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하면서 매번 가도 돌아서면 또 가고픈 곳이 옛 절터이다.
크게 볼 것은 없어도 그 곳에 가면 세월의 덧없음에 가슴 저릴 수 있어서 맘이 잔잔해 진다.
특히 옛절터를 둘러보는 시기가 가을이라면, 그것도 앙상한 감나무에 몇 개의 누런 감이 달린 늦가을이라면, 마음 한 구석에 절의 이름을 선연히 새기고 돌아올 수 있다.
고달사 터를 찾아 가던 때는 햇볕 쨍쨍 내리쬐던 여름이라 맛은 덜했다.
그러나 보물이 워낙 많은 곳이라 한 곳에서 안복(眼福)을 두루 누릴 수 있었다.
지금은 이 모습이지만, 고려 초기엔 합천에 있는 현재의 해인사만큼이나 위풍당당했던 고달사란 절이 있었다. 파란색 비닐을 덮어 놓은 것은 이 절터를 현재 발굴조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 터 뒤에 보에는 산이 혜목산이다.
남한강 자락에는 고려시대 영화를 누리던 절들이 강따라 줄줄이 서있었다.
- 고달사지, 흥법사지, 청룡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 현재는 없지만, 예전엔 크게 융성했던 절들이다.
고려가 불교를 크게 신봉했던 국가였고, 남한강 자락이 풍광이 수려하면서도 수도였던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큰 절들이 많았으리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 생긴 석불대좌. 보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에 앉아있던 부처님은 어디로 갔을까?
석불대좌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20m쯤 위에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비. 고려 광종때의 국사였던 원종대사 찬유가 죽은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그가 입적한 지 17년 뒤인 975년에 세웠다. '원종대사 혜진'은 그가 죽은 후에 당시 왕이었던 광종이 내린 시호(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가 죽은 후에 왕이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내린 호)이다. 현재 보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의 받침대가 되는 거북이를 귀부(龜趺), 몸뚱아리를 비신(碑身), 비신을 보호하고 있는 지붕돌을 이수(螭首)라 한다. 거북은 지상과 하늘을 잇는 매개이면서 천년 수명을 누리는 장수의 상징이고, 용은 하늘을 나는 신비의 동물로 둘 다 신성하기 이를데 없는 영물이다. '이수'의 '이'가 용을 의미하니, 이수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용머리 지붕돌"정도로 하는게 좋을 듯 하다.
비석은 1915년 봄에 도벌꾼들때문에 넘어져서 8조각으로 깨어져 현재 경복궁 뜰에 서있고(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하면서 함께 옮겼을 수도 있다.???) 고달사지에는 귀부와 이수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신에는 원종대사의 가문, 출생, 행적, 입적 사실들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
대부분의 귀부는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등은 거북이 등을 하고 있다. 이 귀부는 현존 우리나라 귀부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습에서 무거운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힘씀을 알 수 있다.
이수 가운데 쓰여진 비의 주인공 이름.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지비"라고 쓰여있다. 글씨 아래에 도깨비가 납작하게 업드려 있다. 우리나라 문양에 나오는 도깨비들은 무섭기보다 익살맞고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담겨있다. 이 도깨비도 지 나름대로 무서운 표정을 짓고는 있으나, 무섭기 보다는 앙증스럽다.
원종대사 혜진탑비 위쪽 풀밭에 놓여져 있는 또 하나의 귀부. 이수도 비신도 없어진 채, 거북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외롭다. 그런데 머리는어디로 갔을까?
고달사터 맨 위 서북쪽 산중턱에 있는 고달사지 승탑. 승탑은 '승려들의 탑(무덤)'이란 뜻으로 예전에는 부도라 많이 말했지만, 지금은 부도보다 승탑이라 한다.
신라말기 선종 불교가 유행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승탑이 처음 만들어지던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에는 이 승탑과 같이 전체 모형이 팔각형을 띠고 있다. 이런 승탑을 팔각 원당형 승탑이라 한다. 팔각형은 원형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팔각형으로 지은 집을 '팔각 원당'이라 한다.
이 탑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고달사지 승탑"이라 이름한다.
맨 아래에 8각의 지대석을 두르고 중대석의 둥근 몸돌에는 거북 몸을 한 용을 조각하고 주변에 구름속을 노니는 용 4 마리를 새겨 놓았다. 극락으로 인도하는 배인 반야용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팔각의 상대석에는 남쪽 정면과 후면에 자물통이 달린 문('문비'라 한다)을 새기고 서쪽과 동쪽에 '광창(光窓)'이라 여겨지는 창살문을 새겼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사천왕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 처마 밑에는 비천상을 새겨놓아 이 탑의 주인이 천상세계에 있음을 은연중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고달사지 승탑은 현재 국보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붕돌 아래 처마에 새겨진 비천상들
문비와 광창
사천왕상 중의 일부
거북용 주변의 용들이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며 놀고 있다. 긴 머리를 따듯 엮어놓은 용꼬리가 가히 예술이다.
고달사지 승탑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또 하나의 잘 생긴 승탑이 보인다. 이 탑의 주인공은 정확히 알려져 있다. 원종대사 찬유의 무덤이다. 고달사지 승탑보다 격은 조금 떨어진다. 거북용(?)의 머리가 고달사지 승탑이 있는 서편을 보고 있는 것을 보니 고달사지 승탑이 그에게 도를 전수해준 스승의 스승인 원감국사 현욱의 무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달사가 크게 융성했던 시기에 이곳에서 입적한 고승은 원감국사 현욱과 원종대사 찬유이다. 찬유는 원감국사 현욱의 법제자인 진경대사 심희의 제자로 심희는 선종 9산의 하나인 봉림산문(경남 창원)을 열었던 선승이다. 심희의 비는 봉림산문의 중심 절인 경남 창원의 봉림사 터에 있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두 기의 승탑은 현욱과 찬유 것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동편 탑이 원종대사 찬유의 것이 확실하기에 아직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고달사지 승탑을 현욱의 것으로 추정해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학계에서는 아직 의견만 분분할 뿐 누구의 것이라 확실히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이 탑의 거북용 머리가 서편을 향하고 있는 걸로 보아 혹자는 극락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하고 나처럼 무지렁뱅이는 용감하게도 스승인 현욱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내려오면 볼 수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7호이다. 고달사지 승탑에 비해 문양이 더 간략해지면서 도식화되어가고 있다. 지붕돌 처마에 말벌집이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어 근접 촬영을 할 수 없었다. 찍으면서 맘이 급했던지 이 사진도 약간 삐딱하게 찍어졌다. '일체유심조'라는데` ` `
원종대사 혜진탑의 중대석에 조각된 거북용과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