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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자 수필론
표현과 표상의 방식으로 수필 쓰기
-홍정자의 《또 한 번의 야반도주》
여세주
essaytown@daum.net
1.수필에 반영된 예술적 관점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려면, 그의 문학작품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작품은 각기 나름대로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뭉뚱그려서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 작품을 포괄하는 어떤 존재 양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작품세계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그리고 창작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런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학 창작 원리는 작가가 어떤 예술관, 어떤 문학관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된다. 수필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수필인가, 수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작가의 예술철학이 창작 원리로 작용하여 작품의 존재 양상을 결정한다. 수필을 창작하는 작가는 이미 예술에 대하여, 문학에 대하여, 수필에 대하여 그 나름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예술과 문학과 수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장르의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장르의 본질에 대해 작가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작가가 작품을 읽고 창작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수필관이 ‘장르적 관습’을 익힌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예술적・문학적・수필적 요건을 제대로 갖춘 작품을 창작할 수 없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실험적 도전도 기대할 수 없다. 작가들이 끊임없이 ‘예술과 문학과 수필이 무언인가’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술・문학・수필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뇌는 작가들에게도 도외시할 수 없는 과제이다.
수필은 경험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다. 경험 속에 자기 자신이나 타인, 그리고 사물이나 사회 현상 등이 모두 포함된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은 경험을 통해서 어떤 진리를 ‘표상’하거나 정서 또는 성정을 ‘표현’한다. 경험을 재현하여 어떤 진리의 인식에 이르는 작품은 표상론적(재현론적) 수필이라 하고, 정서 또는 성정을 드러내는 작품은 표현론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박이문의 《예술철학》에 따르면, ‘장미가 붉다’는 표상이고 ‘장미가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표상론적 수필에서는 경험을 객관화하고 표현론적 수필에서는 경험을 주관화하여 전달하려는 원리가 작동한다. 이와 같은 두 범주의 창작 방식은 어떤 예술관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다.
《저 글 못 써유》(선우미디어, 2011)에 이어 두 번째 수필집 《또 한 번의 야반도주》(이지출판, 2019)를 펴낸 홍정자의 수필에는 어떤 예술관이 반영되어 있을까? 그리고 수필 창작에 그 예술관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을까?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홍정자의 수필 창작 경향이나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을 어느 하나의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듯이, 일반적으로 한 작가의 수필도 어떤 한 가지 속성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2.경험세계의 주관화에 의한 정서 표현
홍정자의 수필집 《또 한 번의 야반도주》에는 작가의 정서를 표현한 수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내적 경험세계에 더 주목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소통하고자 한다. 감정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에 열중하기 때문에, 이들 작품에서 경험의 서술은 정서적 감응을 표출하기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 경험을 감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정자의 수필은 대부분 독자의 지성에 말을 걸지 않고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기대한다.
<사과 예찬>은 사과에 대한 작가의 정서적 태도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과라는 물질의 효능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에 관한 작가의 감정을 전달한다. ‘나는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라는 감정을 연역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사과와 관련한 경험이나 사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사과에 대한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시각을 맞춘다. 사과와 관련한 경험이라고는 과수원 집 딸로 자랐다는 것과 무더운 여름날 사과 저장 창고의 빈 상자 위에 누워 사과 향에 취했다는 정도이다. 그것에 대한 서술은 자세하지 않고 매우 간략하다. 작가가 그런 경험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의 맛과 향기와 모양 등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뿐이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상큼함, 깊은 맛과 달콤한 향기, 매혹적인 빛깔, 붉다 못해 루비처럼 투명한 홍옥의 색깔, 관능적이라 할 만한 둥근 몸매 등의 언어로 사과의 속성들을 구체화한다. 그리고 “모난 데가 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 품 넓은 어머니를 닮았다”거나 아팠던 지난날들이 밀려난다고 하는 데서 사과 예찬은 정점에 이른다. ‘사과를 가장 좋아한다’는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사과의 이미지나 속성을 극히 주관화한다.
다시 가을이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무엇에 물린 듯 온몸 구석구석 저리고 아팠던 지난날들이 사과의 상큼한 과즙과 향기에 밀려 저만치 밀려나고, 그 자리에 어렸을 때 뛰놀던 내 유년의 낙원이었던 우리 집 과수원이 그림처럼 조용히 펼쳐진다. 난 다시 사과 한 입을 베어 문다.
-<사과 예찬>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수필을 이른바 서정수필이라 한다. 서정수필이라고 해서 경험의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을 마구 배설해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경험을 서술하면서 나타나는 개별적 감정들을 자유분방하게 분출하는 것이 서정수필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정수필은 개별적 감정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윤곽을 통제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하고, 그 감정 표현에 작품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홍정자의 <사과 예찬>은 감정의 통제를 통한 초점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아름다운 소멸>에서도 감정의 수렴이 잘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어느 집 마당의 감나무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어느 집에는 손에 닿는 감조차 따지 않았고, 그 집과 이웃한 다른 집에는 까치밥으로 몇 개 남겨 놓고 감을 모두 따낸 상태였다. 작가는 감나무의 풍경을 그리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풍경에 관한 정서적 반응을 표현하는 데에 열중한다. 다시 말하자면, 객관 세계를 반영하기보다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작가가 만난 감나무 풍경은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은유적 도구에 불과하다. 작가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자극으로 존재한다. 두 집의 감나무가 보여주는 풍경은 서로 상반되는 풍경인데도 그것에서 소멸이라는 속성을 직관하고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소멸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기 위해 작가의 주관적 판단 과정을 거친다. “수확하기를 바라며 기꺼이 내주는 것이 나무의 소박한 소망”이라고 여기면서 수확을 끝낸 감나무에서도, 그리고 “차마 따지 못하고 제 스스로 아름답게 소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나 보다”라고 하며 수확하지 않은 감나무를 통해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두 상황 모두를 주관적으로 수용하여 ‘소멸은 아름답다’는 정서로 수렴하고 있다.
<슬픔은 여운으로>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여러 가지 경험을 끌어온다. 순간적인 슬픔이 아니라 여운으로 남아있는 슬픔을 전달한다. 추석날 아이들이 잠시 머물다 떠난 자리의 흔적들, 어린 시절 고모의 간절한 기도를 떠올리는 성당의 새벽 종소리, 초등학교 4학년 때 노을이 비치는 창가에서 담임 선생님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부르던 노래, 금강산 여행을 할 때 초로의 할아버지가 ‘그리운 금강산’을 처절하게 부르던 모습, 그리고 영면한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의 기억과 잠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던 어머니의 삶으로 요약되는 경험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은유적 예화’로서의 구실을 한다.
서정수필 쓰기에서는 감정의 질감이 선명하게 돋보이도록 경험의 조각을 선택하고 결합해야 된다. 서정수필의 작가는 ‘어떤 것에 관해 무엇을 느끼는가’를 자문하면서 표현할 감정을 찾아내고 그 감정을 명료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노엘 캐럴의 《예술철학》에 기댄다면, 이를 ‘감정의 명료화’라 할 수 있다. 예술가라고 해서 항상 새로운 정서를 제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것보다 구체화를 통해서 정서를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는 있다. 예컨대, 최남선은 <혼자 앉아서>에서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고, 약속도 하지 않은 누군가 기다려지며,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간다는 경험들로 구체화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보다 정교하게 표현한다. 서정수필에서 어떤 정서를 드러내는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미문이 품위 있는 서정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서정의 운치는 감정을 무엇으로 어떻게 명료화하는가에 달려 있다. 명료화가 작품의 완성도나 감동의 수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홍정자의 수필은 서정수필 창작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깨우쳐 준다.
앞에서 대표적으로 살펴본 세 편의 수필이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라면, <온몸으로 하는 기도>나 <프리지어 꽃다발>, 그리고 <뛰는 여자> 등은 인간의 성정을 표현한 수필이다. <온몸으로 하는 기도>에서는 어느 스님을 만나러 먼 길을 갔는데 스님과는 몇 마디의 인사말만 나누고 일에 열중하는 스님의 모습만 보았음에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 돌아왔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노동 속에 참다운 기도가 있다고 여겨 노동에만 열중하는 스님의 성정을 표현하고 있다. <프리지어 꽃다발>은 이웃 간의 배려하는 마음을, <뛰는 여자는> 작가 자신의 성정을 표출한 작품이다. 인간의 성정을 표현하는 이런 수필도 표현론적 예술관에 근간을 두고 있다.
3.객관적 경험세계의 인식론적 재현
홍정자는, ‘수필이란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경험의 재현을 통해 경험의 보편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수필도 더러 썼다. 이런 작품에서는 경험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그것의 해석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보편적 진리를 인식하는 데 이른다. 수필 쓰기에서 언어의 표상적 기능과 진리에 대한 인식적 기능을 중시하는 경우이다. 재현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표상하기 위한 것이다. 표상하지 않는 재현은 무의미하다. 수필에서 경험의 재현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언어적 코드체계이다. 그러므로 재현된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또 한 번의 야반도주>, <이카로스가 되더라도 날고 싶다>, <마른 고추에게서 한 말씀 들었다>, <마음 들키다>, <못 말리는 나의 건망증> 등이 이런 유형에 속하는 수필들이다.
<또 한 번의 야반도주>에서는 과수원집 딸로 태어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반도주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또 결혼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과수원 일을 거들어야 했던 작가가 대학을 가기 위해 허락도 받지 않고 야반도주하여 면접시험을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받을 때까지의 경험은 매우 자세하게 서사화하여 그려준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거나 친구 집에 묵으며 시험 결과를 기다렸던 불안한 상황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족들이 알았을 때의 상황이 반전을 가져온다. 긴장과 반전을 동반한 서사로서 손색이 없는 부분이다. 그 다음의 상황은 설명으로 요약되어 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절반의 시간은 집에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취업을 허락받지 못하고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그런 형편에서 또 한 번의 도주를 시도한 것이 결혼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꿈의 무덤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꿈을 이루기 위한 두 번의 야반도주에도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가가 이루고자 한 꿈은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이다. 그 꿈이 무산되고 인생의 칠부 능선을 지나고 있는 나이에 “또 한 번의 야반도주는 없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는 데서 작품을 끝맺었다. 이 작품은 객관적 서술로 경험을 재현할 뿐, 그 경험에 대한 해석까지 제공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독자는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꿈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무모한 도전을 하지만, 그 자아실현의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럼에도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삶의 진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작품에 재현되어 있는 경험의 결속 구조가 표상하는 삶의 진실이다. 이처럼 경험의 객관적 재현을 통해 어떤 진실을 인식하게 하는 작품은 표상론적 또는 재현론적 예술관을 반영하고 있다. 예술은 감정과 관계되기보다 진리의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여기는 경우이다.
<이카로스가 되더라도 날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서술한 작품이다. 대학 시험을 위해 야반도주한 사건은 한두 문장의 서술로 요약하고, 유년기와 중학 시절에 겪었던 경험의 서술에 덧붙여 일상에 얽매여 살았던 결혼생활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경험을 작가 스스로 해석하여, ‘비상하고 싶은 욕구를 저버리지 못하는 인간 존재’에 대해 주목한다.
만약에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해도 길들여진 일상 언저리에서 맴돌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날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날아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날아가기를 포기했다.
그래도 다음 생에는 날아보고 싶다. 두려움과 겉치레는 던져 버리고 훨훨 날아보고 싶다. 이카로스처럼, 태양 가까이 날아가 떨어져 죽더라도 한번 내 날개를 펴고 살아보고 싶다.
-<이카로스가 되더라도 날고 싶다>에서
<마른 고추에게서 한 말씀 들었다>는 고추를 말리던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객관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바스락거리며 투명하게 고추로 마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의인화된 속성’을 발견하여 인간의 삶에 비의한다. 사람 사는 일에서도 “맞닥뜨린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야 재구실을 한다”거나 “일정 시간 숙련”이 필요하다는 등의 속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물기를 말린 고추가 맑은 소리를 내듯이, 사람도 아집이나 성급함을 버려야 맑은 영혼을 가지게 된다’는 삶의 지혜를 인식하는 데 이른다.
경험에 대한 의미 해석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든, 작가 스스로 해석하여 제시하든 상관없이, 재현해 놓은 경험 그 자체에 어떤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은 재현론적(표상론적) 수필이다. 수필에서 재현이란 객관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기 위한 재현이다. 경험의 본질적인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에 대한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경험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부각시켜 드러내는 것이 작가로서의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홍정자의 수필작품들은 조금도 손색이 없다.
경험의 객관적 재현을 통해 인간과 삶의 진리를 제공하려는 수필은 표상론적(재현론적) 예술관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런 양식의 수필에서 경험의 재현은 진리를 표상하는 상징체로 기능한다. 따라서 표상론적 수필 쓰기에서는 경험을 재현하는 방식과 표상되는 진리의 참신성이나 공감도가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4.표현과 표상의 너머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예술론은 크게 표상론(모방론), 표현론, 형식론으로 나눈다. 이 이론들이 모든 예술작품을 포용하지는 못한다. 어느 것도 예술의 전체를 포괄하거나 설명하는 조건으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예술을 이해하는 이론으로 활용된다. 표상론에서는 대상을 모방하여 잘 그려내는 것, 표현론에서는 내적 감정을 표출하여 환기시키는 것, 형식론에서는 의미 있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예술론을 적용하여 수필의 이해에 접근하는 것은 수필 창작 방식을 파악하는 유용한 길이다. 수필의 현주소로 볼 때 서정수필은 표현론적 관점에서, 서사수필은 표상론적 입장에서 창작하는 양식이다. 교술수필은 그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다. 교술수필은 예술, 즉 문학의 경계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형식론은 모든 수필 양식에 두루 활용할 수 있는 원리이다. 수필의 양식을 살피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결합인 의미론적 체계를 살피는 데에는 형식론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수필은 형식의 자유로움을 특성으로 삼는 장르이므로, 형식론적 예술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수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다. 그러나 수필이 그동안 추구해 왔듯이 문학이기를 희구한다면, 예술형식론을 반영하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도 깊이 고뇌해야 할 것이다.
《또 한 번의 야반도주》만을 두고 볼 때, 홍정자는 표현론적 예술관에 따른 서정적 수필을 주로 창작한 작가이다. 그러면서도 표상론적 예술관을 토대로 한 서사적 수필도 외면하지는 않았다. 교술적 수필이라고 할 만한 작품으로는 <상처에서도 새움이 튼다>가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분포도는 작가가 수필의 문학 지향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홍정자의 수필 분석을 통해 예술철학이 수필 창작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수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감동을 주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홍정자의 수필작품에서 그러한 요소를 추가한다면, 정서적 문맥의 면면함과 문장의 정갈한 기술력을 들 수 있다. 정서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 위한 문장의 긴밀한 배치가 돋보인다. 불필요한 말로 문맥을 막거나, 있어야 할 말을 빼먹어 문맥을 끊어놓지 않는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문장의 호흡도 완급을 조절하여 정서를 밀고 나가는 기운이 살아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온아하고 청신하다. 홍정자는 숙련된 표현력을 다지고 다진 수필가다.
-《수필미학》, 통권24호(2019년 여름)
여세주
문학평론가. 《수필미학》 발행인. 저서 《새롭게 쓴 수필창작론》, 《수필의 전형과 실험》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