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숨쉬는 섬, 강화도 강화도는 역사의 섬이다.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의 참성단에서부터 고려시대의 대몽항쟁 전초기지로, 조선 25대 왕 철종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구한말의 신미, 병인양요와 일본에 의한 굴욕적 강화도 조약의 현장으로 우리 역사의 처음부터 현재까지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강화도에서도 교동면은 강화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강화 섬 중의 섬’으로 47㎢의 작은 면적에 불과하지만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주도한 김통정 장군 같은 영웅을 배출한 당찬 지기(地氣)를 갖춘 곳이다.
‘교동’섬은 북한 땅을 넓은 시야로 바라 볼 수 있을 정도의 최전방. 따라서 예전에는 통제도 많고 사람의 움직임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교동 섬은 젊은이들이 거의 사라진 섬이 됐다. 1,370세대에 인구 3,400여 명(2006년 기준)이라는 통계는 웬만한 젊은 사람들이 인근 인천, 서울 등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주로 고령자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섬에서 흔치 않은 젊은 농사꾼 전혁찬(28세;식량작물학과 2회) 씨는 교동에서 고향 땅을 지키며 농업을 이어가는 흔치 않은 ‘Young Farmer’, 젊은 농사꾼 중 한 사람이다.
전씨는 본인 스스로 한국농업전문학교 입학을 결정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신설된 것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입학을 결심했다. 입학 후 학교생활은 특별히 튀는 것도 뒤쳐진 것도 아닌 평범한 생활이었다. 학교에서 착실히 실력을 다지며 미래 영농생활에 대한 설계를 하곤 했다.
졸업 후 고향에 돌아온 전씨는 선대부터 이어 온 수도작과 고추 농사에 종사하면서 4-H회와 농업경영인회 활동을 하고 있다.
◇좋은 쌀 명성, 고추에도 이어져 그는 강화에서 1만8,000평, 서산 농장에서 3만평의 논농사를 짓고 있다. 서산에서 생산되는 쌀은 서산 RPC를 통해 판매하고 있고 강화에서 나는 쌀은 주문판매를 통해 전량 자가 판매 하고 있다. 비결은 ‘발 품’과 ‘말(言) 품’이란다.
“서울이나 인천 등의 아파트 부녀회장, 마을 통장들을 만나 우리 쌀을 소개하고 명함과 전단지를 건넨다. 부지런히 다닌 끝에 강화에서 나는 생산량은 거의 자가 판매로 소화가 가능해 졌다.”
일종의 다이렉트 세일(direct sale)인 셈인데 사람들을 만나 무엇을 판매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것이 기(氣)를 소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전씨.
“따지고 보면 모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상품이 됐건 서비스가 됐건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해 부대끼며 사는 것이구나”라고 되 내며 힘든 것, 자존심 상하는 것을 참았다.
그가 생산하는 쌀은 ‘아침이슬’이라는 상표로 나가는데 10kg 들이 3만원, 20kg 들이 5만원에 판매된다. 전씨가 생산하는 쌀에 대한 신뢰는 고추에도 이어져 1관에 12만원 하는 고춧가루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고정고객만 800 가정에 이른다.
◇시간은 정말 ‘금’이더라 그는 끝까지 농업인으로 남을 생각이다. “농업과 농업인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언젠가 감소율이 ‘0’에 이르는 순간이 올 것이다. 고품질농산물로 안정적인 고객을 확보해 놓은 농업인들만이 그 시점까지 살아남아 안정된 직업으로서의 농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후배들에게는 “3년이 너무 금방 지나갔다”며 “좀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학교생활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동아리활동, 어학공부, 취미생활, 자격증 획득 등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보라는 것이다. 전씨는 “시간이 금이라는 격언을 늘 들어 왔지만 잘 실감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3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획 하고 지나갔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시간은 정말 금이더라”고 말했다.
◇지금은 준비할 때 교동 섬은 2012년 완공 예정으로 있는 연륙교로 강화도와 연결된다. 강화도가 이미 김포와 연결돼 있으므로 교동까지 연육도가 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교동의 접근성은 획기적으로 향상된다. 관광객들의 왕래도 훨씬 늘어날 것이다.
“관광과 연계한 농산물 마케팅을 착실히 준비해 나갈 시점”이라고 말하는 전씨는 성공을 위한 준비로 하루 해가 짧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