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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 : 별동 윤상 선생은 예천군청에서 근무할 때부터 몸을 일으켜 83세의 수를 누리면서 조선조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예천읍 서본리 별동에서 고려가 무너지기 20년 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예천군청 직원으로 사무를 보다가 조선 태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부모를 모시기 위한 몇 해 동안의 시골직을 제외하고는 주로 나라의 미래 동량을 기르는 현재 국립대학의 전신인 성균관에서 30년 간 교편을 잡으면서 당대의 인사들은 거의 선생의 제자였다. 특히 문종과 단종도 제자였다. 부모를 모시기 위해 원하여 실시한 시골직은 선산, 예천, 상주, 안동, 산음, 황간, 김천, 영주, 대구의 고을 원 등을 지냈고, 43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문종이 즉위하던 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오니 임금이 윤상의 생활비용을 지급했으며, 성균관 학생들이 선생에게서 다시 배울 수 있게 해달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예천에선 이웃 고을의 선비들까지 공부하고자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았고, 단종 때 세상을 뜨자 임금이 관리를 보내어 문상했고, 묘는 예천읍 백전리 눙골에 모셔졌다. 선생은 예천읍 서본리 별동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지명으로 호를 삼았기에 후세 사람들이 별동선생이라 우러렀으며, 예천읍의 향현사에 모셔졌고, 지금도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조묘가 있다. 그리고 선생 때문에 조선시대 관례가 된 일이 많다. 첫째, 스승을 이야기할 때 후대 사람들은 반드시 선생을 예로 들었다. 둘째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리면 말 한 필을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선생으로부터 관례가 되었다. 셋째 왕자의 선생이 되어 박사 직위에 오르는 것은 유교 사회의 영광이었고. 이로부터 왕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면 성균관 대제학이 박사를 겸직하는 관례가 생겼다. 넷째 나이가 많아 관직을 그만 두는 이에게 임금이 정월, 사월, 칠월 십월에 음식을 내려주는 관례가 선생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는데 이 일은 현재까지 이어져서 공직에서 물러나면 연금이 주어진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시대 유교 즉 성리학의 뿌리를 이루었으므로 민족사적 측면에서 앞으로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다시 조명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별동 윤상 선생에 대한 행사를 진행한다. 선생이 요즘 국립대학인 당시 성균관의 수장이 되도록 한 것에는, 첫째, 선생은 예천군청에 근무할 때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퇴근 때는 관솔을 따다가 밝히면서 밤에도 글을 읽었다. 둘째, 퇴계 이황 선생이 이르기를, “예천사람 윤상은 학문이 깊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면서 시 한 수를 읊기를, “성리학의 뿌리는 밝히기가 어려운데, 예천에서는 윤상 선생을 일컬어 왔다네,”라고 하였다. 선생의 작품 중 시로서는, 문경팔영(聞慶八詠), 예천 객사의 동헌 운에 차운한 시 등이 있고, 문장으로서는 예천의 객사와 동헌을 중창한 기문 등이 있고, 가요로서는 예천향교 가요 등이 있다. 선생의 인품은 따뜻하고 조심함을 털끝만치도 흩트러짐이 없었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 때(1436년) 성균관 제자들이 소풍을 가서 말썽을 일으키자 선생을 탄핵하는 무리가 나타났으나, 다른 기색 없이 평소처럼 제자들을 상대해 주자, 제자들이 더욱 선생을 경애했다. 그 후 다시 탄핵이 빗발치자 동료 어변갑은 “윤상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감히 헛되이 꾸며서 남을 모함하느냐”면서 벌떡 일어났다고 하니, 선생의 신망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보여 준다.(국가기록원 민간기록조사위원 장병창 작성, 2013.6.6)
윤상 : 윤 별동(尹別洞) 선생의 침착성과 참을성, ㅇ 위치 : 보문면 미호리, ㅇ 내용 :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의 문신(文臣)이며 대학자(大學者)이다. 그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1) 장지문에 얹혀 있는 물그릇 : 별동이 아직 젊었을 때, 예천군 관아(官衙) 사또(員) 밑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여름날 윤상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또가 그의 침착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가 모르게 장지문 위에 물을 한 그릇 떠서 올려놓고, “지금 소나기가 쏟아져 들어오니 급히 장지문을 내리.”라고 그에게 명(命)하였다. 한참을 지난 후에 “장지문을 전부 내려놓았습니다.”라고 사또에게 보고하니, “장지문 위에 아무 것도 없더냐?”고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장지문 위에 물이 한 그릇 얹혀 있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사또는 다시 “그러면 장지문 위에 물그릇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하고 되물었다. “장지문을 내리기 전에 장지문 위를 막대기로 훑어보니 막대기 끝에 무엇이 닿기에 공상을 놓고 올라가 보니 물이 한 그릇 있어서 조심하여 물그릇을 내려놓고 장지문을 내려서 닫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윤상의 침착성에 탄복한 사또는 그 후 모든 일을 마음 놓고 그에게 맡겼으며 크게 출세(出世)할 인물임을 알았다고 한다. * 장지문- 옛날 큰 집이나 정자에 달려있던 큰 문짝으로 여름이면 쇠마구리로 공중에 달아매어 시원하게 하고 겨울이면 내려서 바람을 막게 하는 큰 문짝/ 2) 거위의 죽음을 면케 한 참을성 : 윤상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 들게 되었다. 주막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주인의 손자인 듯한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가지고 대문 밖에 나가서 놀다가 그만 구슬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그 때 마침 아이의 옆에서 먹이를 찾던 거위가 구슬이 먹이인 줄 알고 널름 집어삼키고 말았는데, 한참 후 주인집에서는 야단법석이 났다. 아기가 가지고 있던 구슬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家寶)로 여기던 것으로 구슬이 없어졌으므로 큰일이었다. 그 때 이 주막에 있는 손님은 윤상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구슬을 훔쳐간 것으로 의심받아 막무가내로 내놓으라 하였다. 이에 그는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려주면 찾아 준다고 하였지만 계속 실랑이를 하자, 주인은 하인들에게 시켜 그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관가에 끌고 가려고 하였다. 이 때 윤상은 태연한 자세로 저기 있는 거위도 다리를 새끼로 매어 멀리 못 가게 내 옆에 같이 있게 해주면 내일 아침 식전(食前)까지 틀림없이 구슬을 돌려주겠다고 주인에게 사정하였다. 주인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지만 이미 날도 저물고 하였으니 그렇게 하겠노라 하면서도 그가 밤새 달아날까 싶어 기둥에 꽁꽁 묶어 놓고는 그 옆에 새끼로 다리를 묶은 거위를 함께 묶어 놓고서는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날이 밝자, 윤상 옆에 다리가 묶인 거위는 똥을 누게 되었고, 따라서 어제 저녁에 주워 먹은 구슬도 함께 따라서 나오게 되었다. 이 때 윤상은 주인을 불러서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이 있으니 찾으라고 하였다. 구슬을 찾은 주인은 묶은 줄을 풀어주면서 백배 사죄(百拜謝罪)하면서 거위가 구슬을 먹은 줄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밤새도록 묶여 고생하였느냐고 물었다. 윤상은 허허 웃으면서 “거위가 구슬을 먹었다고 하면 급한 마음에 어제 당장 구슬을 찾기 위하여 주인장께서 그 거위를 죽였을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요” 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침착성과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윤상은 마침내 높은 벼슬도 하였고 큰 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3) 단종(端宗) 임금에게 큰 절을 받은 윤상 : 영조 때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 : 1691∼1756)가 경상도 북부지방인 안동, 순흥(順興), 예천의 원님들과 영주 부석사(浮石寺) 누마루에서 연회를 벌였을 때의 일이다. 원님들을 수행하던 이속(吏屬)들은 누마루 아래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안동사람이 뽐내면서 “안동이 최고”라고 뻐겼다. 이에 맞서 순흥 사람이 “우리 고을 옛 어른인 안 문성공이 안동부사로 갔을 때 너희 할아버지들이 발을 씻겨 드렸으니 순흥이 안동보다 더 낫다”고 자랑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예천사람이 “그 까짓게 대수냐 우리고을 별동선생은 단종(端宗) 임금이 입학할 때 세종(世宗)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큰절을 받았으니 예천이 최고”라고 서로 다투었다. 이런 말을 누마루 위에서 듣고 있던 박(朴) 어사가 세 고을 원님들을 불러서, “연회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 어서 돌아가서 저들의 다툼을 판결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예천이 가장 최고인 것 같소.”라고 하더란다. 이 이야기는 정조·순조 때에 걸쳐서 이루어진 “연조귀감”이라는 책에 실렸다. 조선 세종 때 대사성(大司成)까지 역임하고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추앙(推仰)받은 윤별동(尹別洞)을 모신 사당(祠堂)이 미호리에 있으며, 고려조(高麗朝) 마지막까지 절의(節義)를 지킨 율은(栗隱) 김손(金遜)을 모신 표절사(表節祠), “학사(學舍)가 없으면 뜻을 펼 수 없다.”는 교육이념(敎育理念)에 따라 1676년(현종 1676)에 미산(眉山) 김이도(金以道)가 세운 미산학사(眉山學舍)가 있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乃城川)은 낙동강(洛東江)의 상류(上流)로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명사십리(明沙十里) 펼쳐 있는 미호유원지(眉湖遊園地)로 인근의 등산코스와 자연휴양림(自然休養林)이 있는 학가산(鶴駕山)이 바라보이고 있다.(普門面홈페이지 2013)
윤상(尹祥) : 1373~1455, 본관은 예천으로서 조선 태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30년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어 단종에게 학문을 강의하여 사림의 자랑이 되었다. 현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며, 조선 개국 이래 으뜸가는 사범으로서 문종 원년(1451)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문집 목판이 있고 유물로 교지가 전한다.(普門面홈페이지 2013)
윤상 : 別洞先生集 / 奎 4072/ 저편자 尹祥(朝鮮) 著/ 발행자 日峨山齋舍/ 날짜 [英祖25年(1749)]/ 분류 목록·해제 > 목록 > 규장각소장목록/ 초록 尹祥(1373-1455)의 詩文遺集/ 내용 卷1:夢金尺賦. 詩:五言絶句:聞慶八詠, 十三日過金郊馹, 次盤山韻, 次鄭幾康韻, 次閭陽韻, 立春日寄永同. 五言律詩:次公州朴牧使江樓韻-律, 次般若寺板上韻, 聞慶樓題, 重陽日耆老會吟, 送卞僉樞奉使日本, 十一月十一日碧蹄驛別許楊州洪監丞徐主簿, 十三日宿金巖站 . 七言絶句:次領議政黃相國乞骸詩, 送金學諭會隨賀聖節使八朝, 昭格殿祈雨祭行香使齋宿有任二首, 寄同年郭參判, 次碧松亭松陰唱和詩, 次琴參議-柔-江陵韻二首, 次鄭司成賀李主簿登科韻, 次高轉運使, 八駿馬二首, 次咸陽學士樓題, 大丘郡事時上首領官乞由, 次孝令縣東軒板上韻, 次般若寺板上韻, 壬辰季冬寄琴永同, 用許佐郞韻寄永同, 山居偶吟, 苦熟正錄廳次李修撰韻, 立秋日次鄭司成韻, 題榮川客舍小亭, 酬贈尹直學, 丁卯重陽日次河政丞韻(1447), 贈日本國禪和子, 送崔判書歸田園, 聞慶樓題, 次安東客舍西樓韻, 次安東北別室板上韻, 弘濟院途中十一月十一日佳, 十二日臨津舟中, 過平州城, 遼東都司付宴日, 次仁同鄕校樓韻, 次商山南長寺韻-三首. 七言律詩:世宗大王輓章, 哭李相國, 申相國輓, 東宮嬪輓-顯德王后, 次天使謁聖-二首, 贈送天使倪侍講司馬給事中復命還朝二首, 和日域崇泰師, 丁未仲 冬日自詠 以示伯殷仲殷(1427), 次?軒養拙堂詩韻, 次琴參議之江陵韻, 閑居自警, 雲城君是軸次其嚴君朴二相韻, 其嚴君朴二相韻, 杏壇, 次日本文溪韻, 次南宮相國韻, 無題三首, 用前韻, 次鄭司成宴集韻, 興德宮次鄭司成韻, 次醴泉客舍東軒韻, 次慶州倚風樓韻, 送一雲法師還山, 高靈馹曉行用壁上韻, 元日付同宴次柳掌令韻, 次驪興淸心韻, 觀稼樓, 次曹家庄孔漁村韻, 謝僧惠扇, 樂善堂詩. 請傳位表, 賀正朝表, 賀正朝表, 賀皇太子表, 謝賜諸佛名稱歌曲方物表, 請封世子奏准謝恩方物表, 成均館謝謁聖視學箋, 成均館謝聖殿明倫堂懸掛額字又賜甁鍾與酒饌箋, 禮曹請建箕子祠堂碑箋, 禮曹請文科試五經義箋, 兵曹請於山河險阻皆置關防以嚴守禦箋, 奉參判軍容使-礪-禮狀. 卷2:成均館闢佛?, 代德原郡事張自綱上?, 陳言, 李添嫡妾分揀陳言, 黃澗與琴永同書, 碧松亭松陰唱和詩序, 次韓正字詩序, 成均館賜???記, 醴泉客舍東軒重創記, 榜中祭壯元金參判-益精-文, 在東北面宗室?麻親致尊祭文-應製, 仁政殿立柱祭文, 仁政殿上樑祭文, 仁政殿門外南行廊開基祭祝文, 胎室封室祭祝文, 德陵安陵欄墻修補先告事由祭祝文, 策, 策問, 天生烝民有物有則, 拾遺:義興開刊鄕藥救急方跋, 刻杜律跋, 歌謠(甫州鄕校歌謠, 受命之初, 行役之勞, 記德, 通禱之詞, 慶尙道都試考官時觀察使前請酒饌長對二句). 卷3:附錄:年譜, 墓碣銘, 聞見錄/徐四佳居正筆苑雜記, 聞見錄/成?齋俔叢語, 聞見錄/金思齋正國言, 聞見錄/海東名臣錄, 聞見錄/?畢齋彛尊錄, 聞見錄/退溪集, 聞見錄/月川家藏先生手筆, 聞見錄/退溪集, 鄕賢祠奉安文, 常享祝文./ 자료제공 규장각한국학연구원(//www.history.go.kr/2014)
윤상(尹祥)/ 서명 해동잡록(海東雜錄)|해동잡록 1 본조(本朝)/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내용 본관은 예천(醴泉)으로 자는 실부(實夫)이며, 처음 이름은 철(哲)이라고 불렀고 호는 별동(別洞)이다. 우리 태조(太祖) 2년에 지방 아전으로서 급제하였다. 학문이 정밀하며 깊/ 자료제공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한국고전종합DB(//www.history.go.kr/2014)
윤상 : 세종조의 유종(儒宗 : 儒林의 宗匠)/ 서명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제3권|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저자 이긍익(李肯翊)/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윤상은 자는 실부(實夫)이며, 처음 이름은 철(哲)이고, 호는 별동(別洞)이다. 본관은 예천(醴泉)이고,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태조 임신년에 나이가 20세 진사에 올랐고 다음 해에 생원(生員)을 거쳐 병자년(1396)에 문과에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16년이나 있었고, 벼슬이 예문제학에 이르렀다. 을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서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오고갈 때 반드시 관솔[松明]을 따서 관사 은밀한 곳에 두었다가 밤에 글 읽을 때 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善山)ㆍ상주(尙州) 등지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 원손(元孫)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대사성으로 특명을 받아 원손의 입학을 지도하는 박사(博士)가 되니, 선비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 문종(文宗) 초년에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의 관아로 하여금 달마다 음식물을 주게 하였으니, 퇴로(退老)한 재신(宰臣)에게 음식물을 내리는 일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공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그 학문이 세 김씨 아래에 쓰였다. (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에 비하여 더욱 뛰어 났으므로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웠다. 공은 실오리처럼 올올이 가늘게 분석하여 일러 주되 종일토록 근면하여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 시대의 달관(達官)과 문인(聞人)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니, 조선 개국 이래 사범(師範)으로서 제일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6/ 제공 한국고전종합DB(//www.history.go.kr/2014)
윤상 : 성균 생원 유상해 등이 윤상의 재등용을 청하는 상서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서명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50-07-08(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문종 2권,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7월 8일(경술) 8번째 기사/ 성균 생원(成均生員) 유상해(兪尙諧)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이 엎드려 금 7월 초6일 정비(政批)504) 를 보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을 파직하였는데, 신 등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여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상언(上言)합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인재는 국가의 이기(利器)요, 사유(師儒)는 사람을 만드는 모범(模範)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나라가 성할 때에는 사유(師儒)를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조정이 개국한 이래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가면서 사부(師傅)를 존중하고, 교화를 숭상하고, 어진 이를 장려하고, 힘써 참된 유학자를 얻어 사부의 반(班)에 앉게 하여 인재 양성의 효과와 풍교(風敎)의 아름다움이 당우(唐虞) 505) ·삼대(三代)506) 에 비할 만큼 융성합니다. 윤상(尹祥)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조행(操行)이 청렴하여 결백하고, 학문이 정미(精微)하고, 문사(文詞)가 우아하고 건실하며, 손은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재주 있는 자가 있으면 유도(誘導) 권장하여 더욱 진보하게 하고, 재주 없는 자는 반복하여 가르치고 깨우쳐서 통달시키고 맙니다. 무릇 조정에 포열(布列)한 문학하는 선비로서 누가 윤상의 지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사람의 국가에 유익한 것이 참으로 작지 않습니다. 또 비록 연로(年老)하였으나 기력이 강건하고, 총명이 감하지 아니하였으며, 언행 동정(動靜)이 모두 사범(師範)이 될 만합니다. 지난 날 세종(世宗) 때에 늙었다고 사직하는 것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어짐을 분명히 알고 영구히 사표(師表)로 삼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이 어찌 오늘에 도리어 그 직을 파면할 것을 생각하였겠습니까? 쓰고 버리는 것은 진실로 이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으나, 국가의 어진 이를 임용하는 뜻에 어찌 결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실망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특별히 산관(散官)에 두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다시 함장(函丈)507) 사이에 돌아오게 하시면 신 등의 다행이요, 국가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정부(政府)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니, 정부에서 아뢰기를, “윤상(尹祥)의 나이 70이 넘었으니, 관례상 마땅히 물러가 쉬어야 합니다. 그대로 파(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상(尹祥)은 예천군(醴泉郡)의 아전으로 처음에 열심히 글을 읽었으며, 비록 이역(吏役)에 분주하여도 조금도 학업을 폐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정미하고, 이학(理學)을 잘하였는데, 더욱 주역(周易)에 정(精)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경학(經學)으로 소문이 나서 오래 성균관(成均館)에 임명되어 여러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조금도 권태한 빛이 없어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나이 70을 지났으므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세종(世宗)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나이 늙었으므로 면직하였다. 나이 78세였으나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모두 그의 가는 것을 아깝게 여겼다. 예천(醴泉)에 퇴거하여 제자를 교수하니, 남방의 배우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학업이 정하기는 하나 넓지 못하고, 성품이 또 편벽되고 강하여 반드시 자기 소견만 옳다고 하니 대신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8장 A면 /【영인본】 6책 252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註 504]정비(政批) : 임금이 내리던 비답(批答). ☞ / [註 505] 당우(唐虞) : 요(堯)임금·순(舜)임금 시대. ☞ / [註 506]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시대. ☞ / [註 507]함장(函丈) : 스승. ☞ / 제공 조선왕조실록(//www.history.go.kr/2014)
윤상 : 유한과 윤상에게 선온을 하사하다/ 서명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52-09-13(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단종 3권,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9월 13일(임인) 4번째 기사/ 전(前) 부윤(府尹) 유한(柳漢)·전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모두 늙어서 시골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울에〉 와서 회장(會葬)569) 하니, 그들이 돌아갈 때에 그 집에 선온(宣?)을 하사하였다. 유한은 무인(武人)으로 태종(太宗)의 지우(知遇)를 얻어, 본 벼슬에 제배(除拜)되었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나 기력이 아직 건강하여 말을 타고 험한 길을 달려도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였다. 윤상(尹祥)은 본래 예천(醴泉)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착하며 더욱 역학(易學)에 깊어서 오랫동안 사석(師席)의 장(長)이 되었으니, 당시에 이학(理學)570) 의 종(宗)으로 추앙(推仰)되었다. 다만 성품이 편벽(偏僻)되고 강(剛)하여 동렬(同列)과 더불어 동이(同異)를 강론할 때에 조금이라도 자기와 다름이 있으면 문득 서로 꾸짖고 비방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결점으로 여겼다./【태백산사고본】 1책 3권 9장 A면 /【영인본】 6책 53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註 569]회장(會葬) : 임금이나 2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종친(宗親)들의 장례(葬禮)에 각사(各司)의 관원과 친척들이 참여하던 일. ☞ / [註 570]이학(理學) : 성리학. ☞ / 제공 조선왕조실록(//www.history.go.kr/2014)
윤상 : 전 예문 제학 윤상에게 옷을 내려 주다/ 서명 단종실록 (단종 2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54-08-28(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단종 12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8월 28일(정미) 2번째 기사/ 전 예문 제학(前藝文提學) 윤상(尹祥)에게 옷 한 벌을 내려 주었다. 윤상은 치사(致仕)2690) 하여 예천(醴泉)에 사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묘(?廟)를 하례하기 위하여 내현(來見)하였다. 윤상은 일찍이 노산군(魯山君)이 입학(入學)하였을 때에 박사(博士)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었다. 윤상은 학문(學問)이 정박(精博)한데, 더욱이 《역경(易經)》에 뛰어나고 시문(詩文)을 잘하며, 오랫동안 성균관(成均館)에 벼슬하여 학자(學者)들이 많이 스승으로 받들었다. 윤상은 하나하나 자상(仔詳)하게 사람들을 가르쳐 주며, 종일(終日)토록 정좌(正坐)하고 있었으나 일찍이 피로한 빛이 없었다. 당시에 김반(金泮)과 김말(金末)이 모두 숙유(宿儒)2691) 로서 사성(司成)2692) 을 겸(兼)하여 각기 소견(所見)을 고집하며 쟁론(爭論)하기를 서로 양보하지 않았으나, 학생(學生)들은 많이 윤상의 설(說)을 받들었다. 예천군(醴泉郡)에 살면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니,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그를 따랐다./【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9장 A면 /【영인본】 6책 706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사상(思想) / [註 2690]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남. ☞ / [註 2691]숙유(宿儒) :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 ☞ / [註 2692]사성(司成) : 성균관 종3품 벼슬. ☞ / 제공 조선왕조실록(//www.history.go.kr/2014)
윤상 : 전 예문 제학 윤상의 졸기/ 서명 단종실록 (단종 3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55-03-09(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단종 13권,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3월 9일(갑인) 3번째 기사/ 전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상(尹祥)이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에서 졸(卒)하니, 예관(禮官)3137) 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였다./【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38장 A면 /【영인본】 7책 19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3137]예관(禮官) : 나라에서 의식을 행할 때 예를 집행하는 관원. ☞ / 제공 조선왕조실록(//www.history.go.kr/2014) --- |
출처: wwwwwww 원문보기 글쓴이: 장수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