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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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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 김윤숭 스크랩 <수월관음도>, 숙비 그리고 역동선생의 도끼 상소
지리산문학관.계간시낭송 추천 0 조회 88 16.07.14 23: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에 투고한 글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

 

성리학자인 역동선생(易東, 禹倬)과 불화인 <수월관음도>를 연관지어보려니 조금 생뚱맞기는 하다. 안동대에 있는 역동서원이 역동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라는 것쯤은 안동 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리고 역동선생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미로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역동선생이 왜 도끼를 들고 왕에게 가서 상소를 올려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실 상소의 이유는 점잖은 선비들이 입에 올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점잖지 못한 필자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그림 한 점을 감상하자.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출처 : http://www.asianart.com/exhibitions/korea/13.html

 

<수월관음도>는 일반적으로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의 연못가 바위 위에 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 관음보살도의 모습을 기본 구성으로 한다. 위 그림은 현존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 중 가장 오래되었고(1310년 제작), 크기로도 세계 최대이다. 길이 419.5cm, 너비 254.2cm 규모인데, 원래 크기 500cm, 너비 270cm 규모였다. 이 그림은 비단에 그려졌는데 여러 폭의 비단을 덧대어 붙인 것이 아니라 한 폭의 통 비단에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비단을 만들기 위해 직조기가 별도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20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뉴욕 타임즈는 모나리자에 버금가다.”라고 극찬을 했다. 문명대 교수는 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왼쪽 상단의 관음보살 머리에서 하단 오른발까지 대각선 구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원만한 얼굴 모습과 둥근 어깨, 풍만한 가슴은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형태미를 보여준다. 옷 주름과 흰 사라천의 뚜렷한 선과 붉고 검은 필선이 대조를 이루어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관에 금으로 그려진 정교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초문무늬, 사라천 끝단의 굵고 탐스런 금색 당초문 무늬, 연꽃무늬, 꽃무늬 그림은 화려함과 치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표현했다.

 

불행히도 이 그림은 국내에 없다. 국내에는 2009년 통도사에서 한 차례 전시되었을 뿐이다. 현재 일본 규슈에 있는 사가현 현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소유는 카가미 신사 소유다. 그림 뒤에는 1391년 카가미 신사의 승려 양각이 기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어떤 경로로 일본에 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왜구가 빼앗아간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이 그림은 고려 충선왕의 후비였던 숙비(淑妃)가 발원해서, 김우·이계·임순·송연색·최승 다섯 명의 화가에 의해 1310(충선왕2) 5월에 완성되었다. 이 그림을 발원한 숙비는 세계적인 명작을 남긴 대단한 여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역동선생이 도끼 상소를 감행한 이유는 이 여인과 매우 관련이 깊다. 큰 비용을 들여 불화를 발원했다고 상소를 한 것은 아니다. 먼저 고려시대로 돌아가 보자.

 

고려의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해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뒤에 충선왕이 되는 세자 장(몽골명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 이하 충선왕)이 태어났다.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한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지내다가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12975월 병사하자 7월 귀국한다. 귀국한 후 그는 어머니가 연적인 무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무비를 죽였다. 무비의 한자가 無比인 것으로 봐서 후에 충선왕이 부정적인 이 한자로 그 여인을 표시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모를 죽인 이 사건은 조선시대 같으면 천륜을 어긴 큰 죄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겠지만 별일 없었다. 비록 사망한 황제지만 쿠빌라이의 외손자를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 충렬왕도 저지할 힘이 없었다.

 

당시 62세이던 충렬왕은 졸지에 부인도 잃고 총애하던 여인도 잃어 쓸쓸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에게 좀 미안했던지 충선왕은 새로운 여인을 아버지 충렬왕에게 소개했다. 그 여인은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김취려 장군의 증손녀로, 남편이었던 진사 최문이 사망하고 홀로 지내던 김 씨였는데, 미모가 대단한 여인이었다. ‘돌싱이건 말건 미모에 반한 충렬왕은 이 여인을 숙창원비淑昌院妃로 삼고 잘 지냈다.

 

두 여인을 잃고 정치에 흥미를 잃은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에게 양위를 해서 충선왕은 잠시 왕위에 있었다. 왕위에 있을 때는 제법 개혁적인 정책들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비趙妃라는 여인을 총애했는데, 원나라 왕족 진왕晉王(카말라甘麻刺

, 성종 테무르의 형)의 딸인 정비 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보다시리寶塔實憐)가 자신이 소박맞았다고 원나라에 고자질하는 바람에, 원나라로 소환당하고 왕위도 다시 아버지 빼앗기게 되었다. 13087월 충렬왕이 사망하자 몽골에 있던 충선왕은 귀국해 왕위를 이었다. 제국대장공주 사망 후 충렬왕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궁궐 저 궁궐 혹은 이집 저집으로 돌아다니며 지냈는데, (가장 먼저 간 집이 김방경 장군의 집) 충렬왕의 빈소는 이 글의 주인공 숙창원비의 집에 차려졌다.

 

그 후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충선왕이 아버지 빈전에서 제사를 지낸 후 숙창원비의 오빠네 집에 갔다. 그리고 그 집에서 숙창원비와 서로 마주보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이런 이야기가 왜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는 이해하기로 하자. 서모를 위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2주쯤 지난 후, 충선왕은 허 씨라는 과부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조선시대라면 상중에 후궁을 맞아들인 것 자체가 문제가 되었겠지만, 성리학적 세계관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 고려시대니까 이건 넘어가야 한다.

 

허 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인 지 3일 후, 충선왕은 숙창원비와 간통하고 곧 숙비淑妃로 책봉했다. 충선왕은 서모를 자신의 비로 삼은 것이고, 숙비로서는 세 번째 남편을 맞이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비가 밤낮으로 온갖 교태와 아양을 부리니 왕이 미혹되어 정사를 직접 돌보지 않았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자를 다루는 기술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였다면 서모를 범한 남자는 왕위에서 쫓겨났음은 물론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질책하는 사람이 없었다.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일 뿐 아니라, 원나라 성종 사후 무종(카이샨)을 옹립한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원나라의 실세였던 것이다. 당시 분위기를 고려사는 이렇게 전한다. “원 황태후가 사신을 보내 숙비에게 고고姑姑를 하사하였다. 고고란 몽고 부인들이 쓰는 관의 이름이고, 이 때 왕이 황태후의 총애를 받았던 까닭에 요청하였던 것이다. 숙비가 고고를 쓰고 원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자 재추 이하 여러 신하들도 폐백을 내어 숙비에게 하례하였다.”

 

이 시기에 하필이면 우리의 역동선생께서 감찰규정監察糾正이라는 벼슬에 재직하고 있었다. 감찰규정이 뭔가? 벼슬아치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자리 아닌가? 분명히 왕을 성토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충선왕의 권력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충선왕을 성토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역동선생은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미로 도끼를 들고 상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충선왕도 조금은 부끄러웠던지 역동선생을 죽이지는 않았다. 죽을 각오로 맞서면 사는 법. 역동선생은 80세까지 장수하셨다. 반면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충선왕은 후일 티벳까지 유배를 가기도 했다.

 

세 번째 남편을 맞이한 숙비는 어떻게 되었을까? 충선왕과도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숙비가 된 다음 달인 11월에 충선왕은 왕권대행에게 나라를 맡기고 원나라로 가버린다. 그리고 그 후로는 한 번도 고려에 오지 않았다. 왕이 없는 궁에서 숙비는 거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후원에 등을 매달았는데 그 모습이 등불의 산 같았다고 한다. 큰 잔치를 베풀기도 했고, 원 사신들 접대도 대신했는데 왕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사용했다. 행차에 사용하는 도구와 의상이 제국대장공주(쿠빌라이의 딸)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숙비는 위의 <수월관음도>를 발원하였다. 예사롭지 않은 예술품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에 의해 탄생하였고, 7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다시 <수월관음도>로 돌아가 보자. 고려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인이 비용을 대서 <수월관음도>를 그릴 때, 화가들은 관음보살의 모델을 누구로 했을까? 숙비는 고려 최고의 미인이기도 했다. 당연히 숙비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서구인들이 이 그림 속 관음보살의 얼굴에서 모나리자를 연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 관음보살의 표정에서 약간의 우수를 느낄 수 있다. 세 남자와 결혼했지만 모두 일찍 떠나버린 쓸쓸함, 돈과 권력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허전함을 가진 모델의 표정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선재동자를 보는 관음보살의 눈길에도 숙비의 마음이 투영된 듯하다. 가져보지 못한 아들에 대한 아쉬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나무관세음보살.

 

참고 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충렬왕?충선왕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열전, 우탁?숙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탁」?「충선왕」?「충렬왕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박종기, 세 남자 섬긴 충선왕 숙비의 발원 담긴 수월관음도

         http://blog.naver.com/kmu_univ/120199073308

금강불교,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의 일시 귀환

         http://cafe.daum.net/geumgangbuddha/NnWg/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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