으흐랄라 계곡은 협곡 절벽에 굴을 파고 생활을 하였는데 다른 곳 보다는 협곡이 비옥해 살기가 좀 나은듯하다.
이 오지의 척박한 땅에서 숨어 산 옛날 사람들의 환경과 이런 곳에서 박에 살 수 없는 당시의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다.
데린 구유 지하도시는 도피해 사는 사람들의 최악의 생활공간이다.
햇볕도 제대로 쏘이지 못하고 지하에서 오래 살면 사람의 생체 리듬에 결정적인 후유증이 온다.
열기구 투어는 새벽에 일회 하는데 210유로면 매우 비싼 금액인데 원하는 관광객의 반도 못 해결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열기구를 타면 카파토키아의 전 계곡을 하늘에서 한 번에 내려다 볼수 있다.
지프투어 하면서 계곡을 둘러보는 재미와 열기구를 타는 재미는 또 다르다.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이 거처 가던 숙소를 말하는데 숙소가 단순한 여관이 아니고 금품을 노리는 도적들을 퇴치하기 위한 간단한 방어시설이 되어 있다.
오부룩 호수는 평평한 대지가 둥그렇게 땅속으로 푹 꺼져서 파여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맨홀같이 파인 게 호수 깊이가 2백m나 된다니 놀라운 일이다.
안탈리아 구 시가지입구에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 하였다고 하드리아누스 문을 세웠는데 지상보다 낮다.
구 시가지의 카라알리올루 공원은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공원으로 크지는 않다.
구 시가지는 지중해 연안들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좁은 골목에 아기자기한 조그만 상점들이 있고 조경도 잘 되어 있어 터키의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안탈리아 올림프스 산 케이블카를 타고 2365m의 산 정상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는데 구름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터키 일주에 옵션이 많아 옵션과 팁을 합치면 백50만원의 여행비와 비슷하다.
이 케이블카를 비롯하여 지프투어 열기구등 옵션이 십여 가지다.
필요한 옵션을 여행비에 포함 시키고 옵션을 정리하는 것이 여행객을 속이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파묵칼레에 히에라폴리스 유적이 있는데 로마관료들의 휴양지였던 이 유적은 거의 파괴되어 볼거리가 없다.
석회질의 온천수가 분출하여 산비탈을 흐르며 생긴 대규모 새하얀 석회언덕인데 지금도 계속 물이 흐르고 있다.
호텔에는 온천욕과 수영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 모처럼 온천욕을 하였다.
쉬린제 마을은 그리스인들이 그리그 풍으로 언덕에 지은 하얀 벽에 붉은 기와로 지어진집이 여러채가 있다.
주거용 같지가 않고 조그만 시골학교 같은 건물이 거의 다인데 와인 창고나 공장 같다.
이렇게 많은 포도주나 올리브유 창고라고 보면 유명한 와인 마을 같다.
에페소는 터키에서 제일 큰 로마유적이 있는 곳으로 원형극장 도서관 신전 등이 광범위하게 세워져 있다.
규모도 크고 예술적 가치도 있는데 원형이 그대로 있지 않고 거의 다 무너져 있는데 복원할 생각이 아직 없는 모양이다.
셀수스 도서관은 1만 2천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는데 지급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무너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관광객이 대리석 바닥을 밟고 다니며 무너진 유물 위를 올라가도 제지하는 관리인이 없다.
에페소의 무너진 유적은 멀리서 보아도 멋있는 유적의 흔적이다.
부르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톱하네히사르에 가면 오스만의 동상과 아들의 묘가 있고 아름다운 탑이 있다.
부르사에서 제일 큰 울루자미 모스크 옆에 실크시장이 있어 얼른 실크 원단 한 감을 샀다.
가이드가 가죽 패션쇼 하는 매장을 데리고 가 내가 모델로 화려한 가죽옷을 입고 우리 여행팀 앞에서 쇼를 했다.
내친김에 우리부부 처제부부 모두 가죽 상의를 하나씩 사 입었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를 거처 터키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이스탄불에 도착하였다.
고등학교 때 위스키달라 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현장을 가본 것이다.
터키가 자랑하는 부르 모스크를 갔는데 내부 공사 중이라 전에 왔을 때 보다 감흥을 못 받았다.
이스탄불 시장에서 전차를 타보기도 했고 집사람과 처제는 터키석 목걸이와 반지를 사고 매우 좋아 한다.
터키석이 크기도 하고 가격도 싸고 빛에 따라 보석의 색이 변해 호기심을 자아낸다.
터키에서 보석을 사면 싸기 때문에 여행비가 빠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밤에 해변가의 야시장을 갔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동서가 불만이 있다고 야식 시장에서 일행이 야식을 하는데 식당에서 동서가 홀연히 사라졌다.
가이드가 처제에게 물으니 걱정 말고 찾지도 말라고 하지만 가이드 입장에서 여행객이 없어졌으니 황당한 일이 아닌가…….
이 야식시장은 별미라고 꼭 가서 먹어봐야 한다고 자기가 말한 식당이다.
자기감정이 있다고 단체행동에서 빠져 여러 사람 신경을 쓰게 하는 것은 나이가 들은 사람으로서 선도는 하지 못할망정 도리가 아니다.
톱카스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황제인 슐탄들이 살던 궁전으로 문 입구에는 추가 달려 있는데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고 규모도 크고 동양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돌마바체 궁전은 바닷가에 있는데 오스만 제국이 마지막으로 제일 번성할 때 지은 마지막 궁전이다.
번성할 때 지은 궁전이라 전 세계 각국에서 제일 크고 좋다는 물건들을 거의 선물로 받아 전시하는데 시설도 당시에는 첨단시설로 되어 있어 근대사의 사적 자료가 많이 있는 곳이다.
터키라는 나러는 지도자만 잘 만나면 지정학적으로 얼마든지 클수가 있고 부흥할 수 있는 여건이 있는 복 받은 나라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천혜의 터키는 고대 유적도 많아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