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의 해안 외 4편
언덕 아래 나를 사랑한 너는 누구일까
자본의 탐욕을 메고
언덕 위로 뛰어간 토끼는 누구일까
높은 곳과 빠른 걸음을 고집한다면 진정 이기주의일까
거북이 책이 토끼 책에게 감동을 준다면
서로 같이, 오래오래
우리의 바다를 지켜내지 않을까
침묵한 골목 침묵한 그림 침묵한 풍금 침묵한 의자 침묵한 배
침묵한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바뀌고 싶을까
달이 뜬 저녁이면 여기는 더 눈부시다
소년과 소녀가 손을 맞잡듯
칸나도 뜨겁다
노을과 파도의 맛이 빼어난 여기
잠깐이라도 머문 입술들만이 장생포를 안다
사랑을 안다
토끼와 거북이가
대대손손 문화창고를 이어갈 여기
타지에서 온 어린 고래 방문 리뷰도 장난이 아니다.
산꼭대기 학교
이른 아침 출근한다, 산꼭대기 학교로
안개 꼬리를 불러 세우며
균형을 잃은 흰빛이 폭포수로 떨어질 때
차가운 안개도 양어깨를 확 비튼다
휘어진 벼랑처럼
안심할 수 없는 나
넓적한 나무 밑동을 끌어다가 두 발에 대고 오른팔을 번쩍 들어올린다
까끌까끌한 열등감이 뚝 부러지도록
오늘만큼은
플라스틱 함정과 공해로부터 빠르게 벗어나기
그래야 산꼭대기가 될 수 있지
몸의 반동을 이용해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잡으며 더 높이 오른다
뿌리가 유연한 파랑을 치어다보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잡아당기면서 오른발 왼발을 계속 옮긴다
큰 바위 수십 지나
마침내 산꼭대기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태고의 사랑이 들린다
초록이 팔랑거린다
그런데 바로 정상에는 조개구름이 눈부신
오후 수업도 만만치 않겠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세계
오늘처럼 아름다운 너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물찻오름 입구를 돌아가는데
산딸나무 나긋나긋하다
흰 꽃 너머
너의 꿈이 나의 꿈이라면 좋겠다는 물소리가 애틋하다
고요와 소란을 실감한 신발들
할아버지삼나무에 붙어사는 콩짜개덩굴 달팽이 이끼 버섯을 발견하고는
서로 간 공생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지
불현듯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던 영혼의 나무가 나타나 말을 거는 것 같다
인간의 탐욕과 집착으로 더는 생태계 훼손이 없기를
푸르른 빛의 하울링
이대로 끝이 아니기를
휘파람새 지저귀는 피톤치드 층계
하늘과 구름 사이가 선겁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처녀림을 빠져나온 찰나
화산송이길 양쪽 삼나무
V자 그리며 나를 계속 앞으로 당긴다
너와 내가 점점 깊어진다.
루꼴라 그리고
한여름 태양은 위대하다
극과 극을 경험한다
너의 티티새가 몸이 아파 꼼짝없이
동네 밖 포도밭으로
날아가지 못해도
아주 잠깐 아침
아주 잠깐 정오
아주 잠깐 저녁을 붙잡고
루꼴라의 가로 세로를 계산한다
탄생과 죽음을 미화한다
나의 애인이 긴 휴직을 하고
아주 먼 나라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못해도
빗방울 사이 여러 밤
바람 사이 여러 낮이
루꼴라 그리고를 돌려가며 보살핀다.
유리 화병과 장미
목이 긴 너는 도망칠 수 없다
내가 네 안에 꽂힌 이상
낮달이 떠 있다 유리 밖에 양쪽으로 길게 해와 손을 맞잡고
변화하는 구름을 관찰하는 장미 친구들이 보인다
흰 코끼리 부부가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중이고
풀밭 위로 토끼들이 뛰어다니고 얼룩말과 사자가 달려 나가고
새와 나비가 언덕을 오르내리고
어미 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파도를 가르고
오로지 우리에게는
공기와 맑은 물이 삼시 세끼인데
유리 밖은 별천지
마음을 비우든
창문 너머를 이해하든
나는 너의 침묵을 칭찬한다
너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앞으로 나도 얼마나 더 가벼워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