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함경과 초기불교에대한 성철스님의 正見
성철스님이 부처님 원음을 읽게 된 인연
성철스님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 말에 토굴에서 수행하실때 일부러 부처님의 원음인 빠알리삼장의 일본어판인 남전대장경을 통독하시고, 아함경은 부처님 원음이며, 부처님의 원음은 소승경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철스님의 바른견해가 백일법문에 나옵니다.
성철스님이 당시에 대승비불설이라는 충격적인 이론을 접하시면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성철스님은 수행승이셨던 것만이 아니고 교학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백일법문같은 것을 보면 지금까지 어떤 선사도 하지 못했던 선불교와 중도 중심의 교판을 행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주목할점은 선불교중심의 교상판석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대승불교안에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나 또는 많은 교종의 스님들이 교상판석을 시도했는데, 선불교에서는 최상승이다라고만 했지 대승불교전체를 관통하면서 그것을 교판한 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천태대사가 일찌감치 교종중심의 교판을 했다면, 선불교는 겨우 이제서야 선불교중심의 교판을 한것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판으로만 본다면 천태지의대사의 교판에 뒤이은 또 하나의 교판이다라고 생각하면 될것입니다.
성철스님은 달마대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바른 견해를 확립하신 분
진실로 중요한 것은 성철스님이 선불교중심의 교판을 위해서인든 아니든, 대승비불설을 알기위해서든 아니든, 바로 부처님의 원음인 아함경과 니까야를 토굴에서 통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중요한 것이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철스님은 달마대사를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달마대사는 달마관심론에서 아승기겁에 걸친 보살행으로 성불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견해라고 하면서 대승불교의 핵심이론인 성불론과 보살행론을 급진적으로 수정했습니다. 사실 달마대사의 그 말은 그러한 것을 글자그대로 믿는자가 어리석은 범부라고 했지만, 경전을 그대로 믿는 일반불제자야 무슨 죄입니까? 그냥 신심있는 불제자일뿐이지요. 그러니 달마대사가 삼아승기겁에 걸친 보살행을 통한 성불론이 어리석은 범부의 견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론을 설한 대승논사들의 경전 즉 대승경전을 에둘러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시대적한계때문에 아함에 대하여 바르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탐진치삼독심만 멸하면 지금여기에서 성불"이라고 말해서 "탐진치소멸이 해탈열반 아라한"이라는 초기불교적 수행관을 반영하긴 했습니다. 달마대사는 비록 그러한 생각을 단편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아함경이 소승경전이고 대승이 우월한 경전이라는 그 당시의 견해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견해를 말씀하진 않았습니다. 이것은 꼭 달마대사만의 한계는 아니고 시대적인 한계라 하겟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선사로서 달마대사와 같지만, 부처님의 원음인 아함경을 읽고 바른 견해를 확립하심으로서 달마대사의 인식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아함경과 초기불교 아라한에대하여 확립하신 정견
성철스님이 제일 먼저 확립한 견해는 아함경과 율장이 부처님직설에 가장 가깝다는 것입니다. 대승경전을 변호하기 위해 그렇게 약간의 여지를 두고 말씀하셨지만 같은 백일법문내에서 아함경을 부처님원음으로 여기고 아함경의 입장에서 기존의 대승경전과 기존의 오시교판론 같은 교상판석을 통렬하게 비판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또 부처님과 부처님직제자들의 불교가 불교의 중심이라고 과감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기존 대승불교에 의하면 부처님직제자들은 소승성문아라한으로 근기낮고 저열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아함경을 읽으심으로해서 기존의 아라한관에 대하여 큰 변화를 가져왔고, 부처님직제자들의 불교야 말로 불교의 중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대승경전의 아라한멸시에 대한 간접적이지만 무거운의미를 가진 비판이며 바른견해의 확립입니다.
성철스님은 또 아라한의 깨침이 성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존 대승경전과 선불교에서는 아라한 연각 보살 부처라는 단계를 만들어놓고 아라한의 깨침은 수준낮은 것으로 치부하여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부처님직제자들인 아라한들은 바로 중도연기를 깨쳐 법계에 들어가신 분들로 그분들을 아라한이라고 부르던 보살이라고 부르던 성불이라고 부르던 하등의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야 말로 아라한 보살 성불을 애매모호하게 뭉뚱그려 합해버리신 것이 아니라, 대승경전에서 아라한을 멸시하고, 선불교에서 아라한을 오해하였던 것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드러내는 성철스님의 바른 견해인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아함경에대한 바른 이해를 기초로 대승경전을 비판하심
성철스님은 이러한 바른 견해를 기초로하여 첫째로 대승경전의 이론을 비판하셨습니다. 즉 성철스님은 부처님원음을 보면 이승이니 삼승이니 삼아승기겁에 걸친 보살행을 통한 성불이니 하는 돌아가는 헛된 길(空路)를 결코 설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이 비판은 달마대사의 대승불교비판과 맞닿아있지만 성철스님의 말씀은 아함경과 니까야라는 부처님원음을 근거로 확립하신 것이라 더욱 강력한 진실의 말씀입니다.
성철스님은 이러한 바른 견해를 기초로하여 둘째로 중국불교와 우리나라불교의 이론을 비판하셨습니다. 즉 중국에서 확립된 오시교판론(핵심은 부처님원음인 아함경이 가장 저열한 경전이라는 인식)은 결단코 잘못된 교상판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부처님원음인 아함경을 소승경전이라고 알아서는 절대 안된다는 성철스님의 사자후이신 것입니다.
성철스님의 시대적 한계
성철스님은 조계종단의 큰 어른이셨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이와같이 아함경에 비추어 비판하셨지만, 또 한편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직설은 아니지만 중도가 있으므로 불설이라고도 볼수 있다라고 타협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 이러한 견해로 대승경전의 각 종파의 논리를 말씀하시면서 성철스님식으로 철저히 부처님이 설하신 아함경의 중도의 입장에서 대승의 경론을 분석하려고 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아함경에 대한 바른 견해를 확립함과 동시에 종단의 큰 어른이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더욱 철저하게 비판하시진 않고, 또 선불교의 입장에서 통합하려고 하셨습니다.
예를들면 성철스님은 비록 이와같이 아함경을 말씀하셨지만, 대승의 불보살이 대승논사들이 창작한 헛개비임을 말씀하진 않았습니다. 이미 "대승경전은 부처님 직설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씀에 이 의미가 포함되어있다고도 볼수 있지만 명확하게 말씀하시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승삼승 삼아승기겁에 걸친 보살행은 헛된 길"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잘 살펴보면, 성철스님도 그러한 것을 설하는 대승경전의 불보살이란 것이 창작이란 것을 의식하셨음이 당연하다고 할것입니다.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일뿐.
성철스님은 또한 아함경이 부처님의 원음임을 확신하셨지만, 스님들의 교육과정이라고 할수 있는 강원의 과정에 아함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지 못했습니다. 아함경이 부처님원음이고, 이승 삼승의 이론을 담은 대승경전이 대승논사의 작품임을 꿰뚫어 알았다면 아함경을 스님들이 공부하실수 있게 노력했어야 마땅한데 그러하시지 못했습니다. 성철스님이 계시던때에 안팎으로 조계종을 둘러싼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절인연에 그렇지 못했던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이렇게 성철스님은 비록 대승경전을 선불교로 통합 교상판석하신 훌륭한 분이시고, 무엇보다도 놀랍게 아함경에 대한 바른 견해를 확립하신 분이시지만 시절인연과 선불교중심으로 통합하려는 의도가 더욱 강한 탓에 부처님원음과 아함경에 대한 더욱 폭넓고 바른 견해를 밝히시거나 교단에 영향을 끼쳐 변화시키려 하시진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이 확립하신 바른 견해를 귀중히 여겨야할 이유와 우리 시대 불제자들이 해야할 일
그렇다하더라도 부처님원음에 대한 이해와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가 선진적인 스님들에게 나타난 것이 겨우 1980년대라고 하고 빠알리경전이 드디어 한글로 역경된 것이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일어나고, 재가불제자들이 아함경 초기불교 위빠사나에 대하여 대중적인 앎이 일어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므로 50년전에 놀라운 정견을 확립하신 성철스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벌써 5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대승과 선불교의 스님들과 불제자들은 성철스님이 확립하신 정견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승 삼승론과 오시교판론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면서 옛날 이론을 반복하고 부처님원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확립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면 진정으로 성철스님이 그 당시에 확립했던 견해가 귀중하다고 할것입니다.
출가제자로서 아함경에 대하여 바른견해를 말씀하신 분은 성철스님이 있고, 재가제자로는 고익진박사님이 계십니다. 이분들이 단편적으로나 밝힌 아함경에 관한 견해는 지금의 대승 선불교에도 큰 충격이 됩니다. 그렇지만 성철스님은 선불교중심으로 교상판석하려는 의도가 강하셨고, 고익진박사님은 법화경으로 교상판석하려는 의도가 강하셨습니다. 전래된 불교의 선종과 교종 양쪽에서 아함경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한 것은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시절인연이 있고, 거의 아함경에 관한 한 선각자적인 견해였기 때문에 완전하게 초기불교적 부처님원음에 확고히 선 정견을 말씀하신 것은 부족한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분들이 그 시대에 선각자적으로 깨우친 아함경에 대한 말씀은 충분히 우리시대에 부처님원음을 회복하려는 불제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과 고익진박사님이 선불교와 법화경으로 통합하려는 시절인연을 감안한다면 우리들이 그 뒤를 이어 부처님원음을 바르게 드러내고 부처님원음을 기반으로하여 선불교와 대승불교의 중도를 벗어난 이론들을 바로잡아야 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_()_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나타난 아함경 초기불교에대한 正見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천태지의대사의 오시팔교론과 현수대사의 오교론과 다른 점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목전에 문제로 와닿은 대승비불설에 대한 변론입니다. 스님은 대승비불설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들을 폭넓게 참고하여 결론을 내리시길, “대승경전은 부처님직설은 아니지만 중도사상이 있으므로 불설이라고 볼수 있다. 그것이 확인됨으로써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이 견해는 대승불교의 장점만을 보고, 대승불교의 단점과 치명적인 맹독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신 것이지만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언급이 됩니다.
성철스님이 대승비불설을 변론하시는 과정에서 내리신 결론 중에서 중요한 것:
(1) 근본불교(원시불교)와 소승불교(부파불교)를 분리하여 이해
(2) "아함경은 소승경전"이라는 삿된 견해를 버리고, "아함경이 근본경전"이라는 정견을 확립
(3) "불교의 중심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의 불교"라고 하심
(4) "부처님의 직제자들은 연기중도를 바로 깨쳐 성불한 것"이라고 규정
아래에서 성철스님이 아함경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모아 보았습니다. _()_
1.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 ... 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할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 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 뒤로 십수개의 부파가 나뉘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승 불교는 바로 그 부파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 성립 이후의 교단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근본불교 정신으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2.
하나 덧붙일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불교를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눕니다. 원시불교를 다시 (1) 부처님 당시와 직계 자제들이 있었던 불멸 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2) 부처님께서 돌아 가신 후 백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합니다. 부파불교란 곧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까지 4. 5백년 사이를 말하고, 또 대승불교는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합니다.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유견의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자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없는데 반하여,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교설이 설하여져 있습니다.
3.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는 것인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당시의 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만일 그 근본취지가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 변질된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4.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 등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5.
누구든지 지관(止觀) 정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 번 귀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원융무애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가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지겁을 닦아 성불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6.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緣起를 見하는 者는 法見하며 法見者는 緣起를 見하느니라. 中阿含經, p241).
발가리(跋迦梨)여,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 발가리여, 법을 보아서 나를 보며 나를 보아서 법을 보느니라. (相應部經典 三券, p190).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말입니다. 여래는 법계를 정등각 하고 연기를 직접 깨치고 중도를 직접 증득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직접 증득하고 바르게 깨친 연기는 곧 법이며, 중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히 교시되어 있습니다.
7.
이와같이 일승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물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南傳大藏經 제 16권 상, 相應部經典 5, pp357-358)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8.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알아둘 것은, 선인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렸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위해서 설법한 것을 말하는데, 그러면 부처님은 녹원에서 사제를 설하실 때 아공만 설하고 법공은 설하시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교판입니다. 녹원에서 부처님이 사제를 설하든 팔정도(八正道)를 설하든 혹은 무엇을 설하든지간에, 그것은 분명히 중도를 근본으로 삼아 설법하셨지, 어느 것 하나 중도를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즉, 중도 이것이 팔정도라고 선언해 놓고 사제법문도 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을 말할 때도 아(我)나 아소(我所)의 공인 아공(我空)만이 아니라 법공(法空)또한 설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9.
원시경전의 초전법륜에서는, 아라한이 여섯이 있다고 설하여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을 아라한(阿羅漢)이라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아라한이란 말은 중도를 깨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깨친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서는 아라한이라 하든지 보살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_()_
<출처> http://cafe.daum.net/BLDM/IeYM/2853?docid=11cBE|IeYM|2853|20090611132019&q=%BE%C6%C7%D4%B0%E6&srchid=CCB11cBE|IeYM|2853|20090611132019. 글쓴이: 명행족
=====================================================================================
2. 대승불교에서 아함경을 무시하는 이유 - 도월스님
참 어려운 질문을 하십니다. 답변드리기도 곤란하고 난처합니다.
이 문제를 잘못 건드리면 이단으로 공격받기 쉽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소승은 성직자의 양심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려 합니다.
아함경이 이 땅에 들어온지 겨우 몇 십년입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평가받기 시작한 경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 전에는 소승불교 경전으로 치부하다, 많은 신도분들이나 개혁을 주장하는 분들이 기복신앙적인 요소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읽게 되어,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부처님의 진 법문 즉 살아있는 경전이지요. 이것은 부처님 사후 700년 이후 쓰여진 대승경전과 달리, 부처님 재세 시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진정한 불교경전입니다.
소승은 승려 생활한지 오래지 않았지만 부끄럽게도 아함경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저 금강경이 최고인 줄 알고 읽고 사경하고 했지만, 정작 금강경으로는 뭔가 부족하여 그 사상의 원 교리를 찾다가 아함경을 읽고, 정말 부처님 살아 생전의 육성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아함경이 처음부터 북방불교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 달마조사로부터 선이 들어오면서 선문답이라고 하는 방식의 깨우침을 우선했었지요. 뜰앞에 잣나무가 어쩌네, 똥막가지가 어쩌네 하며 논쟁을 하다가 소위 큰 스님이라는 분들이 부처님이전부터 있었으나 부처님이 크게 강조하지 않으신 공사상을, 개인적인 깨우침에 근거해서 확대재생산하여 여러가지 경전을 마치 부처님의 말씀인냥 편찬하였지요. 그 팔만 사천 경전이 된 대승경전을 먼저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이나 수행자들은 그 대승경전(경전이라기 보다는 법문이라함이 옳을 듯)을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의 실제 말씀인냥 알고 공부했던 것이지요. 경전은 대승경전밖에 없었고, 더구나 여시아문 하니까 부처님의 실제 음성으로 믿을 수밖에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대승경전을 천 몇 백년 공부하던 중에, 불과 몇 십년 전에 들어온 아함경을 보니, 부처님의 행적이나 연기법 팔정도 등이 대승경전과 달리 너무 쉽게 설명이 된 것을 보고, 수준이 낮은 경전으로 마치 원시불교(소승불교)에서 보는 경전으로 치부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대학생이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고 쉽다고 팽개치듯이, 정작 부처님의 진 법문인 아함경을 팽개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뿌리 깊은 무속신앙 신비주의 기복신앙을 팽개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겠죠. 그리고 뭔가 탁하는 순간에 깨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아함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 깨침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선종과는 너무나 다른 가르침에 놀라서 던져버린 것입니다.
제가 대승경전을 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건전하고 진정한 대승불교를 하자는 것이지요. 다만 기초학문을 배워 학력이 쌓인 후 대학교 공부를 하듯이 절차와 순서를 밟아가야 하는데, 우리 불교는 기초 학문인 아함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학교 교제로 바로 공부를 하는 경우지요. 그러니 정작 승려들과 신도들이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수박겉만 핥다가 마는 경우가 바로 한국불교입니다.
1. 아함경이 왜 중요한지를 먼저 말해야..
아함경은 우리가 성경이나 코란을 보듯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생활 가운데 불교의 진리를 설한 내용입니다. 누구나 불교의 깨달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해진 것입니다.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내용을 부처님 사후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직접 부처님께 들은 바를 적은 경전이지요. 기독교로 보자면 4복음서 같은 것으로 불교성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죠. 기독교에서 4복음서가 없다면 기독교가 존립하지 못하듯이, 아함경이 없는 불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0명의 제자 중에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 존자나, 두타행을 수행하고 부처님 법을 전한 제1대 조사로서 받들고 있는 마하가섭 등 부처님의 10대 제자에게 설한 경전 내용입니다. 아함경엔 무상 고 무아 연기 사성제 팔정도 등에 대한 구체적인 교리들과 부처님이 45년간 설하신 모든 법문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사후 700년에서 1,000년이 지난 다음부터, 부처님 얼굴도 음성도 모르는 스님들이 여시아문하여, 마치 부처님의 진짜 말씀처럼 기록한 법문하고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살아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최초의 경전입니다.
이 아함경을 읽어보면 부처님이 막 깨달으신 이야기부터 부처님 열반까지 모든 시기에 걸쳐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말씀과 일거수일투족이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럼 왜 북방불교에서 아함경을 무시했나?
우선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달마조사에 대한 설명이 우선됩니다.
달마조사는 경전에 기록되기를, 앞서 말한 마하가섭 존자가 1대 조사가 되셨고 나중에 아난존자가 가섭존자로부터 깨달음을 인정받고 2대 조사가 되었으며→3조 상나화수존자→4조 우바국다존자 →5조 제다가존자→6조 7조........ 28대 조사 "보리달마" 스님까지 오게 되었으나, 달마조사는 당시 선종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져 온 것입니다.
달마조사가 소림사에서 면벽 9년 하실 때 중국 승려 혜가스님이 29대조사로 맥을 잇게되고→30대조사 승찬대사→31대조사 도신대사→32대조사 홍인대사→33조사 혜능대사 까지를 33조사라고 하여 선종에서 높이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이전에 이미 중국 땅에 뿌리내리고 있던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요즘 말로 하면 족보개념 때문에 육조 혜능까지를 중요한 법을 받은 분으로 생각하고, 그 시대 팽배했던 도교 사상을 결합한 중국불교 즉 선종이 득세하게 됩니다.
결국 아함경은 버려지고 마치 선종(선불교)만이 최고의 수행법이고 부처님의 진법문인 것처럼 왜곡된 것입니다.
3. 한국불교는 어떠한가?
우리 한국불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육조 혜능의 법을 이어받은 받은 법손으로 이어지는 선종을 배워 온 스님만 정통으로 인정해 왔었습니다. 결국 16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의 불교 도입이래 고려 말의 태고 보우나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지금의 각 종단들이 종조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덕분에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은 중국에서 즉 육조혜능의 법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한국 선종에서 인정을 해주지 않는 잘못을 아직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불교는 철저한 중국의 사대주의적 종교이지요.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도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보니 우리같이 선만이 최고인냥 하지 않고 남방불교도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조계종단을 중심으로 선만이 최고의 수행, 최고의 불교인 것처럼 왜곡하다보니, 국적도 없는 불교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러니 아함경이 달갑지 않은 것이죠.
4. 한국불교에서 다루는 경전은?
각 종단이 주된 교재로 삼는 경전을 말하는데, 소위 말해서 소의경전이라고 합니다. 통상적으로 한국불교의 대부분의 종단에서는 금강경이 소의경전으로, 다른 경전보다 우선시 하지요.
금강경은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설한 공사상을, 후대에 대승의 승려가 좀 더 발전적으로 확대해석한 경전으로, 한 곳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항상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고, 모양으로 부처를 보지 말고 진리로서 존경하며, 모든 모습은 모양이 없으며 등등...... 이렇게 본다면 곧 진리인 여래를 보게 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지요.
이것이 '즉 선을 통하여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대승의 입장에서, 수많은 경전 중에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사용한 것이지, 부처님의 경전이 이것밖에 없어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5. 그럼 지금이라도 아함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아함경을 인정하면 대승불교 즉 한국불교의 존립기반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을 받아들이면 그동안 승려들이 법문한 거의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정되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승려가 아닌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으면 화형시켰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너무 쉽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아함경은 지금의 대승경전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대승은 힌두교의 잡신들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염라대왕, 주술, 점술, 동양철학, 산신, 칠성, 용왕각, 유교, 도교적 요소 등으로 기복신앙화 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부정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짖거리를 행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데, 아함경으로 말미암아 이런 기복신앙적인 요소가 없어지면 모두 굶어 죽는다는 생각에 아함경을 읽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아함경에는 현재 대승의 모든 신적인 존재나 점술, 허례, 의식, 기복을 철저히 배격하거든요.
일례로 여러분께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시피, 삼귀의에서 마지막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해야 할 것을 아직도 "거룩한 스님께 귀의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뻔한 얘기를 왜 아직도 고치지 않을까요? 그것을 고치면 사찰에서 스님과 재가자의 권한이 동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찰의 운영에 재가자가 동참해야하는 이론적인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기에, 사찰 운영에 침해받아서 재정을 공개해야하고 재정을 스님 독단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직도 아함경을 마치 원시불교 즉 스리랑카 태국 베트남 등 소승에서 배우는 경전으로 치부하고, 자신들이 배우는 금강경 등의 대승경전이 최고인냥 권위를 부여하여, 신도들에게 기도하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도 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예로 조계종단에서 선승으로 추앙받는 청화 큰스님이 아함경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이제부터라도 승려들이 아함경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자, 승려들이 청화스님이 주석하시는 선방에 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95년 전 만해스님이 불교 유신론을 통해서 참선을 올바르게 지도할 것. 염불당을 폐지할 것. 포교를 현대화할 것. 무속적인 산신 칠성들을 제거하고 석가모니불만을 봉안할 것. 의식(儀式)을 간소화할 것이라고 외친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못내 아쉽게도 만해스님께서는 아함경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열반하셨지요.
그 동안 우리가 참된 경전인 아함경을 외면하고, 마치 선조사들이 부처님의 진리를 자기 나름대로 설한 법문을 마치 부처님의 진경전인냥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함경을 제외한 나머지 경전은 모두가 방편법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방편법문도 진리를 연구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본래 부처님의 깨달은 그대로의 경전이 있는 데, 그것을 애써 무시해서는 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아함경을 통해서 진리를 완벽하게 그리고 전부를 가르쳤습니다.
6. 부처님이 설하신 외의 그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아야
만약 아함경의 교리와 다른 이론을 설한 경전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아함경에 바탕을 둔 대승의 이념은 더 한층 발전시켜 불교의 교리와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아함경을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한 불제자의 자세가 아니겠지요. 아함경을 읽어야 기복신앙과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하여 불교를 종교로 만들고 교주가 되고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단지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순응하고 포용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현상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의 이념처럼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이 부처요 보살입니다. 우리 불제자들은 이 아함경에 수반하여 육바라밀 팔정도를 직접 행한 후, 대 소승의 이념을 실천하는 부처요 보살행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세상 살아가면서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길을, 바로 아함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함경의 말씀을 따라 신앙한다면, 굳이 기복과 신비 등 외도를 가르치는 절에 가서 부처님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원불사의 소의경전은 아함경입니다. 또한 한국 나아가 세계의 모든 불교의 소의경전은 아함경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불제자가 오늘부터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아함경을 읽으시기를 삼가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로 든 금강경은 때를 가려서 공부한다면 너무나 훌륭한 경전입니다. 지금까지 글을 읽으신 분 중에 금강경을 신봉하고 공부하시는 분들은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조계산 보현사에서 도월합장
도월스님의 불교개혁실천모임 http://cafe.daum.net/DOWOL
도월스님께서 지도스님으로 계시는 한국불교개혁카페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