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등재수필 창간호가 나오던 날
백남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진등재수필》창간호(서정시학, 2016) 출간을 앞둔 3월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머릿골 고향집 마당에서 북편 진등재 방향으로 바라보는데 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에 보던 익숙하고 아기자기한 능선이 아니라 저기, 설악산이나 히말라야 같은 경이롭고 기품서린 명산의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것이 아닌가. 그래도 진등재만은 선명하게 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푹 들어간 진등재 뒤로 동그랗고 커다란 달덩이 같은 것이 하얗게 솟아 있는 것이다. 둥근 물체의 하단 부위에는 희끄무레한 바위도 박혀 있었는데, 그 곳에 불이 켜지면 세상이 환히 밝을 것만 같았다. 흰 흔적만 있고 아직 불이 켜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부분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게 신의 현현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절대자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진등재는 결코 머릿골의 작은 산이 아니라,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기운이 잠재되어 있는 희망의 땅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아버지께서는 마당을 쓸고 계시며 손님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내게 일러주셨다. 너무나 선명한 봄밤의 꿈이었다.
출판기념식은 봄꽃이 만개하는 4월 3일, 머릿골 진등재에서 하기로 잡혀있다. 먼저, 서울에 계시는 스승님 최동호 교수께 전화를 올려 그간의 정황을 말씀드리고 기념식 때 참석하셨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렇잖아도 자네 고향에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가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그 무렵, 김달진문학관이 우수문학관으로 지정되어 시상식참가로 오실 수가 없게 되었다. 아쉽지만 선생님의 머릿골 방문은 다음으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드디어 당일 아침이 왔다. 온 천지가 꽃으로 치장된 세상에 봄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가뭄 끝의 단비라 꽃놀이를 가지 못해도 좋을 만큼 환호성이다. 하루 종일 내리고 내일 오후에 멈출 것이라 한다. 비의 의미를 생각하며 행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10시 30분, 승일이와 1차 모임 장소인 마산대에 도착하니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20명의 회원들이 다섯 대의 승용차로 나누어 타고 출발을 한다. 함안, 정곡을 거쳐 모교 신반중학교에서 의령문협 양창호 회장과 회원님들, 진주의 김유섭 시인을 반갑게 만난다. 중학생 시절에는 여기서부터 머릿골까지 20 리를 걸어서 다니던 길을 따라 여덟 대의 승용차가 줄을 지어 빗속을 뚫고 올라간다.
정오쯤 머릿골에 도착하니 준비 차 먼저 올라간 동생 남조와 남경이가 나와서 주차를 도와주니 고맙고 순조롭다. 비는 계속 내린다. 폐가가 된 우리 집으로 일행을 안내한다. 모두가 들어서니 마당이 비좁다.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셨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빗줄기 사이로 진등재를 바라보니 희미하나마 그 모습을 보여주어 참 다행이다. 하얀 구름떼로 능선을 모두 가려버렸다면 많이도 안타까웠을 텐데 말이다. 잠시 동안이지만 진등재를 향하여 각자 문학적 사연들을 소통하고 상상할 수 있음에 위안을 삼아야 하리라.
행사는 종가의 재실 사당에서 진행하기로 한다. 병풍을 치고 제물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며 준비를 끝낸다. 그동안 모든 회원들이 오늘을 위하여 일사불란하게 정성을 다해 왔다. 시산제 형식에다 출판기념식을 더하여 가장 창의적인 식순도 마련하였다. 박문주 선생의 사회로, 이장중 수필가가 최동호 교수님의 여는시「명검」을 낭송하는 것으로 의식은 시작된다. 임희주 선생이 창간축시를 읽고, 남경이가 창간사「진등재 이야기」를 낭독한다. 그 행간을 이용하여 강신, 참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이 진행된다. 강천 수필가의 낭랑한 독축 소리도 인상적이다. 송신근 회장의 인사말, 양창호 시인과 이성모 교수의 축사에서 절정을 이루고, 지도교수의 군말로 출판기념회의 대미를 장식한다. 나는 신의 강림을 기원하는 ‘강신’ 의식에서 3배를 올리며 엎드려 이렇게 기원했다.
진등재 신령님이시여. 백남오 삼가 고하나이다. 머릿골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13세 때 객지로 나간 불초소인은 만 5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이 척박한 땅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이 스승을 만나 작가가 되고, 어린시절 뛰놀던 동산의 이름으로 문학회를 만들고, 동인지 창간호를 출판하여, 문우 30명과 함께 고향땅을 밟았습니다. 이 가슴 벅찬 날, 부디 강림하시어 저의 소망을 들어주소서. 진등재의 이름으로 문학회를 창립한 것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저 개인의 입신과 영달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진등재문학회에서 빛나는 문학인재들이 줄줄이 배출되어 그들에게 문학의 월계관을 씌워주소서. 그리하여 꿈속에서 보았던 그 하얀 바위 등에 환하게 불을 밝혀 진등재가 문학의 빛으로 영원하게 하옵소서.
식을 마치자 ‘진등재수필문학상’ 시상식에 들어간다. 작가들에게 창작의식을 고취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단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며, 수필문학의 발전에 밀알이 되고자 창간기념식에 맞추어 제정된 상이다. 영예의 1회 수상자는「언니의 행복」이란 작품을 낸 진부자 수필가에게 돌아갔다. 환갑이 넘어 문학에 입문하고, 칠순이 지났는데도 소녀 같은 감성으로 수필에 매진하는 그녀의 열정에 모두들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
의식이 모두 끝나고 준비해온 음식으로 점심식사까지 마쳤는데도 비는 계속 내린다. 유년의 추억이 서린 진등재 중턱까지 걷기로 한다. 빗속에서 꽃들은 미소를 머금고 천지에 분분하다. 새싹들도 생기를 뿜으며 푸른빛을 발산해 낸다. 벚꽃도 지천이지만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까지 피어서 마치 꿈속의 꽃길로 착각하게 하는 마력을 부린다. 고향산천의 축복어린 환송이다. 이상하게도 오늘 나의 문우들은 이 머릿골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한다. 글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내지 못할 곳이라고도 입을 모은다. 하지만 나는 안다.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는다는 것을. 작은 오솔길은 꽃 대궐을 이루고 꽃비가 쏟아지니 마음이 먼저 취해 버렸다는 사실을.
꽃 속에서 문우들과 나도 함께 취하고 만다. 그래, 다 좋다, 너무 좋다. 내 문학의 원형이 이렇게도 부끄러운 곳임을, 꼭꼭 묻어 두었던 아픔을 이 순간부터 툭툭 털어버리려 한다. 머릿골 진등재가 아름다운 문학의 이름으로 태어나는 날이다.
*백남오: 2004년《서정시학》수필, 2015년《수필과 비평》평론등단. 작품집으로 『지리산 황금능선의 봄』『지리산 빗점골의 가을』『지리산 세석고원의 여름』. 경남대학교 초빙교수.
첫댓글 꿈결처럼 아름다운 수필 한 편을 쓰셨네요
그날의 감동적인 모습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비는 왔지만 꽃들이 만개하고 운무에 가려진 진등재는 상서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꽃 속에서 문우들과 나도 함께 취하고 만다. 그래, 다 좋다, 너무 좋다. 머릿골 진등재가
아름다운 문학의 이름으로 태어나는 날이다. 그날의 감동이 다시금 와 닿습니다.
교수님!
오래만에 꾼 꿈이 대단한 꿈이었네예^^
역사의 현장에서 같이있었던 시간들이 새록 새록..^^
좋은분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를 글에 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수님! "최고"입니다.
경상도 방언으로 진등은 길게 뻗은 산등성이를
의미한다.
진등재수필이란 이름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진등재수필의 명성이 길게 이어져서
동인 모두가 등성이처럼 정상에서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의미있는 탄생의 근거지가 있음은 든든한 언덕이 된다.
이제 진등재는 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날의 감동을 다시 느끼며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그날처럼 아침부터 비가 오고 있습니다. 무릇 행사에 비는 불청객이지만..그날은 왠지..그 비마저 저희를 축복하는 듯 해서 반가웠지요. 그날의 비장함과 감격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진등재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내렸지만 올라 가는 길 계곡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복사꽃이 마치 앞날의 꿈과 희망을 축복하듯 너무나도 곱고 선명하였습니다.
병풍을 치고 음식을 차려 정성껏 예를 갖추는 교수님의 모습에서, 진등재수필은 반드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소중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대망의 문학회가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