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간 베일 속 수수께끼 청학동. 그 베일이 걷힌 시기는 불과 반세기.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 이상향 후보지.
특히, 쌍계사에서 청학동까지. 수많은 성현들이 찾아나선 곳. 그러나, 그 누구도 찾지 못한 곳.
결국, 그 실체를 드러낸 시기는 동학혁명 당시. 그전까지만 해도 청학동은 알려지지 않았던 곳. 청학동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950년 6.25 전후
'천년의 이상향 베일에 비해 짧은 역사.'
옛 성현들 발자취를 찾아서 청학동에서 쌍계사까지 답사. 2005.6.25 ~ 26 답사 산행 기록.
쌍계사에서 청학동으로 갈까? 아니면, 청학동에서 시작할까? 청학동 들머리가 길 찾기 쉬울 듯.
...............청학동 설화................... 옛부터 청학동은 가꿀 수 있는 옥토가 1백여리 늘 따뜻하며, 탐관오리와 조세 피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전설 속 하늘나라 선녀들이 살고 있는 곳
청학동을 찾아나선 김종직 <두류기행록(頭流記行錄)>.
“악양현의 북쪽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청학사 골짝이라.” 한다.
어허, 이는 옛날에 이른바 신선의 지역이라는 것인가.
인간과 더불어 서로 과히 멀지 않는데 이인로는 어찌하여 찾다가 못 찾았는가. 일을 좋아하는 자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지어 명칭을 붙인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길안내를 하던 해공 스님
구양현 북쪽 골짜기를 청학동이라 지칭한다. 이인로를 위하여 후대 사람이 이를 사모하여 근처에 있는 절의 이름은 ‘청학사’라 명명
하지만 김종직도 지리산 탐방의 일정 때문에 청학동을 보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이러한 글을 남기며 무척이나 아쉬워하였다.
그 제자 김일손 <속두류록(續頭流錄)>
"불일 폭포를 중심으로 한 곳이 청학동”
“매년 6월이면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아와 못물을 마시고 바로 간다.”고 한다.
여기 사는 중들이 자꾸 보는데, 이것이 청학이라는 것이다.“
김일손은 직접 탐방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역시 이인로가 이곳을 찾지 못한 일에 의문.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청학동 존재에 대해 여운을 남겼다.
중종 때 남추(南趎) <지봉유설(芝峰類說)>
“남추는 곡성 사람으로 어려서 공부를 하는데 배우지 않아도 모든 것을 통하였다.
하루는 안개가 개이더니 몇 사람과 바위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는데 남추가 집안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에게 편지를 주면서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두 사람이 있을테니 전하고 오라 하였다.
도인 왈 “내 이미 네가 올 줄 알았다.” , 바둑을 끝내고 답장과 푸른 옥돌 바둑알을 주었다. 아이가 온 9월 중순 낙엽이 날리고 가는 눈이 왔는데 돌아오며 배고픈 줄도 몰랐고, 발 아래서 풀이 움텄다.
의아하게 여기면서 청학동을 나서니 봄기운이 완연하고 초목이 돋아났다. 이것은 곧 인간 세상의 2월 일기였다.“
청학동은 인간세상이 아니라 선계의 공간.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청학동을 찾아가 바둑 한판 구경하는 동안에 지나간 6개월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
역학자 백구룡의 제자가 청학동에 가서 최고운과 은단대사의 바둑구경을 하다가 내려오니 6달이 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
청학동-삼신봉-불일폭포-불일암-쌍계사.
마침, 산사모 산악회에서 무박산행 일정. 꼭 현장 답사를 해야만 할 산행 코스였다. 아내에게 외박 허락을 받고서 집을 나섰다.
전설의 고향을 찾아가는 마음이 설렌다. 사당에 도착하니 반기는 산악회 동호인들.
손오공. 나는야 펄. 튤립. 솔향기. 장문성 삼삼이 캔디. 리산. 山木 편지 청학동 마운틴 대장 소나무 만투 님, 토미 님, 산골 님과 마중나온 이 경득 님.
모처럼 참석하니 낯선 얼굴도 수두룩. 처녀 총각 동호인이 점점 더 늘어난다. 나이 많은 유부남 유부녀 동호인은 감소.
'45인승 버스에서 내가 제일 원로.'
이름 대신에 사용하는 낯설지 않은 닉. 이름을 사용하는 것 보다 합리적인 듯. 각자 고유 사생활이 지켜질 수 있는 점.
버스 안에서 각자 간단하게 자기 소개 달리는 버스 안에서 4시간 정도 새우잠.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 산행할 때 편하다.
2005.6.26 새벽 어둠 속에 도착한 삼성궁. 청학동을 찾다 보니 잘못 삼성궁까지 갔다. 삼성궁은 어떤 곳일까? 알고픈 사람을 위해.
......... 삼성궁 ......... 삼신봉 남쪽 묵계골에 신선도를 추구하는 이색 마을. 청학동 도인촌이 있는 계곡 서쪽 능선 너머 정동쪽 골. 무수한 돌탑과 한풀선사 중심으로 한 구도자들의 수도처.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삼성궁.
삼성궁 지도
삼성궁은 환인, 환웅, 단군왕검 세 분을 모신 궁이란 의미. 삼성궁을 구경하려면, 입구 석문에서 징을 세 번 쳐야 한다. 그러면, 칼 찬 수행자가 나와서 정중하게 방문객을 맞이한다.
한풀선사(36)와 함께 3년간 생활한 제자는 100 여 명. 3주에서 몇 개월 수련 받았던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 99년부터 16년째 매년 개천절에 '개천대제' 행사를 연다. 이날은 삼성궁을 개방하는 날이라 누구든 구경할 수 있다.
...................................... ...................................... 삼성궁 돌탑들은 이 곳에서 원력 솟대라 부른다. 삼한 시대에 천신께 제사 지내던 성지, 소도(蘇塗) 보통사람들 접근을 금하려 높은 나무에 기러기 조각
성황당에 기원을 담듯, 솟대를 쌓아 옛 소도를 복원 3,333개 솟대를 쌓아 홍익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터전. 참으로 지리산은 물론 청학동에서도 이색적인 관광명소.
삼성궁에서 나와 금방 청학동을 찾아간다. 천 년의 베일을 뚫어놓은 듯한 아스팔트 도로. 청학동은 아직 새벽비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 청학동. ........... 옛부터 신선이 되길 꿈꾸는 한반도 도인들의 무릉도원 청학동은 신라시대 최치원도 찾아나선 삼신봉 남쪽 마을. 청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이상향. 청학동의 마을 이름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전설의 마을' 청학동은 '전설의 새' 청학(靑鶴)을 본 딴 지명.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 청학은 징기스칸'이 황제에 등극할 때 울었다는 전설 속 오색조.
한반도가 외침을 받을 때마다 꿈꿨던 은신처 이상향이 청학동. 지리산 청학동은 고려 신라 시대에도 전쟁을 겪은 적 없는 마을. 하여, 이상향을 찾으려는 천년의 노력 끝에 찾은 곳이 청학동이다.
청학동은 진주 서쪽 백리 밖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거쳐 십 리. 전감록에는 그곳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청학동을 찾았던 인물은 이인로, 김종직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 신라가 패망할 무렵부터 천년동안 못 찾았던 그곳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이인로의 <파한집>에 의하면,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다는 기록.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큼 좁은 길을 엎드려, 몇 리를 가면 넓은 곳. 사방이 옥토라 곡식을 가꾸기에 알맞고 청학이 사는 까닭에 청학동.
그러나, 이인로는 청학동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 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짐작했다.
현재 지리산 청학동 말고도 전설 속의 청학동으로 추정된 곳은 여러 곳. 불일폭포 부근 세석평전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선비샘 아래 등등.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전설 속 그 청학동일 것으로 알려져 왔던 셈이다.
그런 와중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을 약 50 리 거슬러 올라간 해발 800 m 첩첩산중인 청암면 묵계리 학동마을이 청학동일 것으로 유력했던 이유는 그 입지가 전설 속 계곡과 유사했고 6.25를 모를 만큼 외부와 단절된 생활.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이곳 사람들이 매스컴을 타며 널리 알려진 탓.
청학동은 정감록 신앙에 연유된 십승지(十勝地)의 하나. 구한말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도들이 피난해 살던 곳. 특히 갱정유도 신자는 지금도 댕기머리 상투 바지 저고리
1948년에는 여순반란사건 패주 좌익세력 일부가 이곳에 은둔. 1950년 6.25전쟁 때는 북한 패잔병의 일부가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청학동 원조로 알려진 도인촌(道人村)이라고 불리우는 산골마을. 단군계 신흥종교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 교도>들 마을.
6.25 이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대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 <<인 의 예 지 의 인간 본성을 수양하여 인간 윤리를 실천한다.>> 는 교리.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유교적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온 마을이다. 유교, 불교, 단군신화, 문수보살, 천왕성모 등등의 장점을 살린 종교의 마을.
이들은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생활하며 서당에서 훈장 가르침을 받고,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 .......................................................
2005. 6. 26. 새벽비 어둠속에 청학동에 도착한 동호인 일행. 빗줄기 피할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라면만 끌여먹고 삼신봉 행. 우중산행 포기한 몇사람은 그곳에 남아 청학동을 잘 구경했을까? 나도 그곳에 남아 청학동을 둘러볼까 고민하다가 삼신봉 향해 출발.
........... 삼신봉. ........... '이조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이상향'은 삼신봉 아래. 지리산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벗어나 청학동을 감싼듯 한 삼신봉. 세석평전에서 촛대봉과 마주보고 있는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분수령.
영신봉에서 정남향 산맥을 따라 10km 아래로 뻗어내린 곳이 삼신봉 신(神)자 붙은 <영신봉>. <내,외삼신봉> <삼신봉>은 각각 10Km 간격. 청학동을 감싼 <삼신봉, 내 삼신봉, 외삼신봉> 3 봉은 3 神이 산다는 곳.
<삼신봉> 등산 코스는 오른쪽 외삼신봉, 가운데 내삼신봉, 왼쪽 쇠통바위. 내삼신봉은 신선대라 불리기도 하며 마치 금강산 한 부분을 옮겨 놓은 듯 그 신선대 지나 능선 따라 내려가면 큰 자물쇠가 얹혀 있는 듯한 쇠통바위.
쇠통바위는 천지개벽의 전설을 간직한 곳. 청학동 마을에 있는 열쇠처럼 생긴 바위로 쇠통바위를 열면 천국이 열린다고 전해온다.
<삼신봉>이란 외삼신봉 내삼신봉 쇠통바위을 합친 지명. 삼신봉은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보이는 지리산 전망대. 청학동에서 삼신봉 코스는 도인촌 신앙 이해에 도움된다.
삼신봉은 특이한 사상적 배경을 안고 있는 곳. 삼신봉은 영신봉 아래 남쪽 '남부능선'에 있다. 영신봉에서 섬진강까지 뻗어 내린 산맥은 낙남정맥. .......................................................... ...........................................................
안개비로 시야가 가려져 아쉽게도 그곳 안내판만 보였다. 그나마 그곳까지 올라간 사람은 일행 중 불과 5명 정도였다.
힘들게 가서 주변 전망 못 볼 바엔, 다음을 기약하겠다는 젊음.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황혼기이라 안내판 만이라도 구경. 불일폭포 가기 전 숲 속의 빈터에 둘러 앉아서 점심식사를 했다.
늘 10인분 밥을 싸오는 등반대장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오늘은 혹시 점심 준비를 못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오곡밥. 20 인분 준비했다가 잘 익지 않아 10인분만 갖고 왔다 한다.
........................... 불일폭포 & 불일암. ........................... <지리산 10경 중에서 제 6 경 - 불일폭포 >
동양화처럼 절벽에 둘러싸여 물보라를 날리는 2단 폭포 쌍계사 금당 옆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야영장과 불일폭포.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 협곡에서 낙차 60m의 지리산 최대 폭포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했을 때, 희종대사가 내린 시호가 '불일'. 남쪽이고 수량이 풍부해 늘 영롱한 무지개가 어린다는 폭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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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폭포 물줄기로부터 흩날리는 물안개일까?' '아니면, 안개비가 흐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까?'
협곡 깊숙히 들어가 계단으로 한참 내려가 도착한 폭포 전망대. 일반 등산로에서 0.3 km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만 하는 불일폭포. 이왕 힘들게 들어간 김에 만투 후배와 함께 마냥 바라보다가 나왔다.
폭포 위에 확보 자일을 드리우면 올라갈 수도 있을 듯. 직접 올라가 폭포에 얽힌 설화의 비밀을 풀고 싶은 충동. 불일폭포 안쪽 공간에 청학동 가는 길이 있다는 설화 때문.
'진주 서쪽 백리 밖 석문 거쳐 물속동굴을 거쳐 십리.'
불일폭포 1단 50m와 2단 10m 경계선 폭포 안쪽 물속동굴. 청학동 찾던 선조들이 의구심 갖고도 위험해 발길 돌린 곳. 하여, 청학동은 천년의 세월속에서도 베일에 쌓였던 이상향.
마침, 자일도 없어 눈으로 찾다가 말았던 물속 동굴. 그곳을 어렵게 통과한다고 해도 다음 진로가 막막하다. 그곳은 청학동 가는 길 중에 하나로 상상되었던 곳일 뿐. 아무튼 답사를 통해 오랫동안 가졌던 궁금증이 풀려 속시원.
빗줄기가 굵어지자 폭포소리가 더욱 커지며 계곡을 울린다. 그곳을 나와 무학대사 수도처 토굴을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불일폭포의 왼쪽 산중턱에 있는 암자가 신라 시대의 불일암. 1983년 불타 암자 터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복원되어 있다.
불일폭포에서 나와 음료와 감자전을 파는 토담집과 사라진 옛 야영장. 토굴 토담집 앞 야영장을 없앤 자리에 꾸민 '연못 있는 뜰'이 운치있다. 혹시, 무학대사가 스승 청학거사를 만나 깨닳음을 얻은 곳이 여기 아닐까?
무학대사가 3년간 도를 닦고 백두대간 풍수지리학을 터득했다는 곳. 무학대사가 10년 후 다시 찾았을 때 스승의 유서를 발견했다는 토굴.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도와 이조를 창건하고 불교중흥을 꿈꿨다는 토굴.
토담집 주인을 만나 토굴의 유래를 묻고 싶었지만 출타 중인 것 같다. 흰 고무신이 디딤돌 위에 놓여 있지만 주인장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그곳에서 서성거릴 때 한 처녀가 디카를 토미 님께 들이대고 인터뷰 요청.
토미 님은 나와 연배가 비슷한 50대 중년 남자. 나도 모르게 눈길이 끌릴 만큼 인물이 고운 처녀. 동호인 총각들 눈에는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을까?
마음이 끌리면 바라만보지 말고 말을 걸어야 할텐데. '아!~~ 저런..끝내 말 한마디 못 거는 동호인 후배들!'
안타깝게 그 앞을 지나며 모두 눈길만 떼지 못한다. 노처녀 동호인들의 시샘어린 눈총이 무서운 탓일까? 배낭에 슈퍼마켓 규모로 먹을 것 싸오는 총각 삼삼이.
노처녀 누나들이 생일 선물한 새 배낭을 자랑. 1.5~1.8 리터 맥주 2병, 얼음물 1병과 소주 1병 거기에다가 밥 4~5인분하고 간식거리, 안주 과일.
산행하던 중간에 휴식장소마다 먹을 것을 권한다. '돈 잘 벌고.. 몸 건강하고.. 아파트도 장만했는데. 동호인 일행에게 쏟는 정성 반만 쏟아도 결혼할텐데..'
............ 쌍계사 ............ 경남 하동군 화개면(花開面) 지리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 사찰을 감싸고 흐르는 두 개울이 합쳐지는 위치에 있어.. 쌍계사.
원래는 신라 성덕왕 23년(723년) 의상의 제자 삼법이 옥천사라 명명했다. 진감선사가 중국차 종자를 심고 대가람 중창, 정강 왕 때 쌍계사로 개명.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 인조 10년(1632년) 벽암이 중건.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와 보물 제380호인 부도 문화제. 대공탑비 비문은 진성여왕 때 최치원 글씨로 4대 금석문 가운데 첫째.
적묵당(보물 제458호), 대웅전(보물 제500호), 5층석탑, 칠불아자방, 마애여래좌상, 일주문, 팔상전 등의 문화재 쌍계사는 불무장등, 삼신봉 산행의 들머리 기점인 곳이다. ...................................................... ......................................................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를 딴 지명으로 알려진 고운동 계곡. 고운이 지리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전쟁과 신분 격차 없고, 먹을 것이 풍부, 무병장수 낙원. 청학동은 최치원이 죽을 때까지 마음속의 이상세계였던 곳. 청학동은 전쟁과 지배층 수탈을 피하려던 민초들의 이상향.
신라 말 최치원이 학을 타고 놀았다는 커다란 바위가 환학대. 쌍계사에서 청학동까지는 최치원의 흔적이 유난히 많이 남아있다. 이번 산행은 타임머쉰 타고 신라시대 최치원의 족적을 추적한 느낌. ...................................................................................... ...................................................................................... '그당시 최치원이 청학동을 찾아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 ......................................................................................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해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내던 최치원. 굶주린 백성들이 성난 초적이 되어 사찰까지 약탈한 신라 말. 그당시 최치원은 해인사를 떠날 작정을 하고 청학동을 찾은 듯.
해인사는 14 암자와 75 말사를 거느린 오늘날까지 부유한 사찰. 쌍계사를 비롯하여 대원사 내원사 벽송사가 모두 해인사의 말사. 하여, 쌍계사 주변에는 최치원이 남긴 흔적이 유난히 많이 있다.
학처럼 깨끗하고 신선처럼 고고한 성품의 최치원. 사찰의 어지러움조차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청학동에 파묻혀 속세의 어지러움을 잊고 싶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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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속옷까지 흠뻑 젖도록 비를 맞으며 산행. 봄비에 촉촉하게 젖은 처녀들의 몸매가 아름답다. 어쩌다 서로 마주친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난감.
'젖은 옷 사이로 비춰보이는 고혹적인 매력.'
황혼에 접어든 나이지만 남자 임을 느끼게 된다. 딸 같은 나이 처녀라 죄책감에 몸둘바 모르는 나. 이조시대 기생들까지 거느리고 이곳을 찾았던 남명,
'1558년 남명 조식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남명 나이보다 이십년 이상 어렸을 기생들. 비에 흠뻑 젖어 속살까지 비춰 보이는 자태. 마땅한 비옷이 없어 몸매가 드러나 보였을 듯.
당시 동행한 기생들은 어떤 옷차림이었을까?
비에 길이 끊겨 신흥사에서 머문 남명 일행. 중들이 술과 먹을 것을 대접했다는 그당시 기록. 기생을 포함한 남명 일행은 모두 사찰에서 묶는다.
'배탈로 곤욕을 치룬 남명 조식의 심경.
사찰로부터 청탁 받아 부담을 느낀 탓일까? 아니면, 기생들과 술과 풍류를 즐긴 탓일까? 그당시 남명이 배탈난 속마음을 알듯 모를듯.
이조 유림의 탄압으로 구구도생 해야 한 사찰들. 가마꾼까지 자처했던 그당시 중들은 절박했던 듯. 결국, 지리산의 많은 사찰들이 문을 닫고 헐린다.
키 넘는 조릿대 숲 사이로 난 오솔길도 걸어봤다. 남명 일행도 청학동을 찾아 조릿대 숲을 걸었을 듯. 이조시대에는 길도 없이 빼곡했을지 모를 조릿대 숲.
하산 후에도 굳세게 마시지 않겠다던 막거리도 일잔. 사당에서 뒤풀이 술을 사양할 자신이 없어 일찍 귀가. 인사말도 없이 자리를 피해 귀가했더니 아내가 반긴다.
에필로그.
빗 속 산행 대신 화개장터 최참판댁 탐방을 선택. 우리나라 옛 풍습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처녀총각. 무박 산행의 다양성을 추구한 개척 정신에 공감한다.
KTX 관광 상품으로 부상될 만큼 인기가 높은 최참판댁. 최참판댁은 소설 '토지'의 배경 무대이자 하동의 관광 명소. 소설 내용은 대지주 최참판댁 가문에 얽힌 비화로 시작된다.
최참판댁 재산을 강탈하려던 조준구는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일본인 힘을 빌려 재산을 강탈 여기에 더해 서희와 꼽추인 아들 병수를 결혼시키려는 음모
서희는 충직한 하인 길상과 함께 용정으로 탈출한다. 서희는 윤씨 부인이 남긴 금은괴를 자본으로 장사로 성공 하인이었던 길상과 혼인하고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찾는다.
'토지' TV 드라마 촬영장 평사리 마을도 관광 명소. 이곳에서 서희 아씨 또는 길상이도 되어보는 즐거움. 동호인 몇몇 처녀 총각들은 남몰래 그 즐거움 누린 듯. |