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국내에서 간첩활동을 함
간첩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후보위원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16년 출생2000년 사망
북한의 정치인, 대남간첩.
1990년대 남한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전설적인 '할머니 간첩'으로 유명하다.
북한에서 공개한 생일에 따르면 1916년 11월 4일에, 남한에서 등록한 호적에 따르면 1917년 2월 13일에 오늘날의 서귀포시인 남제주군에서 이재춘과 김경량 부부의 6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이화선이다. 제주도 가파소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인 1927년에 중퇴했고, 1930년, 어머니와 함께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을 하던 아버지 이재춘을 찾아갔으나 3년 만에 홀로 귀국해서 부산에서 살았다.
1937년, 소학교 동창인 어부 김태종과 결혼하였으며 1940년, 남편과 함께 대마도로 이주하였고 김태종은 잠수부로, 리선실은 삯바늘질로 연명했다. 그러다가 대마도에서 해방을 맞이하여 1947년에 귀국하여 부산 영도로 돌아왔으나 김태종이 그녀를 버리고 다시 대마도로 밀항해서 딴 살림을 차렸다. 이러한 가정적 불행에 더불어
고향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사건의 영향으로 남로당에 가입하였고,
북에서 파견된 공작원과 동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4월, 동거 중이던 공작원이 체포되면서 수배령이 떨어졌고 월북하였다. 1995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동식은 리선실이 원래 이삼룡 밑에서 여성운동을 하다가 6.25 전쟁 중 태백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선전공작원으로 서울로 내려와서 잠시 활동을 했고, 전남편 김태종의 소식을 잠시 알아봤다고 한다. 이후 다시 북으로 돌아가 금강학원에서 사상교육을 받았고, 내각 경공업위원회 과장, 황해도 녀맹 간부, 평양시 녀맹 부위원장 등 꽤 괜찮은 이력을 밟았다. 그런데 1963년 4월, 김일성에게 직접 탄원서를 바치고 대남공작전선에 투입해달라고 부탁하였고, 이에 김일성이 695 정치대학에 보내주어 공작원으로 훈련을 시킨 후 1966년 8월, 남한에 잠입시켰다.
특수공작선을 타고 서해안, 강화도, 서울, 부산에서 5년 간 활동하다가 1971년에 북으로 돌아갔다. 이후 1973년 4월, 다시 침투하여 5개월 간 서울과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73년 9월에 북으로 돌아갔다. 성공적인 2차례의 임무로 연락부에서 유능한 공작원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1960년 4월 28일에 북송된 전라북도 완주 출신 재일교포 신순녀로 위장하게 되었다. 신순녀에 대해서 철저히 학습한 리선실은 1974년 1월, 공작선을 타고 일본 서해안으로 잠입, 고베에 살던 신순녀의 이복여동생에게 자신이 신순녀라고 속이고 접근했다. 이 이복여동생은 실제로 신순녀를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리선실은 자신이 1965년에 일본으로 밀항해서 오사카 입국관리국에 자수하여 그녀의 주소를 알아냈다고 손쉽게 그녀를 속일 수 있었다. 덕분에 1974년 3월 4일, 도쿄에 사는 신순녀의 또 다른 먼 친척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정식 일본 거류민으로 외국인 등록증을 교부받고 도쿄 입국관리국에 자수하였다. 리선실은 자신이 이동춘이란 남자와 동거하는데 신경통으로 노동할 수 없는 이동춘을 자신이 부양해야 하니 특별체류허가를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당국은 조사 후에 신순녀가 북송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지적했지만 리선실은 북송된 신순녀는 가짜고 자신이 진짜라는 거짓말로 일본 당국을 속였다. 북한에 물어봤자 확인도 안해줄테니 일본 측은 그냥 1975년 4월 22일, 특별체류허가를 내주었다.
일본 정부를 속인 리선실은 이어 한국공관에 국민 등록을 신청하였고,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들을 보증인으로 세워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리선실은 영리하게도 가까운 오사카에 살던 신순녀의 가까운 친척들이 북한 국적을 유지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먼 친척들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국민으로 인정받았음에도 4년이 지난 1978년 5월에야 여권을 신청하였으며, 4년간 신순녀 가족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을 완벽하게 속여넘겼고 1977년 2월, 외국인 등록 갱신도 전혀 무리없이 해냈다.
4년 후인 1978년 5월, 리선실은 한국에 사는 신순녀의 친언니 신양근을 만나러 가자고 신순녀의 이복여동생을 구슬러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1978년 6월 4일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당시 신양근 전북 전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리선실은 완벽한 연기력과 신순녀에게서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친언니인 신양근조차도 속여넘겼는데, 신양근도 3살 때 신순녀가 도일하면서 헤어졌기 때문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리선실은 신양근의 집에서 머물며 전주와 광주를 관광하고 세이코 손목시계와 카메라를 선물로 뿌리는 등 신양근 일가의 환심을 샀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한국 방문을 마친 리선실은 1주일 후에 얌전히 일본으로 돌아가는 치밀함을 보였다. 신순녀는 일본으로 돌아가 신양근에게 고향에서 같이 살자고 구슬렀고, 1978년 12월 24일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도 많은 선물을 뿌리고 고향 제주도 여행을 가는 등 유유자적하였으며, 더 긴 1개월간 체류하고 또 일본으로 돌아갔다.
1979년 4월, 일본으로 일시 귀국한 리선실은 그간의 결과를 보고하였고 상부는 그녀에게 남한 사회에 지하조직망을 건설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여 1979년 7월에 다시 일본에 잠입시켰다. 리선실은 9월 29일에 다시 한국에 잠입, 영주 귀국을 하기 위해 아파트를 사고 싶다면서 공작금 1천만엔을 주면서 신양근의 며느리를 속여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아파트를 구입하여 아지트로 삼았다. 신양근 일가를 완전히 기만한 리선실은 또 일본으로 돌아가는 등 평범한 교포 코스프레를 유지하였으며, 1980년 3월 30일에 다시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고정간첩으로 활동하였다. 리선실은 신양근의 장남을 통해 주민등록증을 손쉽게 발부받았으며, 이후 이용가치가 없어진 신양근 일가와의 연락을 서서히 끊었다.
1년간 조용히 서울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정세와 서울 지리를 익힌 리선실은 1981년 11월부터 야권 성향의 교인, 노동운동가들을 포섭하기 위한 각종 공작을 벌였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보험회사 직원을 양녀로 들였고, 부동산 사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였다. 근데 체포될 것을 염려했는지 고질적인 신경성 위염을 앓아서 영등포의 한의원에서 통원하며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때 고베에 있는 신순녀의 이복여동생을 만난다거나 병치료를 구실로 4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북한에 공작상황을 보고하였다. 리선실은 1990년 9월 17일, 북한으로 돌아가 다시는 남한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리선실의 공작은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북에서는 리선실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는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무려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시켜주었고, 리선실은 간첩 중에서 정경희와 함께 최고위직에 이르렀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출을 시작으로 1998년 7월까지 4선 대의원을 지냈다. 1981년 국기훈장 제1급,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조국해방기념메달, 1985년 국기훈장 제1급, 1986년, 로력훈장, 1990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 언론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은 김일성훈장이다.
1991년, 그때까지도 살아 있던 리선실의 친모가 재일교포에게 리선실의 소식을 알아달라고 전하였고, 그 교포가 북한에 가서 안내원에게 이화선을 만날 수 없겠냐고 묻자 너무 높으신 분이라서 만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리선실은 1991년 1월, 윤이상과 김일성의 접견,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 생일잔치, 1992년 9월, 정권수립 44주년 기념행사 등에 나타나면서 고위직임을 과시했고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다만 1995년에 체포된 북한 공작원 김동식은 정치국 후보위원인것 자체는 사기 진작 차원이고 리선실의 힘은 별로 없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아는 공작 방법이 너무 낡아서 신세대 공작원을 교육할 수준도 못되었다고 한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면서 생존은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후 소식이 들려오지 않더니 2000년 8월 7일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당중앙위원회 부장 직함으로 안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심화조 사건 때 남한보다 훨씬 못한 인민들의 삶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다가 미움을 사서 채문덕에게 고문당해서 처참하게 죽었고, 채문덕이 역으로 숙청되면서 복권되어 안장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죽은 것도 사실 1999년이고, 2000년 8월 7일은 김정일이 리선실을 복권한 날짜라는 것. 하지만 체포된 공작원 김동식은 리선실이 이미 간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이 간암에 좋다고 왕지네도 보내주었다고.
북한 영화 이름없는 영웅이 리선실의 얘기라는 주장이 있다.
영화 헌트의 대남총책이 리선실이나 정경희에게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리선실은 총책 수준은 아니었으며 총격전에서 사망한 헌트의 총책과 달리 유유하게 북한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